요즘 저는 일본 추리소설에 푹 빠져 있습니다.
어제 서울아산병원에 다녀오면서도
하루 종일 차 안에서 책을 읽었는데요.
이번에 읽은 책은
우타노 쇼고의 **《납치 의뢰》**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특이했습니다.
저는 책의 4분의 1쯤 읽었을 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결말을 먼저 확인해 버렸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범인이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처음부터 읽었습니다.
그런데 재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처음에는
“누가 범인이지?”라는 마음으로 읽었다면,
두 번째에는
“아, 이 사람이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하면서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타노 쇼고의 《납치 의뢰》를
결말까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이 작품의 시작은 아주 황당합니다.
한 여자가
심부름센터를 찾아옵니다.
이름은 아키코.
그런데 이 여자가 의뢰한 일이
바로 자신의 납치입니다.
자신을 납치해 달라는 겁니다.
이유가 더 황당합니다.
남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는 겁니다.
자신이 납치되면
남편이 거액의 몸값을 내놓으면서
얼마나 애타게 자신을 구하려 하는지
보고 싶다는 것이죠.
심부름센터 직원인 가와우치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뢰인가 싶지만
돈이 필요했습니다.
경마로 생긴 빚도 있었고,
여자가 상당한 돈을 주겠다고 하니
결국 이 이상한 납치극에 참여합니다.
가와우치는 나름대로
아주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아키코에게 납치된 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시나리오까지 만들어 주고,
손발을 묶는 방법부터
먹는 음식까지 정합니다.
물과 샌드위치 정도만 먹게 하면서
진짜 납치된 사람처럼 보이도록 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협박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 사건은 가와우치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자작 납치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키코에게는
숨겨진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키코에게는 내연남 가즈오가 있었고,
두 사람은 남편의 돈을 빼돌려
해외로 도망칠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가와우치는
자신이 이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짜놓은 계획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말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작품의 진짜 무서운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아키코의 남편
도시유키입니다.
도시유키는 아내의 외도도 알고 있었고
아내와 가즈오가 꾸미는 계획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척합니다.
아내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하고 초조한 남편처럼 행동합니다.
돈을 준비하고
아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남자가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아내의 외도를 알아챈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속이려고 만든 계획을
오히려 자신의 계획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아키코는 남편을 속이려고 했고,
가즈오는 돈을 가져가려고 했고,
가와우치는 돈을 벌기 위해
그 납치극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세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 자체가
도시유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키코가
진짜로 죽습니다.
처음부터 가짜였던 납치가
진짜 살인사건으로 바뀌어 버린 겁니다.
그리고 도시유키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황과 증거를 만들어 갑니다.
결국 내연남 가즈오는
아키코를 납치하고 살해한 범인처럼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가즈오가 경찰에게
“사실은 자작 납치극이었습니다.”
라고 말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자신의 불륜과 범행 계획까지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요.
이게 이 작품의 참 묘한 부분입니다.
범인이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 자체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을 보는 재미도 상당히 컸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형사의 어리바리한 모습도 재미있었습니다.
사건을 따라가면서
독자에게 정보를 조금씩 보여주는데,
처음에는 형사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읽을 때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아, 이 장면이 그래서 있었구나.”
하면서 같은 장면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남편의 남동생 쪽에서 보여주는
기막힌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심부름센터 직원 가와우치의 생각입니다.
가와우치는 처음에는
돈만 보고 사건에 뛰어들었지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이러다 내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이 사건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습니다.
아키코는 죽고,
가즈오는 살인범으로 몰리고,
사건에 얽힌 사람들은
하나둘씩 파멸해 갑니다.
그런데 가와우치는
그 혼란 속에서 빠져나옵니다.
처음에는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마지막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게임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남편
도시유키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처럼 행동하면서
뒤에서는 모든 상황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속이려고 했고,
내연남은 남편의 돈을 빼앗으려고 했고,
심부름센터 직원은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가장 큰 계획을 세운 사람은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범인을 알고 난 뒤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독서에서는
“범인이 누구지?”
두 번째 독서에서는
“이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모르고 있지?”
이런 식으로 보게 됩니다.
범인을 알고 나면
추리소설의 재미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납치 의뢰》는 오히려
범인을 알고 나서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다시 살펴보는 재미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평범해 보였던 말 한마디가
나중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행동 하나가
사실은 전체 사건을 움직이는
중요한 장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상대방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누군가의 시나리오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납치 의뢰》는
단순히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마지막까지 판을 읽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를 보는 소설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가장 선한 사람도 아니고,
가장 영리해 보이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모든 상황을
자신의 시나리오로 만들어버린 사람.
남편 도시유키였습니다.
저는 범인을 먼저 알고 다시 읽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오히려 알고 보니
처음 읽을 때 그냥 지나쳤던 장면들이
하나씩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책을 읽으실 분이라면
가능하면 저처럼 결말부터 보지는 마시고요.
처음에는 끝까지
범인을 모른 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다 읽은 다음
처음부터 한 번 더 읽어보세요.
아마 같은 소설인데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속이는 사람보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던 이야기.
우타노 쇼고의
《납치 의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