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호_피천득 詩세계_〈이 순간〉
〈이 순간〉(1969)
단형시 중 가장 긴 시인 <이 순간>은 피천득의 미학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에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한 사실이다 (전문)
이 시에는 네 개의 순간이 등장한다.
첫째 순간은 “별을 쳐다”보는 순간이다. 별이 살고 있는 우주를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둘째 순간은 피천득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듣는” 순간이다. 말년까지 꾸준히 음악 듣기를 일상으로 삼았던 피천득에게 음악 듣는 시간은 “찬란한” 순간이다.
셋째 순간은 인간사회에서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즐거운” 순간이다.
마지막 순간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는” 습관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허무도 어찌하지 못하는” 시인 자신의 일상을 굳게 지켜주는 습관이다.
피천득에게 순간 또는 찰나(刹那)는 그의 다른 시 〈순간〉*과 연계된다. 어떤 의미에서 시인은 순간을 언어로 포착하여 기록으로 영원히 남기는 언어의 마술사일 것이다. 피천득 시의 전편에 흐르는 시학은 “순간의 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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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당인리 상공에 제트기 소리
홀연 지구 반경의 거리가 용해(溶解)된다
까만 저 오버에 눈을 맞으며
너는 ‘피프스 애비뉴’를 걷고 있다
‘티파니’의 쇼윈도는
별들을 들여다보는 유리창
‘푸리츨’ 장사 군밤 굽는 연기에
너는 향수를 웅얼거린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너의 모습이 점점 흐려진다
헤지지 않아도 되었을 이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