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진 * 어느 여교수의 회고록 _ 그런데도 못 다한 말
조성식 선생님
2009년 12월 25일 수요일에 고려대 병원 장례식장에서 조 선생님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건강의 화신과도 같았던 선생도 나이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나 보다. 그때가 88세였으니까 장수했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상태가 안 좋다는 연락을 받고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이미 곡기를 끊은 지 한참 된 후였다. 평소에 우리가 알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신은 또렷해서 더 안타까웠다. 선생님은 슬퍼하는 사모님에게 위로하느라고 일본 말로 “90까지 사는 사람 봤어?” 라고 했다.
평소의 복장으로 (선생님은 집에서도 늘 복장을 단정하게 하고 계셨다) 이부자리도 깔지 않은 채 맨 방바닥에 누워 계셨다. 언제부터인가 식사를 못하고 우유 한 컵만 겨우 마시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안쓰러워서 선생 따님에게 왜 요도 안 깔고 누워 계시느냐고 약간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뼈만 남은 몸이 배겨서 어떻게 딱딱한 맨바닥에 누워 있나 싶었다.
딸이 말하기를 식구들에게 요를 폈다 거뒀다 하는 수고를 시키지 않으려고, 막무가내로 저렇게 맨바닥에 누워 계신다고 했다. 무력하기 그지없는, 특히 죽음 앞에서는 더더욱 그런 우리들, 그래도 의식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우리가 찾아뵌 이후 선생은 병원치레 두어 번 하시고 이승을 떠났다.
우리가 대학에 입학하고 1년간은 주로 교양과목과 교직과목들을 수강했다. 그래서 영문과 교수들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교양영어 과목을 조 선생님이 맡고, 우리가 영어과 학생들이기 때문에 타과 학생들이 쓰는 교재를 쓰지 않고 미 단편선집을 교재로 사용했다. 교재는 어렵고, 가르치는 선생님은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적은 지독하게 박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이로니컬하게도 영문과 학생들의 교양영어 성적이 거의 다 C학점부터 시작이 되는 이변이 발생할 정도였다.
2학년이 되자 학년 담임교수가 정해졌는데, 조 선생님이 우리 학년 담당이 되어서 우리 모두는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선생은 철저하면서도 다정하고, 무서우면서도 몹시 수줍음을 타기도 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렇게 엄격하면서도 정이 많아서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을 많이 대주었다고 했다.
한번은 우리 학년이 선생님을 모시고 날씨 좋은 어느 봄날 야유회를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학생인 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게 차려 입혀진 상태로 아빠를 따라와 우리들과 놀다 간 적이 있다. 이 딸의 모습이 선생님 가정의 모든 것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장면도 잊히지 않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명문교인 황해도 해주고보와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출신에다 6·25 전쟁 중에는 미8군에 문관으로 있으면서 당시 사령관인 테일러 Taylor 장군에게 한글을 가르친 경험이 있어 그런지 선생님의 영어, 특히 회화 실력은 과에서도 발군이었다. 게다가 과 교수들 가운데 제일 젊고, 경제적인 여건도 다른 교수들보다 나은 편이었다. 복장도 준수했고, 특히 멋있는 넥타이를 자주 갈아매어서 감탄하며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사모님도 미인이고 품위가 있어서 우리는 선생님 댁을 자주 찾았다. 그 많은 학생들에게 어떤 때는 자장면을 시켜주기도 하고, 때로는 사모님이 직접 정갈한 음식을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님은 얼마 있다가 서울대에서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고대의 유진오 총장이 고대 영문과 교수진을 강화할 목적으로 선생님으로 하여금 강제로 학교를 옮기게 한 것이다. 유진오 총장은 조 선생님의 선친과 경성제대 동문이다.
고려대로 가서도 선생님은 여전했다. 정월 초하루도 연구실에 나가서 우리는 세배를 늘 사모님에게만 드렸다. 연구하다가 독일의 철학자 칸트 Kant처럼 오후 5시만 되면 어김없이 테니스 코트를 향해 연구실을 나섰다. 선생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동료 교수들이 5시구나 했다고 한다.
비록 서울대를 떠났지만 우리는 떠나 보내드리지 않고 계속 댁으로 찾아뵙고 많은 것을 배웠다. ‘한 번 선생은 영원한 선생 Once a teacher, always a teacher’이니까. 선생님 전공이 어학이라 나하고 학문적으로는 약간 소원했다. 그러나 전공에 상관없이 학문과 인생에 임하는 자세가 하도 바른 분이라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선생님을 알고 지낸 그 긴 세월 동안 그분은 한결 같았다. 집 안도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선생님의 서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은 한 주 전에 교정을 마쳤는데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애먹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생을 마치는 날까지 자 ruler를 대고 마지막 출간되는 책의 교정을 보고 계시던 모습은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마지막 책은 장례식 날 출간되어, 참석한 사람들이 한 권씩 받아 들고 갔다.
시저가 지배하는 로마는 당시의 세계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들은 막강 대군을 가지고도 북방의 앵글로색슨족만은 어찌 하지 못했다. 앵글로색슨족을 몸이 건장한 validus 야만이라고 제쳐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앵글로색슨족의 남자들에게 있어 자연사는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느끼게 되면 침대에서 내려와 창을 옆에 끼고 문 쪽으로 기어가다 죽었다고 한다. 전쟁터로 나가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앵글로색슨족은 몸만 건장한 것이 아니라 정신도 건장했던 것이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책의 교정을 보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에서 창을 옆에 끼고 전쟁터로 기어갔다는 앵글로색슨 전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묘지에서의 인상적인 한 장면이 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선생님의 맏아들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마치고 지금까지 거기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다. 자기가 맏이인데 부모를 가까이서 모시지 못한 자책감까지 더해져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다. 괴팍할 정도로 깔끔한 선생님은 맏이가 외국에 있어서 서운하다는 말을 아마 단 한 번도 내비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맏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장지에서 오열하며 몸부림을 쳤다. 잔인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그날 그 아들의 아픔에서 묘한 아름다움이 묻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남편은 전공이 같은 탓도 있지만 평생 조 선생님을 존경하며 따랐고, 또 선생님도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유독 남편을 끔찍이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