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시감상 : 황경원/신륵사. 황경원/석호정. 황경원/배 위에서 저녁에 용문산을 바라보다. 황경원/저자도에 배를 정박하다

[짜르르]

한국 한시감상

황경원/신륵사

〔神勒寺〕

성긴 종소리 저녁 물가 너머 울리고 / 疎鐘度暮渚
외론 탑이 양지편 언덕에 우뚝하네 / 孤㙮表陽崖
고운 달빛은 문틈으로 새어들고 / 窈窕月窺戶
무성한 꽃은 섬돌을 뒤덮었네 / 氛氳花覆階
강물 빛은 절집을 통과하고 / 江光通祗樹
돛대 그림자 선방으로 들어오네 / 檣影入禪齋
들판에는 푸른 빛 이미 퍼졌는데 / 平蕪綠已徧
먼 봉우리 나지막이 다시 어두워지네 / 遠岑低更霾
영릉의 나무들 울창하게 우거졌으니 / 鬱鬱英陵樹
산천의 기운이 진정 아름답구나 / 山川氣正佳
구의산 조수가 울어대는 것 같고 / 九疑鳥獸叫
운소가 조화롭게 울리는 듯하네 / 想像雲韶諧
아름답고 밝으심, 미칠 수 없으니 / 休明不可及
노래를 불러도 회포는 남아도네 / 歌誦有餘懷
성덕을 떨치게 하지 못하니 / 未能揚盛德
본래 마음 어긋남이 한스럽구나 / 秪恨素心乖

[주C-001]신륵사(神勒寺) : 경기도 여주(驪州)에 소재한 유서깊은 사찰로, 명승지이다.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물이 감싸안은 봉미산(鳳尾山)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주D-001]외론 탑 : 신륵사 경내의 남한강변에 고려 후기에 건립된 삼층석탑이 서 있다.
[주D-002]영릉(英陵) :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능이다. 당초에는 광주(廣州)에 있었지만 1469년(예종1)에 묏자리가 좋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주D-003]구의산(九疑山) : 순(舜) 임금을 장사 지낸 곳이다. 창오(蒼梧)의 들에 있다고 알려졌는데, 현재의 중국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의 남쪽이다. 주명(朱明)ㆍ석성(石城)ㆍ석루(石樓)ㆍ아황(娥皇)ㆍ순원(舜源)ㆍ여영(女英)ㆍ소소(蕭韶)ㆍ계림(桂林)ㆍ재림(梓林)의 아홉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모양이 같아 보는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켜 구의(九疑)라고 말한다.
[주D-004]운소(雲韶) : 황제(黃帝) 때의 음악인 〈운문(雲門)〉과 순(舜) 임금 때의 음악인 〈대소(大韶)〉를 합해서 이르는 말이다.
[주D-005]아름답고 …… 없으니 : 후대 왕들이 세종의 덕성에 미칠 수 없다는 뜻이다.

황경원/석호정

〔石湖亭〕

날아갈듯한 난간에서 맑은 호수를 내려 보니 / 飛檻臨澄湖
상쾌하여 답답한 생각 싹 가시는구나 / 爽然煩慮散
깊은 산 어귀에는 봄 나무들 무성하고 / 亹深春木繁
드넓은 모래사장에는 저녁 구름 어지러워라 / 沙濶夕雲亂
술병 끼고 아득한 강물을 따라 / 携酒下蒼茫
배 타고 드넓은 곳에서 노닐고파 / 方舟凌汗漫
어느새 시선을 멀리 보내 / 於焉縱遠目
저 맑은 하늘을 바라보노라 / 聊以望淸漢
생각해 보니 예전에 신 학사는 / 念昔申學士
어지러운 세상 싫어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의탁했지 / 厭紛寄絶岸
비록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 雖出貴游家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문장이었네 / 所好唯文翰
즐거운 잔치 창주에서 많이 열렸는데 / 歡讌滄洲多
술자리엔 한미한 선비 태반이었어라 / 獻酬寒士半
그 풍류를 어찌 부여잡을 수 있으랴 / 風流安可攀
굽어보고 우러르며 그저 길이 탄식할 뿐 / 俯仰聊永歎

[주C-001]석호정(石湖亭) : 석호는 경안천(慶安川)이 한강과 만나 넓어지는 곳을 이르던 말인데 석호가 내려다보이는 검단산 남쪽 기슭에 석호정(石湖亭)이 있었다. 신여식(申汝拭, 1627~?)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주D-001]신 학사(申學士) : 석호정을 지은 신여식(申汝拭)을 말한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옥보(玉甫), 호는 석호(石湖)이다. 1648년(인조26)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 3등 42위로 합격하여 관직이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주D-002]창주(滄洲) : 경치 좋은 은자의 거처를 의미하는 말. 삼국시대 위(魏)나라 완적(阮籍)이 지은 〈위정충권진왕전(爲鄭沖勸晉王箋)〉의 “창주를 굽어보며 지백에게 사례하고, 기산에 올라가 허유에게 읍을 한다.〔臨滄洲而謝支伯, 登箕山而揖許由.〕”라는 말에서 나왔다. 《文選 卷20》 여기서는 석호정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황경원/배 위에서 저녁에 용문산을 바라보다

〔舟中 夕望龍門山〕

날 저물자 강물소리 세차고 / 江聲駛已暮
저 멀리서 고기잡이 불 피어오르네 / 漁火起茫茫
모래섬은 밝고 정갈한데 / 洲渚澹寥朗
물오리는 택량에 모여 있구나 / 鳧鷖集澤梁
오늘 밤에는 바람이 고요하니 / 今宵風正恬
돌아가는 배가 돛을 펼 수 있으리 / 歸帆聊可張
시를 읊조리니 벌써 질탕해지는데 / 歌詩旣跌宕
단술 또한 향기로워라 / 酒醴亦芬芳
잇닿은 산이 파도 사이로 보이고 / 連嶂波中見
용문은 구름 밖에서 빛나는데 / 龍門霞外光
상원사(上元寺)와 죽장사(竹杖寺) / 上元與竹杖
두 절집이 그 가운데 자리 잡고 있구나 / 禪院據中央
밤이 오면 종소리 울리는데 / 夜來鐘磬聲
마치 선실의 다락 곁에서 들리는 듯 / 若出柁樓旁
언제쯤 스님을 찾아가 / 何時尋上人
달빛 속에 높은 언덕 올라 볼까나 / 帶月陟高岡

[주D-001]상원사(上元寺)와 죽장사(竹杖寺) : 용문산에 있는 절 이름이다.

황경원/저자도에 배를 정박하다

〔泊楮子島〕

푸른산 가까이 배를 매어 놓고 / 維舟近碧山
숨어 핀 꽃을 앉아서 바라보네 / 坐看幽花發
이슬은 강가에 흠뻑 내리고 / 露氣湛江干
새벽빛은 돌이끼에 엉기었구나 / 曉光凝石髮
멀리서 곱게 새벽노을 올라오고 / 亭亭昇遠霞
뉘엿뉘엿 달빛이 흘러가는데 / 冉冉流華月
물가에선 백구가 졸다가 / 中沚白鷗眠
조수가 일자 놀라 흩어진다 / 潮生驚散沒
두 개의 왕릉에 북두칠성 걸리고 / 二陵斗柄懸
외로운 섬엔 소쩍새 소리 그쳤구나 / 孤嶼子規歇
깊고 깊은 가시덤불 언덕이요 / 窈窕荊榛丘
맑고 밝은 산수굴이로다 / 澄明雲水窟
차라리 삼도의 아름다움은 잊을지언정 / 寧忘三島姸
오히려 천봉의 우뚝함은 기억하리 / 尙憶千峰兀
다시 좋은 벗과 만나기를 기약하며 / 更與良朋期
단림에서 도골을 연마하리라 / 丹林鍊道骨

[주C-001]저자도(楮子島) : 뚝섬 앞쪽 중랑천이 한강 본류와 만나는 지점에 토사가 퇴적하여 생긴 삼각주.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로 불리었다. 세종이 둘째 딸 정의공주에게 저자도를 하사했고 공주의 아들 안빈세가 정자를 지어 세도가와 시인묵객을 불러들였다고 하며 저자도에 초대받은 한명회가 그 풍광에 매료되어 자신은 압구정을 지었다는 일화도 있다.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해 예부터 많은 문인이 이곳을 찾아 노래하였고, 기우제를 주로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주D-001]두 개의 왕릉 : 저자도 근방에 있는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D-002]산수굴〔雲水窟〕 : 은자(隱者)나 도사(道士)가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
[주D-003]삼도(三島) : 삼전도 신선이 산다는 봉래ㆍ방장ㆍ영주 등 세 선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비유한다.
[주D-004]천봉의 우뚝함 : 저자도 주변의 풍경으로 보인다. 저자도는 지금 없어져 자세한 경치를 볼 수 없으나 변계량이 이곳에서 지은 〈낙천정기(樂天亭記)〉에 의하면 “거기에 올라서 사방을 돌아보니 큰 강과 둘러싼 연못이 얽힌 채 넘실대며 흐르는데, 연이은 봉우리와 겹쳐진 멧부리가 차례로 나타나고 겹겹이 나와 언덕을 고리처럼 둘러 조회(朝會)하는 듯하고 뭇 별이 북신(北辰)을 둘러싼 듯하여, 과연 하늘이 만든 훌륭한 곳이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東文選 卷80》
[주D-005]단림(丹林) :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지명이다.

황경원/홍양지 재 의 청원관 잔치에서 거문고 타는 것을 보다

〔讌洪養之 梓 淸遠 觀聽彈琴〕

와병 생활 혹독하여 즐거움 없어 / 卧病悄無歡
그대가 생각나 홀로 가노라 / 懷人聊獨往
가을 깊어 산 속 나무 성글고 / 秋高山木疎
밤 깊어 은하수 넓게 펼쳐졌구나 / 夜永天河廣
헌걸찬 홍양지는 / 有頎洪養之
아름다운 문장 어찌 그리 뛰어난고 / 淸藻何遒朗
드디어 이원령을 맞아 / 遂邀李元靈
좋은 날 함께 노닐게 되었네 / 良辰共偃仰
때마침 홀로 거문고를 타는데 / 孤琴時自彈
오음이 번갈아 일렁이누나 / 五音迭相盪
처음엔 엄숙하게 우성이 드날리더니 / 羽聲厲初揚
슬프고도 낭랑한 상성이 울려라 / 商聲哀且爽
모두 공상과 잘 어울리니 / 一與空桑和
마치 광릉산을 감상하는 듯 / 還同廣陵賞
밝은 달 수풀 끝에 걸릴 때 / 明月挂林端
다시 〈유수곡〉을 듣노라 / 更聽流水響

[주C-001]홍양지(洪養之) : 홍재(洪梓, 1707~1781)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양지(養之)로, 홍귀조(洪龜祚)의 아들이다. 1753년(영조29) 시직(侍直)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757년 수찬으로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ㆍ부교리ㆍ부수찬ㆍ헌납ㆍ대사간을 역임하였고 1769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 좌윤과 대사헌을 지냈다. 문필에 능하여 북청의 〈이지란신도비(李之蘭神道碑)〉와 경주의 〈삼강묘비(三綱廟碑)〉가 있다.
[주C-002]청원관 : 홍재(洪梓)가 소유하고 있던 누관(樓觀)이다. 황경원이 지은 〈이원령 묘지명(李元靈墓誌銘)〉에 “성보가 일찍이 밤에 술병을 끼고 홍씨의 청원관에서 술을 마시면 군 역시 흔연히 그를 따라 갔다.〔成甫嘗夜携酒, 飮于洪氏淸遠觀, 君亦欣然而從之.〕”라는 대목이 있다. 《江漢集 卷15》
[주D-001]이원령(李元靈) : 이인상(李麟祥, 1710~1760)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ㆍ보산자(寶山子)이다. 고조부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이나 증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ㆍ서ㆍ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는데 그중에서 이윤영(李胤永)ㆍ송문흠(宋文欽)ㆍ김무택(金茂澤) 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특히 효종대왕의 북벌론을 찬성하고 배청사상을 지니고 있어 황경원과는 이념적 성향이 같았다. 문집으로 《능호집(凌壺集)》이 있다.
[주D-002]우성(羽聲) : 오음의 하나로 강개하고 격앙된 소리이다.
[주D-003]상성(商聲) : 오음 중 맑고 슬픈 음색을 띤 소리이다.
[주D-004]공상(空桑) : 고대의 유명한 비파의 이름이다.
[주D-005]광릉산(廣陵散) : 혜강이 즐겨 연주하던 금곡(琴曲) 이름. 진(晉)의 혜강(嵆康)이 사마소(司馬昭)에게 끌려 동시(東市)의 형장으로 갔을 때 태학생(太學生) 3천 명이 나서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사마소가 불허하자, 혜강은 그 전에 화양정(華陽亭)에서 자면서 어느 나그네에게 전수받았던 광릉산(廣陵散)을 마지막으로 거문고 가락에 울려 연주했다고 한다. 《晉書 卷49 嵆康列傳》
[주D-006]유수곡 :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고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 곡조이다.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 또는 〈아양곡(峨洋曲)〉이라고도 한다. 백아가 마음속에 ‘높은 산〔高山〕’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험준하기가 태산과 같다.〔善哉! 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백아가 마음속에 ‘흐르는 물〔流水〕’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광대히 흐름이 강하와 같다.〔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列子 湯問》

황경원/밤에 소나무 언덕에 올라 퉁소를 불다

〔夜升松壇 吹洞簫〕

적막한 밤 높은 누각엔 / 高閣夜云寂
밝은 별만 매우 찬란한데 / 明星正爛爛
처음에 연주하던 거문고 가락 / 初弄孤桐琴
아직 여음이 흩어지지 않았네 / 餘音猶未散
뜰 앞에는 낙엽이 지고 / 庭前危葉下
하늘가에는 돌아가는 구름도 끊기었는데 / 天末歸雲斷
누가 울적한 마음을 품고 / 誰懷壹鬱心
격한 절조로 홀로 길게 탄식하는가 / 激節獨長歎
이생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 李生不遇時
술을 마시며 하늘의 별만 바라보고 있구나 / 中酒望星漢
함께 소나무 언덕에 오르니 / 相與躋松壇
퉁소에 귀뚜라미 소리 소란하여라 / 洞簫寒蛬亂
변음을 연주할 때는 조화가 적고 / 聲變中和少
곡이 끝날 때는 슬픔과 원망이 태반이라 / 曲終哀怨半
이윤은 신야에서 나왔지만 / 伊尹出莘野
어찌 꼭 농사일만 걱정했으랴 / 何必傷鉏灌

[주C-001]밤에 …… 불다 : 황경원이 쓴 〈이원령묘지명(李元靈墓誌銘)〉에 이 시의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밤이 깊어 갈 때 성보(成甫)가 거문고를 가지고 상성을 타니 군은 슬피 하늘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명나라는 나의 부모지국이다. 지금 천하가 좌임을 한 지 오래되었는데 내가 부모를 위해 원수를 갚지 못하니 구차하게 산들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성보와 더불어 소나무 언덕에 올라 퉁소를 불면서 밤새도록 괴로워하고 원통해하다 잠들지 못하였다.〔夜將半, 成甫操琴彈商聲, 君愀然仰天而歎曰, ‘明吾父母之國也. 今天下左袵, 久矣, 吾不能復父母之讐, 雖苟生, 何所樂哉?’ 因與成甫, 升松壇, 吹洞簫, 終夜煩寃, 不能寐也.〕” 성보는 신성하(申聖夏)이다.
[주D-001]거문고 가락 : 원문은 ‘桐琴’이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역산 남쪽에 우뚝 자란 오동나무라.〔嶧陽孤桐.〕”라고 하였는데, 오동나무는 역산 지방의 특산물로서 거문고와 비파〔琴瑟〕를 만들기에 좋은 재목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신성하(申聖夏)가 타고 있던 거문고 가락을 의미한다.
[주D-002]이생 : 이인상(李麟祥, 1710~1760)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ㆍ보산자(寶山子)이다. 고조부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이나 증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ㆍ서ㆍ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는데 그중에서 이윤영(李胤永)ㆍ송문흠(宋文欽)ㆍ김무택(金茂澤) 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특히 효종대왕의 북벌론을 찬성하고 배청사상을 지니고 있어 황경원과는 이념적 성향이 같았다. 문집으로 《능호집(凌壺集)》이 있다.
[주D-003]이윤은 …… 걱정했으랴 : 신야(莘野)는 유신국(有莘國)의 들을 가리키는 말.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신의 들에서 농사를 짓다가 탕(湯) 임금의 초빙을 받고 상(商)나라를 도와 왕업을 이루었다. 비록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천하의 일로 자임(自任)하였고 결국 성군을 만나 뜻을 펼 수 있었기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 것이다.

황경원/장경사에서 묵다 을묘년

〔宿長慶寺 乙卯〕

남한산성은 지세가 매우 험준하고 / 南漢極天險
산등성이 이어진 백치 높이의 성이라 / 連岡百雉城
가까스로 산 위의 절에 올라 / 聊登山上寺
밤이 다하도록 피리 소리를 듣노라 / 終夜聽笳聲
황량한 성가퀴엔 자비의 구름 고요하고 / 荒堞慈雲靜
싸늘한 초소엔 지혜의 달빛 밝구나 / 寒譙慧月明
말에게 물 먹이는 적을 어찌 막을 수 있었으랴 / 何能防飮馬
걸려있는 적의 깃발 차마 볼 수 없었으리 / 不忍見懸旌
옛날 숭정연간에 / 昔在崇禎世
청해에서 구원병을 내었을 때 / 靑海出援兵
동쪽 강에선 북소리 진동하고 / 東江金鼓振
북쪽 항구에는 배들이 늘어섰네 / 北汛舳艫橫
만 리 길에 군사가 이르기 어려운지라 / 萬里師難至
하루아침에 맹약이 이루어졌구나 / 一朝盟已成
충신들은 분노로 배를 찔렀고 / 忠臣刎腹怒
곧은 선비들은 다투어 글을 찢었네 / 貞士裂書爭
조정이 능욕을 당한 것도 이미 서럽거니 / 已傷丹極淪
황하가 맑아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구나 / 未覩黃河淸
법당에는 아직도 한이 남아 있는데 / 招提餘恨在
성가퀴에는 새벽 기러기만 울며 간다 / 埤堄曉鴻鳴

[주C-001]장경사(長慶寺) : 남한산성 안에 있는 절.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세웠다. 전국 팔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짓는 것을 도왔다고 하는데 이때 승군(僧軍)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주C-002]을묘년 : 1735년(영조11). 강한의 나이 27세이다.
[주D-001]백치(百雉) : 치(雉)는 성벽의 높이와 길이의 단위로, 높이 1장(丈), 길이 3장(丈)을 보통 1치로 친다.
[주D-002]자비의 구름〔慈雲〕 : 넓게 파급되는 석가여래의 자심(慈心)이 마치 공중에 덮이는 구름과 같다고 하여 이른 말. 이곳이 절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했다.
[주D-003]지혜의 달빛〔慧月〕 : 불교 용어로 중생의 번뇌를 깨우치는 지혜가 마치 청량한 달빛 같다고 하여 이른 말이다.
[주D-004]숭정연간에 …… 때 :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 명 의종(明毅宗)이 원군을 파견한 사실을 가리킨다. 남공철이 지은 〈판중추부사……황공 신도비명(判中樞府事……黃公神道碑銘)〉에 의하면 의종은 총병관 진홍범(陳弘範)에게 조서를 내려, 산동 여러 진의 수군을 통솔하여 가서 구원하라고 하였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황경원은 이 일을 거론하며 의종을 황단(皇壇)에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주청하여 실현하였다. 《金陵集 卷15》
[주D-005]맹약 : 병자호란 후 청나라와 화친조약을 맺은 사실을 가리킨다.
[주D-006]충신들은 …… 찔렀고 : 이정웅(李廷熊)ㆍ송시영(宋時榮)ㆍ이시직(李時稷)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자호란 때 자결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07]곧은 …… 찢었네 :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비국(備局)에서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겠다는 국서를 쓴 뒤 이를 수정하고 있을 때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는 입대(入對)하여 주벌을 청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때 김상헌의 말뜻이 절절하였고 말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므로 입시한 제신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세자의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인조실록 15년 1월 18일》
[주D-008]조정 : 원문의 ‘丹極’은 대궐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붉은색을 칠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9]황하가 맑아지는 것 : 중국의 황하 강이 늘 흐려 맑을 때가 없다는 뜻으로,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10]법당 : 원문의 초제(招提)는 범어(梵語) caturdeśa의 음역(音譯)으로,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1624년(인조2)에 남한산성 서문 안에 건립한 국청사(國淸寺)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