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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군대는 당대 강국 중 하나인 이집트군과 전투를 벌이기에는 규모와 장비 면에서 크게 부족했다. 남유다는 이미 죽은 프삼티크 1세 시절에 사실상 이집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물론 반독립 상태이긴 했지만). 남유다의 군비 역시 이집트에게 직접 통제를 받았거나, 직접적인 제한이 없었다고 해도 이집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크게 팽창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대기의 전투 묘사와 요시야의 최후가 지나칠 정도로 이전에 묘사된 아합의 최후와 비슷하다. 아합이 선지자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였듯이, 요시야도 네코 2세의 전언을 통해 나온 야웨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인다, 아합이 전투 직전 동맹인 남유다 왕 여호사밧을 자기로 꾸미고 자신은 일개 병졸로 변장했듯이, 요시야 역시 전투 전에 변장했다고 서술된다. 이뿐 아니라 둘 다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화살에 맞은 뒤에 하는 말도 매우 유사하다.[11] 이러한 유사성을 봤을 때 요시야의 므깃도 전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아합의 최후를 문학적으로 변주한 것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므깃도 전투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전무하다.
대체로 고고학자들은 열왕기의 기록을 신뢰하는 편이다. 에릭 클라인(Eric H. Cline)은 므깃도에서 실제로 전투가 없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핑켈슈타인이나 나답 나아만(Nadav Naaman) 같은 경우는 열왕기의 기록대로 아예 전투가 없었을 것으로 여기며,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네코와 만난 것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네코 2세가 동지중해 연안의 봉신들에게 주종관계를 재확인하고 충성 서약을 받기 위해 요시야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면, 왜 요시야가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고,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요시야가 신바빌로니아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슬금슬금 북이스라엘 고토로 영토를 넓히던 것이 파라오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바룩 핼펀(Baruch Halpern)은 네코 2세가 아라비아와의 무역에 독립적으로 뛰어들려던 요시야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이 모든 미스터리 중에서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시야가 네코 2세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이며, 그와 함께 통일 이스라엘과 메시아의 재림이라는 꿈은 그대로 끝장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요시야의 대망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609년 므기또에서 파라오 느코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이 대망은 완전히 꺾여버린다. 이 비극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요시야는 과연, 동맹국 아시리아를 지원할 목적으로 바빌론과 맞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향하던 파라오 군대의 통행을 경솔하게 가로막고자 했던 것인가? 아니면 이집트의 지배를 거슬러 지나치게 자주적이었던 그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파라오에게 소환되어 응징되었던 것인가? 아무튼, 일화는 요시야의 이념적 기획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국과 이집트와 같은 강대국 사이의 불균형은 엄청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Jean-Daniel Macchi, "이스라엘의 역사. 기원에서 바빌론 지배 시대까지", 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103-104쪽
BC 609년 요시야가 39세를 일기로 네코 2세에게 살해된(혹은 전사한) 뒤, 왕위는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 치세는 3개월 만에 이집트군의 공격을 받아 끝장났다. 네코 2세는 남유다에 엄청난 공물을 부과하고 여호아하즈를 폐위한 뒤, 그의 동생 엘리아김을 여호아김으로 개명하고 꼭두각시 임금으로 앉혔다. 이후 남유다는 독립적인 지위를 잃고 외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였으며, 바야흐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분명 시대는 잘 타고났고 요시야 본인도 그러한 시류를 잘 읽어 종교 개혁과 중앙집권, 영토 확장같은 업적을 남겼고,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다윗이나 솔로몬급의 명군이 되었을텐데도 결국 그가 가진 원대한 꿈을 아직 다 펼쳐보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요절했고, 최후의 명군을 잃은 남유다는 급격히 멸망으로 기울고 말았다. 만약 요시야가 일각의 주장대로 신바빌로니아와 연계하여 이집트와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라면, 그가 조부 므낫세에 버금가는 외교적 혜안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2] 실제로 이후 오리엔트의 패권국이 된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바빌로니아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판세를 읽었음에도 결국 국가간 체급의 차이와 군사력의 격차를 뒤집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을 듯. 물론 므깃도 전투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종교 개혁으로 내정을 정비하고 사회 제도를 재편했으며 영토를 확장해보려 했던 것은 분명한 치적이다.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치적을 남겼지만 성경에서는 폭군으로 단죄된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요시야는 완벽하게 선한 왕으로 성경에서 극찬을 받는다. 아니, 다른 나름대로 선하다고 평가받는 왕들에 비해서도 거의 독보적인데 초대 군주인 다윗의 경우, 밧세바와의 간통, 인구조사 등으로 사고를 쳤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처음에는 그럭저럭 정직하게 살다가도 말년에 타락했으며, 여호사밧은 악한 이스라엘 왕가와 친했다고 선지자한테 한소리 들었으며,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3대도 말년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좋은 평가를 들었던 조부 히스기야조차도 외국에 자신의 재부를 자랑하는 바람에 꾸중을 들었는데[13] 요시야 만큼은 부정적인 평가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 그의 시대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 일신주의가 흥성하게 된 것을 보면 당연한 성경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14] 핑켈슈타인은 그의 시대에 모세오경이 쓰여졌던 점과 일신교적 성격이 강조된 것에 착안하여, 요시야 시대에 현재의 유대교가 처음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을 보면 성경 전체에서도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인물.
자식 농사는 완전히 말아먹었고 다들 그 끝이 별로 좋지 못했다. 여호아하즈,[15] 여호아김,[16] 그리고 마지막 왕인 치드키야[17]까지 모두 외세에 의해 옹립되거나 폐위되어 끌려가는 꼴을 면치 못했고, 셋 모두 아버지만한 능력이나 외교적 안목도 없어서 위기에 몰린 나라를 그대로 말아먹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자식들이 잘못한 것이니 요시야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어쨌든 이런 후손들의 말로를 보면, 요시야가 독립국의 군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실질적인 남유다(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inkelstein, Israel and Silberman, Neil A.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New York: Free Press, 2001. p243-250
Hardmeier, Christof. "King Josiah in the climax of the Deuteronomic history (2 Kings 22-23) and the pre-Deuteronomic document of a cult reform at the place of residence (23.4-15) : criticism of sources, reconstruction of literary pre-stages and the theology of history in 2 Kings 22-23" in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Na'aman, Nadav. "Josiah and the kingdom of Judah" in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Sweeney, Marvin A. King Josiah of Judah : the lost messiah of Israel.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 요시야 이후에도 4명의 왕이 더 있긴 했지만, 모두 외국의 입김에 의해 즉위하거나 폐위당했다. 결국 요시야는 독립국가의 군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였다.[2] 예시로 요시야의 업적도 므낫세 시대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3] 아시리아가 포기한 지역을 이집트가 날로 먹었다고도 볼 수 있고, 이후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공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양국 사이에 아시리아가 동지중해 지역을 이집트에게 할양하는 대신 군사 원조를 받기로 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4] 좀 더 부연하자면, 가나안의 토착신이며 주신이던 바알을 야웨로 동일시하거나 대체해서 믿는 등, 야웨를 아예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야웨를 주신(主神)으로 삼아 다른 여러 신들을 함께 섬겼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아예 초기 유대교는 다신교였으며, 야웨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여러 신들의 주신이었고, 일신교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다른 여러 신들은 천사 등으로 격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5]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가 BC 7세기 경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시기에 그 핵심이 구성되었다는 부분에 동의한다(Rofé, pp.4–5). 아마도 요시야의 치세에 발견된 율법서는 이때 구성된 신명기의 원전, 원형에 해당했을 것이다. 비록, 신명기의 핵심을 이루는 12-26장의 율법 컬렉션이 요시야 왕 시대의 것인지, 그 이전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컬렉션 그 자체가 아닌 개별 법률은 분명 컬렉션 자체보다 오래된 것이다(Knight p66).[6] 물론 역대기는 후대에 쓰인 책인데다 기록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에즈라였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상이 더 짙으므로 다소 감안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7] 보통 가나안의 토착신인 아세라로 여겨진다.[8] 그래서 기독교측에서는 요시야의 개혁이 불완전했으며, 또 므낫세가 이 정도 개혁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야웨의 용서를 받아 멸망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9] KJV나 개역개정 등에서는 요시야가 네코(한글 성경에서는 느고로 나옴)와 "맞서러 나갔다(went against)"고 서술되어 있다. RSV와 NRSV에서는 단지 만나러(meet)라고 써 있고, 불가타 역본에서는 occursum(만나다, 조우하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대체로 열왕기의 묘사가 요시야가 네코와 싸우러 올라갔다기보다 단순히 만나러 갔다고 해석한다.[10] 네코 2세는 요시야를 죽인 뒤 북상하여 아시리아의 잔당과 합류하고 하란을 탈환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기원전 605년 다시 출정한 네코 2세의 이집트군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직접 끌고 온 신바빌로니아군과 카르케미쉬에서 전투를 벌여 대패했다. 이것으로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하고, 네코 2세는 이집트로 철수했다. 이후 시리아와 동지중해는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되어 이집트의 패권은 무너졌다.[11] 둘 다 "내가 부상을 당했으니 나를 전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한다.[12] 조부 므낫세는 아시리아에 순종하는 길을 택했는데 그 당시 아시리아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고 이미 므낫세의 선대왕인 히즈키야는 자국과 아시리아의 격차도 모른채 무턱대고 덤볐다가 전국토가 쑥대밭이 된 바 있었다. 무엇보다 므낫세의 업적도 아시리아와 잘 지낸 덕도 있으니 뭐...[13] 꽤나 심각한 잘못이었는지, 이 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앞서 자랑한 재부들이 모두 약탈당하고 왕의 후손은 환관으로 끌려갈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14] 물론 요시야가 아무리 열심히 야웨를 섬겼어도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므낫세가 너무 똥을 많이 퍼질러서 화가 단단히 난 야웨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야웨는 요시야 시대에 나라가 망하는 꼴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15] 왕이 된지 겨우 3개월 만에 이집트군에 의해 폐위당해 이집트로 끌려갔고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16] 야훼가 그토록 싫어하는 우상 숭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에 보낼 벌금을 모은다는 명분으로 백성들로부터 마구잡이로 세금을 거둬들였으며(이집트에 보내고 남은 건 몽땅 자기가 독차지했다) 옳은 말을 하는 자는 가차없이 벌하는 등 전형적인 폭군의 행태를 보였다. 이 때문에 선지자 예레미야의 폭풍까임의 타겟이 되었으며, 벌 받은 건지 그 악명높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붙잡혀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죽고 난 뒤에 조상들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했다.[17] 신바빌로니아에 맞서기 위해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를 걱정한 예레미야가 신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는 충고를 여러 번 했음에도 끝까지 무시하고 버티다가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함락된 뒤 몰래 도망쳤다. 하지만 끝내 신바빌로니아군에게 붙잡혔고, 신바빌로니아군에 의해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바로 눈 앞에서 봐야 했으며 두 눈이 뽑힌 채 신바빌로니아로 끌려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역시 여호아하즈처럼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