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 조미숙
자동차 열쇠와 핸드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보물이(반려견)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날씨가 따뜻하니 산에 사람들이 많다. 유달산 밑 케이블카 승강장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즐비하다. 벚나무는 물이 올라 꽃망울이 잔뜩 부풀었다. 조금 걸으니 땀방울이 떨어진다. 웃옷을 벗어 허리에 질끈 동여맨다. 한 무리의 등산객 옆을 지나다 문득 물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물병과 핸드폰을 넣을 수 있는 조그마한 가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났다. 손에 드는 게 번거로워 그냥 나온다. 허리에 매는 게 있긴 하지만 달랑 물병 하나 넣기는 커서 오늘 같은 날이면 하지 않는다.
매사에 이런 식이다. 어디에 가든 핸드폰만 챙겨 나간다. 아니 카페에 갈 때는 돋보기도 찾는다. 전자책을 읽으려는 거다. 겨울 외투는 주머니가 크니 양쪽에 하나씩 넣으면 된다. 가방이 필요 없다. 전화기에 카드와 신분증까지 모두 깔아 두었으니 굳이 뭔가를 들고 가지 않아도 돼 편리하다. 요즘은 현금 거래를 안 하고, 털털한 성격이라 화장도 신경 안 쓰니 화장품이나 그 외 소지품도 많지 않아 지갑도 가방도 필요치 않다. 빈 손이 습관이 되었다.
며칠 전에 학습코칭단 연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새롭게 모집 공고를 내어 면접까지 보고 선발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오랜만에 선생님들을 보는 자리이기도 해서 신경 써서 입고 싶었다. 담당자가 늘 격식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눈 밖에 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마땅한 정장도 없으니 벗었다 걸쳤다 하면서 겨우 찾아 입었는데 거기에 어울리는 가방이 없다. 죄다 오래되어 낡고 유행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몇 년 전에 싱가포르 여행을 다녀오면서 선물로 사 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멜 일도 없어 그냥 묵혀두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빠듯한 경비에서 큰맘 먹고 사 왔을 텐데, 아들의 핀잔에도 손이 안 가는 걸 어쩌랴. 혹시 비싼 거였다면 달라졌을까?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털겸 그 가방을 들었다.
10여 년 전, 빨간 장지갑을 갖고 싶었다. 번듯한 가방도 없는데 지갑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마침 중학생인 작은딸과 막내가 인도네시아에 사는 시누이에게 다녀올 기회가 있어 면세점에서 하나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12만 원쯤 했고 그것도 국산 제품이었는데 그걸 산 걸 안 애들 고모는 나를 명품이나 좋아하는 여자로 몰았다고 한다. 시누이가 보내는 식구들 선물 중에 내 몫은 없었다. 난 비싼 지갑을 샀다는 이유 같았다. 아이들 말이긴 하지만 본인은 명품만 두는 방이 하나 있다고 했다. 길을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것도 명품인지. 억울해서라도 마르고 닳도록 쓰려고 했는데 쓸모를 찾지 못해 잊힌 지 오래다. 지금도 지갑을 보면 씁쓸해진다.
지금 집에는 명품 대신에 천 가방이 수두룩하다. 여기저기에서 받거나 아이들이 쓰다 버린 것이다. 내가 예쁘게 그림을 그려 넣거나 수를 놓은 것이나 숲에서 쓸 수 있는 가방은 자주 이용하지만 다른 것은 먼지만 쌓인다. 에코백(친환경 천 가방)이라고 하지만 넘쳐나는 것은 텀블러처럼 환경, 생태와는 거리가 멀다. 수요보다는 공급이 많으니 몇 번 쓰다 버리면 환경 쓰레기가 되어 문제가 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엊그제 큰딸과 지인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는데 가방 이야기가 나왔다. 나한테 정말 보자기로 책을 싸서 다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큰딸은 무슨 6.25 적 이야기냐고 깔깔거린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목포 사람들이고 난 산골 출신이니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일본에서 사는 먼 친척이 저학년 때 사준 책가방이 있어 한때는 뽐내며 다닌 적은 있었다. 예전에는 다들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럴 수 있었겠다고 창피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솔직히 돈이 없어 갖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래저래 빈부 격차는 심해지고 나 같은 서민은 명품은 꿈도 못 꾼다. 아니 아는 상표도 없어, 줘도 모른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얼마 전부터는 등에 메는 가방이 사고 싶었다. 나들이용이다. 특히 서울에 갈라치면 어디 가까운 데 가는 것도 아닌데 핸드폰만 달랑 들고 나설 수도 없으니 어깨보다 등에 거는 것이 편하다. 옛날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이 바리바리 싸 들고 가려면 더욱 그렇다. 아이들은 택배로 보내라지만 어디 그런가? 그건 그거고 손은 손이다.
오늘따라 보따리에 담긴 정이 그립다.
첫댓글 '책보'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책보를 좀 들었습니다. 추억이 새록새록하네요. 빨간 책가방 갖게 되서 좋아했던 날도요.
가방에다 이것저것 담아야 흘릴 염려도 없고 편하던데요.
우리 집에도 휴대 전화, 차 열쇠, 손수건 등을 주머니에 넣고 다녀서 가방을 들면 편하다고 잔소리해도 안 듣는 사람이 있어요.
선생님 말씀처럼 등에 매는 가방은 유용합니다. 짐이 많을 때도 그렇지만 여행 가거나 활동량이 많을 때도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반려견을 키우는데 보물이가 등장하니 반갑네요.
선생님이랑 한바탕 수다 떤 것 같네요.
잘 놀다 갑니다!
책보, 참 오랜만에 들어 본 이름이네요. 60년대 후반 국민학교 시절 친구들이 책가방 살 돈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다녔어요.
조 선생님, 솜씨 좋으시니 가방을 직접 만들어 보세요.
그게 명품이 될 것 같은데요.
저도 회사에 가방 메고 다닙니다. 별 거 안 들었는데, 습관돼서 없으면 허전하더라고요. 글 잘 읽었습니다.
속 좁고 냉정한 시누이 참 밉네요. 그냥 내게 맞는 가방이 명품이려니 지인들 의견 무시하며 산 지 오래 되었네요.
제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저는 손에 뭘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놔둔 지도 모르게 잊어버려서요.
급식 먹으러 갈 때도 엑스자 가방에 휴대폰을 담고 가지요.
읍에 살아선지 책보는 들지 않았네요.
언제부터인가 등에 메는가방이 편하더군요.
시누이는 딸이 엄마 것을 사니 부러워서 질투가 낫나봅니다.
보믈이도 반갑네요. 우리집 코코와 호두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제가 슬쩍 시누이 분이 미워지네요. 선생님은 글쓰는 여자시니까 명품은 그러려니 떨쳐버리세요.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