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lplessly watching myself who are lost in the labyrinth
within the tiny office."
세계인권도시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는 b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그이와의
일정 조율을 위해 이메일을 주고 받던 차, 오늘 아침 메일 한 통을 띄우고 나서야 ‘아차’싶다. ‘월요병’에 대한 회사원의 애로를 토로한답시고 쓴 한 문장에서 ‘myself who
is’라고 써야 할 부분을 ‘myself who are’라고 쓴 채 <send> 버튼을 누른지 한참 만에 실수의 흔적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중학생도 피해갈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큰 어른에게 하였구나, 속으로
혀를 차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토록
쉬운 부분에서 실수 하였다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나의
무의식에서는 myself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고 있다는 어두운 사실이 이 하찮은 실수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작은 사무실 안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나 자신(myself)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라는 의식에서의 표현이, 실은, “작은 사무실 안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나-들(myselves)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라는 무의식 내부의 사실을 감쪽같이 은폐하고 있음을, 말/글 실수라는 진실의 누수를 통해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들(myselves)이라는 진실. 이것은
나만의 현실도, 지금만의 현상도 아니다. 예수가 ‘군대’를 만나던 그 날이나, 지금이나, 나-들은 인간의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웅성거린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_마가복음 5:1-15
“네 이름이 무엇이냐 (What is your name?)”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My name is Legion for we are many.)”
내가
귀신에 들린 것은 (다행이 아직) 아니겠으나, 나는, ‘나’를 ‘나-들’이라고 (무의식 속에서) 명명하는 나를 발견한 순간, 내 속에서 ‘군대’라고
스스로를 호명하는 무리의 함성을 엿들은 듯, 잠시 아찔함을 느낀다. 이
당혹스러움은 라캉의 강의가 적혀있던 어떤 책에서 어설피 훔쳐 읽은 ‘이론’ 탓만은 아니다. 누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뒤통수를 급습하듯 아프게 물어온다면,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예나 지금이나 통 모르겠고, 이 난처함은 라캉이라는 공부 이전부터 어쩔 수 없이
품어왔던 불편함이었다. 분명한 건, 나는 ‘일신’이라는 하나의 개체로서만 구성되어 있는 독립가능, 단순명쾌한 일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한 몸과 한 정신으로 얌전히 구성된 ‘(멀쩡하고 건강한) 개인’인양 늘 사람들 사이에서 시늉한다.
내 안의 나-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천 년 묵은 존재들이 내 안에서 짐짓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거나, 행동의 반경을 슬그머니 넓히려 들라치면, 나는 그 나-들의 꿈틀거림을, 강력한 기미를 엄하게 단속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리할 수 있을까. ‘군대’와 같이 그럴싸한 이름도 얻어보지 못한 내 안의 숱한 타인들의 존재에 대해서 나는 언제까지 함구할 수 있을까. 그들의 웅성거림과 들썩거림을 나는 언제까지 ‘ego’라는 부서지기
쉬운 껍데기 속에 가둬 둘 수 있을까. ‘나’라는 개인의
거죽이 점차 얇아지고, 투명해지고, 취약해지는 ‘공부’라는 풍화작용 속에서, 이제
나의 나 됨은 심히 위태롭다.
흔히
생각하듯, 예수는 귀신을 ‘쫓는’ 퇴마사가 아니(었)다. 그는 나-들을 향해 ‘나
밖으로 나갈 수 있음’의 가능성을 알려 주는 이(었)다. 서로 다른 시간의 무게와 서로 다른 장소의 부피가 작고 연약한
한 육체 안에 뒤엉켜 있을 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문제들을 바라보며, 그 애증의 ‘엉킴'을 가련히 여기며, 나-들이라는 한많은 ‘겹’의 살림을 한 몸에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인간에게도 ‘살 길’이 있음을 일러준 이가 바로 예수였다. 중층의 존재에게도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 있음을 그는 선포하였다.
예수의
흔적을 더듬어, 내 안에 있는 ‘그들’에게, 내 안의 나-들에게도
‘출구 있음’이라는 복음을 감히 은밀하게 속삭여본다. 내 안에 갇혀 있는 나-아닌-나와
더불어 사는 일의 애로를 생산적인 방식으로 훌쩍 넘어설 수만 있다면, 바깥의 공동체와의 그럴싸한 형식으로서의 연대가
아닌, 내 내부의 공동체와의 전심전력을 통한 내용으로서의 협력을 실현시킬 수만 있다면, 나라는
삶은 시간과 공간으로 잘게 조각난 알량한 의식과 어설픈 경험치보다 훨씬 더 찬란히, 더 깊이, 더 향기로이 피어나겠다.
외부의
타자가 아니라, 내부의 타자를 잘 달래야, 그래야만 ‘내’가 산다. 외부의 타자를
향해 ‘출구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월권이다. 나는 네가 아니거늘, 무슨 능력과 권리로 내가 너의 ‘평안함’과 ‘자재함’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부의 타자를 향해 ‘출구 있음’을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 자신 뿐이다. 군대귀신을 향해 ‘출구
있음’을 알려주었던 예수 역시, 결국 ‘보혜사’라는 내부의 돕는 존재를 깨닫도록 돕기 위해 세상에 잠시 들른
선생이었을 뿐이며, 삼세제불도 나의 (이미) 부처됨을 일러주기 위해 등장한 강력한 ‘조교’들일 뿐이었다. 결국, 나와
내 내부의 타자들, 나-들을 솜씨 좋게 건질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어, 내
내부의 ‘나-들(myselves)’에게 '나' 너머로의 길 있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나는 나-들의 구원을 통해 나의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타인의
구원은, 나에 의한 나-들 그로 인한 나의 구원 이후에야 펼쳐질 수 있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들의 이름을 무엇일까. 나-들을
품고 사는 나의 이름은 또 무엇이 되어야 할까. 스스로의 ‘여럿됨’을 ‘군대’라는 이름을
통해 인정하고 인정받는 순간, 그들 모두에게 돌아갈 자리(돼지)가 생겼듯, 나도 언젠가는 나의 여럿 됨을 향해 적절한 이름을 불러주고, 나-들 제 각각의 발현과 귀향을 축원해야 할 터. 내 한 몸의 뉘일 곳도, 머물 곳도, 매양 알 수 없어 헤매고 떠도는 나에게 과연 그러한 큰 힘과 뜨거운 지혜가 남아 있을까.
아이를
달래듯, 귀신을 달래듯, 성난 파도와 번져버린 불꽃을 달래듯, 나는 나-들을 달랜다. 내
안에 자리한 나-들이라는 미로 안에서 길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길을
아는 건 나-들을 품고 있는 나뿐이라고. ‘나-들’로부터 ‘나’로 돌아가는 길. 그 위에서 나는 모든 나-들을 모른 체 하지 않겠노라 서원한다. 나-들이 빚어놓은 무늬 속에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예수가, 부처가, 오직 이 서원을 풀어놓는 나를 위해 세상에 오고 감을 겸허히
받들겠노라고, 맹세한다.
만
갈래 길이 갈라져 나온 저 앞 한 점. 텅 빈 집을 비추는 흔들리는 초꽂이 불마냥 갸냘픈 무언가가
어른거리며 손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