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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동 오층석탑(可興洞 五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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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기단부를 시멘트로 대체하였으며 상륜부는 없고, 탑신과 옥개석 만으로 구성된 5층석탑이다. 옥신석은 1, 2, 4층과 3, 5층이 각각 다른 탑의 부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옥신과 옥개를 한 돌에 새겼다. 3, 5층의 옥신석은 각면에 귀꽃이 든 안상을 새기고 있어 다른 층의 옥신석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규모가 작은 탑이면서도 세부 표현은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 기법이나 규모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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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산리 석탑(葛山里 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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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면 갈산1리 돌바람마을 서편으로 의산서당이 있고 서원안의 탑재들을 모아 다시 세운 석탑이 있다. 최하단의 탑신석에는 탱주와 우주가 모각되고 각 면 마다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 위로 사각의 연화대석이 2단으로 올려져 있고 다시 옥개석 2점이 얹혔는데 아래쪽 옥개석은, 뒤집혀져 있다. 위쪽 옥개석은 3단의 옥개받침이 잘 남았고 반전도 적당한 편이다. 탑신석에는 면마다 2구씩 모두 8구의 부조상을 새겼으나 3구는 파손되었다. 모두 좌상으로 무릎 측면까지 올라 온 연화대좌에 앉았다. 전면으로 보이는 부조상은 상체 나형으로 둥근 광배를 갖추고 합장인을 하였다. 탑의 규모나 사각의 연화대석, 단순화된 부조상으로 보아 신라말, 고려초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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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리 석탑재(金光里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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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리 석불을 모셔놓은 미륵당 서편에 있는 석탑으로 붕괴된 탑재를 옥개석과 상륜부의 일부만으로 조립하여 탑을 이루고 있다. 밑에서 동일한 형식의 옥개석 4기를 포개고, 그 위에 2기의 옥신석을 올렸고 위로는 복발이 있다. 옥개석은 마모가 심한 편이나 층급 부분은 잘 남았는데 4기는 모두 4단 받침이다. 옥신석은 우주가 약하게 모각되었다. 복발에는 찰주공이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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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浮石寺/무량수전: 국보 제18호/조사당 : 국보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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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 (676)에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조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현종 7년(1016)에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수하고무왕 3년 (1377) 원융국사가 조사당을 재건하였다. 조선 성종 21년 (1573)에 조사당 경록을 행하고 광해군 4년 (16120에는 무량수전 , 삼성각, 조사당, 취현암, 범종류, 안양문 등을 비롯하여 9동의 건물이 있다. 석등, 소조여래좌상, 3층석탑, 당간지주 등의 보물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이 있고 또 신라시대부터 쌓은 것이라 믿어지는 대석단이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석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배치하였다. 기둥은 배불림이 많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지붕 네 모서리에 활주를 받혔다. 공포는 헛첨차 없는 주심포양식으로 내외 2풀목이며 가구는 전후퇴 9량집의 팔작지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삼성각은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에 다포계의 건물이다. 조선중기의 건물로 추측되며, 건물내에 독선, 산신, 칠성의 정화를 보존하고 있고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산에 있는 건물로 이절을 지은 의상조사의 영정을 안치하고 있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 (1201)에 단청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에 건립되었다. 그후 고려 공민왕때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우왕 3년 (1377)에 원응국사가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있는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헛첨차가 있는 주심포계의 건물이다. 지붕은 전면이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최현암은 정면4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이다. 현재는 범종류와 안양문 사이에 있으나 본래의 자리는 조사당 동쪽에 있었다. 이 취현암은 예로부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하며, 사명스님이 수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16년 왜인들에 의하여 헐려 버리고 그 목재의 일부로써 지금 자리에 옮겨 세웠다. 범종루는 취현암 바로 아래 축대에 걸친 누각으로 지은 것이다. 앞쪽에서 보면 팔작지붕이고 추현암쪽에선 맞배지붕이다. 정면 3칸, 측면 5칸이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바로 앞에 있는 경쾌하고 단아한 모습의 중층 누각이다. 내부에는 기문들이 결려 있고, 사명대사의 안양루 중수기가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굴도리 5량가이며, 공포는 1출목 2익공계이다. 지붕은 무량수전 쪽으로는 팔작지붕이고 전방으로는 맞배지붕이다. 자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내부는 통칸이다. 기단은 견치석위에 장대석을 한벌 돌려 자연석 초석을 올려 두리기둥을 세웠다. 창호는 전면 어칸에 쌍여닫이 굽널 세살문, 양협칸에 살창을 두었다. 공포는 전면은 1출목 2익공이고 후면은 몰익공계로 꾸몄다. 상부가구는 5향가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조사당에서 서편으로 올라 부석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건물로 석조여래좌상 3구가 안치되어 있다. 선묘각은 무량수전 동쪽 뒷편에 있는 맞배지붕 단칸집으로 조선말기에 세운 듯하다. 선묘각 내에는 당나라 처녀로 신라에 살았던 선묘 처녀의 화상을 안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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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원융국사비(浮石寺 圓融國師碑/유형문화재 제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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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 8년(105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예부시랑 고총이 찬하고 유림랑 임호가 전과 서를 했다. 이수와 귀부를 갖추었지만 파손이 심한 편이고 비신도 파손, 마멸이 심해 판독이 안되는 부분이 많다. 글자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해동김석원’등의 문헌에 그 내용이 전한다. 좌우가 긴 팔작지붕형이며 처마 끝선으로는 전각이 있고 용마루까지 표현되어 있다. 귀부는 뒷면은 조각이 남았으나 앞쪽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육각형의 귀갑문은 안에 王자를 넣어 정교한 표면처리를 하였다. 원융국사비각에는 해동화엄종조의 상국사비가 함께 봉안한 것이고 비갓과 비좌는 원융국사비가 발견된 곳에 함께 있었다 한다. 비갓은 무진각형으로 정상중앙에 연하문을 돌린 보주가 있고 처마끝에는 귀꽃 장식이 잘 남아 있다. 비좌는 둥근 중판연화문대를 돌린 원형좌로 연화문은 반원이 연속된 간단한 형식이다. 높이는 186㎝, 폭은 96㎝이다. 원융국사는 (964~1053) 고려초의 명승으로 자는 혜일, 속성은 김씨이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승려가 되어 복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고려 성종 10년(991)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이 되었다. 묘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부석사에서 법사가 되었다. 문종 7년 (1053)에 부석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원융국사라하고 절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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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당간지주(浮石寺 幢竿支柱/보물 제2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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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의 조성년대는 부석사가 창건 (676년)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부석사 경내로 올라가는 최하층계의 좌측 노변에 위치해 있는데 양 지주가 1m 간격으로 동서로 마주 서 있다. 이 지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주의 하나로, 기초가 무너져 밑부분이 드러나 있었는데 보수했다. 전면은 별다른 조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로 모를 약간 죽였다. 전후 양 측면으로는 20㎝ 폭으로 두 줄의 음각선대를 테두리에서 5.4㎝ 간역을 두고 넣었다. 지주 정상부의 바깥쪽 모서리는 호선을 2단으로 깎아내었고 안쪽에는 간구를 내었는데 장방형이다. 양지주 사이에는 간주를 받은 대석이 남아있는데 사각형의 하대 위에 원형으로 테를 만들고 안으로 지름 30㎝의 원공을 두어 당간이 끼워지도록 하였다. 원형의 테 밖으로는 몰딩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간결 단아해 보이게 비교적 가늘고 긴 편이면서도 아래와 위의 두께에 다소 차이가 있어 안정감을 지녔다. 조성년대는 부석사가 창건(신라 문무왕 16년 676)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높이는 428㎝, 너비는 55.56㎝, 지주 간견은 100㎝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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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삼층석탑(浮石寺 三層石塔/보물 제2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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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석과 하층기단의 하대를 한데 붙여 옹석으로 짜고 중대석 각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어 3구로 구분하였으며, 갑석은 6매석이다. 삼층기단은 4매석으로 갑석을 짜고 각면에 우부 1주를 모각하였다. 탑신과 옥개는 각층마다 1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옥신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받침은 각층 모두 5단씩으로 되어 있고, 처마 아래는 직선이나 전각에 반전이 있으며, 그 좌우에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있다. 옥개석 위로는 고임을 두어 옥신석을 받쳤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있다. 노반은 1단의 갑석이 있고 복발은 편구형으로 횡대가 있고 그 위의 사방에 꽃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1960년 해체 수리시 3층 탑신 중앙에 합리공이 확인되었으나 합리장식은 없었고, 기단부에서 칠제탑, 불상조각,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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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녹유전(浮石寺 綠釉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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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바닥에 깔렸던 것이라 하는데, 벽돌에 유약을 발라 녹색의 광택이 나게 한 것이다 전은 작은 편이지만 유약은 3mm 정도로 상당히 두터운 편이다.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어 아미타극락정토의 유리보전을 표현하기 위해 녹색의 전을 갈았던 것으로 보고 이 벽돌도 무량수전의 초창(初創)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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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무량수전 앞 석등(浮石寺無量壽殿앞 石燈/국보 제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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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부석사 창건시 조각한 것이라고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무량수전 앞뜰 복판에 자리해 있는 석등은 이 절 창건 당시 (신라문무왕 16년, 서기 676년)에 조성된 것이다. 사각의 이중 기대석 위에 8각을 기본으로 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이다. 지대석은 4매석으로 상면에 3단의 기단 받침을 각출하였다. 방형의 기단석은 각 측면에 2구씩의 안상을 배치하였고 상면에는 팔각으로 3단의 하대받침을 각출하였다. 화대석은 평면 팔각의 귀꽃을 갖춘 팔엽복판연화문대이다. 간주석은 팔각주이다. 상대석은 팔엽의 단판앙련인데 앞 안에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사면에 화창을 내었고 창주변으로 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있다. 다른 사면에는 각 1구씩의 공양보살상이 배치되었다. 옥개석은 전각이 뚜렷하고 후대 석등들에 비해서는 옥개석의 두께가 얇고 날렵한 편이다. 옥개석의 밑면은 이단의 낮은 받침을 새겼고 절수구가 남아 있다. 상면 합각의 우등도 뚜렷하다. 정상부에는 팔엽의 단판연화문을 들렸고 그 위에 2단으로 상륜받침을 두었다. 보주의 봉은 없어졌고 보주대만 남았다. 법주사, 해인사, 합천 백암리의 석등과 함께 대표적인 사천왕계 석등으로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예이다. 화사석 사면에 부조된 보살상이나 연화문, 받침각출 방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 앞으로 배례석이 놓였다. 상면 중앙의 연화문은 이중원의 자방을 두고 주변에 8편의 잎을 돌렸는데 사이에는 간엽이 새겨졌다. 통일신라 이후의 일반형에 속하는 배례석이다. 석재의 재질이나 형식등이 석등과 동일한 시기로 추정된다. 석등 높이는 297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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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리 동부도(北支里 東浮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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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조선에 걸쳐 부석사와 관련된 선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원륭국사비각에서 동쪽으로 약 100m 언덕에 부도군이 있다. 모두 9기가 남아있는데 외형이 잘 남은 9기 외에도 지대와 개석이 일부 남아있어 더 많은 부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기는 팔각원당형이고 그외에는 모두 석종형의 부도이다. 원당형부도는 옥개석의 폭이 좁고 처마도 짧은 편이어서 외형은 간략한 평이나 기단부의 중대석 8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 조각을 하고 있다. 탑신에는 인물상이 조각되었고 남면으로는 문비가 새겼다. 그외 2구의 부도는 별석의 옥개석을 올렸고 나머지 부도는 탑신과 한돌로 만든 보주형 상륜을 올린 석종형 부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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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리 서부도(北支里 西浮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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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의 요사를 지나 산정으로 300m가량 거슬러 올라가면 길 왼편 밭둑에 2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이들 부도의 배경은 알 수 없으나 희방사의 중건과 관련한 고승의 것으로 생각되며, 종형 부도가 크게 유행하던 조선의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을 향해 왼편의 서부도는 사각의 옥신석을 얹은 종형 부도이다. 1대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지대석과 대석을 만들고 대석에는 간단한 복련문을 선각하였다. 탑신의 높이는85㎝로서 중앙부에 폭 4㎝가량의 돌대선을 돌리고 있다. 상부는 팔각이고 하부는 아래가 좁아진 종형이다. 옥개석은 사각으로 십자지붕을 모방하였는데 전체가 두텁고 과장된 편이다. 옥개석 위에는 연화보주가 올려졌는데 하단에 연주문을 돌리고 옥개석과 한돌로 새겼다. 서부도와 마찬가지로 동편의 부도도 자연석 위에 3단의 복련문이 조잡하게 조각된 직경 84㎝의 대석이 있고 그 위에 종협의 탑신석이 올려져 있으며 위에 우진각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얹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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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毘盧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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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는 소백산 일경에서 가장 유서 깊은 큰 절임이 그 산문에 솟은 당간지주며, 고려태조의 명으로 세워진 진공대사의 부도-탑비, 경내에 널려 있는 옛주춧돌이며, 우람한 규모의 축대, 온갖 조식으로 아로새겨진 많은 돌부치 등으로 짐작할 만 하다. 신라 문무왕 20년 (680) 의상조사가 영전사에 거주하면서 문도라는 제자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신라말 진공대사가 중건한 후 큰 사찰로 전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원사역은 주변의 당간지주나 석재물의 분포로 보아 상당히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찰 경내에는 보물 제996호인 석조아미타불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조상이 적광전에 함께 모셔져 있고 유형문화재 제4호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 제7호인 영주삼가동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그외에도 진공대사보법탑과 목각탱화가 있었으나 60년대에 없어졌다. 지정문화재외에도 사역 주변에 석등재나 초석, 광배편, 석탑재 등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많은 석재물과 편들이 남아 있다. 특히 광배편은 적광전의 보물 제 996호인 두 불상과 관련하여 복원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사찰, 건물로는 정면 3칸의 적광전과 요사채가 있고 석조불상을 봉안하기 위한 새 건물을 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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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석조광배편(毘盧寺 石造光背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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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 앞에 광배편, 석등 부재, 옥개석,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재편들을 모아 두었다. 광배편으로는 비교적 큰 조각이 4점 정도 남아있어 세부 표현방식은 확인이 된다. 강당 안에 보관하고 있는 광배편은 두광의 중심부에 원형의 연화문을 배치하고, 2조선의 두광 기획에 걸쳐 4구의 큰 화불이 배치되었다. 화불은 둥근 원 안에 복련 연화대좌에 앉다 각기 다른 수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변은 화염문으로 채우고 있다. 뒷면 하단은 앙련 위에 여의보주가 새겨져 있다. 하단은 접착 흔적이 남아있어 한때 복원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탑비 앞 석등재와 함께 있는 광배편 3점도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데 광배편 뒷면은 하단에 수평으로 연화대문을 수평으로 연화대문을 돌리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각 편들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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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석탑재(毘盧寺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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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적광전 앞에는 석탑재 외 석등재, 대좌부재로 보이는 석재들은 1기의 3층석탑 형태로 조립하여 두었다. 지대는 2매의 사각석재로 정방형에 가깝게 놓고 그 위로 8각의 석재를 2개 겹쳐 얹었는데 불상의 대좌석으로 보인다. 각 면마다 안상이 1개씩 조각되어 있다. 그 위는 원통형의 석재물인데 구름, 사자 등의 조식이 전면을 채우고 있어 역시 불상의 대좌중대석으로 추정된다. 그 위에 석탑부재가 옥개석, 옥신석, 옥개석 순으로 올라가도 다시 사각, 8각의 석재가 올려졌다. 탑의 최상부에는 8각의 용도미상의 석재가 얹혔는데 석등개석의 처마부분이 파손된 것인 듯 하다. 안상조각이나 특히 원통형석재의 주변에 돌아가며 새겨진 운문과 사자로 보이는 동물상의 조각은 우수한 편이어서 통일신라시대 유행했던 불상대좌의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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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 眞空大師普法塔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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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17년(855)에 출생하여 신라말 고승(高僧)으로 만년 비로사에 주석하다가 태조 20년(937) 여기 비로사에서 입적한 진공대상의 묘탑인 진공대사 보법탑은 고려 태조의 명으로 고려태조 22년(939)에 세워졌으며, 본래 비로사 동편 산등성이 너머 골짜기 구석에 있었는데 비로사 경내로 옮겨왔다가 1960년대에 없어졌다고 한다. 진공대사보법탑이 세워질 때 고려 태조의 명으로 함께 세워진 진공대사비는 붕괴되어 전해오던 것을 1972년에 지금의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고려태조의 명으로 세운 진공대사비는 오늘에 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첫 금석문(金石文)으로 최고운(최차원)과 신라말 - 고려초의 대표적 문장가 최언위가 왕명으로 글을 짓고 당대의 대표적인 명필 이황추가 왕명을 받들어 썼으며, 최환규가 새겼다. 후면에는 진공대사가 입적에 임하여 승들에게 남긴 간곡한 유계(遺誡)가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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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팔각대석(毘盧寺 八角臺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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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오른쪽에 하대와 중대가, 법당 앞 뜰에는 불상대좌로 보이는 부재와 석등부재 같은 것을 얹어 탑 모양으로 만들었다. 팔각대석은 법당 오른쪽 대좌부도 밑에 4각형의 지대석이 두장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팔각형의 하대변석이 있는데, 그 각면마다 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팔각형 중대석이 있는데 각면마다 구름무늬 안에 한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다만, 뒷면 한면에만은 구름무늬만이다. 이런 중대석의 형식은 부석사 등 다른 여러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지름 120cm, 높이 24.5cm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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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동 석조당간지주(三街洞 石造幢竿支柱/유형문화재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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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나 장식기법등으로 보아 비로사의 초기 창건 (신라 문무왕 20년 860)과 관련한 것으로 본다. 비로사로 올라가는 언덕 왼편 높은 지대에 세워져 있다. 주변 경작지에서 많은 와편과 자기편들이 확인되고 있어 옛 비로사의 사역을 확정지을 수 있는 자료이다. 영주 삼가동 석조당간지는 약 0.80m 사이를 두고 마주 서 있다. 양 지주는 내면으로는 넓은 테를 두른 듯이 단을 지었고 중앙부위로도 절상형의 홈을 내어 조식하고 있다. 주좌는 없어졌고 간주의 간구와 간공은 잘 남았는데 간공은 하단에서 130㎝ 높이에 14×11㎝의 직사각형으로 하나씩 설치되었다. 측면은 윗부분이 약간 줄어들어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모습이다. 규모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석당간이고 장식은 적은 편이나 형태로도 매우 정제되고 우미하다. 규모난 장식기법 등으로 보아 비로사의 초기 창건과 관련한 것이다. 총 높이는 444㎝, 폭은 46㎝, 너비는 63㎝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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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리지 석탑재(三街里址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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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신석과 옥개석, 면석이 넓게 흩어져 있는데 옥신석과 옥개석은 평탄부의 서편으로 몰려있고 기단석이나 갑석으로 보이는 석재는 한단 아래에 있다. 부재의 내용은 옥개석 4점, 옥신석 2점, 면석 3점, 갑석 2장이다. 옥개석은 모두 약한 반전이 있고, 층급은 4단으로 동일하다. 큰 옥개석 86cm, 작은 것은 65cm 인데 1/3 가량 파손되었다. 옥개석 2점의 상면으로는 지름 5cm, 깊이 4cm 가량의 구멍이 나있어 찰주공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쌍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 옥신석은 한변 49cm, 높이 43cm로 모서리에는 폭 9cm의 우주를 약하게 모각하고 있다. 축대 옆에 있는 석조물은 기단부의 갑석으로 보이는데 석재들을 결부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폭 14.5cm의 홈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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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륜사(石崙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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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륜사는 옛날 소백산 국망봉 아래에 있던 신라의 고찰로서 승려의 공부자리로 또는 신라, 고구려 사이 국경 경비군 전방초소로 사용되어 온 소백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었는데 1949년 공비소탕을 위해 외진 곳에 있는 민가나 사찰등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 말기 풍기 길영환이 옛 터에 중건, 8. 15광복후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 옛 절터에는 석탑, 기와, 연화좌대석 1단과 서북인에 두평 가량의 석실 1칸이 있으며, 동쪽으로 소백산 석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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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륜암지 석탑(石崙庵址 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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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망봉 아래 석륜암지가 있고 암지로 올라가는 길의 왼편으로 암반 위에 석탑재를 모아 다시 세운 석탑이 있다. 석탑은 기단 갑석과 옥개석은 확인되지만 탑신석에 해당되는 석재는 원래의 용도가 모호하고 옥개석 위에 놓인 단면 팔각의 석재도 원래의 용도를 알 수 없고 석등의 간주석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잔 갑석을 지대석으로 하였는데 높게 탑신 받침을 내었다. 옥개석은 2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윗면은 반전시켰던 것으로 보이나 끝선은 직선으로 잘렸고 모서리는 마모가 심하다, 옥개석의 형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으나 석탑과 관련된 것인지 확인이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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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륜암지 연화대석(石崙庵址 蓮花臺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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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륜암지로 알려진 국망봉 아래 평지에는 북편으로 높은 암반이 있고 암반에 붙여 주변에 있는 석재들을 모아 놓았다. 석재와 함께 1/3정도 파손된 연화대석 1점이 놓여있는데 석불의 상대석으로 추정된다. 연화문은 석재에 가려 확인이 안되고 2단의 층급만 보이는데 연화문과 함께 굴곡을 넣었음을 볼 수 있다. 석륜암이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암자라 전해지는데 연화대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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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사(聖穴寺/나한전보물제8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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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국망봉 아래 월명봉 동남쪽 기슭에 있다. 옛날 성인이 나온 굴이 있다하여 성혈사라 불렸다고 하나 정확한 창건유래는 알 수 없다. 영주고을의 이름있는 옛선비들 다운데 이 절에서 수학했다는 이가 많으며 통일신라시대 조성으로 보이는 성혈사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고 보물 제832호 성혈사 나한전이 있다. 1984년 나한전의 ㄱ지붕 수리공사 중에 가정 31년(1552)의 명문에 발견되었다.
성혈사 나한전 - 현재 중창불사로 대웅전인 성혈암은 철거되고 나한전, 산신각,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나한전은 북서쪽에 남향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지붕에 다포계 건물이다. 기단은 자연석 쌓기에 상면 한단을 화강석으로 마감하고 그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상에는 창,평방을 걸고 주두를 놓아 공포를 배치하였다. 공간포는 매칸 마다 1구식의 공간포를 두었는데 내외 2출목 5포작이다. 주두와 소로는 사절된 평굽형태이고, 첨차형태는 마구리를 사절하고 하단을 원호를 그린 교두형에 공안은 없다. 제공형상은 외단 1,2제공이 날렵한 양서형이고, 내부 1,2제공은 교두형이다. 전면 3,4 제공은 외단은 연꽃과 봉화를 장식하였고 후면 3제공외단은 수서형이며 4제공은 생략되었다. 내부 4제공은 모두 연봉으로 장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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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룡리 석탑(小龍里 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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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기단 위에 삼층석탑으로 조성한 듯 하나 기단부가 흩어졌고 탑신부도 초층만이 남아있다. 옥신석은 단층만이 남아있고 옥개석은 2개만이 남아 있는데 1개석은 탑 측면에 이탈되어 있다. 초층 옥신석은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그 하단에는 상대갑석이 놓여져 있으며, 그 상부에 별석으로 조성된 옥신 고임이 일부 탈락된 채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2개의 옥개석은 4단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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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지 광배편(宿水寺址 光背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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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지 연화대좌와 함께 충효교육관 앞 정원에 보관된 광배편이다. 주형 광배의 상단 일부로 보이는데 중앙부의 원형의 연화문이 있고 그 상단 양편으로 4.3㎝ 정도의 구멍이 나 있어 불신과 연결되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불(化佛) 1구가 높게 돋을새김 되었는데 보주형 (寶珠形)의 두광이 크고 양손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광배의 가장자리로는 화영문을 조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숙수사지 내에 있는 다른 석조대좌 부재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화불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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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 幢竿支柱/보물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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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숙수사터에 있는 당간지주로서 통일신라 중기이전의 것으로 연도로 오래되었으며 그 모양이 경쾌하고 우미한 작품이다. 옛 숙수사터에 있는 당간지주로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숙수사지 당간지주는 소수서원 입구에 위치하는데 양지주가 59㎝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상대해 있고 상부로 가면서 3㎝가량 더 넓어진다. 지주의 내측면으로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바깥 면은 중앙에 능선형으로 길게 종대를 새기고 있다. 꼭대기에서 117㎝ 밑에서 234㎝까지 사이는 전면적으로 음각되었다. 전후 양측면에는 양지주 모두 폭 7㎝의 외연선문이 돌려지고 그 중앙에도 선으로 능선이 조식되어 있다. 정상부의 안쪽면으로 장방형의 간구가 있고, 하단은 다듬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지대석의 1면에 원고의 받침이 새겨진 장대석이 양쪽으로 1매씩 놓여있다. 높이는 384㎝, 지주의 두께는 65㎝, 폭은 37㎝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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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지 연화대좌(宿水寺址 蓮花臺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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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내 지락제 앞에 있던 2점의 연화좌대를 충효교육관 앞 정원으로 옮겨 관하고 있다. 하대석으로 보이는 연화좌대는 복련 8엽의 연화문은 돌렸으며 상부는 3단으로 층급을 내었고 연잎 끝이 비교적 날카롭게 처리되어 평면은 8각을 이룬다. 도 다른 연화좌대는 상대석으로 추정되며, 중편의 앙련을 16엽씩 돌문을 넣어 화려하다. 평면은 원형에 가깝고 아래쪽으로는 2단의 층급이 있어 8각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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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靈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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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읍 동부동에 있는 풍기 포교당이다, 영전사는 본래 풍기 욱금동에 있던 사찰로 신라 문무왕 9년(669년) 의상대사가 부석사, 비로사를 창건하기 전에 영전사 초당을 지어 소백산 일대의 대가람으로 자리하였다가 조선때 폐사되었다. 그후 1923년 옛 사지에서 석불입상이 발견되면서 해운선사가 중창하였다. 1949년 소백산 전투사령부의 소거령으로 욱금동의 영전사를 폐하고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욱금동 영전사지에 있던 많은 석조 유물들을 옮겨 와 경내 곳곳에 보존하고 있는데 약사전에 봉안된 석불입상과 연화대석, 정원에 있는 팔가대석, 석탑부재, 초석재 등이 남아있다 경내에는 2층의 관음전과 어린이집, 임시로 지은 약사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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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 석탑( 靈田寺 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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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석은 불상의 8각 대좌로 보이는데 윗면과 확인되고 있다. 위로는 우주가 모각된 석탑재를 두고 옥개석 3개가 크기 순으로 올려졌다. 아래쪽 옥개석은 4단 층급이며, 위쪽 2개는 3단으로 약화되었다. 모서리가 파손되었지만 3층 옥개석은 비교적 잘 남아서 처마 끝으로 반전(反轉)이 보인다. 옥개석 위로는 8각의 석등개석으로 생각되는데 역시 모서리가 파손되어 외형 확인이 안되는데, 아랫면에는 8각으로 얕은 단을 모각하고 있다. 옥개석 위로는 돌이 얹혀져 있는데 확인이 안된다. 약사전 맞은편 정원에 석탑의 하대석재로 보이는 장대석이 1점 남았는데 2개의 단이 보이고 면에는 3개의 안상이 조식되었는데 8각 대좌석의 안상에 비해서는 좀 더 간단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약간의 시대차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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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 팔각대석(靈田寺 八角臺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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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 욱금동 전 영전사지에서 금계중학교로 옮겼다가 다시 영전사 풍기포교당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석물의 3단 8각대좌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데 8각의 각면에 폭 25cm, 높이 7cm 크기의 안상을 새기고 안상 안으로 향로와 불상을 조식하였다. 향로는 중앙에 큰 향로를 두고 양쪽에 작은 향로를 붙여 새겼다. 안상 안에 새겨진 불상은 모두 좌상으로 대좌는 연화대좌인 듯 하나 뚜렷하지 않고 둥근 두광에 각기 다른 수인을 하였다. 불상 뒤로 길게 천의 자락이 날리면서 돌아 나가고 있는데 이 자락도 각면이 다르게 조식되었다. 마모가 있지만 세부표현이 상당히 정교하여 영전사 의 다른 석조유물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지름 92cm, 높이 20cm, 1면폭 34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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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 연화대석 (靈田寺 蓮花臺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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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 약사전 안에 불상 앞에 3개의 연화대석을 보관하고 있다. 불상을 향해서 왼편에 놓인 연화대석 ①은 평면 8각에 복련을 둘리고 위로는 낮은 단, 높은 몰딩, 낮은 단으로 3단의 층급을 내고있다. 연화문은 복복련으로 간잎도 양감있게 새겼는데 연잎의 끝 중앙에는 귀꽃을 새겼지만 파손이 심하다. 불상 정면에 놓여있는 연화대석 ②는 평면이 원형으로 넓은 연잎이 크게 퍼져 있는데 잎 끝은 복련으로 중앙에 굴곡을 넣었지만 잎 안쪽에는 큰 화문을 넣었다. 불상을 향해서 우측에 있는 연화대석 ③은 양감이 약한 편이고 평면 8각이 뚜렷하다. 간잎을 넣었지만 조각은 다소 약한 편이다. 윗면으로는 층급이 있으나 역시 약하게 표시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조성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연화대석①의 지름 83cm, 높이 21cm이고, 연화대석②의 지름 85cm, 높이 18cm이고, 연화대석③의 지름 92cm, 높이 64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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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동 석탑(榮州洞 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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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구성공원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영주포교당에는 대웅전 앞으로 1기의 석탑과 함께 석등재들이 모여있다. 지금의 자리가 원 위치는 아니고, 1911년경 문수면 일대에서 옮겨온 것이라 전해질 뿐 옮겨진 연유나 출토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석탑은 현재 5층이나 3기 이상의 석탑이 조립된 것으로 보인다. 각층의 비례가 전혀 달라 몇기의 탑재자 모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현재의 최하층은 감실 주변은 문비를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2층은 우주가 모각된 일반형의 옥신석이고 3층은 우주가 모각되고 각면에는 고부조의 독특한 조상을 새겼다. 각 면마다 쌍을 이루도록 2구씩 배치되었는데 신장과 보살상으로 보기도 하나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다. 최하층 옥개석의 층균받침부까지 매몰되어 낮아진 상태이다. 형식화된 부조상이나 석탑부재들의 규모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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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동 석탑재(榮州洞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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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포교당 대웅전 주변으로 석탑외에도 석탑재로 보이는 석조물이 남아있다. 탑 앞에 놓인 석조물은 우주와 부조상이 확인되어 석탑의 기단면석으로 판단된다. 전면 좌측에 폭 13㎝의 우주를 모각하였고 얕은 도를 새김으로 신장상을 새겼다. 함께 있는 5층탑의 3층 부조상과는 기법이나 내용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어 연관 짓기 어렵고,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므로 시기적으로 오히려 앞설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앞 화단 오른편에는 대석과 옥신석이 포개어져 있다. 아래쪽 대석은 방형에 가장자리로 약하게 경사를 내고 연화문을 돌렸다. 상부로는 낮은 3단의 층급이 있어 옥신 받침으로 추정된다. 옥신석은 폭과 높이가 거의 동일한 석재물로 상부에는 크게 둥근 홈으로 파여 있는데 합리공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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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호리 석탑재(月呼里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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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초등학교 교정에 놓여있는 탑부재로 추정되는 석조물이다.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인데 전면에는 구름좌 위에 서서 양손에 칼을 든 신장이 새겨졌다. 신장의 우측편으로 좁은 우주가 모각된 것으로 보아 이 신장은 팔부 중의 하나로 추정되고 탑의 기단 면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 손은 가슴까지 들어 칼을 지녔고 갑옷을 입은 듯한데 마모가 심해서 확인은 어렵다. 하체도 힘이 있어 보이지만 양편으로 천의 자락이 둥글게 돌아가 내부형태는 확인이 안 된다. 아래로는 구름으로 보이는 대좌를 새겼다. 수각수법이 적당하게 배치된 신체 비례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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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사(留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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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사는 소백산의 도솔봉 남편에 있다. 신라 효소왕 3년(694년) 창건되어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중창되었으며, 1928년 제봉스님이 중건하였다. 신라 의상조사가 이 절 앞에 있던 느티나무 아래반석에서 묵고 간 일이 있다고 하여 절을 짓고 유석사라 했다. 일제시대 말기 이래로 몹시 쇠잔하여 가람이 퇴락되고 신도의 발길이 끊어져 천년고찰이 쓰러질 지경이었는데, 1976년 임철수 주지(법명 정래)가 부임, 가람을 수리하고 황폐한 도량을 가다듬어 다시 중건하였다. 兪碩寺라고도 하는데 희방사를 희사한 경주의 호장 유석이 두운조사와의 인연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암자라는 설도 있다. 원 사지였는지 명확치 않으나 대웅전과 종각 사이에 있는 석탑재로 보아서는 현 사찰에 앞서 고려시대로 상정되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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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사 석탑재(留石寺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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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사의 대웅전과 종각 사이에 석탑의 부재를 모아 놓았다. 현재 남은 부재는 옥신석 1점, 갑석1점으로 옥개석은 층급받침이 3단으로 비교적 잘 남아있고 반전도 확인된다. 상부의 옥개석에는 중앙에 지름 3.3cm의 구멍이 있고 받침은 역시 3단이다. 옥신석은 한변 39cm의 정방향으로 7cm 간격으로 테두리에 음각선을 넣어 옥신석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갑석에는 2단으로 된 고임이 남아있다. 규모나 새김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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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석탑재(邑內里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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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도각 연못 사이의 의자에 둘러있는 석탑재는 아래로 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얹어 탁자처럼 쓰이고 이다. 넓은 방형이며 기단의 갑석으로 추정되는데 가장자리로 약하게 일정한 경사를 주고 있다. 노인정 곁 나무 아래에 놓여 있는 장방형의 판석재로 우주와 탱주를 모각한 것이 확인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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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연화좌대(邑內里 蓮花坐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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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면사무소 정원에 읍내리 석불입상과 함께 있는 연화좌대 2점이다. 모두 석불상의 하대석으로 보인다. 2점 모두 하단이 매몰되어 원형은 알 수 없으나 중심부는 복연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위로 팔각 3단으로 몰딩된 층급이 잘 남았다. 내부를 다듬지 않은 듯 거칠게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로 보이지만 새긴 조각선이 약하고 형태도 단순한 편이어서 하대로 내려가는 예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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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동리 연화대석(赤東里 蓮花臺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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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중부초등학교 교정 한편에 남아있는 2기의 연화대석이다. 탑거리에 있는 사지에서 옮겨 온 것인데 탑거리의 사지는 확인이 안된다. 연화대석①은 일반적인 연화대석 형태로 복련을 1단으로 돌렸는데 잎의 끝에는 귀꽃이 장식되고 있어 하대석으로 보인다. 안으로는 3단의 층급이 높은 편이다. 연화문은 양감이 다소 줄어 든 편인데 비해 귀꽃은 정교하다. 연화대석②는 외형은 일반형과 차이가 없지만 연화문의 내부로 장식이 잘 남았고 안쪽으로도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연화문은 단엽이고 잎 내부에도 장식을 넣었고 간엽 대신 작은 화문을 사이에 넣고 하단 연잎 사이에는 줄기로 구분하고 있다.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연화문과 받침 사이로는 특이한 문양을 넣었는데 소용돌이치는 파도모양이 대칭으로 배치된 반 파레트문으로 보이는데 명확하지 않다. 연화대석①은 지름 99cm, 높이 19cm이고 연화대석②는 지름 96cm, 높이 23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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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석탑재(井林寺址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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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부없이 바위 위에 세웠는데, 2, 3층의 옥신석과 상륜부는 후보한 것이다. 현 초층 옥신석은 폭 63cm, 높이 60cm 이며, 양쪽으로 폭 13cm의 우주를 모각하고 있다. 초층 옥개석은 모서리 파손이 심하나 2,3층의 옥개석은 비교적 양호하다. 모두 4단의 옥개 받침을 하였고 상단으로 옥개 받침을 2단으로 구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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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리사지 석탑재(池東里寺址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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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돌로 만든 초층 옥신석으로 보인다. 우주의 모각은 약하게 나 있지만 비교적 양호하고, 한면에는 높이 23cm, 폭 16cm, 깊이 16cm의 직사각형으로 감실을 내었다. 감실 주변으로는 양쪽에 3개씩 6개의 구멍이 있어 전면에는 문비를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외 탑재의 전혀 알 수 없고, 전하는 말로는 주변 다리공사에 일부 포함되었다고 한다. 규모나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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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월사(陳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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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 절 가운데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해 있는 진월사는 서북으로 안계가 열려 멀리 소백산 연봉을 마주하고 있다. 진월사는 신라 문무왕때 의상조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있다. 조선 선조때 무근사라 칭하다가 그후에 진월사라 부르게 되었다. 건물 구성은 안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전면에 중층 누각, 무량보전, 향로전이 튼 ㄷ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무량보전 후방좌측에는 삼성각이 있다. 무량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출목 주심포계 건물이다. 기단은 잡석에 시멘트 몰타르로 덧마감하고 그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양측 고주만 네모기둥이고 나머지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1출목만 둔 주심포 양식으로 제공 외단형상은 제1~2제공이 앙서에 하단부 초각형이고, 제3제공은 모두 파련초각형으로 처리하였고, 양두는 운공형이다. 첨차형상은 주심 소?대첨차는 마구리?하단 모두 직절형이고, 출목 소?대첨자는 초각형으로 후기적인 모습이다. 가구는 5량가이고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에 동기와를 이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굴도리 몰익공계집이다. 건물은 전면만 얕은 잡석 기단위에 통주의 두리기등을 세워 안마당에서 누각으로 오르도록 하였다. 벽체는 안마당 쪽으로만 개방시키고 그외 3면에는 각칸 판벽에 널문을 달았는데, 전면 3칸의 널문은 가운데 설주가 서있다. 주상은 교두형 첨자를 결구시킨 몰익형이고, 전?후면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운공형 화반을 1개씩 놓았다. 상부가구는 3량가이다. 향로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경집형 납도리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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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草庵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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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는 신라문무왕때 의상조사가 화엄교학의 홍통과 국가의 흥륭을 위하여 왕명을 받들어 호국사찰인 부석사를 창건(신라 문무왕 16년 676)한 후 이곳을 초막을 얽었던 자리란 뜻에서 초암이라 명명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소백산에서 두번째 큰 절로써 1935년 웅장한 석축과 신라탑 등을 보존하고 있었다. 현사역에 삼층석탑과 동.서부도가 창건 당시의 것이라 전한다. 지금의 초암사는 1935년 김상호스님이 삼십여칸의 가람으로 중건하고 풍기-영주일대의 많은 신도를 포섭하여 하마 사운이 회복되었는데 8.15광복 뒤 혼란기에 김상호스님이 이산면 흑석사로 옮겨 이절을 다시 일으키고 새로 진입로를 다듬기도 했다. 현주지는 이분이 (법명: 보원)이다. 초암 법당 앞으로 죽계구곡의 1곡이 흐르고 있다. 석탑과 2리의 부도는 모두 요사채 앞에 모여 있는데 부도의 원래 자리는 알 수 없다. 6.25동란 직전의 소지령에 따라 초암사도 한때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초암사에 있던 몇몇 유물들이 지금의 흑석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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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동부도(草庵寺 東浮屠/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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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는 신라문무왕때 의상조사가 화엄교학의 홍통과 국가의 흥륭을 위하여 왕명을 받들어 호국사찰인 부석사를 창건(신라 문무왕 16년 676)한 후 이곳을 초막을 얽었던 자리란 뜻에서 초암이라 명명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소백산에서 두번째 큰 절로써 1935년 웅장한 석축과 신라탑 등을 보존하고 있었다. 현사역에 삼층석탑과 동.서부도가 창건 당시의 것이라 전한다. 지금의 초암사는 1935년 김상호스님이 삼십여칸의 가람으로 중건하고 풍기-영주일대의 많은 신도를 포섭하여 하마 사운이 회복되었는데 8.15광복 뒤 혼란기에 김상호스님이 이산면 흑석사로 옮겨 이절을 다시 일으키고 새로 진입로를 다듬기도 했다. 현주지는 이분이 (법명: 보원)이다. 초암 법당 앞으로 죽계구곡의 1곡이 흐르고 있다. 석탑과 2리의 부도는 모두 요사채 앞에 모여 있는데 부도의 원래 자리는 알 수 없다. 6.25동란 직전의 소지령에 따라 초암사도 한때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초암사에 있던 몇몇 유물들이 지금의 흑석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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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삼층석탑(草庵寺 三層石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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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삼층석탑은 방형의 지대석에 이중기단을 하고 위에 삼층으로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에 속하는 석탑이다. 이중으로 된 기단부에 각 면석에는 우주와 일주식의 탱주를 모각해 놓았다. 상층기단 갑석은 일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완했고, 상층기단 면석도 철선을 보강하고 있다. 한돌로 된 각층의 옥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옥개석 하단에는 4단의 층급받침이 있으며, 전걱은 반전이 심한 편이다. 상륜부는 없는데, 그 부재로 보이는 파편들이 와편들과 함께 주변에 산재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의 일반형에 속하는 것이나 하층기단 면석에서 퇴화의 흔적을 볼 수 있고, 전체적인 비례에서 기단부가 다소 위축된 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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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서부도(草庵寺 西浮屠/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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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암사 서부도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단엽의 복련을 돌린 하대석을 얹었는데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돌에 새겼다. 중대석은 8각 모서리에 우주를 표시하고 각면은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옥신은 8각 기둥으로 되어 있고 상대석은 암련으로 장식하였다. 옥개석하면에 얕고 넓은 홈을 8각으로 돌아가며 팠고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며 상면에는 복연연화문을 장식하여 삼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삼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다만 보주형의 연봉만 놓여 있다. 각부 조각등으로 보아 동쪽 부도보다 시대가 내려오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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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黑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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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때 폐찰되었다고 하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이 고장 출신으로 선조때 명신인 백암 김늑도 이 절에서 독서했다고 한다. 흑석사는 천여년 세월동안 기복도 심했다. 8. 15 광복 직후 김상호 스님이 순흥 초암사를 철거하여 이 자리에 옮겨 세움으로서 흑석사가 중창되었다.(순흥 초암사도 김상호 스님이 중건, 1935년) 이 부근의 바위 빛깔이 대개 검은 편이고, 여기서 동쪽으로 수백미터쯤 내려가면 ‘흑석’이란 마을 이 잇고 그 마을 서남쪽에 검은 빛깔의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흑석’이란 절 이름은 마을 이름과 그 검은 바위로 하여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경내에는 국보 282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보물 제681호인 석조여래좌상, 문화재 자료 제355인 마애삼존불이 있으며, 그외에도 석탑재, 대좌석, 광배편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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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석탑재(黑石寺 石塔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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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마애삼존불 우측편에 모아 둔 석탑재이다. 편편한 암반위에 방형으로 지대석을 두고 위에 옥개석, 옥신석, 옥개석 순으로 올려져 있다. 맨 아래 옥개석은 뒤집은 상태로 층급받침이 위로 향하는데 4단이다. 한변 길이 84cm, 높이 31cm이며, 옥신은 우주가 모각되었고 폭 55cm, 높이 54cm 이고, 맨 위의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한변 80cm, 높이 30cm이다. 나머지 탑재들이 확인되지 않아 원 탑의 형을 알 수 없으나 남아있는 옥개석과 옥신석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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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연화대좌(黑石寺 蓮花臺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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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 주변에 탑재와 함께 있는 석불대좌의 부재들이다. 상대석을 잃고 지대석과 하대, 중대석만 남은 것인데, 마모도 심하고 잔돌을 얹어 놓아 전체 확인이 어렵다. 팔각 지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이 1구씩 장식되었고 안상 안으로 조각이 있지만 표면 마모로 확인이 어렵다. 복련의 하대석은 마모가 심하다. 복련에 붙여 2단의 몰딩이 있고 중대석을 받고 있다. 팔각의 중대석 각면에도 안상인 듯한 조각이 있지만 마모가 심해 알 수 없다. 규모로 보아서는 약사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의 대좌부재로 추정할 수 있다. 현고 90cm, 지대폭 136cm, 1변의 너비 60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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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喜方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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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는 희방폭포의 장관을 중심으로 계곡의 천석미를 힘입어 소백산 일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절이다. 계곡좌우로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다. 지금의 사찰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고 옛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건립되었다는 전설이 잇다. 신라시대 도승 두운조사가 경주의 호장인 유석의 무남독녀가 호랑이한테 화를 당할 뻔한 것을 살려주고 그 은공을 기뻐하여 절을 지어주고 희방사라 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이나 유적은 7세기경의 창건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다. 창건후 쇠진한 것을 조선 철종 원년 (1850)에 강월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풍기 일대에서 경주 호장 유석과 관련한 유적은 이외에도 풍기 성내리의 유다리, 유석사 등도 있어 당시 풍기일대와 경주와의 관련성이 컸음을 말해준다. 6.25 전쟁 때는 사찰 건물과 함께 사찰에서 보관하고 있던 ‘월인석보 2권과 법화경’ 7권의 판목을 포함한 200여장이 소실되고, 두운대사의 영정도 없어졌다. 현 사찰 경내에는 유형문화재 제 226호인 희방사 동종이 대웅전내에 있고 종각 옆으로 탑재를 모아 세운 3층 석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탑재만 일부 확인된다. 1953년 대웅전을 세우고 그뒤 요사와 탑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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