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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86
10월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연중 제28주간 금 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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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자비의 책, 루카 복음!>
요즘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가’ ‘역사학자’들께서 지닌 소명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하고 균형잡힌 시선,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아닐까요?
역사가들은 각자 나름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고유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관(史觀) 혹은 역사의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최근 기승을 부리며 우리 선량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관이 있습니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일본인들보다 더 일제를 더 찬양합니다. 일본강점기 시절을 그리워하고 두둔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를 미화하고 찬양합니다. 일제를 통해 조선이 성장했다고 억지를 부릅니다. 그릇된 사관이 초래한 불행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루카복음사가 역시 당대 걸출한 역사가이자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희랍어에 능통한 이민족 출신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복음서 역시 유다 역사나 지리에 낯설었던 이방계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루카복음사가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이스라엘의 지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루카복음 24장 13절)
또한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등장하면 항상 희랍어로 소개해 줍니다.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루카복음7장 34절)
참으로 친절하고 자상한 루카복음사가입니다. 그럼 이제 루카복음사가의 사관(史觀)을 조금 살펴볼까요?
루카복음사가가 이방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에게 있어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은 더 보편적입니다.
참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연하고 개방적인 역사관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역사관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루카복음사가는 당시 유다인들의 시각에서 절대로 구원의 대상에 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태생적 죄인들, 이방인들, 세리들, 창녀들, 양치는 사람들, 고리대금업자들, 개똥 수거인들 ㅋㅋㅋ 까지도 모두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방황하던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지가 얼마나 각별하고 강렬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여인들의 복음서’라고까지 칭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쳐죽일 놈’ ‘민족의 배신자’로 생각하며 침까지 뱉던 세리들, 죄인의 대명사들이었던 이방인들, 악령들린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친히 그들과 눈을 맞추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을 상세히 우리에게 전해주신 루카복음사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루카복음사가를 본받아 부족하고 나약한 이웃을 매몰찬 시선이 아니라 따뜻하고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냉혹한 관찰자,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더없이 자상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위로자 예수님으로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복음, 구절 구절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복음, 힘들때 마다 손에 들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루카 복음서를 좀 더 자주 읽고 묵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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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이름을 남기려하지 말고 이름이 들어간 것을 남겨라>
영화 ‘나를 찾아줘’(2014)의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가 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한 가장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책이 많이 팔린 덕분으로 미국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지쳐갑니다. 자꾸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하는 말과 행동에 지쳐가는 것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남편을 통해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특별히 결혼기념일엔 숨바꼭질 놀이까지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으려합니다. 이에 남편은 지쳐갑니다. 그리고 바람까지 핍니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여자 주인공은 남편이 자신을 살인한 것처럼 꾸미고 또 사라집니다. 자신을 찾아달라는 쪽지만을 남기고.
경찰들은 그녀의 남편을 의심하고 남편은 결국 내키지 않지만 TV에까지 출연하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연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아내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이전처럼 계속 자신을 기억하고 찾아달라고 요구합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참으로 무섭게 영화가 끝납니다.
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자존감이 낮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지쳐갑니다.
반면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을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업적을 통해서 확인하려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고 그 업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
내 이름이 기억되고 싶다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 하지 말고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할 업적을 만들어야합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라는 이름이 길이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루카가 복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루카란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영원한 분을 알게 하는 복음이 사라질 리는 없습니다.
우리도 성 루카처럼 이름을 남기려하지 말고 그 이름이 들어간 업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들어간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하느님께 의미 있어야 그 의미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 업적을 하느님 앞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면 다 허망한 것입니다.
‘파브르 곤충기’로 유명한 장 앙리 파브르가 10권의 곤충기를 완성했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파브르는 정식교사도 아닌 임시 교사로 일하며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파브르는 30년간 몸담은 교육계를 떠나 인생의 말년을 곤충기를 쓰는데 바쳤습니다. 그 곤충기는 그의 대작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어보진 못했을지라도 그 곤충기 덕분에 파브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곤충기를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말년에 곤충기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업적을 남길만한 존재라는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스톱에 ‘449통’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도 1점을 내지 못했을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띠와 십자리는 5개씩 모여야 1점이고 피는 10개가 모여야 1점입니다. 띠와 십자리가 4개씩이고 피가 9개인 것이 449통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아무리 졸라봐야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업적은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교회가 존속하는 한 예수님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됩니다.
우리는 분명 주님 앞에 무언가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할 능력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성 루카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복음서까지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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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0,1-9 :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가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희랍으로 건너갔다.
루가 복음사가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 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가 복음은 소로 표상 되는데 이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둘 사이에 주님 현존 위해)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할 바를 말씀해 주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4절)고 하신 것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접대는 그 마을의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2절)고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나 자신의 봉사가 이 공동체에 필요한 줄 알면서도 뒷짐 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느 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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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교회는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아름다우면서도 신학적인 복음서를 저술한 루카 복음사가는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 출신 의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는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그 바쁜 공생활 가운데에서도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공들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가장 큰 관심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 선교였습니다. 자신도 이방인이었던 그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저술함으로써,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당시 세상의 중심이자 끝이라고 여긴 로마에까지 전달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도 공관 복음서로서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선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조금 다른 방향을 취합니다. 다른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셨다고 전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면서 여러 가르침, 특히 그 복음서의 가장 아름다운 비유들을 들려주신 것으로 전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을 듣습니다. 선교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긴박하기만 합니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청하면서, 파견을 받은 사람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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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교활동>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의 뜻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여라.” 라는 지시입니다. 선교활동은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활동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데, 예수님께서는 왜 ‘일꾼’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자녀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일꾼’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는 기도는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는 기도이고, 그래서 선교활동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만일에 일꾼은 되지 않겠다고, 자녀로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남들이 구원을 받든지 멸망을 당하든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이고, 아무것도 아닌 생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3-4)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양들 같은 제자들을 보면서 분명히 그들을 염려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임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겨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십니다. 왜 그런 지시를 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빈손’은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지만 영적으로는 필요한 것을 모두 챙겨서 가지고 가는 풍요로운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제자들을 영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빈손이지만 영적으로는 풍요로운 손’을, 이리 떼를 순한 양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페소서 6장을 보면, ‘하느님의 무기’의 목록이 나옵니다. 진리의 띠, 의로움의 갑옷,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하느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빈손’을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춘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돈 걱정이나 하면서 간다면, 자기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많은 활동비를 가지고 간다면? 이상한 일이지만, 그 선교활동은 백퍼센트 실패입니다. “어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가? 모든 사람을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돈 걱정이 없으면 더 많이 기도할 수 있고, 더 열성적으로 활동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돈이 많으면 선교활동이 안 된다는 것은 오랫동안 선교본당 사제로 살면서 얻은 경험 법칙입니다. 못하는지 안 하는지... 하여간에 그렇게 됩니다. 아마도 가지고 있는 돈이 많으면 ‘하느님의 무기’의 힘이 약해지고, 그러면 세속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도 약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이 많은 경우에는 돈의 힘으로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는데,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면 같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어떻든 선교활동은 돈의 힘이 아니라 복음의 힘으로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아는 사람을 만나도 모르는 체 하여라.”라는 뜻은 아니고, “세속의 인연에 연연하지 마라.”, 또는 “세속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활동비를 안 주시니,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해야겠다.” 라고 생각하고서,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고, ‘예수님의 지시’를 거스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자들이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들을 제자로 뽑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
선교활동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참 평화’를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 평화를 나누어 주려면 우선 먼저 자기 안에 기쁨과 평화가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돈 걱정’이나 하고 있으면, 아니면 돈을 잔뜩 가지고 간다면, 그 사람 안에는 기쁨도 평화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라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참 기쁨과 참 평화는 돈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만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평화를 받을 사람”이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한다고 해도 그것은 제자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뜻이고, 또 그런 일이 생겨도 제자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평화를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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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우리 성당에서 제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단체 중 하나가 바로 교사회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 그리고 첫 영성체반 선생님들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제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우리 본당의 교사회는 사실 인원이 아주 적은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한 고민을 안겨주는 것이, 주일 학교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교사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훌륭한 교사들이 더욱 많이 양성되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하여 교사회는 저에게 노심초사 걱정을 안겨주는 단체이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교사들에게 본당 활동이 짐처럼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둔다고 하지는 않을까 항상 걱정과 근심이 뒤따릅니다.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속한 세상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가고 세속에 치우쳐 있습니다. 대학교 과정 혹은 가정생활은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옥죄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요구합니다. 환경은 둘째치더라도 주일에 친구들을 만나고 싶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할 일도 있을 것이며 쉬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요일 혹은 일요일에 나와 회합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알고 있다 보니 교사들이 더욱 사랑스럽고 한 명 한 명이 소중합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제가 보기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들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엔 얼마나 더 사랑스러워 보일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일흔 두 명을 지명하시여 그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배척당할 것이고 여러 유혹 앞에서 혼란스러울 것이며 상대의 무관심 앞에서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소중한 제자들이 겪을 이러한 어려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비통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야말로, 사랑하는 자녀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가슴 아픈 아버지의 심정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이들과 함께 하리라는 것 역시 명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필요 없으며 집을 옮겨 다닐 필요도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 모든 것은 그분께서 돌보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나와 봉사하는 모든 이들, 나아가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사실 오늘 복음 말씀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편안한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들을 배척하기도 하며 그에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행하였고 그들의 곁에는 지혜로운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미사와, 세례를 통해 얻게 된 구원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결실을 얻는 과정이 투박하다고 해서 그것에 불만을 가지거나 그 기회를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매일매일 부여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개인의 구원과 행복이라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교육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은 희랍어에 능통했으며, 바오로의 방문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오늘 독서에서 증언하듯 바오로의 제자로서 그가 선교를 다닐 때마다 따라 다녔습니다.
바오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로마로 호송되어 끌려갈 때에도 항상 그 뒤를 따랐으며, 사도 바오로가 67년에 로마에서 순교한 후에는 희랍 지방과 소아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다 80세에 이르러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은 바오로의 권유에 따라, 그리스도의 행적을 사실에 근거해 올바로 전하기 위해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하였고,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모습, 병든 이들을 치유해 주시는 모습에 집중 했으며 더불어 마리아에 대한 상세한 기록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물론 의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초기 교회의 모습을 증언하고 기록해야 했던 그의 삶 역시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고 기록하면서 인간적인 슬픔과 절망을 느꼈을 법 합니다. 그러나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성령의 도움과 하느님에 대한 항구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 역시 주님의 일꾼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하루하루 노력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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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평화를 빕니다>
루카 10,1-9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평화를 빕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어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까요
나를 드릴 수도 없어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아무 것도 주지 마세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당신의 곁이 되어드릴게요
다만 나의 곁이 되어주세요
나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평화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평화가
당신과 나 서로에게 평화를
당신과 나 사이에 평화가
당신과 내 안에 평화가
당신과 나 우리로부터 비롯되어
당신과 나 우리를 너머
온 누리에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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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의 어린양의 양>
살리기 위해 죽으러 오신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이리에게 먹힘으로써 이리가 판치는 세상을 양의 세상으로 만들라시며 당신의 양들을 다그치십니다.
이리에게 먹힘이 두려워 어린양의 안락한 목장에 머무르겠다고 떼를 쓰는 양은 어린양의 양이 아닙니다.
이리에게 먹힘이 두려워 이리 떼 가운데서 이리처럼 살아가는 양은 양의 탈을 쓴 이리일 뿐입니다. 어린양을 닮아 이리 떼 가운데 당당히 나아가 기꺼이 먹힘으로써 살리는 양만이 참으로 어린양의 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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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샬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는 슬픔의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천사는 사람이 슬픔과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를 데리고 이 나무에 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자, 이제 네가 입고 있는 슬픔의 옷과 고통의 옷을 벗어 이 나무에 걸쳐 놓아라.”
그는 자신이 입은 슬픔의 옷, 고통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집니다. 천사는 그를 데리고 나무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말합니다.
“이제, 다른 사람이 벗어놓은 옷을 하나 가져가거라.”
그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슬픔의 옷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슬픔과 고통이 가장 적게 묻어 있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은 조금 전에 자신이 벗어놓은 옷입니다.
혹시 고운님의 슬픔과 고통이 가장 커 보입니까? 고운님의 삶의 무게가 가장 무거워 보입니까? 그래서 “왜, 나만 힘드냐?”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가집시다.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을 가르치시고, 추수해야 온갖 은혜와 권능을 다 주신 다음에 몸소 친히 가고 싶은 고을로 보내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을 보내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복을 빌어주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그 평화는 그 집에 머무르고, 평화를 받을 사람이 없으면, 열 명이나 백 명이 있을지라도 평화가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오니, 고운님들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을 향해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저주받을 사람이 아닌데 저주해버리면, 그 저주가 고운님에게 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축복받을 사람이면 받게 되고, 받지 못할 사람이면 평화를 빌어준 사람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먹고 마시면서 축복을 빌어주면, 그대로 이루어주시겠다.”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병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살고, 이 집에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복음을 믿고 사는 그 사람에게 평화의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가지시고 평화를 빌어주십시오.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제 주님 앞에서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믿고 누군가에게 평화를 빌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반드시 고운님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저는 저의 영혼을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에 맡깁니다.” 아멘.
그러기에 저 두레박 사제에게도 샬롬,
고운님 모두에게도 샬롬,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도 샬롬,
고운님들의 모든 자녀에게도 샬롬, 미운 이에게도 샬롬,
온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 샬롬.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 모두가 하느님을 의지하고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은혜를 빌어주고, 그 평화의 은혜로 고운님들 자신의 모든 과거의 불안과 아픔을 씻어내고 기쁘게 살아가는 은총 가득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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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88)
♧♧ 시편 55편 23절….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
*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여기서 ‘근심...’이란 소유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생 여정 중에서 마주치게 되는 여러 근심 걱정과 문젯거리를 의미합니다.
한편 다윗은 스스로를 2인칭화하여 스스로에게 모든 근심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비록 사람이 일을 할지라도 하느님이 인간의 일을 오직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므로 그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선하게 해결해 주실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잠언 16장 1-3절. 참조) 이와 같이 다윗은 대적에게 반역당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주님께서는 평안과 기쁨을 , 그리고 새로운 길과 번영을 주셨으니 이후 다윗은 다시금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사무엘 하권 19장. 참조)
그래서 오늘 날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의인이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
다윗이 곤경 중에도 하느님만을 굳게 의지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항상 의인과 함께 하시어(시편 16편 8절. 참조) 다윗의 걸음이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실 줄로 믿었기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께 내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저희에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리서 11장 1절. 참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 시편 55편 24절….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들을 갚은 구렁 속으로 빠져들게 하시리이다. 그들은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들 그들은 인생의 반도 채우지 못하지만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떠나 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이 반드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리며 교묘한 말로 사람을 속이는 자들이었던 아히토펠과 압살롬은 자기 생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아히토펠은 자살했으며(사무엘 하권 17장 23절. 참조), 압살롬은 요압의 표찬 셋에 치명상을 입고 요압의 무기병인 젊은이들에 의해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사무엘 하권 18장 14-15절. 참조) 이와 같이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의로운 재판관이시기에 악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합당한 보응을 내리십니다. 그런즉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고 언제나 주님 앞에서 정직과 의로움을 행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사는 지혜로운 이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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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왜 이렇게 연락이 되지 않냐는 말로 시작한 전화였는데, 이 친구가 하는 말에 도대체 용건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평범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점심을 어디서 먹었는데 정말로 맛있다는 이야기’를 왜 갑자기 전화해서 말하는지 의아했습니다.
이 친구의 모습은 이렇게 수다쟁이가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예전 공중전화 부스에 적혀 있던 ‘용건만 간단히’라는 문구를 충실히 따르는 친구였습니다. 느낌이 이상해서 “너 무슨 일이 있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는 갑자기 울먹이면서 “명연아! 나 지금 너무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왜 힘든지를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힘들었으면 내가 생각나서 전화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평상시와 달리 하찮은 이야기를 계속했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외로워서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전의 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분에게 코칭을 하는데, 본 내용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상당히 힘들었던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의 모습이 떠올려지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은 지금의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의 관심사가 아니면 잘 듣지 않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는 외로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는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서는 사랑이 더욱더 필요한 요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늘 다가서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서고 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해서 고을과 고장으로 보내십니다. 주님께서 어느 고장에 오셨다는 소식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모릅니다.
빵의 기적을 보면 장정만 해도 사천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들을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을 보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올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외로워 힘들어하는 이를 위해 보내셨던 것입니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사랑을 위해 파견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뜻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찾아올 힘이 없는 이들을 위해 다가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너무나 적어서 주님께서 “일꾼이 적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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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없음}
심리학자 빅터 고어츨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저명인사 400명의 성장 과정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일까요? 운이 좋다? 능력이 많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공통적인 하나는 이것입니다.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끈기를 보였다는 것.”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우리가 아닐까요? 끈기없음이 마치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 끈기없음을 통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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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설립 25주년 되는 한인 공동체의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공동체는 3개 민족이 함께 성당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 공동체, 슬로베니안 공동체, 미국 공동체였습니다. 주교님은 영어로 미사 집전하시고, 신자들은 한국어로 응답하는 미사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어린이 합창단이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1절은 한국어, 2절은 슬로베니아어로, 3절은 영어로 불렀습니다. 같은 노래인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큰 언어는 영어였습니다. 한국인이지만 영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슬로베니아인이지만 영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노래를 3개 국어로 듣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드라마 형식으로 전해주는 것이 복음서입니다. 예수님 드라마의 핵심은 ‘복음선포, 수난, 부활, 승천, 재림’입니다. 이런 드라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신앙을 갖기 힘들었을 겁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 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다른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카는 성모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 성모님의 신앙, 성모님의 삶을 루카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가지셨고, 성모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마리아의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나이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닮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 자캐오의 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루카가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도 다 좋지만, 오늘은 ‘엠마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년 부활이 지나면 본당에서 ‘엠마오’ 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순과 부활을 준비하면서 힘들었을 본당 식구를 위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입니다.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성가 ‘엠마우스’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주여, 천년도 당신 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좋기도 좋을시고’와 같은 성가를 만드신 원선오 신부님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인 신부님의 삶은 ‘엠마오’에 대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일본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일본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아프리카 케냐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더 어렵고 힘든 수단으로 갔습니다. 30대에는 일본에, 40대에는 한국에, 50대의 나이에는 아프리카에서 지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신부님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엠마오는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4시간 운전을 하고 설립 25주년 축하 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앞으로는 6시간 넘게 운전할 기회도 많을 거라 합니다. 제가 가는 곳이 ‘엠마오’라고 생각하며 기쁘게 다니려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 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엠마오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엠마오인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엠마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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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지난 토요일에는 어머니에게 다녀왔습니다. 어머니의 세례명은 데레사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좋아하는 과일을 시장에서 구해 놓으셨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저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이 무엇인지, 잘 드시는 과일은 무엇인지, 요즘 즐겨 보시는 드라마는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루카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 즈카리야의 노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과 용기를 담담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라는 주님의 선포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 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당신이 그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나의 편이 되어 줄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이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무관심으로 외면하지 말고, 위선과 가식으로 양심을 속이지 말고,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큰 아들처럼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들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엠마오’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구원은 어느 곳을 향한 여정과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순례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즈카리야의 노래, 예수님의 사명, 착한 사마리아 사람, 돌아온 탕자, 자캐오,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이야기는 모두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 그것은 바로 은총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겠다고 다짐했던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와 너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다."
오늘 우리가 자캐오처럼 충실하게 산다면, 우리들도 같은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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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탈출의 여정>
-주님과의 만남과 우정-
오늘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에 어느 신학자의 제 강론 평에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설교 깊이가 남다르다. 그저 그렇고 그런 설교가 아니다. 루카복음 저자 스타일 설교다. 쉽고, 아름답고, 울림 있는 언어를 쓴다.”는 내용 그대로 쉽고 아름답고 울림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 나온 책 홍보중 한 권의 책 제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참 기분 좋은 제목의 ‘나이듦의 품격’이란 책이었습니다. 참 중요한 것이 품격있는, 품위있는 삶이요 이래야 아름다운 삶입니다. 얼마전 인용했던 ‘동그란 길로 가다’란 시의 마지막 구절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존엄한 인간 품위를, 품격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이 깊어가면서 노년의 품격이 무르익어갈 때 그 인생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제 '목5동 성당'의 ‘은빛대학’ 80대 노년 인생의 여정중인 형제자매들 100여분이 수도원에 하루 피정을 다녀갔습니다. 60-70대 연령대로 느껴질 만큼 밝은 분위기였습니다. 은빛대학! 얼마나 빛나는, 꿈처럼 아름다운 말마디인지요. 파견 미사 강론 서두에 드린 말씀도 생각납니다.
“여러분은 오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분들입니다. 왜냐?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곳 하느님의 집 요셉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예수님을 만나, 가장 아름다운 분들이 됐기 때문입니다.”
정말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 모실 때 품격있는 삶이겠습니다. 만남중에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위로와 치유요, 기쁨과 평화를 선물 받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나중에 성작을 보니 성체 두 개가 성혈에 잠겨 있었고, 두 분을 찾아 내어 건져 모시게 한 다음, “자매님이 물에 빠진 예수님을 구출해 주셨습니다.” 유머도 드리며 웃음도 나누니 참 즐거운 미사시간이었습니다.
또 사랑하는 도반과 담화와 더불어 고백성사를 주고 사진도 함께 찍으니 기뻤습니다. 보속 말씀 처방전에,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말씀을 써드리고 “웃어요” 붉은 스탬프를 찍었을 때 형제의 웃는 모습은 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참 많이 찍어 드리는 “웃어요”라는 스탬프입니다.
우리 삶은 탈출의 여정, 떠남의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주님 향한, 주님과 함께 하는 탈출의 여정입니다. 한 두 번 탈출이 아니라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떠나는 탈출의 여정입니다. 이래야 영혼은 영원한 젊음의 청춘입니다. 그러니 이런 탈출의 여정중에 보이는 형제 도반과 더불어 늘 함께 하는 영원한 도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분명 예수님께서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고 확약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당신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니, 보이지 않는 영원한 도반이신 당신과 더불어 보이는 도반 형제를 동행케 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본질적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치유활동에 전념하기 위한 무소유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최고의 살아있는 보물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보이는 도반 형제들과 함께 하는 선교 여정인데 무엇이 아쉽고 두렵겠는지요. 마침 시편 성구“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구절도 생각납니다.
이 말마디를 바꾸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부러울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등 무슨 말마디를 넣어도 다 통합니다. 참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기에 이런 최소한의 소유에도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과의 만남과 더불어 우정이 깊어갈 때 저절로 이탈의 자유로운 삶에 아름다운 품격있는 삶의 성취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이웃에 하느님 나라의 선물과 더불어 주님의 평화를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새삼 제자들처럼 미사가 끝나면 우리도 주님 평화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선물이 이 미사를 통해 선물받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사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그 삶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최고의 복음 선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티모테오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루카는 바오로 사도의 참 좋은 도반 형제였음이 독서 앞부분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그대 티모테오여,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늘 함께 했던 형제 도반 루카와 더불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바오로 사도에게 결정적 힘의 원천이었음은 다음 사도의 힘찬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늘 새롭게 시작하는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시고, 영원하신 도반이신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 주시며, 복음 선포의 사명에도 충실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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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눈 팔지 마라>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되고 불평불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4)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 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엉뚱한 것에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다.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15,9-10)
결국 내 삶의 양식은 내 생각, 의지, 내가 지닌 것들을 내려놓는 양의 방식이지 무엇인가를 잡아먹으려는 이리떼는 아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상사는 상사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한 눈 팔지 말고 하느님으로 부터 파견된 일꾼으로서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일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길에서 만나는 친구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를 진리와 선으로 이끌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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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 독서의 말씀들에서는 복음 선포자가 가야할 길이 보입니다. 사실 독서와 복음 모두에 매우 본질적인 지침들이 담겨 있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없지만, 그중 오늘 제게 다가오신 말씀들 위주로 나누고자 합니다.
"청하여라."(루카 10,2)
가장 먼저 준비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들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로 파견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함께 가는 둘 사이의 팀웍도 좋아야 할 것입니다만, 무엇보다 각자 하느님과 갖는 관계성이 선교의 질은 물론 공동체의 분위기를 좌우할 것입니다.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루카 10,5)
복음 선포자는 평화의 전파자입니다. 그런데 먼저 그 자신이 평화여야 하지요. 그는 스스로 포기한 잉여분의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 신발 따위로 신경이 곤두서거나 불안하거나 강팍해지거나 인색해지지 않습니다. 더우기 길에서 사람들과 긴 인사를 나누며 인맥을 쌓고 뒷배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의탁해 가다보면 필요한 순간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주실 것이니 인간적으로 보루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6)
빌어준 평화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튕겨 나올 수 있지만, 평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평화는 고스란히 복음 선포자에게 되돌아 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그 평화를 받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도 되겠네요. 그러니 복음 선포자가 먼저 평화의 존재여야 할 것입니다. 평화를 빌어주기 마땅한 이, 평화를 받아 머무르기 마땅한 이여야 합니다.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7-8)
복음 선포의 길에서 마주칠 일은 그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할 이들은 물론 복음 선포자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섭리가 다이나믹하게 휘돌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받아 먹는 음식이 구미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도 맛깔져서 은총이라 여기는 것도 있겠지만 쓰디쓴 도전과 실패처럼 뱉어내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파견받아 나선 여정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분이 차려 주신 상 위의 모든 일이 복음 선포자를 성장시킬 양분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
가까이? 분명 "가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가까이"일까요? 꼭 세상 종말이라는 공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 "가까이"의 거리는 사람마다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겉보기에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택한 것 같은데 정작 지옥에 사는 듯 고통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기댈 곳 없고 가진 것조차 빈약해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선점해 누리는 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작 복음 선포자가 하느님 나라와 어떤 거리를 유지하고 있느냐 또한 관건이 됩니다. 본인 입으로 선포하는 "가까이"를 누리며 충만하다면 정말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그래서 그러기를 바라고 또 그러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화답송) 계십니다.
제1독서의 서간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고독이 뚝뚝 묻어납니다. 이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는 걸 보면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진정 신뢰했던 것 같네요.
"데마스는 ... 나를 버리고 가고..."(2티모 4,10)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2티모 4,11)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2티모 4,16)
지금 사도 바오로의 처지는 버림받아 가난하고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인간 관계 안에서 벌거벗고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가난과 비움은 인간적으로 참 비참하고 서글플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을 향해 비상하는 엄청난 도약대가 되어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티모 4,17)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쟁취할 수 있다면 버림받음조차, 가난조차, 고독과 외로움조차 은총입니다. 선물입니다. 당신께 더 가까이, 더 깊게 끌어당기시고자 마련하신 환경이고, 또 "차려 주신 음식"이기에 그렇습니다.
10월 전교의 달입니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본성상 선교의 주체입니다. 직접 선교든 간접 선교든, 말로든 글로든 행동으로든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지요.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는 이, 평화의 전파자, 만족하는 이, 하느님 나라와 가까운 이, 그리고 하느님께만 의탁하기 위해 가난과 고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이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수 있냐며 부담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갖추어주신 선물이 의외로 꽤 많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2티모 4,17)고 먼저 우리를 은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니 믿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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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영적 생활의 비현실성에 빠지면 불행한 일이다.
영적靈的생활에 있어서 비현실성에 빠지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삶은 우리 외부의 실재와 초월적인 실재實在와의생명력 있는 관계에 의해 우리 안에서 지속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비현실에 의존할 때 그 삶은 분명히 고갈되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그러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이 무익한 죽음을,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게 해주는 참되고 풍요롭고 희생적인 죽음이라고 오인하는 것보다더 큰 불행은 없다.
-토마스 머턴 「고독 속의 명상」에서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이라는 현실에서 도피하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성부께서는 성자를 세상에 내어주시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완전한 선물로 이웃에게 내어 놓은 것이며, 이는 곧 현실에의 전적인 헌신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뿌리를 내리라는 것은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이라는 외부의 실재와 우리의 내적인 초월의지와의 생명력 있는 관계에 의해 우리 안에서 지속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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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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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할 만큼만>
'추수할 것은 많은데 ᆢ'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일이 있습니다.
늘 사람이 부족하다는 말이 여기저기!
저도 도와줄 사람이 더 있었으면 하다가
언젠가부터는 예수님 보며 두팔 벌리고
'아시죠?' 하고는 그날 제가 할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하나 둘 채워주십니다.
근심, 걱정, 염려와 친구하면 불평이 따라옵니다.
충분함이 아닌 결핍 가운데 오시는 주님!
결핍과 부족을 받아들이고 할 만큼만 ᆢ
'예수님도 그날 할 만큼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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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10, 2)
제게 있어
루카 복음은
길을 찾는
수행자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사람냄새 나는
복음입니다.
사람의 눈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레
진리의 눈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고약한 인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루카는
눈높이를 맞추며
다가옵니다.
대척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통해
뜨겁게 다시 만나게 되는
만남의 복음입니다.
작은 아들이
길을 찾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
목자가 길을 떠납니다.
복음은 쉽게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성 루카 복음사가는
유난히 길고 고된 길을
기쁘게 걸어가셨습니다.
루카 복음을 통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고마운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고마운 마음이
있기에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삶이
무언지를 다시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작은 아들의
땀방울이 다시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돌아갈
아버지가 계십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루카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함께 아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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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 9)
우리가 찾으려했던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루카복음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를 조건 없이 끌어안아 주시는 참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빛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 모두를 기쁨 가운데로 나오게 합니다. 모두를 기쁘게 하는 복음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성 루카 복음사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가 자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자비는 어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오늘을 만나게 합니다. 제 자신에게서 루카복음사가는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일깨워줍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맛 본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은 우리 삶을 채워주는 참된 "소중함"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소중함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함을 통해 비로소 한 사람이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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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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