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아픔(成長痛)
어린 시절 헤르만 헤세(Herman Hesse)의 소설 데미안(Demian)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말이 '알에서 깨어나라'는 구절이었다. 일상에 길들여지고 습관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은 그 카테고리를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고 그 속에 안주하려고 하며, 어쩌면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설정한 범주 속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어린 시절 헤세의 ‘알에서 벗어나야만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는 그 문장이 나에게는 그 범주를 뛰어넘게 하는 너무도 멋진 말로 가슴에 와 닿았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곤충들의 변태도 매우 흡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에서 징그러운 애벌레로, 다시 모든 것이 정지된 고치 속의 번데기 시절을 보내고 그 껍질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비상할 수 있는 나비(나방)로의 화려한 변신이 기다린다. 또 작은 꽃씨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떠올려 보는 것도 그렇다.
맷 리브스(Matt Reeves) 감독의 1996년도 작품인 영화 ‘졸업(The Pallbearer)’은 특히 아름다운 삽입곡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작품이다.
사이먼과 가펑클(Simon & Garfunkel)이 불러 크게 히트한‘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스카보로의 추억(Scarborough Fair)’등은 그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로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삽입곡과는 달리 영화내용은 상당히 부도덕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다. 파티에서 만난 첫사랑 줄리와 결혼을 앞두고 어머니뻘인 미망인 루스와 육욕(肉慾)에 빠지는 주인공 탐(Tom Thompson), 결국은 모든 것을 용서한 줄리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우리나라 정서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19세 이하 관람불가 판정.
제목 The Pallbearer는 우리나라말로 직역하면 ‘장례식에서 관 뒤를 따라가는 사람’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졸업’이라는 멋진 제목을 얻었다.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Ivan Turgenev)의 ‘첫사랑’도 그런 맥락으로, 아버지의 연인 지나이다를 짝사랑하는 소년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첫사랑은 누구나 겪는 성장기의 아픔이지만 그 대상이 하필이면 아버지의 연인이라니 너무나도 아이러니다.
오페라 카르멘(Carmen)은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쥬 비제(Georges Bizet)의 작품인데 원작은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의 소설‘카르멘’이다.
군인신분인 돈 호세(Don Jose)와 집시 여인 카르멘(Carmen)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가 그 줄거리로 강렬한 집시풍의 삽입 아리아로, 매혹적인 집시여인의 플라멩코 춤과 자유분방한 카르멘의 매력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고전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오페라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La Traviata/春姬),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La Boheme)과 함께 3대 오페라로 꼽기도 한단다.
삽입곡으로는 투우사의 노래(Treador), 하바네라(habanera) 등이 우리 귀에 익숙하다.
군부대 위병이던 순박한 청년 돈 호세는 성냥공장에 다니는 자유분방한 집시 여인 카르멘이 장난으로 장미꽃을 자신에게 던지자 사랑에 빠지고....
온갖 정성과 진심을 담아 고백하는 호세의 사랑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투우사를 비롯한 뭇 남성들의 품을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카르멘, 그러나 투우사를 비롯하여 카르멘과 가까이 사귀던 남자들은 모두 불행한 사고를 당하여 파멸에 이른다.
언덕에서 마지막 피 끓는 애원으로 사랑을 호소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카르멘의 싸늘한 답변 뿐, 카르멘을 가슴에 안은 돈 호세는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는 자신도 자살하고 만다.
숨을 거두며 공허한 눈동자로 쳐다보는 카르멘을 마주보며 오열하는 돈 호세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아~, 이 얼마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짝사랑의 종말인가? 요즘말로 진정 팜므 파탈이다.
나는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2학년 때 였던가 담임선생님이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고, 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카르멘’이라고, 특히 마지막 장면의 돈 호세가 사랑하는 여인을 죽이고 자살하는 대목이 감명 깊었다고 말하자.... 선생님을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이며
‘네가 지금 몇 살인데 그걸 읽어? 뭐 감명을 받았다고?’ 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때서? 우리 선생님이 왜 이러실까 의아하게 생각 했었다.
성장기의 아픔과 더불어, 대학시절 군부 독재에 항거하던 60년대의 학생운동을 보며 겪었던 심적 갈등, 산모의 뱃속에서 양수를 마시던 작은 생명이 몸 밖으로 나오며 첫 울음과 함께 산소호흡을 시작하는 신생아를 보며 느꼈던 생명의 신비로움....
이런 일련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면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 무언가 내게 길들여지지 않은 새로운 일에 충격을 받게 된다.
위에 열거한 이야기들은 어찌 보면 하나같이 상식에서 벗어난, 충격적인 사건들인데 그것을 읽거나 보는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도 대리만족을 얻고 빠져드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런 탈(脫)일상적인 것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동경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장기의 청소년들은 강도(强度)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이 성장통을 겪게 되는데 나이를 먹어서도 이런 갈등이 말끔히 지워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어 그런 갈등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라고요....>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