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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주의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 제도는 부르주아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이제 그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었다. 선거는 노동계급이 자신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구의 파괴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폭력을 통해 전 사회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어떤 특권이나 착취도 필요가 없는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지의 국가를 그대로 이용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의 국가기구나 그 제도, 장치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서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투쟁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체제 내부에서 개혁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선거 참여와 의회 진출을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써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19세기 동안,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독재정권 아래에서의 보통 선거권을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이 자신을 조직했던 가장 중요한 요구 중의 하나였다.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계급 강령을 위한 선전 및 선동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에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코뮤니스트혁명이라는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혁명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 개입에 대한 전술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를 유지하고, 노동자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개입, 각종의 선거 연합은 그들이 내건 급진적이거나 혁명적 수사와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노동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의회의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를 입법화하는 동안 지배계급이 평화적으로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는 의회주의의 환상일 뿐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위장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자본주의 사회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기관은 의회 밖의 군대, 사법기관, 국가 관료, 보안 세력,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 자본주의 쇠퇴기, 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사기와 다름없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수백 번 넘는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1년에만 수만 번의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고작 몇 년에 한 번 치루는 선거만으로 노동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권력을 빼앗기고, 대부분의 일상에 대한 지배를 받는다. 이것이 노동자가 선거를 통해 노예가 되는 이른바 ‘민주적 권리’의 실체다. 노동자가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복종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혁명의 과제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의회/선거제도 포함)를 파괴하는 것이다.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시대를 맞아 세계의 노동계급은 의회주의 보통 선거권의 잔해 위에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세우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다른 잔재 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세워야 하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길에 서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떤 혁명적 의도와 관계없이 단지 죽어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이다. 코뮤니스트혁명의 직접적 목표를 내걸어야 하는 지금 노동계급의 유일한 과제는 바로 낡은 사회질서인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 소수이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정치에 맡기지 않고, 투쟁을 통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미래이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 선거 사기극에 맞서 선거 참여 방침이 아닌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노동자평의회와 혁명당 건설에 나서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대의제와 수동성을 강요하는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 정치를 실현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확산과 계급적 연대를 통한 노동자 자기조직화에 달려있다.
현재와 같이 노동계급이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이제는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계급의 자립과 자기조직화로 나타나야 한다. 의회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부르주아 정치 형식인 대리주의는 계급의 자립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의 영역인 의회가 아닌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부르주아 정치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의회와 선거의 신비화
자본주의 상승기에 의회는 부르주아지 조직에 가장 적합한 형태였다. 특히 부르주아 기관으로서 의회는 노동계급의 활동을 위한 주요 무대가 결코 아니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 활동과 선거운동 참여는, 지난 세기의 혁명가들이 항상 계급에 경고했던 수많은 실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아직 의제로 다뤄지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량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노동계급이 의회 참여를 통해 개량을 촉구하고, 선거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강령을 위한 선전․선동 수단으로써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부르주아 정치의 실체와 위선을 비난하는 호민관으로 의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의회는 더는 개량의 도구가 되지 못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제2차 총회에서 “정치적 삶의 무게 중심은 이제 의회의 경계를 넘어서 완전히 그리고 마침내 벗어났다."고 표현했다. 그 이후로 의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 즉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유일한 것은 신비화의 도구 역할이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방식으로든 의회를 활용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노동계급은 실질적인 정치 기능을 상실한 기관으로부터 불가능한 개량을 얻을 수 없다.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제도와 의회를 파괴하는 것이 기본 과업인 시대에, 그리고 보통선거의 폐허와 부르주아 사회의 다른 잔해 위에 노동계급이 자신의 독재를 건설해야 할 때, 의회와 선거 제도에 참여하는 것은 선거 전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죽어가는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할 뿐이다.
선거와 의회에 참여하는 것은 더는 지난 세기에 가졌던 장점을 갖지 못한다. 반대로, 그것은 특히 이른바 '노동자 정당'이 의회 다수를 장악함으로써 사회주의로 '평화적' 또는 '점진적' 이행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혁명적 의원단’을 통해 ‘내부에서 의회를 파괴’하는 전략은 그러한 활동을 수행하는 정치 조직의 타락과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결과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입증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활동이 본질적으로 전문가들의 관심사인 한, 의회는 대중의 자기 활동 공간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 간의 게임을 위한 경기장이다. 선거와 의회를 선전과 선동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전제를 유지하고, 노동계급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인 혁명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그러한 약점이 용인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의제의 유일한 과업이 바로 낡은 사회질서의 전복과 코뮤니스트 사회의 건설인 시대에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이 과업은 계급 전체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처음에 ‘혁명적 의회주의’ 전술이 주로 노동계급과 조직 내에서 과거의 무게를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전술의 비참한 결과는 그들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의회
코뮤니스트는 노동자의 자유가 의회에서 과반수 당선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갖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주의를 입법화하는 동안 지배계급이 평화적으로 기다릴 것이라고 믿는 ‘의회주의 순진함’의 환상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의 독재를 위장하는 무화과 이파리일 뿐이다.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기관은 의회 밖에서 국가 관료, 그 보안 세력,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 의회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을 잘못 다스리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환상을 준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지에 쓸모가 있다.
따라서 혁명가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싸우라고 요구하면서 의회 선거에 반대한다.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관의 파괴를 통해서만 노동계급이 완전한 표현과 조직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혁명당에 달려있다. 이것은 대표자를 단순히 노동자가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소환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의 형태를 취할 것이다. 일단 그들이 자본주의 관계의 진압을 수행하면, 평의회는 계급을 폐지하고 국가에 대한 모든 필요성을 없앨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반(半)국가적 기능을 가진 기구에서 단순한 경제 관리자로 변모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소멸'에 관해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국제주의 코뮤니스트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경제, 정치, 군사적)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뿌리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단지 부르주아지의 손에 있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의 꼭두각시 인형극에 불과하다. 그들은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주권자(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하고, 동시에 그것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선거는 부르주아지의 (의회/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인을 선출할 자유를 양보하는 행위이다. 그들이 우파든 좌파든 기껏해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줄 세력/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이러한 민주적 신비화를 지지하고,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독재를 돕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지 의회/대통령 선거의 사기극에 맞서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다시 제기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무관심과 정치적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혁명당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대통령 선출/의회 다수파 장악을 통한 정권장악은 결코 임금노동의 착취를 폐지하지 못하며, 지속할 것으로 생각하는 ‘권리’마저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직 계급투쟁의 확산만이 자본이 조금이나마 노동자에게 일부를 양보할 수 있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만이 착취 없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