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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46.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47.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셨다.
48.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리 쳤다.
50. 그를 보고, 모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51.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디어 있었다.(막6:45-52)
45. At once Jesus made his disciples get into the boat and go ahead of him to Bethsaida, on the other side of the lake, while he sent the crowd away. 46. After saying good-bye to the people, he went away to a hill to pray. 47. When evening came, the boat was in the middle of the lake, while Jesus was alone on land. 48. He saw that his disciples were straining at the oars, because they were rowing against the wind; so sometime between three and six o'clock in the morning, he came to them, walking on the water. He was going to pass them by,[d] 49. but they saw him walking on the water. “It's a ghost!” they thought, and screamed. 50. They were all terrified when they saw him.
Jesus spoke to them at once, “Courage!” he said. “It is I. Don't be afraid!” 51. Then he got into the boat with them, and the wind died down. The disciples were completely amazed, 52. because they had not understood the real meaning of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their minds could not grasp it.
45.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45. At once Jesus made his disciples get into the boat and go ahead of him to Bethsaida, on the other side of the lake, while he sent the crowd away.
주님께서 1명의 초라한 도시락을 손에 드시더니 5,000명의 장정들을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눈 비비며 다시 확인했습니다.
식량의 문제는 인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 문제가 주님의 손 안에서 어이없이 풀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누가 예수님을 곁을 떠나려 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주님은 모인 무리를 강경하게 해산시키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부터 배에 타라고 재촉하셨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를 벳새다로 정하시고 제자들부터 떠나보내셨습니다.
배에 태운 다음에 아주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는 엄청난 무리를 직접 헤쳐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바다를 등지고 산을 향해서 가신 것입니다.
그 산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일에 왜 이처럼 강경하셨을까?
홀로 남기를 바라셨을까?
요한복음은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4.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표적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6:14,15)
먹는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먼저 농사할 내 땅이 있어야 합니다.
작년 가을부터 뿌릴 씨앗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논밭을 갈고 거름 주고.......
봄에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얻기까지 땀을 흘려야 합니다.
봄에 제대로 씨를 뿌린다고 다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가을까지 수확을 기다려야 합니다.
가을까지 그 사이에 무슨 변수가 있을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뭄과 홍수 해충과 전쟁.......
그런데 예수께서 기도하시더니 한 명의 도시락을 손에 드시더니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인기 절정에 이르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제자들도 이 무리에게 동의 못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일로 강력하게 위기를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 왕으로 삼겠다는 것은 예수님을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셨습니다.
헤롯의 왕좌에 예수님을 앉혀두겠다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이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왕이실 뿐입니다.
사람들은 제 편에서 좋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전혀 달리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말을 뜻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술판과 노름판이 좋은데 부모님은 도서실로 가라는 것입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7:13,14)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곧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여기시는 일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런 오해의 가능성이 있는 기적을 애초에 베푸시지 마시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왜 베푸셨나?
요한도 이 부분에서 의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3. 예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마11:3)
자신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있는데 내가 증거 했던 예수께서 과연 그리스도이신가?
의를 행하다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데.......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11:4,5)
예수께서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를 입증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세속의 집착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최고로 좋은 세상의 대안으로 정한 것입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보장을 위한 세상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 나라를 이루려 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실 것입니다.
완전히 정반대의 목적지를 가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안 한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내가 분명히 이 말을 했는데 아무개 집사가 저 말로 잘못 알아 듣고 이상한 소문을 냈던 것입니다.
선의로 말을 했는데 악의로 해석한 것입니다.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말을 했더라도 듣는 사람의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솥뚜껑이 솥뚜껑이 아니라 자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번영신학을 꿈꾼 것입니다.
그것은 종말의 종교 현실을 이릅니다.
세속의 집착이라는 색안경을 여전히 끼고 영적 사건을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득세할 것입니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딤전6:5)
하나님의 경건을 세속의 보장책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이 전혀 엉뚱한 메시지로 전달 되는 것입니다.
그 색안경이 바로 인간의 가치관입니다.
그 안경을 벗어야합니다.
땅만 내려다보던 눈이 산을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1.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2.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시121:1,2)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이 편에서 일어나는 문제였다면 이제 이것을 말하는 이 편에서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귀신이 모를 리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동원해서 김밥 장사를 하면 좋겠지! 이것이 귀신의 소리입니다.
귀신이 사람 홀리는 일에 기적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자가 사탄이 되어서 세속 가치를 전제로 기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귀신은 진리를 왜곡합니다.
21.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23. 그러므로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막6:21-23)
그래서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인하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종말에는 그리스도를 떠벌이는 자들을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음담패설에 신성모독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말하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내용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지 주목해야합니다.
기적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신앙의 척도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 보는 자가 세상 집착의 색안경을 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탄이 기적을 애용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정확히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 계시의 완전한 방식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예수님을 제 세속의 대안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모조리 해산시키고 그들을 등 뒤로 남겨둔 채 배 타고 호수를 건너 버려야 합니다.
대형교회들을 다 해체 시켜버려야 합니다.
46.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46. After saying good-bye to the people, he went away to a hill to pray.
마가복음은 요한복음과는 달리 무리를 해체하신 다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 자체를 문제시 했다면 마가복음은 이 결정적이며 고질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문제시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님은 더 이상 이 모임이 지속될 수 없다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집단을 더 유지할 경우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고 느끼신 것입니다.
주님은 첫째 그 집단을 해산시키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기도가 유일의 대안입니다.
마가는 다른 입장에서 이 일을 보고 있습니다.
이 문제의 구체적인 대안에 비중을 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헤쳐 보내신 후에 할 일이 없으셔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45.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45. At once Jesus made his disciples get into the boat and go ahead of him to Bethsaida, on the other side of the lake, while he sent the crowd away.
본문에서 “곧”(유데오스)와 “재촉하여”(에나그카센)는 억누르다, 강권하다, 강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곧 주섬거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집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강권하셨습니다.
가게를 냈다면 물건을 살 목적으로 사람이 모여들어야 합니다.
아이쇼핑 말고!
학원을 세웠다면 공부할 학생이 와야 합니다.
출석을 했지만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는 학생 말고!
교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 배가가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이 교회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명감을 가지고 배를 산으로 끌고 가게 하는 몇 가지 원인들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기도한 대로 응답이 왔다며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단히 동일시 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니올시다.
응답의 여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일은 치명적입니다.
그러다가 천국문 앞에서 재앙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3)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이런 치명적인 말씀을 듣게 된 것은 그들이 드렸던 기도들이 잘 응답 되었기 때문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2Many will say to me on that day,‘Lord, Lord, did we not prophesy in your name and in your name drive out demons and in your name perform many miracles?’
황당한 현실에 접한 이 사람에게 기도 응답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된 생각을 해 보았을 텐데.......
둘째로 그것이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면 검증할 필요 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입니다.
예언은 했는데 막상 그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 입이 주님을 부르자 귀신이 튀어 나갔는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기적이 자신을 통해 일어났는데 오히려 그 일이 헛된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셋째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 했는데 그들이 주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다시 이르지만 사람들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과 기적이 별 상관이 없는 줄을 꿈에도 모르고 쓸데 없는 짓에 몰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눅10:20)
귀신이 나가는 것 또 하나님의 나라에 내 이름이 기록된 것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이 내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 동사무소에 주민등록이 되어있다는 말과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래도 저래도 많이 모이면 그만이라는 대형교회들이 적그리스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나를 수렴시키는 일입니다.
나라는 작자가 첫째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분의 뜻을 요리조리 피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교정하는 일이 기도입니다.
첫째의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두 번째의 기도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그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십자가를 감당하게 해주시옵소서!
남의 변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나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피해 다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14.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롬7:14-19)
간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냈다고 해도 그 일을 하기를 도리어 원하지 않고 악한 일을 골라서 하는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 즉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주님조차 그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은 기도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강한 의지를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물론 주님은 이미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계셨고 이 잔을 감당케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6)
서로 예수님을 말하면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바로 그런 셈입니다.
둘 다 주님을 부르면서도 주님과 상관도 없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싸우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세속의 소유를 추구하며 원수 사랑할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남과 북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가 왜 싸웁니까!
이데올로기가 형제를 죽여도 된다는 정당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데올로기가 하나님 계명의 상위 가치입니까?
주님의 생명 사랑의 계명을 최상위에 두는 사람을 두고 기독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땅따먹기 하지 맙시다.
그 일로 형제를 죽이지 맙시다.
47.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셨다.
47. When evening came, the boat was in the middle of the lake, while Jesus was alone on land.
주님은 산에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 때의 경험입니다.
또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경험입니다.
꼼짝없이 배 안에만 갇혀있는 답답한 경험입니다.
거기에서 미친 바람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을 하게 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을 폭우 가운데로 보내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이 땅에서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거친 사나이는 낯간지러운 쑈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진실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너는 절대로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3.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3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26:33-35)
닭이 울자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자신은 주님과 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밤이었습니다.
배를 타더니 물 위에서는 전혀 딴소리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을 포장했던 포장지가 훅 날아 가버린 것입니다.
뼈 속 깊이 절감했습니다.
탕자도 그랬습니다.
자신은 아버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 있게 제 것을 챙겨서 멀리 집을 떠났습니다.
돼지우리에서 참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참 나를 보기 전에 그는 참 아버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참 아버지를 고백했던 이는 돼지 똥 냄새에 절어있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 똥 냄새의 기억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계를 고백하지 않는 자에게 주님은 진노하십니다.
쓸데없이 주님이 그들을 돼지우리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10.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요일1:10)
자기 한계 즉 죄인이 제 죄를 시인하지 않은 것은 죄를 지은 것보다 더 악랄한 일입니다.
다시 더 큰 일을 내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일본만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거기에 초대받지 못한 유일한 국가입니다.
거기에는 강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저들이 전쟁을 통해 저질렀던 일들을 함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원폭 피해자라고 선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8년 아베가 이스라엘 방문 때에 아베를 구두 초코렛에 음식을 담아 대접했습니다.
모독스러운 접대였습니다.
제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은 신발에 밥을 넣어서 대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유대와 똑같이 당했는데 뜬금없이 우리나라 기업을 보고 전쟁 피해 배상을 대신 하라고 했습니다.
배상의 요구는 단순히 돈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대해 개인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지은 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지리 짓을 하고 있습니다.
천공과 그 무리들은 아니겠지만 기독교는 역사를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수백 년이 아니라 수천 년 전의 출애급 이야기를 아마 지금 주일 아침 11시에도 수만 교회에서 수억 교인들을 앉혀두고 하고 있을 것입니다.
친일하는 사람들은 기독인이 아닙니다.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거짓말을 적극 돕고 있는 사람은 기독인이 아닙니다.
48.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48. He saw that his disciples were straining at the oars, because they were rowing against the wind; so sometime between three and six o'clock in the morning, he came to them, walking on the water. He was going to pass them by,[d]
주님은 멀리 떨어진 산 위에서 호수의 제자들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뭍으로 오셨습니다.
거기에서도 주님의 눈이 호수 가운데 제자들을 훤히 보고 계셨습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 치겠습니까?
8.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9.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10. 거기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139:7-10)
예수께서 산에 계시나 뭍에 계시나 제자들의 모습이 다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제자들에게 주님이 안 보이는 것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을 발 앞의 돌부리를 못 보고 꼬꾸라지는 사람 눈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어부들입니다.
배 타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그들이 했던 일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신들의 과학 지식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배에 관한 한 자신하고 있었듯이!
과학이 뭐든지 해줄 줄로 압니다.
그런데 해일이 한 번 일어나자 그 과학의 이기가 순식간에 재앙으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대안이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실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물리 책을 조금 접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 일이 터지니 하다 하다가 이제 그 핵 국물을 바다에 다 퍼부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제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불나방처럼 불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내용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언자들이 어려워서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안 지으면 그런 위험을 사라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단해!
원자력 발전소 짓지 마!
이 시대의 예언입니다.
에어컨 덜 켜!
식구마다 한 대씩 가진 자동차로 자랑삼지 말고
교회가 선물 공세 하지 말고
우리 집에 목사 위임 장로 장립 권사 위임 쓰인 우산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많다고 새 것을 버릴 수도 없고.......
마구잡이로 대형 건물 짓지 말고
먹방 하지 말고
쓸데없는 과대 포장하지 말고.......
그렇게 소비를 줄이면 원전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실은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소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원전을 계속 짓는 짓은 자신의 죄와 부족을 아직도 시인할 의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촛불로 뛰어들었는데 이번에는 횃불로 뛰어들겠다는 것입니다.
제 약함과 죄를 인정하는 이 일은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떠나 제 밑바닥 바로 그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호수에 거친 바람 불게 하시고 거기에 배 타고 가게 하신 주님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밝히시고 계셨습니다.
고난을 지나야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71.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119:71)
고난을 지나자 영의 시력이 0.2에서 1.0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셨을 것입니다.
바다 위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시던 분은 그 배를 바람에 흔들리도록 놔두시고 그냥 지나치려 하셨습니다.
그 상황이 용광로의 금속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인간들이 고문당하는 것 같은 고난에서 자신을 끓이면서 순도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찌꺼기는 위로 뜨고 금은 밑으로 가라앉도록 광석을 넣은 다음에 용광로를 마구 끓여야 합니다.
사사기는 범죄 타락 징계 회개 구원의 선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험한 독재를 당하고도 역시 말도 안 되는 독재를 다시 택한 것입니다.
이 반복되는 역사가 때로 답답하게 보이지만 또다시 이 미친 바다를 경험하고 주님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더 많은 고난당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그냥 그 바다에 놔두고 가시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들이 아직 덜 끓었는지 이 정도면 다 끓인 것인지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러시다가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우리는 하나님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상황 보장을 받으려는 자들이 허다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세요.
제자들을 호수 가운데로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그 밤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했습니다.
죽을 뻔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확인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육지에서 만난 예수님은 바다의 폭우 속에서도 똑같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장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들은 거기에 가지도 못하고 타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펄펄 끓는 곳에도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22. 왕의 명령이 그만큼 급하였다. 화덕은 매우 뜨거웠으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들도 그 불꽃에 타서 죽었다.
23.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은 묶인 채로, 맹렬히 타는 화덕 속으로 떨어졌다.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 모사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화덕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임금님."
25. 왕이 말을 이었다. "보아라,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화덕 안에서 걷고 있고,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없다! 더욱이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과 같다!"(다3:22-25)
그들이 그 불 속에서도 끄떡없었던 것은 거기에도 넷째 사람이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49.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리 쳤다.
49. but they saw him walking on the water. “It's a ghost!” they thought, and screamed.
사람의 형상이 바다 위로 걸어 오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그 때 유령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을 확인 못해서 유령이라고 소리 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확인했더라도 그렇게 소리 쳤을 것입니다.
유령이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상식을 가지고 상황을 이해합니다.
우리 경험한 것 안에서 상황을 판단합니다.
하나님까지 죄인의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유령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상식을 버리지 않으면 의의 나라를 볼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은 이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교하자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가 낮고 천한 피조물을 위해 희생당하실까!
그 희생으로 내 죄가 흰 눈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능자의 사건이 내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용서되는 사건!
인류의 역사만큼 확인했던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틀림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게 되면 틀림없이 흙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육신이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경험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부활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예수님은 무리로 모으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시다가 예수께서 인기 절정에 이르시면 주님은 무리를 뒤로 남겨두시고 배 타고 호수를 건너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또다시 한 무리가 되면 주님은 또다시 반대편으로 배를 타고 가시는 것입니다.
모으셨다가
흩으셨다가
정말 정신없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그들의 신앙이 커갔던 것입니다.
첫 번째 광풍에서는 베드로가 이 분이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두 번째 바다에서 베드로가 이제 저도 주님처럼 물 위로 걷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인류 역사에 한 2,3분 물 위를 걸어본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예수께로 갔다.(마14:28,29)
그 경험 후에 베드로는 수시로 바다 위를 걸어다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세상도 있다는 것을 베드로가 우리를 대표해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한 2,3 분 간!
지금 이런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땅에서 바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나라가 없었더라면 되는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니 내 눈에 보이는 풍요를 남의 것도 빼앗아 내 것으로 삼고 나만 다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내 출세가 목표였습니다.
내 출세가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자 이전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그 나라의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 입구에서 사랑하며 정의롭게 살았는지 내 입장권을 조사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만 천국문을 통과시키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적을 만나면 하나님 나라 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고 맙니다.
그 입장권을 준비할 생각을 잊고 맙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이 땅의 소명을 치명적으로 잊어먹고는 합니다.
4.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5.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채 끝내지 않았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마17:4,5)
잠시 하나님의 나라를 보더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일을 잊은 것입니다.
10. 예수께서 올라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사람 둘이 그들 곁에 서서
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행1:10,11)
천사가 이 말을 했습니다.
“하늘 쳐다보다가 시간 다 간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그 소명을 온전히 감당한 사람을 뽑아서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에 동참케 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5.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요11:25-27)
이단들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몰상식을 밥 먹듯이 강조합니다.
코로나 때 신천지를 보세요.
대구를 난리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자신이 당장에 이 땅과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초월적인 존재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순교를 각오하는 일관된 행동을 보였어야 했습니다.
코로나 다 전염시키고 자신들이 곤란에 처하자 제 잘난 주장을 버리고 교주가 친히 나와서 비굴하게 큰절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몰상식이 아닙니다.
실은 하나님의 나라는 고도의 윤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43.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일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45.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행2:43-45)
저만 살자고 제 것만 챙기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나보다 공동체를 생각했습니다.
초대 기독교 공산사회를 보면 제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방언으로 일상 언어를 삼고 평소에는 입신해서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50. 그를 보고, 모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50 They were all terrified when they saw him.
Jesus spoke to them at once, “Courage!” he said. “It is I. Don't be afraid!”
그들이 유령이라고 소리치면서 그렇게 무서워했던 것은 주님을 보면서도 주님이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육지에서 본 예수님을 바다에서 못 알아 본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다.” 주님의 이 단 한 마디가 그들을 모든 위기에서 건지셨습니다.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위기에서 건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폭우라는 현상을 그들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셨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확인하자 폭우에 대한 입장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나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예수님의 “나다.”라는 한 마디에 베드로는 배 밖으로 자신의 발을 내디뎠습니다.
베드로가 공포심을 느끼며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서 배 밖으로 떨어질까 보아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배 밖은 그에게 죽음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확인한 베드로는 제 발로 배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죽음의 현실로!
왜?
“나다” 그 한 마디 때문에.......
거기를 걸어 다녔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달리 보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날았다가 뒤집어지는 롤러코스트를 돈을 내고 탑니다.
왜?
롤러코스트니까!
그들은 그 광풍 가운데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43:2)
부흥회에서 소리 크게 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 많이 흘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교회당 안의 사건이 아닙니다.
미친 바다의 사건입니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을 매사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미친 바람 부는 장소는 분명히 죽을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을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나다.”
물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그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나가는 기드온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네 군대를 다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겨라.
이 상황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때 거기에는 배 안에서 나 빠져 죽는다고 파랗게 질린 사람과 중력의 법칙을 역행하여 물 위에 서신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한 쪽에는 중력이 작용했고 다른 쪽은 중력의 법칙을 발로 딛고 서 계셨습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한 가지만 보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두 현실 앞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그 풍랑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계시는 한에서 광풍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도 여기 이 나라처럼 틀림없이 중력의 법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중력 법칙이 여기처럼 적용되지 않는 곳입니다.
51.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
51. Then he got into the boat with them, and the wind died down. The disciples were completely amazed,
주님은 바다 위라도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다 위에 아주 서 계셨던 것이 아니라 배 위로 올라오셨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기적을 행하시면서 사신 것이 아닙니다.
이슬만 마시시고......
정확한 %를 말할 수 없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식량을 해결하시고 물 위를 걸어 다니시고 그런 기적을 누리신 것은 한 1% 되셨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화장실부터 가시고 일상을 사신 것이 한 99% 되셨을 것입니다.
기적이 연속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의 법칙을 만드셨고 우리를 그 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코로나가 오면 병 걸리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상으로 되돌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배에 올라오신 후에 피곤 때문에 또다시 엄청나게 깊은 잠에 빠지셨을 것입니다.
이 번에는 배에 타시고 전처럼 바다를 향해 꾸중하신 적도 없습니다.
바다는 스스로 잠잠해졌습니다.
타이타닉호도 똑 같이 폭우를 만났습니다.
거기에 타신 목사님 한 분이 자신의 구명조끼를 믿지 않은 사람에게 벗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에게는 중력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니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배 타이타닉에서 나를 살려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간증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목사님 구명조끼를 얻어 입고 살아난 그 사람의 간증입니다.
그런데 이 구명조끼를 벗어 준 이 목사님은 같은 상황을 전혀 달리 간증하실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죽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디어 있었다.
52because they had not understood the real meaning of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their minds could not grasp it.
그들은 호수 중앙에서 거센 바람을 만나서 죽는다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인상 쓰고 서로 덤벼들고.......
그런데 주님이 오시니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누구나 예수님이 왕이 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엊저녁에 왕으로 모시려던 예수께서 몇 시간이 지나서 장소가 바뀌자 그들 눈에 유령으로 보였습니다.
주님은 도시락 하나로 수 만을 먹이시는 밥 만드는 전공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젯밤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주님께서 이 땅을 지으신 창조자시라는 것입니다.
즉 빵의 기적을 본 사람은 바다의 기적도 예측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그 뭍에서 불러도 하나님이시며 또한 바다에서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목회자의 자리에 있을 때 여러분들은 직장에 계십니다.
육지에 계셨던 주님은 바다에도 계십니다.
구하세요.
목사의 기도를 더 잘 받아주신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고 믿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봉성에서 였습니다.
한 초신자가 저와 무슨 대화를 나누다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 말을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눈을 감고 기도하면 그 때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안 그러시냐고 저에게 질문하며 흘끗 나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의아해서 되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진짜예요?
그런데 그 분은 저를 보고 이상하다? 목사님 한 번 눈을 감아봐요. 안 보여요? 왜 안 보이지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뭐 저래.!
덧붙여서 저에게 말하기를 기도를 위해 눈을 감으면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목사가 신앙의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구하시면 됩니다.
9.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잠28:9)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고 내 하고 싶은 대로 기도드리면 그것이 역겨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바다의 고난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신앙의 한 단계(Level up) 올라선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신앙을 한 단계 올립니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27.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하는가?"(마8:26,27)
첫 번째 배를 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누구냐고 묻던 사람들입니다.
이 배를 두 번째 타고 호수를 건널 때였습니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어서 경배드리고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였다.(마14:33)
그들은 이전까지 예수님을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불렀을 그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배를 두 번 타더니 이제 예수님께 공개적 첫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생사를 오가던 바다의 경험이 그들로 신앙의 한 단계(level up)를 올라서게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