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今書籍之多 盖緣類與選耳 一切書籍 摘行綴句 入此出彼 改頭換面 類書尤無好者 選書亦多 而大同小異 淵鑑類凾 爲類書之大家 康煕命儒臣張英等一百三十餘人編之
고금(古今)에 서적이 많아진 것은 대개 유서(類書)와 선서(選書)가 나오기 시작한 데에 연유하였다. 일체 서적에서 글줄과 구(句)를 뽑아내어 여기에는 넣고 저기에 빼고 해서, 앞머리를 고치고 면(面)을 바꾸기도 하였다. 유서는 더구나 좋은 것이 없고, 선서도 많기는 하지마는 대략은 같으면서 조금씩만 다를 뿐이다. 《연감유함(淵鑑類函)》이 유서의 대가(大家)인데, 강희(康熙)가 유신(儒臣) 장영(張英) 등 1백 30여 명에게 명(命)해서 편찬한 것이다.
凡四十三部四百五十卷 目錄四卷 康煕親序之曰 昔者孔子之繫易也 曰方以類聚 又曰 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則各從其類也 於諸卦則曰 其穪名也小 其聚類也大 盖以天下古今事物之理 畢具於易 而易之爲書 因理象物 因物徵辭 以斷天下之疑 而成天下之務者 各從其類以明之 然則類書之作 其亦不違於聖人立言之意歟 書之最著者 藝文類聚 北堂書鈔 初學記白帖 杜氏通典
무릇 43부(部) 4백 50권이고 목록이 4권이다. 강희가 친히 서문하면서, “옛적에 공자께서 《주역(周易)》계사(繫辭)를 지었는데, ‘방(方)은 유(類)로써 모인다.’ 하고 또 ‘하늘에 근본한 것은 상(上)에 친하고 땅에 근본한 것은 하(下)에 친해서 각각 그 유를 따른다.’ 했고, 계사(繫辭)에는 ‘그 일컬은 이름은 작으나 그 유를 모은 것은 크다.’ 하였다. 대개 천하의 고금 사물(事物)의 이치가 《주역》에 다 갖추어져 있는데, 《주역》이라는 글은 이치에 의해서 물(物)을 형상(形象)하고 물을 인해 말을 징험해서 천하의 의심을 결단하고 천하의 일을 이룩한 것으로 각각 그 유를 좇아서 밝힌 것이다. 그러니 유서를 꾸민 것도 또한 성인의 입언(立言)한 뜻에 어김이 없는 것인가. 유서로서 가장 드러난 것은 《예문유취(藝文類聚)》․ 《북당서초(北堂書鈔)》․ 《초학기(初學記)》․ 《백첩(白帖)》․ 《두씨통전(杜氏通典)》이다.
宋明以來 撰者寢廣 若博而不繁 簡而能覈者 抑亦鮮矣 獨兪安期唐類凾 頗稱詳括 大抵祖述歐陽詢之類聚 稍刪存書鈔,初學記,白帖,通典而附益之 安期 明人也 而曰唐類凾者 以其皆唐輯也 旣缺宋以來書而唐以前 亦有脫漏者 爰命儒臣逖稽 旁搜泝洄往籍 網羅近代 增其所無 詳其所畧云云
그러나 송 나라․명 나라 이래로 편찬한 것이 범위와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번거롭지 않거나 간략하면서도 핵실(覈實)한 것은 드문데, 유안기(兪安期)가 엮은 《당유함(唐類函)》만이 제법 상세하게 궁구되어 있다. 대저 구양순(歐陽詢)이 꾸민 《유취(類聚)》를 근거하고 《서초》․ 《초학기》․ 《백첩》․ 《통전》을 조금씩 깎고 두어서 붙여 보탠 것이다. 안기는 명(明) 나라 사람이면서 《당유함》이라 한 것은 그것이 모두 당 나라 때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송 나라 이후의 글이 빠졌고, 당 나라 이전 것도 빠진 것이 있다. 이에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멀리 상고하고 널리 찾아서, 옛 서적을 구하고 근대(近代)의 것도 망라(網羅)하여 없는 것을 보태고 간략한 것은 밝혔다.” 하였다.
其凡例曰 原本唐類凾所載藝文類聚,初學記,北堂書鈔,白帖 旁及通典,歲華紀麗諸書 此皆初唐以前典故藝文 今自唐初以後 五代宋遼金元 至明嘉靖年止 所采太平御覽,事類合璧,玉海,孔帖,萬巷谷,事文類聚,文苑英華,山堂考索,潛確類書,天中記,山堂肆考,紀纂淵海,問奇類林,王氏類苑,事詞類奇,翰苑新書,唐詩類苑及二十一史,子集裨編 咸與蒐羅 悉遵前例 編入原本類凾 以藝文類聚居一 初學記居二 北堂書鈔居三 白帖等書居四 而以詩文殿之 今以釋名總論 沿革緣起居一 典故居二 對偶居三 摘句居四 詩文居五
범례(凡例)에는, “원본 《당유함》에 《예문유취》․ 《초학기》․ 《묵당서초》․ 《백첩》이 기재되었고, 《통전》․ 《세화기려(歲華紀麗)》등 여러 글이 곁들여져 있으나, 이것은 모두 당 나라 초기 이전의 전고(典故) 예문(藝文)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당 나라 초기 이후로부터 오대(五代 후당(後唐)․후량(後梁)․후주(後周)․후진(後晉)․후한(後漢))․송․요(遼)․금(金)․원(元)과 명 나라 가정(嘉靖) 연대까지로 했는데, 채록(采錄)한 것은 《태평어람(太平御覽)》․ 《사류합벽(事類合璧)》․ 《옥해(玉海)》․ 《공첩(孔帖)》․ 《만화곡(萬花谷)》․ 《사문유취(事文類聚)》․ 《문원영화(文苑英華)》․ 《산당고색(山堂考索)》․ 《잠확유서(潛確類書)》․ 《천중기(天中記)》․ 《산당사고(山堂肆考)》․ 《기찬연해(紀纂淵海)》․ 《문기유림(問奇類林)》․ 《왕씨유원(王氏類苑)》․ 《사사유기(事詞類奇)》․ 《한원신서(翰苑新書)》․ 《당시유원(唐詩類苑)》및 21사(史)와 자집 패편(子集稗編)을 다 수집하고 죄다 전례(前例)를 따라 엮어 넣었다. 원본 《유함》에는 《예문유취》가 첫째이고, 《초학기》가 둘째, 《북당서초》가 셋째, 《백첩》등 글이 넷째이면서 시문(詩文)이 뒷마무리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석명(釋名)․총론(總論)․연혁(沿革)․연기(緣起)를 첫째로, 전고를 둘째로, 대우(對偶)를 셋째로, 적구(摘句)를 넷째로, 시문을 다섯째로 했다.” 하였다.
余以爲富贍廣博 不可勝言 然大明事實及詩文 比諸它代 收入頗畧 是可欠也 夷字或易以彜 或書以𡗝 亦陋習也 玄字易以元 曄字闕華之縱画 盖彼(彼似避)康煕諱也 胤字亦缺乙
나는 생각하기를 풍부하고 광범위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 없으나 대명(大明) 시대의 사실 및 시문이 여러 시대와 비교해서, 수록된 것이 자못 소략(疏略)하니 이것이 흠될 만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夷) 자를 혹 이(彝)로 바꾸고 혹은 이(夸)로 썼음은 고루(固陋)한 버릇이었다. 현(玄) 자를 원(元) 자로 바꾸고 엽(曄) 자에 화(華)의 내리긋는 획을 없앤 것은 대개 강희(康熙)의 이름자를 피한 것이었다. 윤(胤) 자에도 을(乙)이 없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