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允明 通訓大夫壬寅(1602,선조35)宰甲辰(1604,선조37)繡衣啓罷
金允明 1545 1606 順天 守愚 松磵
金允明 1545 1606 輓金守愚 挽詞 高尙顔 泰村集
泰村先生文集卷之二 / 輓詞 / 輓金守愚
君宰花林我天嶺。一生愁阻幸相隣。
盍簪行樂纔期歲。解綬分攜已再春。
離情竟作終身恨。別日還爲永訣辰。
把酒論懷今已矣。東風回首獨霑巾。
.....................
김윤명(金允明)
[생원]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59위(89/100)
[
자(字) 수우(守愚)
생년 을사(乙巳) 1545년 (인종 1)
합격연령 24세
본인본관 순천(順天)
거주지 안동(安東)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박(金愽)
품계 : 건공장군(建功將軍)
[안항(鴈行)]
형(兄) : 김윤흠(金允欽)[生]
제(弟) : 김윤문(金允文)
제(弟) : 김윤사(金允思)[進]
제(弟) : 김윤안(金允安)[生]
[출전]
『융경2년무진년증광사마방목(隆慶二年戊辰年增廣司馬榜目)』(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고350.48 융01])
.....................
桐溪先生文集年譜 / [附錄] / 系圖後錄
曾祖諱玉堅字不磷。景泰庚午生。事父母至孝。居喪哀毀踰制。啜粥。廬墓三年。成廟朝道臣薦行誼。除司圃署別提。
時權奸用事。見幾斂退。隱德不仕。晩築凌虛亭于鶴潭上。爲終老休息之所。自號蠖溪居士。與一蠹鄭先生,琴齋姜先生爲道義之交。享年七十七丙戌九月二十四日卒。明世宗皇帝嘉靖五年我恭僖王二十一年。後以曾孫文簡公貴。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今上三年癸亥。享金溪鄕祠。墓在黃山生員公兆次。配淑人慶州金氏。司憲府執義楣之女。別葬南原北谷里本黨族山。有一子泂。繼室密陽朴氏。禦侮將軍思榮之女。咸陽郡守仁老之孫。祔葬公左。有三子。曰湛。曰淑。曰澣。
......................
嶠南誌卷之六十 安義郡 人物 (逸薦)(李朝)
權時敏 號三槐堂成廟進士以行誼薦洗馬群小弄權見機斂退與姜漢鄭玉堅 講磨道義
......................
위천면지 제1장 유현(19명) 정옥견(鄭玉堅)
이조 성종 때의 학자로 자는 부린이고 학계는 선생의 호다. 초계정씨 입안조 생원 정제안의 손으로 서기1450년에 출생하였다.
학문이 깊고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행의가 돈독하여 세인의 추천으로 중직대부 사포서별제에 잠시 임하였다가 간사한 권신의 농간질이 거슬려 이내 낙향하였다.
향리 사마리 학담 위에 능허정을 지어 장수지소로 삼고 학문 탐구에 몰두 백가서에 통달하였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 헌공께서 안음현감으로 재임할 때 이곳 능허정을 찾아와 자연천리를 즐기며 풍영하고 돌아가 이삼자에게 말하기를 내 오늘날 증점과 더불어 뜻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백세에 두 선생의 뜻이 같고 도가 합하였음을 짐작케 된다.
선생은 만년에 불 고대에 오르고 학담과 능허정에 노닐며 소요하다가 서기1526년 9월24일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통훈대부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사림들이 선생의 행의를 존모하여 금계서원에 봉향하였다.
위천면지 제1장 유현(19명) 권시민(權時敏)
안동 인으로 자는 달이 호가 삼괴 당이라. 서기1464년에 삼가에서 성균 생원 전옥서봉사를 지낸 금석의 아들로 태어나 한 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서기1483년에 사마시에 등과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의가 돈독하여 제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또한 서기1498년 무오사화에 괴란이 지나갈 때까지 질서를 견수하였다. 조정에서 세마벼슬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은둔하였다.
선생은 목사 초계인 정종아의 여서로 처향인 사마리로 내려와 그곳에 집을 짓고 뜰에 괴목 세 그루를 심어 삼괴당이라 이름 하였다. 임천에서 요산요수하였으며 강금재 정확계 등과 더불어 강마도의 하다가 서기1523년에 세상을 떠났다. 서기1780년에 사림들이 추증하여 학림서원에 향사하였다.
......................
朴汝樑 1554 1611 三陟 公幹 感樹齋
鄭慶雲 1556 16?? 晉州 德顒 孤臺
鄭蘊 1569 1641 草溪 輝遠 桐溪, 鼓鼓 文簡
鄭弘緖 1571 1648 河東 克承
朴明榑 1571 1639 密陽 汝昇 知足堂
劉瓘 1484 1542 居昌 瓘之
劉友參 1519 1577 居昌 魯叔
유덕개(劉德蓋) (153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유학 유우삼(劉友參)의 아들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를 지냄.
*劉德蓋字施普丁酉生居昌人父友參子誠甲敬甲子孫居安義鹿峰
明宗丁卯中進士許多文字盡失於龍蛇之變惟光州瑞 石山與高霽峰相和詩而已讀其書孝愛之心愛然於篇 上誦其詩沖和之氣鏗然於句裏以之事君必致忠烈
*劉敬甲字一初庚午生父德蓋子希道子孫居安義鹿峰
光海壬子中進士贈通政大夫掌築院正性度剛直文章 有餘出劉氏世德篇以公之性度文章適際昏朝終不大殿而蒙三品典于身後於公則無損后生痛情何已哉
劉以泰
조선 후기 명의(名醫)⋅어의(御醫).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원(伯源)이고, 호는 신연당(新淵堂)⋅인서(麟西)⋅원학산인(猿鶴山人) 등이다. 정유재란 때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병장
유명개(劉名盖)의 현손이고, 나라로부터 복호를 받은 효자
유유도(劉有道)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유윤기(劉潤祺)이고, 어머니는 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의립(李義立)의 손녀 강양 이씨이다. 가문과 왕실 기록에는
劉以泰, 저서에는 劉爾泰로 기록되어 있다.
鄭蘊 1569 1641 草溪 輝遠 桐溪, 鼓鼓 文簡
박장원 1612 1671 1642~1644안음현감 1655 용산칩거 1658상주목사
우형(禹悙)[1567~1652]의 자는 군면(君勉), 호는 눌계(訥溪)·눌계재(訥溪齋)이다.
禹汝楙 1591 1657
난곡(蘭谷) 우석일(禹錫一)[1612~1666]
우석일(禹錫一)[1612~1666]의 자 자행(子行), 호 난곡(蘭谷),
洪鎬 1586 1646 缶溪 叔京 無住, 東洛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43 봄, 예조 정랑이 되다. ○ 겨울, 安陰 縣監이 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45 사예가 되다.
姜漢 1454 ? 晉州 宗于 琴齋
金宏弼 1454 1504 瑞興 大猷 寒暄堂, 簑翁 文敬
朴承元 鄭復顯 盧祼 林希茂
朴公承元
鄭公復顯
盧公祼
林公希茂
姜翼 1523 1567 晉州 仲輔 介庵, 松庵
鄭復顯 1521 1591 瑞山 遂初 梅村, 敬齋
노관(盧祼) (1522~1574)
임희무(林希茂) (1527~1577)
安義司馬案
權時敏字達而天順甲申(1464,세조10)生號三槐堂安東人成廟癸卯姜渾同榜生員父金錫奉事子逸進士正郞子孫居安義咸陽三嘉
受業於寒暄金先生之門讀書窮理躬行實踐爲務雅好山水有詠歸自得之趣未嘗以世事自累於心士林從遊者入其室如至鄒魯文章行誼爲諸賢所推重享鶴林祠
林得蕃 1478 1561 恩津 衍卿 石泉
林得蕃 1478 1561 先府君行狀 行狀 林薰 葛川集
姜漢 1454 ? 晉州 宗于 琴齋
嶠南誌卷之六十
安義郡
人物(文科)(高麗)
河千 高宗時人性質直長文章一時表箋皆出其手
朴德祥 官尙書
李芮 性忠孝學行純備官判書謚文質
李仁達 芮子官判書
李忠達 芮子官左尹
朴習 德祥子麗季進文判書 (李朝)
林整 恩津人太祖朝文科官西京都巡問察理使
朴義卿 習子 太宗朝文正言
鄭以雅 提學悛孫端廟文校理 李秤 忠達子成廟文持平至大諫
曺淑 號竹軒中 廟進文府使遊林得蕃門講質道義與蘇齋廬교001守愼林塘鄭惟吉相追隨
金埏 中廟文佐郞
劉德蓋 宣廟 進文正字
吳勣 宣廟文府使
朴明榑 密陽人號知足堂宣廟文禮參歷都承旨參宣武勳按湖西蒙褒諭 仁廟丙子巵駕南漢斥和議歸遯花林洞構弄月亭於鍾潭上贈吏判有文集
禹汝楙 悙子號涑川仁廟進文縣 監親沒不復仕作洪範羽翼二十八篇及衍義八篇 鄭東望 顯廟文察訪 愼認明 守彝子文持平 愼 性眞 認明子文承旨 愼必復 守彝曾孫文執義 李相龍 文正言 李敏實 文判校
(逸薦)(李朝)
鄭玉堅 悛曾孫號蠖溪學問精深誠孝篤至親喪啜粥廬墓成廟薦司圃別提見權奸用事退德鶴潭以終贈執義
權時敏 號三槐堂成廟進士以行誼薦洗馬群小弄權見機斂退與姜漢鄭玉堅 講磨道義
林薰 得蕃子號葛川德器夙成早知聖天一理之學從南冥曺植講敬義成廟以孝命旌吏判宋麟壽薦 四授參奉承召力薦退溪李滉以庸學九經八條啓齊治要 道上特許以至論命手寫所啓以進備觀省與金範討賊僧 普雨宰彦陽疏祛六弊卒判決事贈吏判謚孝簡有文集門人鄭惟明撰狀
林芸 得蕃子號瞻慕堂行學著明居 喪盡禮中廟命旌銓曹五薦除參奉
成彭年 兵使允同孫號石谷幼有才器遊林薰門窮探經史宣廟中生進倡 義授敎官不就贈侍平
愼守彝 權后號黃皐早劬經理遊陶菴李縡門見待以高友親病嘗糞斷指及喪廬墓 薦除童敎
신돈항(愼敦恒, 1743~1809)
金宇宏 1524 1590 義城 敬夫 開巖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42 8월, 僧 普雨를 탄핵하는 소를 올리다. ○ 9월, 차자 金達可가 태어나다.
盧禛 1518 1578 豐川 子膺 玉溪, 迂齋, 則庵, 養休 文孝
鄭惟明1 1539 1596 草溪 克允 嶧陽
......................
......................
위천면지 제1장 유현(19명) 권건(權湕)
선생의 관향은 안동이요 자는 처지이며 호가 노천이다.
서기1551년에 삼괴당 시민의 증손으로 명문 출신이며 천품이 준수하고 총명하여 어릴 때 학당에서 하나를 듣고 셋을 깨달아 많은 칭송을 받은바 있다. 오경의 낙민지서로 학문을 강마하였고 하락 태극 두 그림을 벽에 걸어 심지를 맺고 효우를 돈독히 하며 평생을 글과 함께 하였고 애경으로부터 백가지에 이르기까지 주문공의 가례에 의하였다.
선조임진에는 강능에 출행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왜란의 급보를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남긴 장시 한편이 있고 그의 묘도비문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는 도체찰로 여러 향민들과 함께 황석산성에 입성한바 있으며 무력이 아닌 글로써 적을 퇴각케 하였다 한다.
일찍이 임갈천과 노옥계 양 선생에게 배웠고 정한강과 사귀었으며 정동계와는 종신 지교하였다. 선생이 1605년에 세상을 떠나니 동계정온이 조문지어 가로되 “총명하고 너그러운 자태에 자상하고 개제의 덕을 겸하였도다.” 존현은 한결 같이 아름다운 성에서 나오고 애우는 막언 아니함이니 일찍이 의귀를 알아 갈천 옥계의 문호에서 분주하였다. 가세도 넉넉하고 스승과 벗도 근하였건만 하늘이 그 수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55세의 수명을 독촉하였으니 복은 선의 이치인데 이 불행이 왼 일인가 하며 슬퍼하였다.
위천면지 제1장 유현(19명) 곽인(郭訒)
본관은 청주로 자는 경민 호는 원암이다. 1563년에 삼가에서 태어나 15세 때 종숙 회성의 양자로 안음 원학동에 왔다. 천품이 준수하였고 효성이 남달랐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늙은 양친을 보살피고 봉양함에 보는 이로 하여금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석곡 성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문간공 정선생과 더불어 경서를 탐구하였으며 도의를 강마하였다. 문간공이 해도에 유배 되었을 때 어미 없는 나라에서 갓을 쓰고 다니는 자들이 정인홍 이첨에게 절의를 버린 채 아부함에 선생은 글을 보내어 위로하기를 부강직절은 반드시 신명의 가호가 있어 죽음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 했다.
선생의 생활신조인 예극삼사가 있었으니 그 첫째가 거짓으로 꾸밈이 없고 둘째로 사람과 사귐에 차등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세 번째로 항상 평온하게 순리에 따라 살았다. 오직 큰 뜻을 자연의 아름다움에 붙이고 평범하게 살다가 서기1615년에 세상을 떠나니 후에 사람들이 추증하여 학림서원에 향사 하였다.
위천면지 제1장 유현(19명) 신수의(慎守彛)
선생의 관향은 거창이며 자는 군서 호는 황고라고 세인들이 일렀다. 요수신권의 5대손으로 서기1688년에 출생하였다. 도암 이재를 스승으로 뫼시어 성연의 학문인 정주학을 탐구하여 위학이 널리 군서에 달하여 남주의 대표라 하였다.
송운평과 송역천 제현과 강마도의 하였고 수신제가와 불우이웃 구휼에 힘쓰니 감사가 나라에 상주하여 미육이 내렸으나 이를 반납하고 도백과 어사가 천거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서기1728년 무신난 때는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건의하여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막았다. 이때 선생은 말하기를 반둔 들이 일어나면서 스스로 의군이라 이르고 백성을 괴롭히는 못된 벼슬아치를 몰아낸다 하니 주민들은 좌우를 분간 못하고 반군에 가담한 것이니 그 사정을 크게 참작하라하였다. 그것이 사실로써 수용되어 많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게 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초야에 묻혀서 학문에만 몰두하였기에 많은 저술을 하였고, 이것이 황고문집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선생은 향약서 에서 강조하기를 향약은 이풍역속의 도구이다. 건전한 풍속으로 이끄는 좋은 도구이니 백성은 믿음을 가지고 입약 입민 해야 한다고 강조 하였다.
선생은 천품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화림지 효행 편에 수록되었고, 그의 선조 승훈공이 안의 입향 이후 대대로 수승대 옆에 살다가 그의 부친이 상천마을로 옮겼으나 선생이 다시 황산 중고 평에 신기를 잡아와서 자기 처소를 취한 당이라 하여 자호로 삼았다. 수승대 아래 흙을 모아 솔을 심고 뿌리를 내리게 하니 이것이 지금의 섬솔 이다.
선생은 평생에 조금의 실수도 없었으며 오직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다가 서기17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1808년에 사림들이 그의 도덕을 기려 구연서원에 추향하였고, 원정에 그의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