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세 번째 맞는 토요일, 영우가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났다. 어젯밤 병휘오빠가 강릉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말에 기분이 들떠서 일찍 눈이 떠진 거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는 날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병휘오빠가 세수하고 군복을 갖춰 입는 동안 영우는 미리 거실로 나와 있었다. 문을 열고 방에서 나오는 병휘의 군복 입은 모습에서 새삼 믿음직한 군인 아저씨의 늠름한 기풍이 느껴졌다. 츄리닝 차림의 영우가 부시시한 얼굴로 병휘오빠를 따라서 큰길까지 나섰다.
부대에 출근하기 위해 큰길가에 나와 있는 군인 아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차를 기다리며 더러는 담배를 피기도 하고 더러는 군화 끈을 고쳐 매기도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병휘가 나타나자 군인아저씨들이 서로에게 경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영우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영우도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잠시 뒤 군인들을 싣고 갈 통근차가 도착했다. 일명 뻐럭차라 불려지는 통근차는
뻐스와 트럭을 합쳐 개조해서 만든 차인데 높은 산길을 오르내리기 적합해서 눈이 오는 겨울에도 군인들이 출퇴근하는데 큰 걱정이 없다. 영우는 떠나는 뻐럭차가 멀어질 때까지 길가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강릉 바닷가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약속을 하고 출근한 병휘오빠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 지금 이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사실 영우는 동해 바닷가를 말로만 들었지 스무 살이 넘도록 직접 가본 적이 없다. 처음 이곳에 올 때도 동해바다를 구경시켜 주겠다는 병휘오빠의 말에 현혹된 이유도 있지만, 헤어지기 싫었던 감정과 동해바다의 환상이 버무려져서 앞뒤 생각 없이 따라오게 된 것인데,
그동안 병휘오빠의 군부대 사정으로 미뤄 오던 동해 바다로의 여행이 오늘에야 이뤄지게 된 것이다.
영우와 병휘가 강릉경포대의 바닷가 이야기를 상상하며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먼지를 날리며 강릉으로 출발했고, 잠깐 동안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는 대관령 고개길로 접어들었다.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영우는 마치 어린아이 마냥 신이 났다. 용감하게 집을 나와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병휘 밖에 없는 낯선 곳에서
지내며 어른 흉내를 내고 있지만 아직은 이제 스무 살밖에 안된 소녀라 어린 티를 숨길 수는 없었다. 영우를 태운 버스는 대관령 고갯길을 곡예 하듯 달려서 대관령 휴게소를 지나자 금세 정상에 올라섰다. 영우는 대관령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넋을 잃고 보고 있다. 발아래로 급하게 낮아지는 지형을 따라 산줄기와 계곡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저 멀리 보이는 강릉시내와 드넓은 동해의 푸른 물은 청량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이 절로 나오고
온몸으로 경건함을 느끼며 병휘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로 대관령 고갯길의 풍경 속에 잠긴다.
창밖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병휘가 영우에게 시를 한수 들려주겠다고 한다.
“백발의 어머니 강릉에 계신데 이 몸 홀로 서울로 가는 구나”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가네.”
6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서울시댁으로 향하던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어갈 때
강릉 친정을 그리워하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했다는 글이란다. ‘병휘오빠는 참 아는 것도 많네’
“그런 시는 어디서 배웠어?”
“횡계로 전출 명령받고 나서 이곳에 관한 서적을 읽었어”
“오빠는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병휘오빠의 지식은 마치 선생님처럼 폭넓고 흥미로웠다.
잠시침묵이 흐르고 영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신사임당을 생각해 봤다. 먼 옛날 여자의 몸으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험한 고개 길을 걸어서 넘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고개를 넘는다 해도 서울까지
구만리 먼 길을 어떻게 걸어서 갈 수 있었단 말인가?’
예상치 못하게 발생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오로지 혼자서 견디고 헤쳐 나가야만
하는 신사임당의 의지력에 경외스럽기까지 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요즘사람들의 정신력으로는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극강의 체력과 정신력에 더해서 뭐든지 이루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 신사임당이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극복하며 걸어서 넘었던 대관령 고개 길을 영우는 편하게 버스에 앉아서 넘고 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버스는 꼬불꼬불 굽이도는 길로 접어들었고 영우의
몸은 갑자기 좌우로 흔들리며 이리저리 나부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병휘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영우는 그런 병휘가 미웠다. 어쩔 수 없이 병휘의 몸을
감아 안을 수밖에 없는 영우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오빠 미워, 그런데 원래 길이 이렇게 험해?”
“응 여기가 그 유명한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고개 길이야 아흔아홉 굽이를 대굴대굴 굴러서 넘는다고 해서 대굴령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대관령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어. 옛날에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들이 곶감을 100개 챙겨서 떠났는데 한 굽이 지날 때마다 지쳐서 곶감 한 개씩을 먹으면서 넘고 보니 한 개가
남았더라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아흔아홉 굽이라고도 하지 그만큼 넘기가 어렵고 위험하다는 뜻이야”
병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조금 더 가면 원울재라는 곳이 있는데, 과거에 강릉원님으로 부임해서 오시는 분이 고개를 넘을 때 너무 힘들어서 서러운 마음에 울고 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
강릉 인심과 경치에 정이 많이 들고 그리운 마음에 울면서 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해, 이곳은 이야기도 많고 전설도 많은 곳이야, 지금도 여기는 기사님들조차도 겁을 먹고 운전하는 길이라서 베테랑 운전기사님들만 넘을 수 있다고 해”
“정말 이야기가 많은 곳이네”
“영우야 창 밑을 봐”
창밑으로 보이는 거라고는 아찔한 낭떠러지 뿐, 버스바퀴가 걸칠 수 있는 여유의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 낭떠러지네, 이렇게 위험한 길을 가는 거야”
“응 하지만 우리 기사님만 믿고 가면 아무 일도 안 생겨”
하지만 영우는 병휘의 말을 100프로 믿을 수가 없어서 병휘의 허리를 더욱 조여
안았고 병휘의 대관령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굽이진 길을 몇 번 지나자 영우가 어지러움을 호소했고 울렁거림도 찾아왔다. 병휘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차멀미를 가까스로 버티며 창밖을 보고있던 영우가 못 참겠는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토할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웠는지 버스안내양이 다가와서
괜찮겠냐고 물었다. 다행히 토할 정도는 아니어서 창밖의 풍경을 보며 가까스로
버텼다. 영우는 대관령 고갯길을 넘어 강릉에 도착할 때까지 병휘의 허리에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바닷가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드디어 경포바다가 보인다. 영우의 눈에 비친 경포바닷가는 그야말로 장관이라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보였고, 정말로 모래밭 끝에 이렇게 큰 바다는 처음으로 보았다.
어릴 적 인천 사시는 이모네 집에 놀러 가서 보았던 바다하고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때는 포구의 전경만 기억나고 바다 가까이는 섬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경포 바다와는 비교가 않되었다. 병휘오빠와 인천 송도유원지를 갔을 때도 모래밭이 드넓게 깔린 바다가 아닌 인공적으로 만든 해수욕장이었다.
영우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들뜬상태였다. 예전부터 강릉 앞바다를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중학교때 수학여행도 속리산 고등학교때 수학여행도 속리산 참 운도 없었다. 스무 살이 다되도록 못 오다가 이제야 오게 되다니,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상이라도 받는 기분이다.
영우는 어린 강아지가 뛰놀듯이 신발을 벗어서 손에 들고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 위를 이리저리 방향 없이 뛰어다닌다. 그러다가 몸을 돌려 가만히 지켜보며 따라 걷던 병휘에게 다가와 슬그머니 팔짱을 낀다. 뜨거운 여름은 아니지만 맑은 태양이 경포대 모래를 달구었다. 맨발의 영우는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열감을 느끼며
모래 위를 걸었다. 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모래알이 발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와 낭만이 가득한 경포바다의 하얀 모래밭, 수평선 끝 희미한 세상, 바다와 하늘이 섞여 구분이 모호하다. 수정같이 빛나는 물 위에 비치는 햇살에 영우는 넋을 빼앗겼다.
병휘와 영우가 경포바다의 낭만을 만끽하는 사이에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여기저기 상점의 조명이 켜지고 시끌벅적한 경포바다의 밤풍경이 찾아왔다. 잠시 뒤
왁자지껄 한 무리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나타났다. 먼저 도착해서 해변을 걷던 병휘의 군부대 동료들과 그들의 애인들이 시간에 맞춰서 찾아온 거였다. 그렇게 병휘의 군 동료들이 합류했다. 무리 중에는 오늘 처음 보는 여자도 있고 자주 보는
정아 씨와 선미 씨 은정 씨도 마주했다. 이렇게 쌍쌍이 모임을 갖기는 오늘이 처음인 듯 모두들 들뜬 표정들이다.
병휘오빠 동료들과 오늘 처음 보는 여자하고는 서로서로 인사 소개를 한 뒤 근처의 포장마차로 옮겼다. 해변가에 길게 줄지어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밝히는 불빛이 대낮처럼 밝았고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젊은 청춘들이 활기차 보였다.
그들의 머리 위에 무수히 많은 은빛 별들과 둥근달이 어둠 속의 여름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첫댓글 재밋게 보고 갑니다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