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304호인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광주호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소쇄원은 梁山甫(1502∼1557)가 처음 터를 잡아 가꾸었던 別墅庭園(별서란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치 좋은 곳에 조성된 정원으로 전원생활과 문화생활을 함께한 공간을 말한다.) 즉 소쇄원은 생활 기반인 창암촌과 지척인 곳에 위치하는 삶의 공간이며 사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사람들에게 강학하는 학문의 장소이며, 풍류와 위락의 공간으로 제공되어져 당대의 문인들이 누정가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양산보의 본관은 제주이고 자는 彦眞이라 했으며 연산군 9년에 서창 혹은 나주 복룡동에서 양사원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행적은 확실히 알려진 바 없으나 그의 호가 蒼巖이라 하여 이 동네를 창암촌이라고 부른다. 양산보는 어려서 靜庵 趙光祖1482-1519)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양산보의 나이 17세때 당시 王道政治를 구현하고자 신진사류들과 함께 정치개혁을 시도하던 조광조가 勳舊派의 대신들에게 몰려 능주로 유배되었다. 이때 양산보는 귀양가는 스승을 모시고 낙향했으나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아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세속적인 뜻을 버린 채 산수의 경치가 빼어난 이곳에 은둔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성리학에 몰두하게 되는데 특히 송의 周茂叔(敦 )을 사숙했다.
조선 중종때의 학자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다 광풍각, 제월당, 오곡문, 애양단 등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조선 중엽의 민가정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소쇄원은 나라 안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을 따로 떼어다가 줄여서 이곳에다 한데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호남에서 으뜸가는 명승지로 알려져 조경학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발길이 잦다.
ㅇ光風霽月
瀟灑園
超然遐遯日에 초연히 멀리 세상에서 숨으신 날에
亭沼此經營이라 정자와 연못을 이렇게 만드셨네
物色偏瀟灑하니 물색이 이렇게 유달리 시원하니
方知不爽名이라 비로소 이름이 안틀림을 알았네
霽月堂
欲觀虛白界면 虛白한 지경을 보고 싶으면
先到澗邊堂하라 먼저 시냇가의 堂을 가보라.
一樣靑天月이나 똑같은 靑天의 달이라지만
偏憐霽後光이라 비갠뒤의 달빛은 유난히 좋아.
光風閣
習習常吹壑하고 솔솔 바람 항상 골짜기에 불고
冷冷更滿樓라 차갑게 다시금 누각에 가득하네
披襟當水檻이면 옷깃을 젖혀열고 물가의 난간에 서면
身世却疑浮이라 이몸이 물위에 떠있다는 생각드네
愛陽壇
濯髮巖頭水하고 바위위의 물에다 머리를 감고
晞之壇上暄하면 단위의 햇볕에 말리노라면
瑞光無不燭하여 서광은 비치지 않은 곳이 없이
亦自到山門이라 또다시 산문까지 어느새 이르러 온다.
待鳳臺
臺前多竹實하고 臺앞에는 대나무 열매가 많고
臺上散梧陰이라 대위에는 오동나무 그늘 지우네
千載臺猶在하니 천년동안 대는 홀로 있는데
何時下彩禽이라 어느때나 채색새(봉황)는 내려올는지
五曲門
鷺渚加三水하고 白鷺洲보다는 三水가 더하고
龍門少幾灘이라 龍門보다는 몇 여울이 적네
東風花滿浪하니 동풍불면 물결엔 꽃이 가득하니
不遣鎖仙壇이라 仙壇을 잠궈 두지 않도록 한다.
白鷺洲 : 중국의 지명임
龍門 : 하나라의 우왕이 황하의 물을 끌어드리고 험한 산을 개척하여 서로 통하게 했다는 곳이다.
잉어가 이곳을 뛰어오르면 龍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첫댓글 몇해전 소새원 입구의 대 숲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구요. 송강정의 정취도 남달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