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88卷-列傳1-后妃1-091-恭睿太后任氏
○恭睿太后任氏中書令元厚之女門下侍中李瑋之外孫
공예(恭睿) 태후 임(任)씨는 중서령(中書令) 임원후(元厚)의 딸이요 문하시랑(門下侍郞)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무인시대'에 등장한 공예태후
妃誕夕瑋夢有黃大旗竪於其第中門旗尾飄 於宣慶殿 尾
비가 탄생한 날 밤 이위의 꿈에 황색의 큰 깃발을 그 집의 중문에 세웠고 깃발의 꼬리는 선경전(宣慶殿) 치미(옛궁전들의 지붕 용마루 끝에 붙인 짐승 모형)를 싸고 돌며 휘날리는 것이었다.
妃生瑋奇愛之曰: "此女後當遊宣慶殿."
비가 출생하자 이위는 특별히 사랑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후일에 선경전에서 놀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及 平章事金仁揆子之孝聘之婚夕之孝至門妃暴疾幾死
그가 성년(15세)이 되어 평장사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之孝)와 약혼하였는데 혼례 날 밤에 김지효가 신부 집 대문에 이르니 비(妃)가 갑자기 병이 나서 거의 죽을 것 같았다
乃謝遣卜人占病曰:
그래서 결혼을 사절하고 신랑을 돌려 보낸 후 점쟁이에게 병점을 처 보았더니
"勿憂此女貴不可言必爲國母."
“근심할 것 없소. 이 처녀는 비할 바 없이 귀하니 반드시 왕후가 될 것이요”라고 하였다.
時李資謙已納兩女于王聞其言惡之
당시 이자겸은 자기의 두 딸을 왕에게 바쳤는데 이 소문을 듣고 아주 싫어하였다.
卽奏貶元厚爲開城府使.
그래서 즉시로 왕에게 고하여 임원후를 개성 부사(開城府使)로 강직시켰다.
歲餘府 夢太守廳事樑棟坼作大竇黃龍從竇而出
일년 나머지 지난 후에 개성부 막료의 꿈에 태수(太守) 청사의 대들보가 벌어지며 큰 구멍이 생기더니 황룡(黃龍)이 그 구멍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詰朝 具朝服詣元厚具陳其夢以賀曰:
아침이 되자 막료는 예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임원후를 방문하고 그 꿈 이야기를 하면서 축하하기를
"使君家必有異慶公其識之." 仁宗嘗夢得荏子五升黃葵三升
“사또 댁에서는 반드시 큰 경사가 있을 것이니 꼭 알아 두십시오”라고 말한 일도 있었고 또 인종이 일찍 꿈에 들깨 5승(升)과 황규(黃葵) 3승을 얻었다.
以語拓俊京俊京對曰: "荏者任也納任姓后妃之兆也其數五者誕五子之瑞也黃者皇也與皇王之皇同葵者揆也與道揆之揆同所謂黃葵者皇王執道揆御邦家之瑞也其數三者五子之中三子御國之兆也."
이 꿈 이야기를 척준경에게 말하니 척준경은 해몽하기를 “들깨(荏-임)란 임(任)입니다. 임(任)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이실 징조이고 그 수가 다섯이니 다섯 아들을 낳을 길조이며 황규(黃葵)의 황(黃)은 임금 황자(皇)와 같으며 규(葵)는 도규(道揆)라는 규(揆)와 같으니 이른바 ‘황규’란 임금이 도규를 잡고 국가를 통치하는 조짐이며 그 수가 셋인즉 다섯 아들 중에서 세 아드님이 국왕으로 될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王旣出資謙二女四年選入宮號延德宮主.
왕이 이미 이자겸의 두 딸을 내보내고 인종 4년에 임씨를 선택하여 궁중에 들여 오고 연덕궁주(延德宮主)라고 불렀다.
五年生毅宗王遣使下詔曰:
5년(1127)에 의종(毅宗)을 낳았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 조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汝任氏起自德門入司陰敎受儆戒相成之道無險陂私謁之心得純震之長男 斯干之吉夢爰 邇臣式將好賜."
“그대 임씨는 덕망 있는 가문의 출신으로 궁중에 들어와서 여성들에 대한 교양 사업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오직 서로 경계하고 서로 돕는 도리를 준수할 뿐이고 편파한 행위나 사사로운 총애를 도득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길한 징조가 꿈에 나타나 왕가의 맏아들을 낳았다. 이에 근신(近臣)에게 명령하여 좋은 선물을 주노라”
賜銀器彩* {段}布穀鞍馬.
조서와 함께 은그릇, 채단, 포목, 곡식, 안마(鞍馬)를 주었다.
七年冊爲王妃詔曰:
인종 7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古先哲王之有天下也非獨由己德之茂盖亦有內助之賢. 朕 承景命嗣守丕基王假有家重人倫之大義天作之合宜君子之好 咨爾任氏夙以婦才起於德閥動必由於禮節居不忘於女功自初作嬪爰得有子豈特室家之好實增邦國之休是用擧以典章加之位號. 今遣某官某持節冊命爲王妃. 於戱儉約可以保厥身肅恭可以共其職當體朕意永孚于休."
“옛날의 현철한 임금들이 천하를 영유한 것은 자기의 덕이 높은 데만 기인된 것이 아니라 대개는 현명한 아내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외람하게 대명을 받고 국가의 위업을 계승하여 지키면서 가정을 이룩한 것은 인륜의 대의를 존중하는 까닭이오 하늘이 정하여 준 현처는 나의 배필로서 적합하도다. 아! 그대 임씨는 일찍 여성다운 자질을 가지고 덕망 높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모든 행동에서 반드시 예절을 지키었다. 집에 있으면 여성이 할 일들을 잊지 않았으며 후궁에 들어와서는 이에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 한 가정의 좋은 일로 될 뿐이겠는가? 실로 국가의 복을 가져 온 것으로 된다. 그래서 법전에 의하여 지위와 칭호를 높여 주는 바이다. 이제 모관 모(某)를 파견하여 부절(節)을 가지고 가서 그대를 왕비로 책명하게 하노라 아아! 검소하고 절약하면 자기 몸을 보전할 수 있으며 조심하고 공손하면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니 나의 뜻을 잘 체득하여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八年生大寧侯暻王又遣使下詔曰:
인종 8년에 대녕후(大寧侯) 경(暻)을 낳았을 때 왕이 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렸는데 그 조서에 이르기를
"汝以俔天之資居儷極之貴樂關* {雎}之窈窕服卷耳之勤勞乃符帶 之祥載見弄璋之慶歎嘉無已恩禮當優仍賜禮物."
“그대는 영특한 자질로 왕비의 존귀한 지위에 처하였다. 부부간에 화락하며 근로를 일삼았다. 생남할 경사로운 징조가 맞아서 이에 아들을 낳았으니 나의 이를 심히 가상히 여기는 바이니 예물을 주어 우대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이어 예물을 주었다.
九年生明宗王又遣使下詔曰:
인종 9년에 그가 명종을 낳으니 왕은 또 사신을 파견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玆爾任氏典予內職正位中宮震索得男旣主其器 斯多子亦由爾賢謂玆 熊之祥 彼燕媒之后宜膺寵數永保洪休."
“그대 임씨는 나의 내직(內職-궁중의 집안 일)을 주관하는 중궁(中宮)의 지위에 있었다. 첫아들을 낳아 벌써 세자가 있고 또 아들을 많이 두니 이 또한 그대가 어진 탓이라 생각건대 이렇게 아들을 낳은 경사는 저 연매(燕媒)의 전설이 있는 아간후(娥簡后)의 그것과도 같으니 응당 우대를 받고 영원히 큰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十六年妃母李氏卒王素服避正殿百官表慰素衣三日
인종 16년에 비의 어머니 이씨가 죽으니 왕은 소복을 입고 정전(正殿)을 피하였으며 백관들은 글을 보내 위문하고 3일간 소복을 입었다.
贈李氏辰韓國大夫人
그리고 이씨에게 진한국(辰韓國) 대부인의 칭호를 추증하였다.
后生毅宗及大寧侯璟明宗元敬國師 曦神宗承慶德寧昌樂永和四宮主
태후는 의종(毅宗), 대녕후 왕경(大寧侯璟), 명종(明宗), 원경국사 충희(元敬國師沖曦), 신종(神宗)과 승경(承慶), 덕녕(德寧), 창락(昌樂), 영화(永和) 등 네 궁주(宮主)를 낳았다.
毅宗卽位尊爲王太后殿曰厚德立府曰善慶置官屬.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로 존칭하고 그의 궁전을 후덕전(厚德殿)이라고 하였으며 부(府)를 설치하고 선경부(善慶府)라 하고 관속을 두었다.
初后愛次子欲立爲太子以故王怨之.
당초에 태후가 둘째 아들을 사랑하며 그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인하여 왕이 원한을 품고 있었다.
一日侍坐語侵后跣下殿仰天而誓忽雷雨大震電光入座
하루는 왕이 태후를 모시고 앉아서 담화하다가 말이 거슬러지니 태후가 발을 벗고 궁전에서 내려가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맹세하니 갑자기 우뢰와 소낙비가 내리며 천둥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번갯불이 좌석을 향하여 번쩍이었다.
王驚懼 入太后衣下俄
왕은 놀라고 겁이 나서 태후의 옷자락 아래로 엎디어 들어갔다.
而震殿柱
그러자마자 궁전 기둥에 벼락이 떨어졌다.
王悔悟遂爲母子如初.
왕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어 모자간의 사이가 전과 같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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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十二年沖曦死王恐后悲痛不白居數月后聞之意諸將害之憤 得氣攻 病.
명종 12년(1182)에 충희가 죽었는데 왕은 태후가 비통할까 염려하여 알리지 않았더니 몇 달 지나서 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장군들이 충희를 죽인 줄로 짐작하고 분이 치밀어 드디어 병을 얻었다.
時神宗封平諒公亦患痔久不入覲后疑神宗與曦同禍
당시 신종은 평량공(平諒公)으로 있을 때인데 그도 치질을 앓아서 오랫동안 태후께 문안 드리러 오지 못하였으므로 태후는 신종도 충희와 같은 화를 당한 것이나 아닐까 의심하였다.
王命腰輿入謁后且喜且泣曰:
그래서 왕이 신종에게 요여(腰與)를 타고 들어와 문안 드리라고 명령하였다. 신종이 문안하러 오니 태후가 만나 보고 기뻐하는 나머지에 울면서 말하기를
"吾以爲死不意復見爾面." 平諒公曰: "母后之疾勞心致然請張樂悅解." 於是奏管絃王與平諒公上壽爲樂氣少下
“나는 네가 죽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너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하니 평량공이 대답하기를 “어머님의 병환은 마음속의 번민으로 발생된 듯하니 풍악이라도 들으시고 마음을 푸십시오”라고 권고하고 이어 관현악을 연주시켰으며 왕과 평량공이 축배를 올리면서 즐겁게 놀았더니 병이 약간 멎은 듯하였다.
未幾復篤薨壽七十五
그러나 미구에 또다시 위독하여 드디어 죽으니 향년 75세였다.
葬純陵上謚恭睿太后.
순릉(純陵)에 안장하였으며 시호는 공예 태후라고 하였다.
明年金遣使來祭其文曰:
이듬해에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조상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惟靈早自慶閥來嬪侯藩始以婦道相其夫終以母慈保厥子遽違榮養良可哀憐宜加賻贈之恩仍致酒 之奠貞魂如在寵數其歆."
“생각건대 돌아간 분은 일찍이 명문의 딸로서 왕실에 시집 와서 처음에는 부녀의 도리로써 남편을 내조하였으며 만년에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그 자손들을 보살피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응당 부의를 보내야 하겠으므로 이제 주효를 갖추어 제사를 드리노니 영혼이 만일 있거던 이 성의를 받으시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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