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에서 만난 인요한 소장은 기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익살맞은 표정으로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 를 부르기 시작했다. 국제진료센터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외국인과 의료진은 그의 노랫소리가 익숙한 듯, 장단을 맞추거나 즐거워했다. 그는 반갑다는 내용의 노랫가사에 어울리는 표정과 손짓을 마음껏 선보이며 국제진료센터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풍부한 성량을 가진 그에게 “노래 실력이 무척 좋다”고 했더니 “재미있지 않습니까!”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금발에 파란 눈동자, 190cm가 넘는 큰 키의 그는 전형적인 미국인 인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전라도 촌놈’이라고 소개한다. “내 핏속에는 한국 사람의 정이 흐른다”는 것이 이유다. 자신을 키운 8할이 바로 한국의 ‘정’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는 유별날 정도로 고향 ‘순천’을 사랑한다.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추억에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져 고향은 ‘마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의사가 된 것에 대해 한국에서 받은 특혜 중 하나라며 “연세대학교 의대에 정원 외 입학해서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외증조부인 유진 벨과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 아버지 휴 린튼은 한국에서 봉사하며 일생을 보내신 분들이죠. 선교와 의료, 교육을 통해 힘든 시기의 한국 사람들을 많이 보살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분명히 해둡시다. 전 반대로 한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자랐어요. 그들은 낯선 외국인에게 정을 나눠줬고, 사람 사이의 사랑을 보여줬으니까요.”
1895년 미국 남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선교사였던 그의 진외증조부인 유진 벨은 호남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다가 전라도 땅에 묻혔다.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한국에서 48년간 의료, 교육 선교를 펼쳤고, 현재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대전대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1926년 전라도 군산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 휴 린튼은 순천의 선교를 맡아 바쁘게 지내셨고, 어머니 조이스 린튼은 한국 결핵퇴치에 큰 공헌을 했다. 이렇듯 친가와 외가의 어른들이 한국과 쌓아온 인연은 자그마치 5대에 이르지만, 인요한 소장은 “집안 어른들과 내가 한국에 남은 이유는 다르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봐온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의 삶은 한마디로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길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돕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을 챙길 여유는 없었으니까요. 그분들의 순수한 마음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사랑을 만들어 냈죠.”
5대째 한국에서 봉사한 혈통, 계속 이어질 것
지난 7월 20일 인요한 소장은 서울시 명예소방관 위촉식에서 위촉장과 명예소방관 신분증을 받았다. 1992년부터 추진한 한국형 구급차 개발과 기증, 미국 강사 초청 소방관 교육 등 우리나라 소방행정발전에 공헌한 바를 인정받은 것. 그가 특히 구급차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앰뷸런스가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가 앰뷸런스가 아닌 택시로 병원에 이송되다 돌아가신 것이 계기가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8년째 되던 해 미국의 아버지 친구들께서 3200만 원 정도 조의금을 보내주셨죠. 어머니와 상의 끝에 앰뷸런스를 만드는 일에 쓰기로 했고요. 여러 노력 끝에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들어 순천소방서에 기증했습니다.”
연세대 의대 재학 시절 인요한 소장이 동기들과 강의실로 이동하는 모습. 당시 그는 정원 외 입학해서 의대생이 됐다. |
불과 17~18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긴급환자를 이송할 만한 앰뷸런스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미국 등지에서 간간이 고가의 앰뷸런스를 수입하던 시절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해 보급한 그의 노력은 우리나라가 앰뷸런스 체계를 갖추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내가 가진 의료지식을 통해 봉사하고 싶었다”는 그. 이런 그에게 의사의 꿈을 심어준 사람은 어머니 조이스 린튼이었다.
북한 개풍요양소에서 북한 의료진과 새로운 결핵균 염색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1960년대만 해도 결핵에 걸리면 치명적인 선고나 다름없었어요. 마땅한 약도 없었고요. 어머니는 손님방에 간이 진료소를 만들어놓고 결핵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셨어요. 밀려드는 환자로 집은 발 디딜 틈도 없었고요. 결국 미국 후원가들의 도움을 받아 ‘로이스보양원’을 개원해 본격적으로 결핵 환자들을 받으셨어요.”
연세대 의대 재학 시절. 왼쪽부터 어머니 조이스 린튼과 인요한 소장, 아버지 휴 린튼. |
환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의사가 되고자 했던 그는 대전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 의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국인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1년간 미국 대학생활 후 진로를 다시 정하자는 데 합의했다. 그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 진학했다.
1995년 첫 번째로 만든 한국형 앰뷸런스 앞에서. 이 차는 전국에 3000대가 보급됐다. |
“아버지와 약속했던 1년이 지났지만,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미국에서 향수병을 앓았던 거죠. 한국에 돌아와 연세대 의대 입학을 앞두고는 표준말을 배우면서 보냈죠. 그전까지는 ‘거시기’ ‘아따’ ‘긍께’를 안 쓰면 대화가 힘들 정도였거든요.(웃음)”
이후 인요한 소장은 연세대 의대와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루클린 퀸즈 가톨릭 메디컬센터의 수련의 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그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부교수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한국 의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북한에는 17차례 다녀왔어요. 앰뷸런스 보급과 결핵퇴치 등 의료 봉사가 목적이었죠. 어느 나라든 국민이 질병으로 죽어간다면 살려야겠죠.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항상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대 공부가 어렵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의사가 되길 정말 잘했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이제 지리산에 갈 시간”이라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열 살 난 아들과 함께 장장 19시간 동안 무박 등산으로 지리산에 오르겠다는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나 힘들 때 지리산에 오르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여기게 된다”고 한다. 열 살 난 아들이 힘들어 하지 않을까 물었더니 “마흔에 본 늦둥이 아들도 지리산 타는 것을 참 좋아한다”며 진료실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여준다. 사진에는 의대 2학년 때 결혼한 아내 이지나 씨와 미국에서 낳은 두 딸, 그의 아들이 정답게 앉아 있다. 특히 막내아들은 얼굴 생김새는 물론이고 장난스러운 표정마저 그를 쏙 빼닮았다.
“한국 사람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정리하다 보면 정말 까마득할 때가 많아요.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숙명이랄까요. 물론 제 길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어렵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쉽지도 않아요. 하지만 ‘가는 길은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말을 되새기며 즐겁게 봉사하고 싶어요.”
사진 : 김선아
사진제공 : 인요한, 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