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따분함
오래전 얘기인데 모스크바에 가면 자유주의자가 되고 파리에 가면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서방세계의 자유란 따분할 정도로 방임적이라는 것이죠. 그래도 공산주의적 통제사회에서는 그런 정도의 따분함은 이례적인 것이 되는 것이죠. 동서독이 통일되고 나서도 그래도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겪느니 가난해도 배급주는 동독이 더 좋았다는 사람도 있고요. 아마 북한은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그런 사치스러운(?) 따분함을 누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요.
인간에게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한데 원래는 그러한 것은 창조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죠. 그래도 그러한 것을 대체할만한 것이 있었는데 불경이나 사서삼경 등 삶의 보편적인 지침으로서의 권한을 갖는 소위 경전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성서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일반 사람들이 보기 어려운 것이었죠. 기독교는 플라톤 철학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현실세계와 이데아 세계가 각각 있는데 이데아 세계가 진짜라는 것이고 육체로 사는 지상에서의 삶은 일시적인 가짜라는 것이죠 소위 이원론이죠.
속임수와 이교풍습으로 쉽게 신도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려는 가톨릭으로서는 옳다구나 하고 이 이원론을 도입해 영혼불멸, 삼위일체 등 소위 기독교라고 하는 거짓종교의 주요 교리를 만들고 성서는 배척해 버렸죠.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지배하는 정신은 그리스 철학이 되었죠. 그래도 불경을 외우며 목탁을 두드리는 승려들이나 금욕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이나 수녀들 혹은 유교나 도교 혹은 묵가 사상을 추종하여 뚜렷하게 삶의 목표를 두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세속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치열하게 물질추구적이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존경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 칸트나 니체 같은 많은 철학자들은 그러한 것들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파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과학의 발달까지 가세해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구 가치관들은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명맥은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많이 변질되고 퇴색되었다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느끼는 것은 허무, 절망, 권태 같은 것으로 바뀌었죠. 그것은 부정적인 감정들이죠. 그런 감정에 빠져 좋을 것이 없는 것이죠. 돈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세속의 정치와 오락거리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는 것이 나름 최선인 것이죠. 전쟁도 일어나야 권태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고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답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즐거움과 의미나 보람을 찾는 일은 포기한 것이죠. 맞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점에 있어 성서는 너무나 찬란한 빛과 같은 것입니다. 수십억 부 발행되어 있긴 한데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죠.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종교인들이 거의 없는 것이죠.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무지한 상태이죠.
성서는 인간의 창조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중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