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때부터 생존을 위한 활동 속에 존재해 온 각종 놀이는 원시에서 유사시대로, 고대에서 근대로 발전하는 문명을 따라 흘러 오면서 독자적인 형태를 형성해 왔다. 물건을 발로 차거나 손으로 던지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둥근 물건이 있으면 가지고 놀게 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게 된다. 모든 스포츠가 이 본능과 경쟁심에서 출발했다. 축구도 던지고 차고 달리는 인간의 두루뭉수리 본능 속에 3000여 년 간 잠재해 오다가 불과 150여 년 전에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둥근 물건을 발로만 차는 놀이로 분리됐다. 그 사람들은 군더더기와 섞인 살점을 잘 도려내듯이 ‘축구’라는 놀이를 따로 떼어내 틀을 만들고 질서를 정하고 재미를 더해서 해외로 나가는 상인과 노동자들을 통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월드컵축구대회’라는 것을 만들어 잔치를 열기 시작했고, 그 잔치의 재미가 쏠쏠하다고 해서 우리도 그 잔치를 한 번 해보자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축구가 어느 한 지역이나 특정 인종에 의해 시작됐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기원전에 있었던 원시적인 형태의 축구에 관한 기록들은 물론 신라, 중국, 일본,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아시리아, 프랑스, 영국...등 세계 도처에 축구의 원형에 관한 얘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에는 '축국(蹴鞠)'이라는 놀이가 성행했다고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농주(弄珠)’를 가지고 노는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축국'은 둥근 놀이기구, 이를테면 가축의 방광이나 태에 바람을 넣어 차거나 던지는 놀이였을 것이다.
기원전 7∼6세기 경 그리스에서는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는 경기가 성행했고, 이것이 로마에 전파돼 무사들이나 군대스포츠로 발전하면서 '하르파스툼(Harpastum)' 또는 '파가니카(Paganica)'라는 새로운 경기로 변형됐다. '하르파스툼'은 로마 제국 내에 급속히 확산됐다. 이 경기는 각기 자기진영의 골라인을 지키는 두 팀 사이에 벌어졌다. 경기장에는 중앙원도 있었다. 이 놀이는 공을 차거나 던지면서 전진해 마지막에는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골라인을 넘는 것이었다. 로마가 영국을 침략했을 때 '하르파스툼'이 영국에 소개됐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도 둥근 물체를 발로 차거나 튀기거나 동료에게 패스하는 등의 놀이가 있었다. 약 3000년 전 중국의 한조 시대에는 축구의 일종인 '츄슈'라는 경기가 있었는데, 목표 지점을 향해 공을 차고 나가는 놀이였다고 전한다. 일본 사람들은 '게마리'라는 경기를 했다고 한다. 여덟 명이 한 편이 되어 네 모서리에 각각 나무기둥을 세워 놓은 구역 안에서 우군끼리 공을 패스하는 놀이였다.
이러한 단순한 놀이들이 세계 도처에서 각각 독특하게 발생하고 성장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축구와 흡사한 놀이들이 있었다고 하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축구의 원류는 영국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구가 오늘 우리들 앞에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모습으로 성장해 2002년 1월 현재 FIFA 회원국은 204개에 달하고 있다. 전 세계의 등록 선수는 무려 2억5천만 명에 이르고 있어 ‘월드컵축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세계를 하나로 묶는 평화와 우호의 제전으로 굳어졌다.
축구의 변천사
대영 제국의 풋볼은 15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형태로 지속돼 왔다. 안에 털을 넣고 짐승가죽으로 둥그렇게 싼 공을 차면서 마을과 마을 사이에, 때로는 쌍방에 수 백 명씩이 수마일 떨어진 골을 향해 밀고 밀리는 맹렬한 크로스컨트리, 또는 시장과 거리에서 사납게 날뛰는 소란스런 경기였다.
그래서였던지 영국의 왕이 풋볼을 금지하는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314년 런던 시장 니콜라스 펀든이 에드워드 2세의 이름으로 '풋볼 금지령'을 처음으로 내렸고, 1369년에는 에드워드 3세가 병사들이 이 소란스런 놀이에 빠져 궁술연습을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축구경기를 금지시키려고 했다. 이후 1847년까지 42차례에 걸친 풋볼 금지령이 포고됐다. 그래도 축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끈질기게 되살아났다. 다소 미개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축구는 세계적인 경기로서의 매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왼쪽 그림 : 16세기 초 일정한 구역 내에서 벌어진 축구와 비슷한 경기를 그린 그림)
1561년에 리처드 물카스터라는 교사가 '축구가 청소년 교육에 좋은 효과를 준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영향으로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축구를 적극 권장했다.
1580년에는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바르디라가 '칼시오(Calcio : 축구)'라는 최초의 축구 규칙집을 펴냈다. 이것이 영국축구와 이탈리아축구의 결합이었고, 서로 다른 두 나라의 축구가 동화되면서 큰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1680년 영국의 왕 챨스 2세가 축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세기 초에는 말타기, 사냥, 낚시 같은 종래의 스포츠를 즐기던 소년학생들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친 축구경기의 원리를 빠른 속도로 학교 운동장이나 놀이터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학교들은 축구를 각각의 방식으로 발전시켜 대항전을 갖는 등 각 학교의 전통으로 가꾸어 나간다. 경기 방식은 대개 20명이 한 팀으로 구성됐으나 공을 잡은 사람이 단독으로 드리블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길게 차거나 앞으로 패스하는 방법도 드물게 쓰였다. 손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1823년 여름 '윌리암 웹 엘리스'라는 학생이 손으로 공을 잡고 달려 득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럭비 학교에서는 공을 손으로 잡고 달려도 된다는 내용을 규칙에 추가했다. 이로부터 럭비 학교와 다른 학교들의 축구 경기방식이 달라지게 됐다. 엘리스의 돌발적인 행동은 럭비경기의 시초가 됐고, 오늘날의 미식축구에도 영향을 끼쳐 공을 차거나 손으로 잡고 달리게 됐다.
축구 주요 연지
1845년 영국의 이튼에서 축구경기에 심판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심판(Referee)'이 아니라 '엄파이어(Umpire)로서 경기장 밖에서 조정역할만 했다.
학생들이 공립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간에 경기규칙이 좀 달라도 별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자 혼란이 생겼다. 대학에서도 경기를 계속하려면 공립 학교마다 달랐던 규칙들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통일된 규칙으로 정리할 필요가 대두됐다.
1848년 이튼에 있는 공립 학교들의 대표 14명이 ‘캠브리지 규칙(Cambridge Rules)’라는 축구규칙을 처음으로 통합 정리했다. 이 규칙은 '실용(practical), 공정(fair), 합리(reasonable)'라는 3대 원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캠브리지가 축구규칙의 원산지가 된다.
이후 축구경기는 일반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아 갔고, 모든 대학들과 공립 학교들에 클럽이 결성돼 대항전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사회인으로서 축구를 계속했다.
1855년 요크셔에서 쉐필드 크리켓(Sheffield Cricket)과 축구클럽Football Club)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857년 최초로 쉐필드 축구클럽(Sheffield FC)을 탄생시켰다.
1862년 노츠 카운티(Notts County)라는 축구리그가 창설됐다.
1863년 10월 26일, 드디어 런던 선술집에서 영국의 '축구협회(FA : Football Associaton)'가 창립된다. 이것이 축구의 공식기구 1호다. FA가 다소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던 축구에 일정한 형태와 질서와 스포츠정신을 불어넣는 14개조의 정리된 규칙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축구경기의 기초들이 이 때부터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의 경기장은 코너플랙과 골포스트외에는 아무런 선도 없었다. 규격은 200야드 X 100야드로 했다. 지금의 두 배에 가까운 넓이였다.
1866년 초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쉐필드 클럽이 런던과 쉐필드에 있는 클럽들 간에 경기를 갖자고 제의해 3월 31일 지역 간 경기가 열렸다. 골포스트의 정성에 끈을 두르는 것으로 크로스바를 대신했다.
1870년에는 FA가 11명으로 하는 팀의 구성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15명에서 60명까지도 뛸 수 있었던 한 팀의 선수를 11명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스코틀랜드에서는 팀의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의 개념이 시작됐다.
1871년에는 FA컵 대회가 시작됐고, 결승전이 2,000명의 관중 앞에서 치러졌다. 1888년의 결승전 관중은 17,000이었다. 1893년에는 45,000명이었다. 그리고 1901년 결승전에는 무려 110,000명의 대 관중으로 폭증했다.
'골키퍼'라는 특정한 위치의 선수가 탄생한 것도 1871년이다.
1872년 11월 30일 잉글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에 세계 최초의 비공식 국제경기(0-0)가 벌어졌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뒤에 세계 최대의 스포츠 제전 월드컵 축구대회가 탄생한다. 이 해에 주심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경기장 밖에 있어야 했다. 1880년에는 주심이, 역시 경기장 밖이긴 했지만, 시간을 측정하고 경기 종료를 결정하며 행동이 거친 선수를 퇴장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주심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 것은 1891년부터였다.
1872년 코너킥이 채택됐다.
1875년 경기장의 규격을 최소한 100야드 X 50야드로 정했다.
1877년에는 대영 제국 내의 축구협회들이 통합 경기규칙을 마련했다.
1878년 최초의 조명 아래 야간경기가 세필드에서 거행됐다.
1880년 최초의 여자 축구팀이 영국에서 '네틀 허니볼'이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1882년 영국 클럽들이 스로우 인(throw-in)을 손으로 던지도록 허용했다.
1883년 영국의 4개 축구협회들이 축구와 축구규칙에 관한 모든 것을 논의, 결정하는 기구인 국제축구평의회(The 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의 규약을 통일시키는 데 합의했다. 공의 둘레를 27~28인치(68.6~71.1cm)로 규정했다. 골대에 크로스바를 설치하고 골라인과 터치라인을 그었다.
1885년 프로축구의 규범화가 잉글랜드에서 이루어졌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사용했다.
1886년 6월 2일 국제축구평의회(IFAB)의 첫 공식회의를 열었다.
같은 해 IFAB는 경기관리자 양성사업에 착수했다.
1887년 경기장이 규격화됐다. 중앙선과 골 앞을 구획하는 선, 코너킥 에리어 등을 공식화했다.
1888년 4월 영국에서 6개의 클럽이 세계 최초의 공식리그를 시작했다. 축구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대영 제국 전역에서 재미와 여가를 위한 경기로 발전했다. 1888년에는 리그가 형성되면서 프로선수가 공인됐다. 그리고 영국은 축구를 세계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무역상인들은 물론, 다른 나라들의 공업화 요구로 파견된 기술자들, 숙련공들, 철도건설 노동자들이 축구를 확산시켰다. 축구는 체력과 투지, 그리고 개인의 능력과 조직력이 요구되는 경기다. 신체적으로는 심장과 폐기능을 향상시키고, 정신적으로는 용기와 결단력, 단결심을 길러준다. 또 축구경기는 매우 단순한 데다 규칙도 알기 쉬워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1890 중앙원이 시작됐고, 경기장의 선을 석회로 그리기 시작했다.
1891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열린 린필드 FC와 미국 캐나다 혼성팀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의 페널티킥이 도입됐고 혼성팀의 미국 출신 제프리 선수가 축구 사상 제1호 페널티킥을 성공 시켰다. 잉글랜드는 1891∼92시즌 페널티킥 제도를 채택했다. 센터서클 중앙점을 표시했다. 그리고 주심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온 것도 1891년이었다.
1892년 2부리그가 출범했다.
1897년 축구장을 130~100야드 X 100~50야드의 범위 내로 정했다.
1899년 축구의 국제 교류시대를 여는 개척자로 독일의 한 축구팀이 잉글랜드에 파견됐다.
1902년 페널티에리어, 골에리어, 중앙선을 그었다.
1904년 국제축구연맹(FIFA)이 창립됐다.
1905년 알프 콤몬(Alf Common)이 £1,000($2,000)에 선더랜드에서 미들스브러로 이적료를 받고 이적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1912년 GK의 손 사용을 페널티에리어 내로 제한했다.
1913년 FIFA가 국제축구평의회(IFAB)에 가입했다.
1925년 오프사이드 규칙이 3명에서 2명으로 변경됐다.
1927년 아스날 대 세필드 유나이티드 경기가 최초로 라디오 중계방송됐다.
1930년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가 1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1937-38년 국제축구평의회는 잉글랜드의 스탠리 라우스 경이 성안한 17개조의 축구규칙을 50년 만에 개정해 1938년부터 시행했다.
1937년 페널티아크를 추가했다.
1958년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스웨덴 월드컵 축구경기들을 생중계했다.
1962년 FIFA 회원국이 100개에 이르렀다.
1965년 선수교체를 처음으로 리그경기에 도입했다.
1970년 월드컵 축구경기들이 위성을 통해 생중계됐다. 선수교체 제도를 월드컵에 도입했다.
1970년 국제축구연맹은 페널티킥과 동일한 방법의 승부차기를 확정했으며 월드컵에는 82년 스페인월드컵에서부터 적용했다. 월드컵 최초의 승부차기를 한 경기는 그 대회 준결승 서독(3-3, 5킥4)프랑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70년 6월3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진 제19회 대통령배축구대회 예선리그 해병대와 한전의 경기 때 시범적으로 운영됐다. 승부차기가 채택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추첨으로 승부를 가렸으며 결승전에서는 공동우승으로 처리했다. 우리나라 축구 초창기에는 연장전에서도 결판이 나지 않으면 반칙이 적은 팀이나 코너킥을 많이 한 팀이 이긴 것으로 했다.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레드카드와 옐로우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대회는 퇴장 없다.
1971년 펠레가 브라질 국가대표로 92경기에 77골을 기록하고 대표에서 은퇴했다.
1977년 제1회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World Youth Tournament. 1981년 'World Youth
Championship. 20세 이하'로 개칭)가 튀니지에서 열렸다.
1978년 수비팀이 자기 골에리어 내에서 얻은 프리킥은 '골에리어 절반 내 어느 곳에서 차도 된다'는 규칙 추가했다.
1979년 직접프리킥과 간접프리킥을 구분하기 위해 주심은 간접프리킥 때 한쪽 팔을 위로 들도록 국제축구평의회가 결정했다.
1980년 상대선수, 경기관련자, 그 밖의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거나 침을 뱉는 행위는 난폭행위로 간주하기로 했다.
1985년 제1회 16세이하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U-16 World Tournament. 1991년 'Under-17 World Championship'로 개칭)가 중국에서 열렸다.
1988년 FIFA의 페어플레이 캠페인(The FIFA Fair Play campaign)이 시작됐다.
1991년 제1회 여자월드컵축구대회(FIFA World Championship for Women's Football)가 중국에서 열렸다.
1994년 선수교체 수를 2명에서 3명으로 늘렸다.
1996년 '선심(Linesman)'을 '부심(Assistnt Referees)'로 변경했다.
1997년 3월 1일 60년 만에 국제축구평의회 연례회의에서 오프사이드, 백패스, GK의 4보, 선수교체, 킥오프와 골킥 직접골 인정...등 일부 규칙을 개정하면서 영어로 10,532개에 달하던 단어를 7,484단어로 30%나 줄였다. 스코틀랜드의 죠지 커밍(George Cummuing)이 책임자로 2년여에 걸친 연구와 정리작업 끝에 마무리된 이 개정규칙은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199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1998년 블라터(Joseph S. Blatter)가 아벨랑제Joao Havelange)의 후임으로 FIFA 회장에 취임했다.
1999년 2월 20일 국제축구평의회(IFAB) 113차 총회에서 새로운 선수교체 제도인 '플라잉 섭스티튜션tm(Flying Substitutions)'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1999년 7월부터 체력의 부담이 많은 여자축구, 16세이하 청소년, 35세이상 베테랑선수들에 적용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수교체를 수시로 한다.
*교체된 선수를 다시 기용할 수 있다.
*교체는 교체장소에서만 한다.
*교체 시 입장선수는 퇴장선수의 번호판을 든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아메리카와 유럽을 처음으로 벗어나는 월드컵축구대회를 공동개최한다.
2004년 FIFA 창립 100주년
'사커(Soccer)'라는 말의 유래
설1 : FIFA는 축구에서 파생된 '럭비 풋볼(rugby football)'과 구별하기 위한 축구의 이름 'Association Football'의 'Assoc'에 'er'을 붙여 부르다가 'soccer' 로 변했다고 전한다.
설2 : 1863년 10월 26일 FA(Football Association 축구협회)가 축구의 공식기구 1호로 탄생한 영국에서는 축구를 'Association football'이라고 불렀다. 'Association'의 가운데 부분에 'er'을 붙여 'soccer'라는 축구의 별명을 만들었다는 설.
설3 : 미국에 축구가 도입되자 미식축구와 구별하기 위해 'Association Football'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Assoc. Football', 다시 'Assoc'로 줄었고, 유행에 따라 어미에 'er'을 붙여 'Assocer'로 변했다. 그 다음에 오늘날의 'Soccer'로 굳었다는 설.
설4 : 1863년 잉글랜드에서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를 구성하면서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풋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해 잉글랜드축구협회 임원 찰스 레포드-브라운이 친구들로부터 "러거(Rugger)보러 가자"는 말을 듣고 "나는 사커(Soccer)보러 가겠다"고 대답한 데서 '사커(Soccer)'란 말이 생겨났다는 설.
*미국, 호주, 캐나다에서는 축구를 Soccer라고 불러 미식축구와 구별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칼시오(Calcio)'라고도 한다.
첫댓글 ㅎㅎ 멋짐..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