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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와다(Theravāda)의 관점에서 본 공업(共業): 니까야와 아비담마를 중심으로
김 한 상 / 동국대학교 강사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붓다가 설한 업 이론
Ⅲ. 북방 부파들의 공업(共業)
IV. 테라와다의 입장
V. 나오는 말
국문요약
본고의 목적은 테라와다(Theravāda)의 관점에서 공업(共業, sādhāraṇa-karma)을 조사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불교의 핵심 사상들 가운데 하나는 업 이론(karma-vāda)이다. 비록 불교 사상에서 차지하는 업의 중요성이 꾸준히 인식되고는 있으나, 업 이론에 대한 모든 불교인들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불교 역사에서 발전과 변형의 과정을 겪어왔다. 그러한 예들 가운데 하나가 안다까(Andhakā)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와 같은 북방 부파들이 제창한 공업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업은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어떤 집단이 공유하는 공업이고, 또 하나는 개별적으로 결과(vipāka)를 낳는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이다. 북방 부파들은 이러한 집단이 축적한 공업에 의해서 기세간(器世間, bhājana-loka)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많은 현대 불교인들은 참여 불교(Engaged Buddhism)를 표방하면서, 업의 책임성이 사회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렇게 이들은 업이 본질적으로 공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업은 초기 불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이다. 초기 불전에서 업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붓다는 업을 ‘의도(思, cetanā)’라고 정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업을 개인적 책임 즉 ‘자업(自業, kammassakatā)’으로 다루었다. 이와 같이 초기 불전에서 업은 개인의 심리현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테라와다도 모든 행동의 결과가 전부 업보(業報, karma-vipāka)가 아니라는 근거에서 공업을 부정하고 있다. 까타왓투(Kathāvatthu)에 따르면, 한역으로 ‘과보(果報)’나 ‘이숙(異熟)’이라 하는 빨리어 위빠까(vipāka)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과 같은 주요한 심리 현상들처럼, 업이 만들어낸 정신적 결과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업이숙이란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에 기세간에 사는 수많은 다른 중생들과 공유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테라와다는 북전(北傳)의 공업이 원래 의도(思, cetanā)와 동일어인 업(業, karma)을 업보(業報, karma-vipāka)로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각 개인들의 유사한 업들이 어떤 주어진 상황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의 업들이 서로 모인 업을 혼동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테라와다에게 공업은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한 업의 성향을 통칭하는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일 뿐이지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a-sacca)가 아니다.
*주제어
공업(共業, sādhāraṇa-karma),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 자업(自業, kammassakatā), 결과(vipāka) 또는 업보(業報, karma-vipāka),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a-sacca), 기세간(器世間, bhājana-loka), 의도(思, cetanā)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중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는 업 이론(karma-vāda)이다. 불교는 세계의 성립과 개인 운명을 주관한다는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신하는 것으로서 업 이론이 매우 중요하다. 불교에서 업 이론은 철저한 결정론(決定論)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우연론(偶然論)도 아니다. 붓다는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들을 피하여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를 가르쳤다. 붓다는 한편으로는 삶이 그 어떤 절대적인 신의 계획적 의도나 조종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또 한편으로는 삶은 도덕적 인과의 법칙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전개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업 이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붓다가 자신의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주로 재가자)에게는 처음부터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를 가르치지 않고 시론(施論, dāna-kathā), 계론(戒論, sīla-kathā), 생천론(生天論, sagga-kathā)으로 구성된 차제설(次第說, anupubbi-kathā)을 가르쳤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붓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업과 그 과보라는 도덕적 인과의 법칙을 알게 되어 법(法, dhamma)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궁극적 가르침인 사성제를 가르쳤을 만큼, 업 이론의 수용 여부는 불교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차지하는 업 이론의 중요성은 모든 불교 전통들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모든 불교인들이 이에 대해 일치된 이해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불교 역사에서 업 이론은 발전과 변화의 과정을 겪어왔다. 원래 단일했던 교단이 맨 먼저 상좌부(上座部, Sthaviravād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로 분열하고 다시 18개 내지 20개 부파들로 분열하면서 붓다가 설한 업 이론도 각 부파의 ‘법이론(dhamma-vāda)’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개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업(共業, sādhāraṇa- karma)’이다.
일부 현대 불교인들은 공업의 이론을 채용하여 불교의 적극적 사회 참여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이른바 ‘참여 불교(Engaged Buddhism)’를 표방하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Thich Nhat Hanh)은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maggo)의 정명(正命, sammājiva)은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이 아닌 공업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한 개인의 행위는 그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승석은 공업이 불공업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생명 복제에 대한 불교적 처방을 제시하는 업 개념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고 주장한다. 남궁선은 불교에서 업 이론은 연기(緣起, paṭccasamuppāda)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공업과 불공업의 두 가지 의미를 지녀야 만이 업 이론이 비로소 이론적으로 완벽해지며, 중생들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으므로 불교의 이상인 자아의 완성은 불공업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불교의 사회적 실천이 저조했던 이유가 공업의 이론이 간과되어왔거나 재해석되지 못했던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박경준도 업을 불공업만으로 보는 해석에 반대하고, 불교의 사회참여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 공업의 이론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공업 이론의 대두는 사실상 업을 개인적 책임으로만 해석하는 전통적인 업 이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오늘날의 대승 불교권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고의 목적은 테라와다(Theravāda)의 관점에서 공업의 이론을 탐구해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논자는 먼저 초기 불전에 근거하여 공업의 이론이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에 얼마만큼 부합되는지를 살펴보고, 북전(北傳)의 문헌들에서 공업이 어떻게 기세간(器世間, bhājana-loka)의 성립과 소멸을 설명하는 원리로 서술되고 있는 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까타왓투(Kathāvatthu)에서 테라와다와 안다까(Andhakā)가 공업에 대해 벌인 논박들을 통하여 테라와다는 붓다가 설한 업 이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고, 공업의 이론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공업의 이론은 원래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에 다름 아닌 업(業, karma)이란 용어에 그 결과(vipāka)까지도 포함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며, 업과 동의어인 의도는 네 가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의 하나인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이라는 점에서 테라와다에게는 오직 자업(自業, kammassakatā)으로서의 업만이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a-sacca)이고 공업은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일 따름이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Ⅱ. 붓다가 설한 업 이론
업(業)의 원어인 빨리어 깜마(kamma)와 산스끄리뜨어 까르마(karma)는 ‘하다’, ‘만들다’, ‘행하다’를 뜻하는 어원 √kar에서 나왔으므로 글자 그대로 ‘행위’를 뜻한다. 이러한 어원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리그웨다(Ṛgveda) 시대에 업은 제사나 제식행위를 뜻했고 도덕적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기 우빠니샤드(Upaniṣad) 시대부터 선악의 행위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한다는 생각이 점차 확립되기 시작했다. 붓다는 인도의 사회적 통념인 업 이론을 수용하여 자신의 사상 체계 내에서 이를 완벽하게 설명하고 체계화시켰다. 초기 불교에서 업이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 즉 쩨따나(cetanā)’에 붙이는 이름이며, 그것과 관련되어 드러나는 몸의 업(身業, kāya-kamma), 말의 업(口業, vacī-kamma), 마음의 업(意業, mano-kamma)을 말한다. 이점은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 붓다가 다음과 같이 업을 정의한데서 잘 나타난다.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이다. 의도를 통해서 사람은 몸, 말, 뜻을 통하여 업을 짓게 된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업이란 순수하게 개인의 마음 작용인 ‘쩨따시까(cetasika)’의 하나이며, 세 가지 업의 본질은 모두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思, cetanā)’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의도야말로 행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업을 의도와 동일하게 보는 것은 결국 업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마음의 욕구, 성향, 목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신적인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공업의 이론은 이와 같이 본래 순수한 마음 작용인 의도(思, cetanā)에 지나지 않는 업이라는 용어에 그 결과(vipāka)까지도 포함시킨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초기 불전에서 업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제 135번째 경인 「쭐라깜마위방가 숫따(Cūlakammavibhaṅga-sutta)」에서 확인된다. 이 경에서 또데야의 아들(Todeyya-putta)인 수바 바라문 학도(Subha-māṇava)는 붓다를 만나서 왜 중생들 가운데는 수명이 짧은 사람들도 있고 수명이 긴 사람들도 있고, 병약한 사람들도 있고 건강한 사람들도 있으며, 못생긴 사람들도 있고 잘 생긴 사람들도 있으며, 세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세력이 있는 사람들도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도 있고 부유한 사람들도 있으며, 낮은 가문의 사람들도 있고 높은 가문의 사람들도 있으며, 지혜가 없는 사람들도 있고 지혜를 갖춘 사람들도 있는 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바라문 학도여, 중생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업이 중생을 구분지어서 천박하고 고귀하게 만든다.
Kammassakā, māṇ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Kammaṁ satte vibhajati yadidaṁ hīnappaṇītatāyāti.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술이 보인다.
비구들이여, 중생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어떤 업을 지으면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된다.
Kammassakā bhikkhave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yaṃ kammaṃ karonti kalyāṇaṃ vā pāpakaṃ vā, tassa dāyādā bhavanti.
이와 같이 초기 불전들에서 업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자업(自業)’ 즉 ‘깜맛사까따(kammassakatā)’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제 130번째 경인 「데와두따 숫따(Devadūta-sutta)」에서 지옥의 왕 야마(Yama)는 자신 앞에 끌려나온 죽은 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악업은 어머니가 지은 것도 아니요 아버지가 지은 것도 아니며, 형제나 자매나 친구나 친지와 친척들이 지은 것도 아니며, 사문과 바라문들이나 천인들이 지은 것도 아니다. 그대 스스로 악업을 지었고 오직 그대가 그 과보를 받을 것이다.
Taṁ kho pana te etaṁ pāpaṁ kammaṁ n’eva mātarā na pitarā kataṁ na bhātarā kataṁ na bhaginiyā kataṁ na mittā-maccehi kataṁ na ñātisālohitehi kataṁ na samaṇabrāhmaṇehi kataṁ na devatāhi kataṁ; tayā v’etaṁ pāpaṁ kammaṁ kataṁ; tvañ ñeva etassa vipākaṁ paṭisaṁvedissasīti.
여기서도 업과 그 과보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에서 붓다는 자기의 행위는 자신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하며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양도하거나 남과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을 설하고 있다.
씨앗은 뿌리는 대로 열매 맺나니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선이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악이 있으리. 그대 이제 씨앗을 뿌렸으니 오직 그대만이 그 열매를 경험하리라.
yādisaṃ vappate bījaṃ, tādisaṃ harate phalaṃ, kalyāṇakārī kalyāṇaṃ, pāpakārī ca pāpakaṃ, pavuttaṃ vappate bījaṃ, phalaṃ paccanubhossasī ti.
여기서 우리는 붓다가 말한 “그대 이제 씨앗을 뿌렸으니 오직 그대만이 그 열매를 경험하리라(pavuttaṃ vappate bījaṃ, phalaṃ paccanubhossasī ti).”라는 문장을 주목해야 한다. 이 문장은 붓다가 공업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확고부동한 성전(聖典)의 근거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와 같이 초기 불교의 업 이론은 기본적으로 ‘자업(自業, kammassakatā)’ 또는 부파 불교의 용어로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이라고 할 수 있다.
Ⅲ. 북방 부파들의 공업(共業)
앞서 살펴 본 대로, 붓다는 업을 철저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보았지만 부파 불교 시대에 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업이 공동의 책임으로 확장되어 해석된다. 이것이 이른바 ‘공업(共業)’이다. 테라와다의 관점에서 공업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업의 개념부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업은 산스끄리뜨어 ‘삿다라나 까르마(sādhāraṇa- karma)’의 한역어이다. 삿다라나(sādhāraṇa)의 사전적 의미는 ‘동일한 지주나 기초를 갖거나 의지하는’, ‘많은 또는 모든 사람에게 속하거나 적용되는’, ‘모두에게 공통되는’ 등이다. 이 공업에 상대되는 말로는 개별적인 업이라는 뜻의 ‘별업(別業)’ 또는 공통되지 않는 업이라는 의미의 ‘불공업(不共業)’이 주로 쓰인다. 물론 별업과 불공업은 오직 북전(北傳)의 문헌들에서만 나오는 말로 테라와다의 자업(自業, kammassakatā)에 해당한다. 북전의 문헌들 가운데서는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에서 공업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공업계라고 하는가. 법이 업을 따라 변하면 공업이 일어나, 함께 머물고 함께 사라지는 것을 공업계라고 한다. 무엇을 불공업계라고 하는가. 법이 업을 따라 변하지 않으면 공업이 일어나지 않으니, 함께 머물지도 않고 함께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것을 불공업계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보면 초기의 공업은 원래 중생들이 함께 업을 짓고 그 과보를 함께 받는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북전의 문헌들에서 공업은 주로 기세간(器世間, bhājana- loka)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에서 비가 내리는 현상이나 지옥 등이 모든 중생이 짓는 공업의 증상과(增上果, adhi-phala)에 의한다고 설명되고 있으며,중생은 별업(別業) 즉 불공업으로 생겨나고, 기세간은 공업으로 생겨난다고 설명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생들이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 업을 짓는 내용에 따라 중생들이 머물 세계의 성립과 파괴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문] 무슨 이유로 모든 세계가 함께 무너지지도, 함께 성립되지도 않는가?
[답] 모든 중생들의 업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들이 이곳에서 공업을 증장하면 세계가 곧 성립되고, 공업이 다하면 세계가 곧 무너진다. 또 중생들이 저곳에서 정업을 증장하면 이 세계가 곧 무너지고, 정업이 줄어들면 이 세계가 곧 성립된다.
또한 중생들의 행위는 증상연(增上緣, adhi-pratyaya)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의 행위와 영향을 주고받는데, 그렇게 작용하는 힘을 증상력(增上力, adhi-pati)이라고 한다. 와수반두(世親, Vasubandhu)가 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의 입장에서 설일체유부의 교리를 집대성한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도 중생들이 사는 기세간은 중생들이 함께 지은 공업으로 인한 힘을 지닌 바람으로 시작되며, 이 공업의 소멸은 불, 물, 바람의 세 가지 재앙들을 통해서 기세간의 소멸을 가져온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들이 거주하는 기세간은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중생들이 함께 지은 공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모든 중생의 업의 증상력에 의해 허공에는 점차 미세한 바람이 생겨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기세간이 장차 이루어지려는 조짐이다. 그러다 바람이 점차 증가하여 왕성해지고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풍륜, 수륜, 금륜 등이 성립한다. 그러나 처음에 대범천의 궁전 또는 야마천의 궁전을 성립시키고 그 후에 풍륜 등을 일으키니, 이것을 바로 외부의 기세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설일체유부는 중생들의 공업으로 기세간이 이루어지며 달과 태양의 운동과 이동도 공업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리와르만(訶梨跋摩, Harivarman)이 지은 경량부 계통의 논서인 성실론(成實論)에서도 대지, 해, 달 등과 같은 환경의 생성이 공업에 의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아비담심론경(阿毘曇心論經)에서는 불공업이 각 중생들의 업이 증대하여 생기는 업으로, 공업이 모든 중생의 업이 증대하여 생기는 업으로 각각 정의되고 있다. 이 밖에도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의 문헌인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서도 증상과로 기세간이 나타난다고 설명되고 있다. 남전(南傳)에서도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 계통으로 추정되는 안다까(Andhakā)라는 부파가 자연 현상들의 원인으로 공업을 지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공업은 이 밖에도 북전의 문헌들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더 이상의 인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이러한 설명을 종합해 본다면, 공업은 같은 종류의 업을 지은 자들이 같은 종류의 과보를 받는 업으로서, 세계의 성립과 파괴를 규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업으로 인한 과보(vipāka)를 자신 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받게 되며,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행한 선악의 과보를 자신도 공유한다는 것이 업 이론으로서 공업의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북방 부파들은 기세간과 같은 물리적 현상들을 중생들이 함께 지은 업의 결과(kamma-vipāka)로 보고,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에 지나지 않던 업을, 그것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북전의 공업은 업의 동기적 측면보다는 업의 결과적 측면이 강조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후자의 관점으로부터 공업의 이론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테라와다의 관점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IV. 테라와다의 입장
북방 불교의 공업(共業)에 해당하는 ‘사라나 깜마(sādhāraṇa- kamma)’나 ‘사라나 깜마위빠까(sādhāraṇa-kammavipāka)’라는 빨리어는 고층(古層)의 빨리 니까야(Pāli Nikāya)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ppakaraṇa- aṭṭhakathā)에서 테라와다인 자론사(自論師, saka-vādin)의 입장을 수호하고 논쟁 상대인 타론사(他論師, para- vādin)의 입장을 반박하는 문구에서나 보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불공업(不共業)에 해당하는 빨리어 ‘아웨니까 깜마(āveṇika- amma)’도 율장(律藏, Vinaya-Piṭaka)에서 ‘독자적인 승가의 갈마(āveṇika-saṅgha-kamma)’라는 개념으로나 쓰이고 있을 따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테라와다가 참된 이치(諦義, saccikattha)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로는 공업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논쟁 상대를 논박하기 위해서 인습적 명칭(vohāra-vacana)으로만 그것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논의는 까타왓투(Kathāvatthu)의 「대지와 업보에 대한 논의(Paṭhavī- kammavipāka-athā)」이다. 여기서는 “대지는 업보이다(paṭhavī kamma-vipāko).”라는 안다까(Andhakā)의 주장에 대해서, 테라와다는 만약 그것이 업보라면 물질(色, rūpa)인 대지(paṭhavī)가 어떻게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상응할 수 있는지를 추궁하면서, 업보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에 대지에 사는 수많은 다른 중생들과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서 ‘위빠까(vipāka)’라는 개념은 특수한 전문용어로서 89종류의 마음들 가운데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에만 한정된다. 그래서 테라와다는 일부 물질(色, rūpa)이 업에 의해서 생기는 것을 인정하면서도,그것들을 위빠까라고 결코 부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테라와다에게 위빠까란 업의 결과로 금생이나 내생에 받는 정신적 느낌일 뿐이다. 그래서 냐나틸로카(Nyānatiloka)도 지적했듯이, 공업이란 개념은 업에 행위의 결과까지 포함시킨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테라와다는 위빠까를 ‘개인의 정신’으로 보는데 비해, 북방 부파들은 이를 ‘집단의 행위의 결과인 물질’로 보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북방 부파들은 공업의 이론을 도입하였고, 테라와다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까타왓투의 「대지와 업이숙에 대한 논의」로 돌아와 보자. 논쟁은 과보의 공유나 집단 행위라는 화제로 옮겨간다. 테라와다가 지적하는 타론사의 문제점들이나 모순점들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테라와다는 과보의 분할, 양도, 공유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대지는 확대, 축소, 분양, 분단되어 부동산으로 매매되곤 하지만, 선업과 불선업의 결과인 과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테라와다는 세계의 생성에서 대지가 먼저 완성되고, 그 뒤에 거기에서 태어나는 중생이 업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면, 업보의 순서가 뒤바뀌고 모순이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셋째, 테라와다는 모든 중생의 업이 모인 결과로서 대지가 있다면 대지라는 장소에 재생할 중생은 자신의 과보를 받지 않게 되며, 대지에 태어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 pari- nibbāna)하는 중생이 있으면, 그는 받아야 할 업보를 남긴 채 반열반하게 된다는 모순점을 들고 있다.
넷째, 테라와다는 중생 전체의 업의 결과가 아니라 전륜성왕(轉輪聖王, cakkavatti-rāja) 혼자의 업보로서 대지가 생겼다고 한다면, 거기에 살고 있는 많은 중생이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까타왓투 주석서(Kathāvatthuppakaraṇa-aṭṭhakathā)에서는 “대지, 바다, 태양, 달 등도 모든 이들에게 공업의 과보라는 것은 그들의 견해이다(paṭhavīsamuddasūriyacandimādayo pi sabbesaṃ sādhāraṇakammavipāko ti tesaṃ laddhi).”라고 설명하면서 세계 즉 기세간의 성립과 전개와 소멸을 중생들의 공업으로 돌리는 안다까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붓다는 모든 업보가 금생이나 전생의 업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만약 모든 업보가 금생이나 전생의 업에 의한 결과라면, 불교의 업 이론은 철저하게 ‘결정론(決定論)’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는 이러한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에 입각하여 대지나 산과 같은 자연 현상 즉 기세간은 중생들의 공업의 결과가 아니라 계절에 의해 생긴 것(utu-ja), 즉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일 뿐이라고 해명한다. 이점은 밀린다빤하(Milindapañha)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왕이여, 무릇 중생으로서 의도가 있는 자는 모두 업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불과 모든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은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땅과 산과 물과 바람 그런 모든 것들은 계절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허공과 열반 이 두 가지는 업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시절에 의해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Ye keci mahārāja sattā sacetanā sabbe te kammajā, aggi ca sabbāni ca bījajātāni hetujāni, paṭhavī ca pabbatā ca udakañ-ca vāto ca sabbe te utujā, ākāso ca nibbānañ-ca ime dve akammajā ahetujā anutujā.
전술하였듯이, 붓다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업의 본질은 의도(思, cetanā)라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의도는,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개인의 마음 작용 즉 쩨따시까(cetasika)에 속한다. 그리고 쩨따시까는 ‘4위 82법(四位八十二法)’이라는 테라와다의 법이론(dhamma-vāda)에서 네 가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의 하나이다. 이점은 바로 업이 본질적으로 단체나 집단과는 무관한 순수한 개인의 마음 작용이면서 궁극적인 실체로서 인정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업은 개인의 마음 작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업(自業, kammassakatā) 즉 불공업(不共業, āveṇika-karma)이라고 보는 것이 테라와다의 입장이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담마(dhamma)는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ha-sacca)와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에서 중심 주제는 거의 대부분 전자이다. 테라와다의 아비담마가 탐구하고 분석하는 대상은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으로 이루어진 가화합(假和合)인 개인 즉 자아이기 때문에 이 자아를 떠나서는 테라와다의 법이론(dhamma-vāda)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4위 82법이라는 테라와다의 법이론에 공업이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보다 중요하게, 테라와다는 자아나 중생이나 사람이라는 인습적 명칭(vohāra-vacana)들이란 사실상 오온으로 이루어진 가화합인 개념(施設, paññatti)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테라와다는 공업도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한 업의 성향을 통칭하는 인습적 진리(俗諦, sammuti-sacca)이자 개념일 뿐이지 궁극적 진리(眞諦, paramatta-sacca)가 아니라고 본다. 마치 개인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듯이, 공업도 단지 개인의 업이 서로 합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제임스 파울 멕 더모트(James Paul Mc Dermott)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대로이다.
담마빠다 앗타까타(Dhammapada-Aṭṭhakathā)의 위두다바왓투(Viḍuḍabhavatthu)와 같은 예외가 드물게 있으나, 주어진 상황에 참여한 사람들의 개인적 업의 결과와 처벌의 합류라는 의미에서만 고전 빨리 문헌들에서 ‘공업’이 말해질 수 있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도 지적했듯이, 이른바 국가나 국민이라고 하는 큰 단체도 사실은 개인의 방대한 집합일 뿐이며 국민이나 국가가 행동하지는 않는다. 결국 행동하는 것은 개인일 따름이다. 개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국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V. 나오는 말
붓다가 설한 업 이론은 개인이 지은 업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자업(自業, kammassakatā)’으로 요약된다. 테라와다도 이러한 붓다의 말씀(buddha-vacana)에 충실하여 업을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설일체유부와 안다까와 같은 북방 부파들은 기세간과 같은 물리적 현상들을 중생들이 함께 지은 업의 결과(kamma-vipāka)로 보고, 개인의 마음 작용(心所, cetasika)인 ‘의도(思, cetanā)’에 지나지 않던 업을, 그것과 동일시하려는 데서 공업의 이론이 대두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공업 이론의 대두는 업을 개인적 책임으로만 해석하려는 전통적인 업 이론의 종말을 의미하며, 나중에 대승 불교에서 아라한이라는 개인적 이상만을 추구하던 부파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사회봉사와 중생구제를 강조하는 보살 사상이 형성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승 불교의 흥기에 유·무형의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대중부 계열 안다까와 설일체유부가 공업의 이론을 주장하였던 점이나, 공업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불교의 사회적 참여나 기여를 부르짖는 현대 불교인들 대부분이 대승 불교인들이라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테라와다가 설하는 업 이론이 사회성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테라와다는 업이 기본적으로 자업(自業, kammassakatā)의 성질을 지닌다고 해석하긴 하지만, 개인이 짓는 선업(kusala-kamma)이나 공덕(puñña)을 남들과 나눌 수 있음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제 288번 자따까(Jatāka)인 「맛춧다나 자따까(Macchuddāna-Jatāka)」에는 보살(菩薩, bodhisatta)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남은 밥을 갠지스 강에 던지면서 그 공덕을 강의 신(nadī-devatā)에게 돌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에도 테라와다 불교권에는 신도들이 음식이나 가사를 비구들에게 공양하고 나서 비구들이 축원을 하는 동안 손에 물을 따르는 관행이 있다. 이 물은 바다를 채우는 강의 상징으로 선행의 공덕이 남들과 나눌 수 있을 만큼 크고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어디까지나 자업에 바탕을 두면서 그 선업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업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붓다는 개인의 업과 자연 환경을 전혀 무관하다고 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악간냐 숫따(Aggañña-sutta)」, 「짝까왓띠시하난다 숫따(Cakkavattisīhanāda-sutta)」 등과 같은 초기 불전들에서도 개인의 업과 자연 환경 간의 긴밀한 상호관계가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후대 테라와다 주석서들에서 ‘다섯 가지 자연의 법칙(pañca-niyāma)’이라는 이론으로 체계화되었다. 이와 같이 초기 불교와 테라와다에서도 개인의 업과 그 과보는 그 자신을 넘어서 주변 환경과 다른 중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다만 참된 이치(諦義, saccikattha)와 궁극적 이치(勝義, paramattha)에서 그것을 공업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테라와다의 기본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 개인의 행위를 그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가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할 필요는 없으며, 개인도 그가 속한 단체나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가 지은 업을 함께 나누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불교의 이상인 해탈(解脫, vimutti)과 열반(涅槃, nibbāna)도 결국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 개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지, 단체나 집단이 공동으로 성취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개인은 자신이 행한 특정한 몫에만 책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었고 테라와다도 이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업 이론과 관련하여 테라와다와 대승이라는 주요한 두 불교 전통들의 입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테라와다는 업을 개인적 책임으로 보는데 반해서 대승 불교는 그 업이 주변에 미치는 파급력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승 불교가 기존의 전통 교단들을 사회봉사와 중생구제에 무관심한 소승(小乘, Hīnayāna)이라고 폄하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테라와다의 업 이론이 단순히 개인적 문제로만 한정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업과 불공업으로 업을 구분하는 것 자체는 테라와다에게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테라와다는 자아의 완성을 통해 사회의 완성이 이룩된다고 보는 점에서 업의 사회적 책임에 더 역점을 두는 대승 불교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업의 법칙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점점 악업(pāpa-kamma)을 피하고 선업(kusala-kamma)을 실천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개인들이 서로 모임으로써 그들이 속한 단체나 집단도 선하게 변화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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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Group Karma (sādhāraṇa-karma) in Theravāda Perspective: According to the Nikāyas and Abhidhmma
Kim, han-sang / A lecturer of Dongguk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theory of group karma (sādhāraṇa-karma) from a Theravāda perspective. One of the central concepts in Buddhism, as is well known, is the idea of karma (karma-vāda). Although the importance of karma in Buddhist thought is regularly recognized, the Buddhist understanding of the theory of karma has not been inalterably fixed, and it has undergone a process of development and modification during the course of Buddhist history. For example, a so-called ‘group karma’ was formulated by the Northern Buddhist schools such as Andhakā and Sarvāstivāda. According to this view, the theory of karma can be classified into two parts. One is group karma that is held in common by certain groups of people. The other is individual karma (āveṇika-karma) that gives rise to individual effects. The Northern Buddhist schools maintained that the physical universe (bhājana-loka) is formed by the group karma accumulated by groups of people. Nowadays, many modern Buddhists prefer to suggest the dispersion of karmic responsibility into the social system, such that moral responsibility is decentered from the solitary individual and spread throughout the entire social system, advocating Engaged Buddhism. In this way, they emphasize that karma is in essence collective. However, the concept of group karma is not traced to the Early discourses. Instead, the repeated emphasis in the canonical discussions of karma is on the individual as heir to his own deeds. The Buddha treated karma, everywhere and always, as a personal inheritance, kammassakatā. Likewise, Theravāda Buddhism denies the concept of group karma on the ground that all effects of actions are not karmic effects. According to the Kathāvatthu, the pāli term vipāka, which is generally translated by effect, or result, refers only to the karma-produced mental results, such as pleasurable and painful bodily feeling and all other primary mental phenomena. In this way, on the part of Theravāda, vipāka itself cannot be shared with other sentient beings in the physical universe (bhājana-loka) in that it is a mere personal experience. Theravādins insist that the assumption of a so-called group karma in the Northern Buddhist traditions is a wrong application of the cannonical term karma, which is identical with intention (cetanā), into karmic results (karma-vipāka), and it is a mistaken view as to what might be termed conjunctive karma, which is in any given situation the karma of each individual involved must be in confluence with that of every other participant in the situation. On the part of Theravāda, a so-called group karma is therefore not the ultimate truth (paramatta-sacca) but the conventional truth (sammutti-sacca).
* Key Words
Group Karma (sādhāraṇa-karma), Individual Karma (āveṇika-karma), One’s own karma (kammassakatā), Result (vipāka) or Kammic result (karma-vipāka), Conventional truth (sammuti-sacca), Ultimate truth (paramatta-sacca), Physical universe (bhājana-loka), Volition (cetan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