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세 가지 이야기’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들으셔도 좋고, 허구의 이야기라고 단정하고 들으셔도 됩니다. 때로는 진짜가 가짜가 되고 때로는 가짜가 진짜가 됩니다. 현실이 알고 보면 꿈일 때도 있고, 꿈이 실은 현실일 때도 있습니다.
첫 번 째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였지요. 당시 우리 위대한 중국의 인재들은 모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 사람들을 사심없이 지원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형제들에게는우리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 입혀주고 우리 밥그릇에 담긴 쌀밥을 먹여주며 우리의 농업 전문가들을 그곳에 보내 논농사를 가르쳐주고 우리의 의사들을 보내 질병을 치료해 줄 정도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 주었지요. 저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중한 기회는 다른 의사가 가로채버리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아쉬워 하셨고, 저는 더 아위웠습니다. 저의 첫 번 째 꿈은 이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다 크면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소중한 생명을 하나하나 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대단히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저는 정말로 의사가 되었습니다. 치과의사가 되었지요. 유감스럽게도 아프리카 형제들의 이를 뽑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제가 작가가 되고 난 후인 2008년에 파라에서 프랑스 국제방송의 한 토고 출신 기자와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작품 ‘형제’의 프랑스어 판의 홍보를 위해서 였습니다. 홍보가 끝나고 우리는 과거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떠올리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중국의 농업 전문가(남성)들이 자기나라 사람들에게 벼농사 짓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중국의 의사들이 병을 치료해주었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그 중국 남자들은 수많은 토고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수많은 아이들을 낳았다고 하더군요. 바로 이 토고 출신의 여기자의 사촌 동생이 중국과 아프리카의 우정 덕분에 태어난 결과물이라면서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농업 전문가와 의사들이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토고에 남긴 속담도 하나 있습니다.
“중국인인 남긴 아이들이 중국이 남긴 쌀만큼이나 많다.”
두 번 째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저는 중학교 때 ‘서유기’를 읽었습니다. 삼장법사의 제자들이 서천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가 저를 끝없는 상상의 나래에 태웠습니다. 사실 저는 손오공이 되고 싶었습니다 . 손오공이 될 수 없다면 삼장법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도 아니면 사오정, 사오정되 안 되면 저팔계가 되어도 만족할 것 같았습니다. 서천으로 가서 부처를 만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저는 불교 신자가 아니라서 ‘서유기’를 읽고서야 이런 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0년 전 마침내 네팔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카트만두에 착륙하는 순간 저는 룸비니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이 삼장법사가 서천으로 떠난 여행의 종착지였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와 그가 세운 불교대학도 바로 그곳에 있지요. 카트만두에 며칠 머물고 난 우리 일행 네 사람은 룸비니로 갔습니다. 저의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불교대학이 있던 곳은 터만 남아 맨땅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 옆에 있는 석가의 탄생지는 커다란 천막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은 경건한 마음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부처의 탄생지라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지요. 그 커다란 천막 안에 들어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한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저 스스로도 제가 이렇게 경건했던 적은 없었다고 느끼는 순간 갑자기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에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었습니다. 무슨 메시지인지 궁금하여 휴대전화를 얼른 꺼내어 확인해 보았습니다. 베이징의 낯선 번호에서 온 성매매 광고 문자더군요. 학생도 있고, 서양 아가씨도 있으니 얼마든지 고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 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998년 제가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을 때입니다. 마침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를 대성당에서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50년에 한번 씩 하는 전시라고 하더군요. 대단히 성대한 의식이라 유럽 각지에셔, 심지어 세계의 각지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었습니다.
저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생각하고 탐독했던 것이지요. 저는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그날도 아주 경건하게 경외의 마음을 품고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50년에 한번 볼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이겠습니까? 그들 사이에 있자니 이는 제 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리노 대학교의 ㅜ중국 연구자인 스테파니아 교수는 저를 위해 입장권을 준비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망원경도 챙겨 왔습니다. 사람들은 입구에서부터 장사진을 치고서 일정한 발걸음으로 예수의 수의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중간에 멈추는 일도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이르렀는데도 트리노의 수의는 여전히 10미터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스테파니아 교수는 제게 망원경을 눈에 대고 걸으면서 보라고 권했습니 다.
그날 트리노 대성당 밖에는 노점상들의 천막이 또한 장사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와 관련이 있는 물건은 물론, 별로 관련이 없는 갖가지 기념품과 상품을 팔고 있었습니다. 제가 토리노에 있던, 그날부터 약 열 달 전에 영국의 다이에나 왕태자비가 자동차 사고로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노점마다 다이에나의 사진과 초상화로 가득했습니다. 다이에나가 가장 잘 팔리는가 봅니다. 다아에나의 눈 수 천, 수 백 쌍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는 성당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느낌은 너무도 이상했습니다. 인류의 유행을 지나 인류의 수난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2017. 3. 15 남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