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가는날
전남 강진 백련사 무문관에 가는 날이다.
그동안의 외도 삼 년간을 석 달의 무문관 정진으로 업장 소멸하려 한다.
서울살이 '수도승' 으로 삼 년. 월간 <해인> 편집장 소임과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에서 불교미술을 공부하느라 보낸 시간들이다.
아! 그동안 선방의 좌복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신새벽 이슬 머금은 산사의 오솔길은 또 얼마나 그리웠던가.
남도의 5월은 누렇게 익어 물 결치는 보리발과,
간간이 모내기를 한 논들 위로 날아오르는 백로들이 낯선 객을 맞이한다.
올보리들은 벌써 타작을 끝내고
`'보릿대' 를 태우 는 연기가 온 들녘을 가득 휘감아 돈다.
예전에 남도 답사길에 오르면 반드시 거치는 곳이
강진 땅이었고 백련사였는데, 이렇게 선방 방부를 들여 한 철 지내는 것은 처음이다.
백련사는 천이백여 년 전 신라 문성왕 때 무량 국사가 창건하셨다
고려 때는 보조 국사를 중심으로 '정해쌍수'를 주장하던
송광사의 '정혜결사'가 점차 최씨 무신 정권과 밀착되어 백성들을 외면할 때.
백련사에서는 원묘 국사께서 참회와 정토 사상을 모태로 한
'백련결사'를 주도하여 지방 토호들과 서민층에게까지 불법을 널리 보급하였다.
말하자면 민중들의 권익을 보호한,
우리나라 민중운동의 시초가 되는 도량이기도 하다.
이후 여덟 국사가 배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소요 대사를 비롯하여 여덟 종사가 배출된 수행도량이다.
특히 백련사에서는 '염불만일회'를 결성하여
만일 철야기도(약 삼십년)를 회향한 법화와 정토기도도량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해인사 강원 한 해 선배이자 수계도반이기도 한
혜일 스님이 주지로 머무는데. 옛 선방 터에 무문관을 다시 짓고 세 철째 운영해오고 있다
백련사에 도착하니 오후 세시쯤 됐는데 주지스님은
초파일 행사 후 과로로 입원 중이라 하고 다른 스님들은 보이질 않는다.
정진 중 필요 할 겼 같아 이것저것 쟁기다 보니
한 걸망이 되었는데 낑낑대며 산길을 올라 무문관에 도착하니 도량은 텅 비어 있다.
무문관은 맞배지붕으로 지은 다섯 칸짜리 한옥이다.
다섯 명이 살 수 있는데 아직 아무도 안 온 모양이다.
빈방 하나에 걸망을 풀어놓고 한숨을 돌리니,
탁 트인 전망 아래로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썰물 때문인지 갯벌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고
건너편에는 청자 도요지로 유명한 포구들이 보인다.
가볍게 도량을 산책하다 좌복을 펴놓고 한번 앉아보았다.
그리고 방 안을 휘 둘러보니 모든게 마음에 든다.
2002. 5. 21,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