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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소년과 이태리 아가씨
꽉 막힌 서당 가는 길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예의를 지키어 노력하며 총총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지. 엄중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처음 그 길에 들어선 이의 기를 누르기에 충분하겠지. 그렇게 들어선 서당 위 한 늙은 선생에게 올라가기 위해 걸어야 하는 넓고 긴 계단을 오를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 듯하게 또 마치 숨소리를 너무 죽여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올라간다. 그렇게 만난 선생은 이리하라 저리하라 하면서 나의 감정과 태도를 조각해 낸다. 난 분명 그렇게 조각되어 어떠한 상황에 올바른 감정과 행동을 해낼 것이다. 난 그렇게 홀을 잡을 것이고, 옷깃을 장식할 것이며, 식습관을 드리고 손님을 대접할 것이다. 입궐 할 때에도 예절을 지키겠지. 이제 내가 배운 대로 계단을 내려간다. 한 마리의 새가 날갯짓하는 듯하여 늙은 선생이 인자한 미소를 띄기를 기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는 가식 떨지 말라고 꾸짖는다. 하지만 걱정 없다. 더 연습하여 보다 더 정교한 조각이 되면 된다.
딱 트인 절경. 내 뒤로는 큰 강이 긴 선을 따라 흐르고 내 머리 위에는 강렬하지만 부드러운 봄 태양이 내 이마와 볼에 맺혀 있는 땀을 반사 시켜 빛나게 만든다. 이미 더러워 질 대로 더러워진 손은 신경쓰기를 포기하고 진흙탕에 여러 번 빠진 농구공을 이리저리 뛰기고 있다. 시선은 별로 멀지 않은 농구 골대를 바로 본채 곁눈으로 공을 향해 다가오는 친구를 주시한다. 손은 손 대로 눈은 눈 대로 바쁘게 움직이며 친구를 재끼며 골문을 통과하는 공을 볼 때의 쾌감과 기쁨은 굳이 조각되지 않아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게임 끝났다.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르고 있자 멀리서 한 아이가 걸어와 어눌하지만 자신감 있는 영어로 말을 건다. 운동하느라 벗고 있던 안경을 고쳐 쓰자 희미했던 아이의 윤곽이 드러나며 그가 왜 영어를 썼는지 알 수 있게 됐다.
백인 키 작은 남자아이는 개구진 파란 눈으로 우리 일행을 쳐다보고 있다. 마침 5명 밖에 인원이 없던 우리는 흔쾌히 승낙하며 딱딱한 콩글리시로 말했다. “together play basketball? “
“Of course three three rule ok?”
“Ok good.”
그 아이는 우리에 비하면 선수였다. 하는 족족 그 아이가 있는 쪽의 팀이 이겼고 나중에 성인을 낀 팀과 그 아이가 낀 팀끼리 했을 때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땀을 빼고 나니 슬슬 배가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같이 편의점으로 발을 옮겼다.
그 길은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우리 일행을 위한 길인 것 마냥 아름답게 뻗어 있었다. 그저 마냥 뻔안하고 즐거운 감정을 느꼈다. 선선한 봄바람과 무척 밝은 봄 태양이 우리를 춥게도 덥게도 만들며 온몸에 넘쳐 흐르던 땀 샘을 천천히 멈추었다. 대화가 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영어 수준으로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그 사이에는 친구의 우정도, 연인의 사랑도, 낯선이의 어색함도 아닌 어떤 긴장감과 그로 인한 예의와 존경심이 아주 얇고 넓은 천이 귀중한 도자기를 감싸듯 우리를 감싸 안았다. 그곳에는 어느 선생의 가르침과 덕과 예의 요구는 하나 없었다. 그저 끝없이 이어져 있는 초록 잔디와 그 잔디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며 뚫려 있는 길을 걷고, 이따금씩 광활하게 파란 색칠해진 하늘에 떠있는 옅은 구름을 보며 멋대로 그 형태를 만지고 정의하며 같이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2000년도 더 전에 어떤 노인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분명 이 경험을 추구하며 한번 만 더 이와 같은 느낌을 느끼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노인이 자신만큼 남을 귀중히 여기는 선생이었다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두가 그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개념을 정리했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제자를 길렀을 것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경험의 기쁨과 덕은 누구에게 의해 가르쳐진 것도 아니고, 요구 되어 강박처럼 챙긴 것도 아니며, 강하게 원하여 목마른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며 찾아 얻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생이 2000년이라는 시간의 제악을 벗어나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할 수 있던 이유는 분명 어린 소년이 느낀 그 경험이 결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러니 그 기쁨은 선생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중요한 기쁨의 기준을 잃어 버린 늑대들에게 다시 인간다운 기쁨을 알려준 소년의 깨달음은 놀랍다. 하지만 소년은 소년대로 있지 못했고 선생이 되어 버렸다. 더이상 소년은 인간관계를 있는 그대로로 느끼지 못하고 가르치는 데에 집중했다. 원래도 배움에 뜻이 있던 그 소년의 인간성은 결국 모든 것을 수학의 셈처럼 정의하는데 이르는 것이다. 그저 느끼지 못하고 정의하고, 가르쳤으니 제자들은 당연히 그 속의 기쁨보다는 문자에 마음을 두었을 것이다. “인은 이것이고 저것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수를 두니 이질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가만히 우러나오는 것은 없고 그저 익힘으로 조각하는 꼴이다.
소년은 사람의 손을 놓고 연필을 잡았다. 어루만지기보다는 조각하기를 선택했고 그렇게 소년에 매끈한 이마에는 날까 롭게 패인 주름이 하나씩 늘어만 갔다.
모두가 그저 지나갈 뿐인 골목길 속에는 보다 낮은 곳으로 가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별로 되지 않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슬슬 햇빛이 들어서지 않을 때에 눈 앞에는 문이 나타난다. 그 문 앞에는 수많은 물감들과 캔버스들이 쌓여 있다.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천장과 맞닿아 있는 가로로 늘어져 있는 조그마한 창문 2개 뿐이다. 키 큰 사람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이 낮고 좁은 반지하에는 다행히 그 반지하에 잘 어울리는 채형을 지닌 아가씨만이 있다. 들어가기 미안한 그 반지하 속에 어울리지 않은 채형을 가진 나를 반기는 아가씨는 완벽하지만 외국인이기에 뒤틀릴 수밖에 없는, 그런 기묘하고 오묘한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떨떠름하다. 나는 왜 이곳이 왔는가? 아무튼 배울 것이 있을 터이니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백인, 녹안, 그리고 서울의 반지하는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그다지 쉽게 머리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아가씨의 인생이다. 상의는 난닝구 티셔츠를 입고 있으니 본인의 키보다 훨씬 큰, 심지어 반지하의 천창에 닿을 법한 큰 캔버스를 이리저리 옮기며 생긴 강단 있는 팔 근육이 두드러지는데 비해 바지는 동묘에서 산 아줌마 바지를 입고 있으니 예술가 답기도 하고 사람 자체가 모순적이게 보이기도 하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화가의 작업실은 생각보다 더럽다. 물론 일반화를 할 수는 없지만 이 아가씨의 작업실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각인을 새긴 것이다. 문 바로 옆 빛이 질 들어오지 않는 선반에는 언젠가 짜 놓은 유화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고 고여 있는데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불안하고 역겨운 무언가가 유화물감의 기름을 먹고 있었다. 나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한 것을 보고는 아가씨는 아가씨답지 않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vigliacco!”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후에 그것이 쫄보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무언가 더 씁쓸한 맛이었다. 확실한 것은 한국어 보다는 이탈리아어가 확실히 그녀가 왜 아가씨라 불릴 수 있 수 있었다. 무언가 더 고귀하고, 나와는 다른 생명채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선반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들고 있던 붓의 끝으로 역겨운 입으로 유화물감의 기름을 빨아먹고 있던 바퀴벌레를 찔렀다. 바퀴벌레는 배에서 피와 내장대신 파란색 물감을 토해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잠시 다리를 꿈틀거리다 죽었다. 글에 자세히 묘사할 만큼 나에게는 충격적인 관경이었지만 아가씨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듯 살며시 발로 시체를 저 멀리 치워두었다.
“제가 버려 놓을까요?”
“뭐… 마음대로!”
그렇게 나에게 바퀴벌레 시체를 남겨둔 체 다시 아가씨는 캔버스 앞으로 가서 끝에 파란색 무언가가 묻어 있는 바로 그 붓으로 진홍색이라 부를 수 있는 색으로 아무런 계획이 없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더러운 작업실을 휘저으며 창문을 열기도하고 물감을 짜기도 했다. 담배를 원하는 듯 손을 피면 눈치 것 조금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난생처음 새 담배곽을 열어 아가씨의 손에 담배를 꽂아 주웠다. 냄새가 난다 싶으면 코를 막고 입으로 만 숨을 쉬었다.
그 방에서는 나는 아무것이나 해도 되었다. 물감을 조금 잘못 짜도 괜찮았고 이따금씩 벌레를 보고 자빠질 뻔해도 괜찮았다. 귀찮게 이게 뭐냐 저게 뭐냐 질문해도 친절하게 답해 주었고 열심히 그린 그림에 그저 ‘색깔이 마음에 드네요… 그거 말고는 잘 모르겠어요.’라는 감상평만 수번 남겨도 웃으며 ‘그런가?’하며 다시 본인의 붓과 캔버스의 모든 집중을 쏟았다. 하지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캔버스에 관한 것이었다. 작든 크든 잘못 잡아 캔버스가 살짝씩 구겨질 때면 우화한 이태리 아가씨의 얼굴도 함께 구겨졌다. “똑바로!” 어눌한 한국 말이어서 그다지 목소리가 크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면 긴장의 한숨과 함께 몸과 머리가 뜨거워졌다. 착하다 하면 착했고 우화하다 하면 우화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분명 아가씨만에 법이 있었고 그 안에 있어서는 똑부러졌다.
아가씨와 나는 닮은 것은 하나 없었다. 나는 남자고, 아가씨는 여자다.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분명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이해하기에는 난 그쪽 지식이 없고, 작업실의 악취에 표정이 굳은 나를 이해하기에 그녀는 너무 그곳에 익숙해져 있다. 같은 것이라면 단지 그 공간에 같이 있어 이따금 대화를 나눈 다는 것. 반지하 작업실에 유화 물감 냄새, 담배의 찌든 냄새와 함께 이상야릇한 분위기 안에 휘감겨 서로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는 책을 펴 읽었고 아가씨는 그림에 집중했다. 난생처음보는 이들은 이따금씩 서로를 쳐다보며 자극을 받은 채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하였다.
밥을 시켜 좁은 탁자에 앉아 각자의 관심사를 상대방에게 말하고 맞장구 쳐주며 밥을 먹었다. 어눌한 한국말을 상대로 대화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이상하면서도 재밌는 일이었다. 아가씨는 나에게 간단한 이탈리아어를 가르쳤고 나는 내가 읽고 있던 {수레바뀌 아래서}를 나름 열심히 설명해 보았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쾌쾌한 담배 냄새가 도는 답답한 반지하에서 나는 몇 년 전 만났던 오스트레일리아 소년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탁 트인 풍경 속에 있던 나와 이 지하속의 나는 눈앞의 환경과 사람 모두 달랐지만 느낌은 다르지 않았다. 그때의 그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날 감싸 안고 있었다. 잠시 숟가락을 내려 놓은 채 가만히 아가씨를 바라보며 이리 생각해 보았다. ‘저 아가씨는 그 노인을 알까?’
옛 소년이 한 것은 발명이 아닌 발견이다. 그러니 2000년도 더 후에 사람들이 그의 글을 보고 공감하고 새삼 다시 삶의 기준을 바꾸어 쌓는 것이다. 그가 발견하고 주목한 그 인과 예로 이루어진 행복은 그 시절의 선생과 제자, 부모와 아들, 왕과 신하 뿐만이 아닌 처음 본 외국인 소년과의 농구, 처음 본 외국인 아가씨와의 대화에서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노인의 말을 들었을까? 아니 노인의 이라도 알까? 배움을 길렀을까? 예의 있게 계단을 내려갈까? 홀을 들지 못할까?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발견의 기쁨은 발견을 발명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듯하다. 소년을 교만해 져서 그처럼 살아야만 자신이 발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그 교만은 향당편에서 하늘을 찌르고 마치 그 노인이 군자가 된 듯한,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보고 배워야 하는 듯한 그런 자세한 묘사의 조각칼을 나의 얼굴과 몸에 들이민다. 이리 베이고, 저리 베이며 느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통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가 설명한 기쁨을 찾은 것은 노인의 말씀을 듣기 전의 땀 흘리던 추억과 노인의 말씀에서 벗어나 수레바퀴 아래, 그 수도원에서 아가씨와의 이상야릇한 추억이었다.
나는 요한이기도 하고 베드로이기도 하며, 도마이기도 하고 가룟 유다이기도 하다. 높은 곳에 서려는 욕망과 자신이 유리한데로 말바꾸는 교활함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의심과 배신의 유혹을 항상 느끼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이상인 예수를 제시함과 동시에 비천한 인간상인 제자들을 소개한다. 조각칼을 들이밀지 않고 어둠속의 인간을 보여주며 철저히 절망하고 울부짖게 내버려둔다. 그러다 인도자 역할인 성령을 소개 시켜 제자들과 사울의 변화를 그려낸다.
나는 천민이기도 하고 소인이기도 하며, 자공이기도 하고 자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이 요구하는 것은 홀을 잡는 자신의 모습과 임금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이며, 그렇게 자신을 닮은 안회를 높게 칭찬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철저히 보여줌과 동시에 배움이라는 조각칼로 내 마음과 겉모습을 노인과 같게 잘라낸다. 그렇게 얻은 거짓 모습에 노인은 박수를 친다. ‘이제 비로소 안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구나.’
그렇게 조각된 나는 여전히 내면에 남아있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조각된 나는 내가 아니야. 넌 여전히 소인이고 천민이야.”
이에 나는 이리 대답한다.
“무슨 상관이야. 저기를 봐 나의 선생이 웃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