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문화 탐방기 2
6월 29일 12시 30분 경, 우리 일행은 제주공항에 도착했고, 출구로 나오니 이미 제주의 회원들이 현수막을 펼쳐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경험이며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제주 회원들과 어울려 곧 그들이 예약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는 간단했지만 고등어구이는 정말 맛나게 먹었고, 하지만 기대했던 제주산 소주는 그 식당에 없어서 우리가 흔히 마시는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식사 후 우리는 제주 문화 탐방 첫 번째로 한담공원을 간다. 장한철(녹담거사) 표해록 기념비 앞에서 우리는 그의 일대에 관한 설명을 듣고
《표해록》(漂海錄)은 1770년에 제주 출신 선비였던 장한철이 과거를 보러 배를 탔다가 폭풍으로 표류해 1771년에 귀국하기까지의 경험을 쓴 기록이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지정문화재이다.
장한철(張漢喆ㆍ1744∼?)의 『표해록』은 영조 46년(1770년) 마을 사람들의 권유와 관가의 원조로 서울에 과거 길을 떠났던 장한철이 폭풍을 만나 온갖 고초를 겪고 류큐국(유구국)이 있었던 유구열도(琉球列島)에 표류하면서 겪었던 일을 한문으로 기록한 일기문 형식의 책이다.
영조 46년(1770년)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북제주군 애월읍 애월리 출신 장한철은 마을 부로(父老)의 권유와 관가의 원조로 1770년 12월 25일 김서일 등 일행 29명(장한철 포함)과 함께 과거보러 제주를 떠났다.
장한철 일행을 태운 배는 육지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태풍을 만나 지향 없이 표류하면서 갖가지 고초를 겪고 사경을 헤매다 나흘만에 유구 열도의 어느 무인도에 도착한다.
5일만인 영조 47년 정월 초사흗날 무인도에서 안남(安南)의 상고선(商賈船)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본토 상륙 직전에 태풍으로 선체가 파손되고 21명의 동행자를 잃고 8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장한철은 그후 서울로 올라가 과거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1771년 5월 8일 고향에 돌아온다.
태풍으로 노도근해에서 조난당하고, 유구 열도 호산도에 표착하여 왜구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안남 상고선에 의해 구조됐으나 상선에서 봉변당하고, 청산도 근해에서 또다시 조난 당해 사경을 헤매다 21명은 죽고 8명만이 살아남은 과정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이 책은 당시 표류 상황뿐만 아니라 그가 경과한 경로를 더듬어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을 담고 있어 해양지리서 역할 뿐 아니라 해양문학으로서의 가치 또한 높다.
장한철은 『표해록』을 쓴 후 4년만인 영조 51년 정월 과거시험에 합격해 대정현감 등을 지낸 바 있고, 문집으로 『녹담집(鹿潭集)』을 남겼다.) * 위키백과에서 발췌
그 후 주변을 산책하는데, 아래와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명 소금을 구워내는 곳이라는데, 그 모양을 꾸며놓은 것이었고. 설명은 제주 사람들은 소금을 햇볕으로 굽지 않고 불을 때서 굽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길을 돌려 제주지회 현판식을 한 후 숙소에 짐을 풀고 본 행사를 시작한다. 행사 전 나의 세 번째 시집 “바다에 그늘은 없다”의 사인회를 하고 정예실교수(한라대)의 사회로 행사는 진행되는데, 특히 기억나는 것은 유양업교수(광주 카톨릭대)의 성악, 이시원(팝페라 가수)의 공연, 진순애님의 가야금독주, 고광자님의 시조창 공연은 기억에 남을 만한 공연이었다. 물론 이 외에도 하모니카 연주, 기타연주 시 낭송. 나정임님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구연, 등이 있었으며 득히 시낭송가로 활동하는 설경분님의 낭송은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다.
행사를 마친 후 일행은 만찬의 시간을 갖는다. 정성껏 준비해 놓은 음식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으며, 행사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하는데 나는 몇 분과 새벽 1시 까지 술잔을 기울이고야 말았다. 그렇게 첫 날 하루는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