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나는 여전히 휴가도 몰수당한 채 ‘문학 강연’으로 여름을 나고 있다. 오전에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명작을 통한 세상읽기’를 설파하고 있다.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철학, 심지어 종교의 세계까지 동서고금을 넘나든다. 이것은 즐거움이자 내 ‘생업’이다. 젊었을 때 벌어놓은 것도 없고, 민주화가 되어도 변변한 감투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한 처지라 매일 내 지식을 파는 걸 생업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점심 약속을 못하고 지낸지가 거의 10년이 된다. 강의를 끝내면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버리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민족문제연구소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문학평화포럼 등 관련 단체와 내가 주간으로 있는 월간 《에세이플러스》의 일, 각종 인터뷰, 회의, 초청강연 등으로 쫓긴다. 65살이 넘도록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건 수치스런 일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억압을 뚫고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 가족과 나는 그해 8월부터 전혀 다른 고통과 통한의 삶이 시작될 줄은 전혀 몰랐다. 나에게 8월이 남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맞는 8월, 나는 고통스런 기억의 책장을 넘기며 예순여섯 해에 걸친 나의 지난 삶의 현장으로 걸어가 본다.
한국전쟁 중 아버지·삼촌 희생 집안이 늘 울음바다
나는 1941년 경북 의성군 금성면 구련동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내 고향은 50호 정도의 풍천 임(任)가 집성촌이었다. 논밭 너덧 마지기 정도였던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집은 20여 마지기나 갖고 있어 제법 부자 소리를 들었다. 4살 때 8·15를 맞았다. 해방공간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에게 역사적 돌연변이가 되어 엄청난 비극과 고통을 잉태시키고 있었다. 결국 9살 때 발발한 6·25가 한강의 ‘괴물’처럼 우리 집안을 ‘불행’이라는 감옥에 구금시켰다. 4형제의 맏이인 아버지는 해방 후 군청 서기로 있다가 그만 둔 직후였다. 아버지의 바로 밑 동생인 작은아버지는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 학창시절에 ‘불온학생’으로 낙인 찍혀 멀리 여수로 발령을 받았다가 나중에 연줄을 써서 간신히 고향 가까운 학교로 올 수 있었다. 그는 고등고시 예비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하던 중 1946년 ‘대구 10·1사건’에 휘말렸다. 대구, 경북지역 인사들 대부분이 연루되었던 이 사건(박정희의 친형도 가담) 뒤 우리 마을에는 커다란 피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8·15 후 민족사의 첫 시련이었다. 대구사건보다 훨씬 혹독했던 제주사건(1948)이나 여순사건(1948)에 대한 진상 조사는 다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도 대구 10·1사건만은 여전히 역사의 금지구역 속에 묻혀 있다. 그 까닭은 경북지역 정서가 그만큼 군부독재 지지의 냉전적 가치관에 젖어 있음을 반증한다. 오늘날 영호남의 갈등은 ‘지역감정’이 아니라 역사의식의 차이로, 영남지역은 이런 점에서 한 세대 낙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지역감정으로 접근하는 한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제주 지역이 4·3사건의 원한을 풀어내면서 그 시민운동가들이 국회를 비롯한 제도권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데 비하여 영남지역은 아직 이런 상황을 상상도 할 수 없다. 최근 인혁당 관련자(대부분이 대구 경북지역 출신)의 재심이 이뤄지고 있지만 진정한 ‘인혁당 복권’은 다른 지역처럼 그 관련자들이 국회에도 당당하게 진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뤄져야만 참된 역사의 복원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북지역이 이렇게 된 데는 5·16 유신통치가 뼈저리게 속죄해야 할 대목이다. 자유당 때 반독재 민주화 기운이 가장 높았던 지역이었음을 상기하면 군부독재의 폐해가 얼마나 극심한가를 유추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 - 토지개혁 - 단정반대 - 반이승만 독재를 주장했던 인사들을 좌익으로 몰아 전향을 강요하고,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이들을 무차별 검거, 학살했다. 경찰은 작은아버지와 죄 없는 아버지도 잡아갔다.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적도 없었지만 연좌제로 끌려가셨다. 그 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더 이상 이 지상에서 볼 수 없었다. 아직도 나는 아버지의 무덤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다. 1947년 타이완의 장지에스(蔣介石)가 주동한 2·28 학살사건은 시신을 몰래 묻으며 석제 묘비 비용까지 주었으나 실무자들이 그 돈을 횡령한 채 나무토막으로 비석을 세워 세월이 흐른 뒤 유족들이 그 무덤을 찾았을 때는 신원을 밝히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 묘지를 몇 년 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비록 집권의 야욕으로 국민을 학살했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를 갖춘(결코 잘 했다는 건 아니다) 품격 앞에서 나는 새삼 우리 민족의 비인도적인 잔혹성을 느꼈다. 아버지 4형제 중 셋째는 이미 병환으로 작고했고, 막내삼촌(임화빈)은 잡혀간 두 형을 찾다가 피란을 못 간 상태에서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왔다. 국군이 진격할 때 막내삼촌과 형(임상환, 당시 중학 5년생)은 혼란 속에서 분별없는 ‘잔혹성’을 피하기 위해 일단 피신했다. “어머니, 조용해지면 돌아오겠습니다. 준열(내 본명)아, 형 금방 돌아올게. 어머니하고 누나하고 잘 지내.” 19살인 형은 가방만 하나 들고 또래 청년들과 떠나면서 작별을 고했다. 이게 형과의 마지막이 됐다. 형이 피란한 뒤 내 고생은 더욱 심해졌다. 위로 누님이 셋 있었지만 사내로는 내가 제일 큰 9살이고, 어린 남동생이 둘 있었던 터라 졸지에 가장이 됐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대성통곡하셨고, 누나들도 따라 엉엉 울어서 늘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의 횡포 말고도 같은 동네에 살던 일부 개신교도들의 횡포도 심했다. 타성(김씨) 중 개신교 신자였기에 일찌감치 피란을 떠났던 몇몇 집이 인민군이 물러나자 귀향했다. 그들의 너무나 등등한 그 기세에 우리 가족은 주눅이 들었다. 우리 마당을 어슬렁거리다가 농기구나 멍석 등을 가리키며 “이건 우리 껀데…” 하면 어머니는 두 말 못하고 “예, 가져가세요”하며 공손하게 드렸다. 어린 나는 6·25속에서 세상이 싫어지고 사람이 무서워져 염세주의적으로 변해갔다. 그나마 땅이 있었기에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 순 있었다. 어머니는 상머슴이었다.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눈시울을 붉어진다. 1953년 7월 6·25는 그렇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긴 휴전에 들어갔다.
<1980년 한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성인들이 안동 병산서원에서 한길사 주관 학술대잔치 후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학창시절 염세주의로 각종 서적 닥치는 대로 독파
나는 1956년 의성중학교 졸업 후 등록금이 거의 무료인 안동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 시절 나는 더욱 염세주의로 빠져들었다. 반공문화의 교련교육 풍토 속에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공부도 싫어졌으며, 집안 얘기도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혼자서 이상야릇한 독서에만 전념했다. 심지어는 범죄심리학뿐만 아니라 성명철학, 관상, 수상학(손금) 등의 동양철학과 신비주의,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과 니체의 허무주의가 마약처럼 내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어갔다. 만약 그 무렵 나에게 좋은 선배가 있었다면 내 인생은 보다 긍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범학교 2학년 여름방학부터 형과 삼촌들이 보던 사회과학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200여권의 ‘불온서적’(이랬자 별 것도 아니지만)을 거의 독파했다. 염세주의 증세가 더더욱 심해지면서 한때 스님이 될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1959년, 사범학교를 졸업하자 동기생들은 거의가 낭만적인 바닷가나 출세의 발판이 될 도시를 근무지로 지망하였지만 나는 고향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참 외로운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회고할 때마다 이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일생 동안 마실 술을 그때 다 마셔버렸는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학교장이 자유당 정권을 반대한 민주당 지지자였던 사실이었다. 교사들은 1960년 3·15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마을별로 담당자를 선정하여 학예회단을 꾸려서 이승만 지지 순회공연을 강요당하거나 선거운동원으로 내몰렸다. 일일 보고를 면사무소에 해야 했는데, 야당 성향인 교장 덕분에 요식적으로 할 수 있었다. 어떤 처지에서도 그 인간됨에 따라 이렇게 정의와 불의를 행하는 갈림길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 시절이었다. 보도연맹 연루자 가족들은 ‘불온 인물’ 딱지가 붙여져 늘 지근에서 감시당하고 있었다. 죄 없는 사람을 자신들이 죽이고는 그 가족들을 닦달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군중들의 시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우리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진 동료 교사의 집으로 자주 모였다. 우리들은 특히 한국의 상황을 비교적 잘 전해주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종내에는 교장 사택에서 방송을 통해 1960년의 위대한 ‘4월 혁명’의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학생들의 힘으로 철옹성 같은 이승만 독재의 아성이 무너져 내리는 위대한 4·19의 전율이 한동안 나를 감전시켰다. 내 마음속에는 또 다른 내가 꿈틀대며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비가 몇 차례의 변신을 하면서 세상을 향하여 날아가듯이 나도 ‘허물’을 벗어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대학에 가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배워 세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 염세적이었던 마음의 찌든 때 같은 각질이 하나 둘 벗겨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문학을 필생의 길로 선택했다. 그 해 12월 말, 2년 간의 교사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미군들에게서 사진을 받아다가 화가에게 건네주면 화가는 그것을 스카프 같은데다 그린 후 미군들에게 갖다 주는 일을 했다. 혹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복제본을 팔기도 했다. 화가한테는 그림값만 주고 나머지 이익은 모두 내 이익이 되는 곱빼기 장사였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나오는 일과 똑같은 일이다). 서울의 길목 좋은 미군부대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고가의 ‘출입증’이 있어야 했다. 나는 출입증 없이 몰래 들어갈 수 있는 평택의 미군부대를 알아냈다. 인근에서 숙식을 하며 미군들이 하루 근무를 마치고 귀대하면 막사로 들어가 서투른 영어로 ‘흥정’했다. 운이 나빠 경비원에게 걸리면 경찰에 인계되어 3일 정도 구금되기도 했다. 이 때 느낀 것은 ‘미군보다 한국인이 더 나쁘다’는 것이었다. 미군 헌병한테 잡히면 아르바이트 학생이라 사정하면 봐주고 정문까지 ‘추방’할 뿐이었지만, 한국인은 아무리 사정해도 반드시 경찰서로 넘겼다. 미군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같은 동포에게 더 가혹하게 대했던 것 같다. 일제 때도 일경보다 한국계 경찰이 더 잔혹했던 예가 있었다. 이런 자발적 식민 근성은 지금도 여전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예 미국이 요구하기도 전에 미리 감 잡고 알아서 우리의 것을 내주는 일은 없을까. 미군부대에 그림을 팔던 선배들(그 중 한 분이 윤상환 선생으로 나중에 통혁당 사건에 연루)은 미국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매일 미군을 대하면서 그 본성을 잘 알게 됐기 때문이리라.
5·16쿠데타로 실직… 박정희와 수십 년의 악연 시작
1961년 봄, 나는 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중앙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학업보다는 돈벌이에 관심을 뒀던 1학년 학기 중, 나는 5·16쿠데타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친일파인 장면정권은 너무나 현실을 모르는 느낌이었던 터라 나는 처음에는 박정희 지지자였다. 그에게서 실낱같은 기대를 가졌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는 쾌감까지 느꼈다.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선 과정에서 ‘서울양반이 시골 촌놈 무시한다’, ‘박정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다’는 말은 더더욱 그를 지지토록 했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를 빗대어 ‘여순사건 관련자’ 운운한 대목이었다. 그렇게 민심을 몰랐으니 대통령 재임 중 쿠데타를 당했지 안했나 싶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농담으로 ‘5.16학번’이라고 한다.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모든 미군들에게는 금족령이 내려졌고, 출입도 금지되었기에 출입증도 소용없었다. 몇 달만에 ‘실직상태’가 된 것이다. 생계가 막히자 가정교사를 시작했다. 2학년 부터는 가정교사와 함께 학비에 도움이 되는 중대신문사 기자를 겸했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장 대학원에 진학했다. 현대문학을 전공하며 본격적인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중앙대 도서관은 나의 지식 사냥터였다. 임영신 총장이 ‘친미파’여서인지 미8군 도서관에서 폐기된 많은 책들이 중앙대 도서관으로 몰려들었다. 미8군 도서관은 좌우 이데올로기 구분이 없이 각종 자료가 많았던 것 같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전집 등 국내에서 보기 힘든 책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대출 담당자가 학과 선배여서 대출기록을 작성하지 않고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83년 출소 후 역사·민족·문학 접목 활동
1966년 25살에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사회과학 지식으로 굳어진 나의 머리는 아름다운 언어로 채색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그런데 등단해보니 한국문단이라는 게 참으로 허망했다. 서구문학에는 부르주아문학의 체계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전후문학파가 있었지만 여전히 어중이떠중이 한 느낌이었다. 1968년 경향신문의 《주간경향》 기자로 일했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시절엔 정부비판 성격이 강했으나, 5·16이후 친 군부 언론으로 전락했다. 기자생활은 재미가 없고 무료감이 더해 갔다. 마침 한 선배(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가 한국기자협회 기관지인 《기자협회보》 편집실장으로 있었다. 그와의 인연으로 편집위원이 되어 언론탄압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당국으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1970년 월간《다리》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 잡지는 한마디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를 겨냥한 월간지였다. 1972년 1월 실질적인 경영주(김상현 전 의원)가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일본 관광을 주선했는데, 그 여행이 빌미가 되어 내 일생이 바뀌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그러잖아도 1972년 초부터 나가던 대학 강의나 열심히 하면서 눈치껏 지내자고 결심하고 모교 강단에 섰다. 그런데 ‘유신’ 광풍은 1974년 소위 ‘문학인 간첩사건’을 조작했다. 이 사건은 일본 여행 때 재일동포가 낸 월간 《한양》과의 관계를 들어 유신에 저항하는 문인들을 옭아맨 날조사건이었다. 《한양》은 원로 박종화부터 조연현을 비롯한 중견에 이르는 거의 모든 분들에게 일본 여행 중 온갖 편의를 두루 제공했다. 우리라고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도 아니련만 미운 털 박힌 몇몇을 골라 구속시킨 희대의 졸렬한 용공조작극이었다. 인권이란 단어도 못 쓰던 때라 완전히 짓이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었다. 5개월 만에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지만 이미 나는 정당한 공민권을 가진 국민이 아니라서 대학 강단에도 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 18년간 나는 공민권이 없는,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긴 시민권 박탈문인으로서의 기록을 남겼다. 나는 이 억울하고 고통스런 체험 후 박정희 정권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우선 생계를 위해서 번역, 잡문, 대필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말하자면 ‘두뇌의 막노동’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분노감은 눈덩이처럼 커져 박정희 정권을 제거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섰다. 나는 1976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남민전)’에 참여했다. 남민전의 목적은 유신독재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슬 퍼런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선 지하조직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거의 유일한 대중 지하조직이었던 남민전은 오직 ‘독재타도’만을 외치며 정면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남민전의 맹렬한 활동도 박정희 정권의 감시망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1979년 10월 정보당국에 의하여 연루자 84명이 피검, 유신 말기 최대 공안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김남주 시인 등 관련자 대부분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이 적용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얼마 후 감옥에서 박정희가 시해됐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쉽게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파별로 집권 야욕에 눈멀어 서로 다툰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김치 국물 값만 잔뜩 오르겠구나 싶었는데, 예상대로 5·18신군부독재 체제를 불러왔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1961년, 1980년, 1987년 세 번이나 민주화의 기회를 놓쳤고, 이제 또 다시 그 위기를 맞고 있다. 흔히들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평가하지만 양김 노선의 갈등으로 군부세력이 재집권에 성공함으로써 개혁의 좌절을 가져왔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민주 투사들은 이미 기득권층으로 편입하여 올챙이 시절을 잊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기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잘 보이는 눈 아래 것이 안 보일 수도 있다. 지금이 바로 등잔 밑이 어두운 그런 시대다. 1983년 8·15광복절 특사로 4년 가까이 부자유한 몸이 되었다가 출옥했다. 그러나 또 다시 ‘인생의 위기’를 느끼게 됐다. 박정희 정권에 이은 전두환 독재가 포악했던 시절이라 한때는 지식인 대열에서 이탈해 생계만을 유지하는 삶도 좋다고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이 때 나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바로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자인 박원순 변호사였다. 박 변호사는 1986년 2월 우리의 역사문제를 공동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에게 보급하는 ‘역사문제연구소’를 개설했고, 나는 부소장을 맡아 갈망해오던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지적 체계를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있었다. 나는 1991년 연구소 창립부터 지지자가 되어 연구위원, 지도위원, 부소장을 거쳐 2003년 10월에 제3대 소장이 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 해명하고,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학문과 운동이 합쳐진 단체이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민족국가가 존재하는 한 어떤 나라, 어떤 정권이든 가장 중시해야 될 국가 구성요인의 기본이다. 북으로부터의 위협만 강조하면서 외세로부터의 위협은 깡그리 무시하는 논리는 진정한 ‘국가보안’이 무엇인가를 무시한 채 제2, 제3의 이완용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한다. 나라를 팔아먹은 게 뭐가 잘못이냐고 핏대를 올리는 세력이 과연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을까.
큰형의 죽음 이산가족 상봉장서 확인 후 통곡
나는 스스로 문학인이자 평화인이라고 규정한다. 2004년에 홍일선, 이승철 시인이 주축이 되어 문학과 평화를 접목하기 위한 ‘한국문학평화포럼’을 결성했다. 고은 선생님이 회장을 맡았고 나는 부회장으로 기꺼이 참여했다. 나는 올해 초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문학평화포럼은 ‘상생, 평화, 공존’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한반도 곳곳의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그동안 전국적인 규모의 문학축전 행사를 10여 차례 전개해 왔다. 2006년 들어서도 소록도, 독도, 단양, 민통선 애기봉, 철원 등을 찾아가서 ‘평화, 인간, 공생’을 주제로 문학평화축제를 열었다. 특히 지난 6월 25일, 56주년을 맞아 격전지 중의 한 곳이었던 철원 백마고지 아래에서 개최한 ‘전국평화문인대회’는 평화의 소중함을 더욱 일깨운 자리였다. 나는 6·25때 행방불명된 형을 찾으려고 몇 해 전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했다. 다행히 지난 6월 28일, 6·15 남북 공동성명 6돌 기념 제14차 이산가족 특별상봉 행사가 열린 금강산호텔에서 형의 피붙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헤어진 형은 그 후 북에서 결혼했고, 딸과 아들 효숙(48), 성재(45)는 벌써 중년이 되었다. “아바지는 돌아가셨습네다.” 56년 전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선 형은 1990년 질병으로 숨을 거뒀고, 두 조카가 상봉장에 나와 형의 빈자리를 지켰다. 형수도 이미 몇 해 전에 병고로 세상을 떠났고, 세 남매 중 막내는 몸이 불편해 못 나왔다고 했다. 나는 95세의 어머니와 두 조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작은아바지, 할마니. 정말 반갑습네다.” 생전 처음 보는 조카들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영락없는 ‘임가’의 혈육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표정과 말, 눈빛에서 반가운 느낌이 손에 잡힐 듯이 묻어났다. 혈육이란, 정이란, 민족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어머니, 이게 형 사진입니다.” 내가 어머니에게 나이든 모습의 형의 사진을 건네주자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북에 사는 조카들에게 우리 집 가계도를 그려 만든 족보를 건네주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이 헤어졌지만 조카들을 생각하며 평화와 통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남과 북의 문인들이 지난 7월 29일 금강산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의 단일조직인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남과 북에 들이닥친 큰물피해로 연기되어 안타까웠다. 남북 문인들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함께 만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오는 가을에 다시 재개되었으면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6년 5월 18일 일본·대만, 오키나와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고이즈미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저지를 위한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이라는 국제연대를 결성했다. 나는 지난 8월 13-15일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 주최로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열린 야스쿠니 신사참배 반대 국제대회에 참여했다. 한국을 비롯하여 대만·일본 및 세계 각국 참가자들 1천여 명이 도쿄 도심에서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한국·대만 피해자의 합사 취하를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시위를 벌였다. 공동행동 각국 대표들이 선두에서 현수막을 들었고 그 뒤를 각국 시민단체들이 따르며 도쿄 도심을 촛불과 함성으로 가득 채웠다.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는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저마다의 기치를 내걸고 서명을 받고 있었다. 한 단체는 중국 난징(南京)대학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군 만행 작품을 철거하자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었다. 결코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그건 거짓이란 주장이었다. 우리가 촛불행진을 하고 있는 길가에도 여러 극우 단체가 피켓을 들고 외쳐댔다. 한 단체는 정신대 희생자 할머니들을 겨냥하여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에다가 “창피한 줄 알아라”고 목청을 높였다. 제발 우리나라의 우익들이 그런 광경을 좀 지켜봤으면 좋겠다.
“평화와 통일은 민족의 목마름…상생의 길로 나서자”
통일문제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난 7월 5일 북측의 미사일 발사 이후 남북 정부 당국의 행태를 보면 모두 남북 주민을 인질로 잡고 서로 자존심 겨루기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남북 당국은 상대방의 주민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쳐야 할 때가 되었다. 즉 남측의 대북 쌀 지원거부나 북측의 이산가족 상봉 거부는 모두 일차적으로 남북주민에게 고통이 전가된다. 이러한 정책은 또 다른 냉전의식의 고양이자 민족에 대한 ‘폭거’일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6자회담에 모든 것을 걸 필요가 있을까. 설사 6자회담이 틀어져도 남북 당국과 우리 겨레는 하나여야 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교류를 끊어서는 안 될 것이다. 6자회담이란 결국 미국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난관과 강대국의 이간질이 생기더라도 남북은 이제 더 이상 총부리를 겨눠서는 안 된다는 신뢰를 가져야 할 때다. 나는 그간 서너 차례 북한에 다녀왔다. 공식회담이 아닌 비공식적 만남에서는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순박한 대화 속에 한민족이라는 것을 매번 확인하곤 했는데, 그건 내 조카와 질녀를 만날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공식석상에만 서면 남북은 아직도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이 말은 곧 그간 민간교류로 남북의 민족 구성원들은 이미 하나가 되었으나 두 쪽의 권력체계와 강대국에 의한 분단 책동이 정상적인 유대감을 찢어놓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북은 민족 자주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풀어가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한다. 양쪽 모두 상대편 당국과 주민들에게 불신감을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단 고착화나 또 다른 분단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 당국이 민족적 각성을 통해 열린 통일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 결국은 민족의 통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의 추진에 있어서 낭만주의적 태도는 배격되어야 한다. 즉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신중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나의 펜 끝은 언제나 민주·통일·평화에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 한길사)》에 <해방 직후 지식인의 민족현실 인식> 등 모두 네 편의 글을 실었다. 《해전사》는 1980년대 한국 진보학계와 젊은 세대의 역사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대중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1979년 10·26 직전 제1권이 나왔으며 1989년 제6권 출판으로 완간됐다. 당시만 해도 대학에서조차 한국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식인 사이에서는 현대사를 제대로 보자는 인식이 팽배했고 《해전사》는 그런 요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책이다. 당시 《해전사》는 해방 공간의 한국 역사에 대한 가장 깊이 있고 진지한 연구의 성과였다. 특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해방 전후 한국 사회를 종합적으로 조명했으며, 친일문제 등 제도권이 다루지 않은 주제를 집중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글을 쓸 때 고민이 많았다. 가령 친일문제를 다룰 때, 식민지배의 폭력성 앞에서 누구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필자들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친일 인사 개인에 대한 원한보다는 그 같은 비극이 되풀이돼선 안 되겠다는 일념에서 썼다. 80년대 지식인층의 ‘재야 역사교과서’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 50만~60만권 정도 판매됐는데, 이 가운데 1권이 40만권 정도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권의 파급력이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1권은 초판 출판 직후 판금 조치 당했으나 1980년 원고 일부(내가 당시 남민전사건으로 구속 상태여서 글이 삭제)가 삭제된 가운데 신군부의 검열을 통과하여 합법적으로 판매됐다. 그런데 2005년 우파진영에서 발간한 《재인식》은《해전사》의 성격을 ‘좌파민족주의’라는 말로 너무 쉽게 규정했다. 《재인식》은 과거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눌렀던 이분법적 역사관을 강요하고 있다. 흑백 논리로 역사를 재단하고 《해전사》를 한쪽 편에, 《재인식》을 그 맞은 편에 둠으로써 대결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나는 ‘본처는 문학이고 애인은 인문사회과학’이란 말을 즐겨 한다. 나는 사실 문학평론가에 못지않게, 역사와 민족문제 등을 두루 연구하며 전반적인 인문사회의 평론가가 되고 싶다. 구태여 내 전공을 말한다면 문학과 사회, 문학과 역사, 문학과 정치라는 문학의 변경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친일문학은 조그마한 분야일 뿐이다. 흔히들 나를 처음 대하는 분들은 생각보다 온건하다고 하는데, 아마 나에 대한 통념이 강경파로 잘못 인식된 탓에서 온 오해다. 나는 원칙을 실천하는 방법은 가장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못마땅하더라도 실천을 연기해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다. 이런 나의 철학은 양쪽으로부터 다 공격받을 수 있고 오해받을 수도 있다. 혹자는 내 철학이 틀린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는 내가 살아온 삶에서 형성된 신념이기에 바꿀 순 없을 것 같다. 내 삶의 축적의 결과이자 개성이고 색깔이다. 아마 나는 전생에 빚을 다 갚지 못한 채무자였을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이제까지 어떤 정권으로부터 어떤 혜택이나 특권도 누려보지 못한 채 항상 봉사하는 감투만 써오고 있을까. 권세와 돈과 명예가 나와는 너무 먼 촌수인지라 나의 펜 끝은 언제나 민주·통일·평화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웹진 민화협, 06.09.10>
◆임헌영 소장 주요 이력 1941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59년 안동사범학교 졸업 1959~60년 초등학교 교사 1961~65년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졸업 1965~68년 중앙대 대학원 현대문학 전공 1966년 <현대문학>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1968~70년 <경향신문> 기자 1970~72년 월간<다리> (1972년 10월유신으로 폐간) 주간 1972~74년 중앙대 등 강사 1974년 긴급조치 문학인 사건으로 투옥 1979~83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1986~89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1988년 한국문학 작가상 평론부문상 수상 1990~92년 <한길문학> 주간 1992년 EBS(교육방송) <문학의 세계>진행 우수 프로그램상 수상 1996~2002년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아카데미 원장 1996년 편운문학상 평론부문상 수상 1997~2003년 <한국문학평론> 주간 1998년 복권. 1998~현재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2000~03년 민족문제연구소 부소장 2003년~현재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2003~05년 KBS 시청자위원회 위원장 2003년~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2006년~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 <저서>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 변혁운동과 문학, 분단시대의 문학 외 2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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