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 대한 단상(斷想)
어느 시인의 말씀처럼 "어쩌다 여기 까지" 와서 이제 저는 8 순이 넘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1959년(제 21세) 전 까지는 오성 산, 출성 산, 용천 산 등 삼 면이 산으로 둘러 싸인 두 메 산골에서 자라
어려서 부터 소나무와 함께 벗하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서 소나무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있고
소나무와 함께한 추억도 많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만든 모임 이름도 송백회(松柏會) 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제 삶의 끝자락에서 한평생 삶을 이어 온 직장 생활마저 그만 두고 집에서 쉬다 보니 가끔은
서울 거리를 비롯하여 산을 걷게 됩니다. 자연히 여기 저기 둘러 보면서 앞에 말한 인연도 있어서 인지는
몰라도 유난히 도로 가운데, 아파트 정원 이런 곳에 서 있는 소나무가 그처럼 안쓰럽게 보입니다.
마치 제가 이제 와서 고향을 그리며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중얼거리듯 저 소나무들도 그리 울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여 저 소나무가 진정 가고 파 하는 고향으로 보내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한도(歲寒圖)' 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소나무 임은 아시겠지요.
조선 후기의 서화가 김정희가 그린 그림으로 송백(松柏) 같은 선비의 절조(節操)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작품 말입니다. 국보 정식 명칭은 김정희 필 세한 도 이지요.
또한 윤 선도는 오우가(五友歌)에서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의 다섯 벗을 말하고, 각각의 벗에
대하여 다시 한 수씩 노래하기를
(중략)
솔(松“은 더우면 곳 퓌고 치우면 닙 디거/솔아 너 얻디 눈서리 모다/구쳔(九泉)의 블희 고 줄을 글로 야
아노라.”라 하여 눈 서리를 모르는 솔의 불굴(不屈)을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가진 소나무에 대한 추억은 이처럼 늘 푸른 나무로서 지조와 절개를 표현하는 나무로 만이 아니라
뿌리에서 줄기, 가지에 이르기 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유용한 나무였다는 생각 외에, 저와 소나무와
얽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먼저 소나무는 제가 어렸을 때 유용한 먹거리였습니다.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 그게 무슨 먹거리야. 그걸 어떻게 먹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그리고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소나무 껍질은 배고픔을 달래는 식사 대용품이었습니다. 어린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껍질을 벗겨 내고 그 속을 먹었지요. 지금이야 누가 먹겠는가 싶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맛이 있었
습니다. 다시 한 번 먹어 보고 싶기도 합니다.
다음은 땔감으로 이용한 솔 잎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소나무도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이면 솔 잎을 떨어뜨립니다. 그것을 솔 가루라 하는데 당시는 사람들이
산에 올라 갈퀴로 긁어다 때면 참으로 불도 잘 타고 화력도 좋아 아주 유용한 땔감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땔감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산 가지를 꺾어다 땠는데 민둥산이 많았던 것도 그처럼 산에서 나무를 사정 없이
베어다가 땔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나중에는 산림 계가 생겨 엄격히 단속하기 시작했
습니다.
이조 시대에는 굴뚝에서 솟아 오르는 연기를 보고 백성이 굶주리지 않는다며 위안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파란 솔 잎은 송편 만드는데 넣어서 그 향기로 떡을 만드는 데도 사용했고, 술 담그는 데도 넣으면 아주
좋은 술이 되기도 했지요.
한편 이조 시대에는 사약을 먹여 죽이려는 데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아 그 까닭을 살펴 보니 평소 솔 잎을 먹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전해 집니다. 그만큼 솔 잎의 약효를 말함이지요.
다음은 소나무 송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소나무 가지를 잘라 내면 솔 마디가 생깁니다. 거기에서 송진이 나오는데 그것을 관 솔이라 했고 그 관솔은
일종의 나무 기름이었기에 불 쏘시개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방안에 키는 불로도 이용
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로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저도 겪은 사실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관솔을
공출 하기도 하였는데 군용으로 사용하였다 했습니다.
다음은 저의 삶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준 고마운 솔방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저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1년을 쉬게 되는데 쉬는 동안 끼니라도
해결하기 위해 당시 군산 시에 머물던 예비 군 부대에 김 달수 중대장 님의 전령으로 있었는데 그것도 복이
다였던 지 부대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바람에 저는 어쩔 수 없이 몇 개월 만에 귀가 하였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다가 원하는 중학교에 가야 하나 가슴을 졸이고 있을 때 하루는 어머님이
"장 영(場永)아, 집에 있기 지루하고 내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학교에 가야 하니 우리 함께 솔 방울을 따서
팔도록 하자'" 하는 제안이셨습니다.
저는 순간 멍했지만 그때 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가 싶어 엄청 큰 충격에 싸였습니다.
"그래요, 어머니. 그런 좋은 일이라면 얼마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 하여 다음 날부터 어머님과 산에 올라 솔 방울을 따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품고 하는 일이라 고된 줄도
모르고 솔방울을 따서 집에서 20 리나 되는 지경 장에 가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어깨에 메고 20 리를 가는 일이
힘들었지만 당시는 솔방울이 워낙 화력이 강해서 인기가 높아 가져 가면 금시 팔렸고 매일 거듭했습니다.
어떻게 하여 중학교에 갈까 고민하던 제 가슴에 희망으로 벅차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솔방울! 단순히 소나무에 붙어 있는 열매지만 저에게는 희망을 불사른 씨앗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나무를 보면 저는 맨 처음 솔방울만 눈에 들어 옵니다. 그러면서 크기에 상관 없이 사랑의 열매로 보입니다.
또한 어머님 생각이 솔방울에 오버 랩 되어 함께 계시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어떻게 어머님은 그런 기가 막힌
제안을 하셨을까? 어머님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그리워 솔방울을 주어다 어머님과 함께 모신 아버님 어머님
영전에 바쳐 드리기까지 했고 지금 솔 방울 한 묶음이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솔방울을 어머님께 바치고 나니 어머님을 찾아 뵈울 때마다 옛 생각에 젖기도 합니다.
다음은 소나무 등걸에 대한 소회입니다.
소나무를 베어 내면 뿌리만 남는데 그 뿌리를 등걸이라 하지요. 그 등걸은 당시로서는 기가 막힌 땔감이었습니다.
우리 고향에는 출성 산과 용천 산이 동네 옆에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출성 산에 자라던 나무를
모두다 베는 벌목이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니까 금지된 벌목을 허가하여 그랬었던 것 같은데 제가 어렸을 적에 본 일이라 기억은 희미합니다.
사람들은 등걸을 캐기 시작하였고 아버님도 새 아침이 밝아 오기 무섭게 지게를 업고 집을 나셔 등걸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출성 산은 상당히 높은 산인데 그 어려운 일을 하시는 아버님을 따라 나서면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등걸을 캐기에 앞서 칡 뿌리를 캐서 먹을 수 있도록 씻어 주고 나서야 등걸을 캐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 생각
하면 그때 캐 주신 칡 뿌리의 달콤한 맛은 지금도 혀 끝에서 솔솔 납니다.
이런 저런 여러가지 추억 때문인지 저는 소나무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못해 짙은 애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서울 거리를 거닐며 도로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가 너무 쓸쓸하게 보이며 아파트 단지에 갖혀 담벼락을
맞대는 그들이 우는 듯 싶습니다. 그 소나무들이 고향이 그리워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하고 슬프게 우는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요?
그들이 절규하는 소리 들리지 않습니까? 그들의 고향 산천에는 소나무 말고도 여러 벗이 있습니다.
여러 나무들이 하루 산 이야기를 별을 보며 달을 벗하고 해를 맞으며 나누었어요. 수 많은 새들이 날아와 예쁜
노래들을 선사했고 새끼를 낳아 사랑을 주며 키웠습니다. 또한 바로 옆 골자기에서는 물이 흐르며 새소리에
질 세라 기막힌
화음을 넣어 주는 기쁨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매연을 뒤덮인 이곳에서 살라 하니 숨이 막혀
죽겠습니다. 새소리 물소리 그처럼 아름다운 코러스 노래만 듣고 살던 저에게 하루 종일 달리는
차 소리에 귀가 멀었습니다. 심지어 클랙숀 소리에, 앰블란스 달리는 소리에 간 떨어지는 놀램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제발 기도 하는데 제가 살던 그 고요하고 사랑이 넘치는 제 고향으로 다시 보내주십시오. 기도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릴 적 놀던 그 고향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같이 놀던 벗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고향으로 돌아가 동무들 만나 어릴 적 놀던 그 놀이들 한 번 해 보고 싶고 살아 온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아 그리운 고향 그리고 벗들이여.
<끝>
첫댓글 옛적 다리실재 부역(도로에 돌무덤 = 도로에 깔기위한 것)할적에
봄철에 하므로 산에서 솔껍질 먹어본 생각이 납니다.
참 어려운 시기 지금은 선배님의 말씀에 꿈도 없는 기적? 입니다.
우리나라는 60년도 부터 다시 원점 회귀하였으면 어떨게 생각 될지???
어려운 시기 경험담 잘보고 갑니다.
뚝배기님! 고향 소식을 접하는 마음 참으로 뭉클합니다. 다리실재 이름도 가슴을 뒤흔드네요.
살아온 삶 어디 내세워 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87세인 제 이야기를 허구로 보는 사람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한 걸요.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그처럼 천지개벽이요 상전벽해의 이야기인 걸요. 주마등처럼 흐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