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 42장 11절 – 17절
오늘날 성도들은 고난없는 삶을 복받은 삶이라고 여기고 그런 삶을 사는 자들을 부러워 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하시기 위해 먼저 다루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전까지 세상의 관점을 따라 세상의 가치관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런 우리가 교회를 다니므로 잘사는 자가 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단의 종된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함에서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세상이 주관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악중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낮아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길로 사는데는 익숙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데는 낯설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바로 고난입니다.
예전에 송아지에게 콧뚜레를 합니다. 그러면 송아지를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콧뚜레를 하지 않는 삶에 익숙한데 콧뚜레를 해야하닌까 발버둥칩니다. 그래도 소가 제역할을 하려면 콧뚜레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고난이고 아픔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주인이 그 송아지를 아끼고 귀하게 여길지라도 콧뚜레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송아지가 불쌍하다고 콧뚜레를 하지 않으면 그 소는 키우는 목적을 상실하고 맙니다. 소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 주인은 그 송아지를 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나 하나님께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고 자기를 신뢰하는데서 떠나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서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율례를 배웁니다. 신앙은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그런 송아지의 삶이 아닙니다. 콧뚜레를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고 불편해도 그것이 소에게 유익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의 율례를 배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그 고난이 우리에게 온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할 그릇된 일을 하므로 고난을 당한다면 이런 고난은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운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악하거나 추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는 그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그 고난에서 탕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고난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우리는 언제나 실패하고 잘못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낮추시고 연단하시며 믿음의 학교에 입학시키고 자기의 노력이나 의지를 내려 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의뢰할 때 그래서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