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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수도회] 하느님의 혼이 숨쉬는 가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집회 3,2-6.12-14
† 제2독서 콜로 3,12-21
† 복음 루카 2,22-40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기념 없음 (가정 성화 주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이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각 가정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북돋우는 가운데, 가족 간의 사랑이 넘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배우는 ‘사랑의 학교’가 되기를
노력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위기와 시련을 겪고 있는 가정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기도합시다.
★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가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새 삶은 서로 참아 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며 율법에서 명한 대로
제물을 바친다.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가신 아기 예수님은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지셨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으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의 세계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문제들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온다고 합니다. 붕괴된 가정, 사랑 없는 가정에서부터 희망 없는
황폐한 사회, 믿음 없는 관계, 앞날에 대한 약속이 사라진 세상이
자라납니다. 그러나 세상의 문제를 치유하고 해결하는 희망 또한 가정에
있습니다. 가정을 지켜 주고 복원하고 정화하려는 노력 없이 오직 사회적
차원의 해법으로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은 환상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약속은 오직 ‘아기’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성탄 팔일 축제의 한가운데에 있는 성가정 축일에 우리는 세상의 구원이
시작되는 가정의 신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신비의 중심에는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아기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시작이
허락됩니다.
독일 태생의 미국의 철학자 아렌트는 20세기의 유명한 철학서 가운데
하나인 『인간의 조건』에서, 환원 불가능한 지난날의 잘못된 일의 결과에
신음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안해하는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의 근거는
다름 아니라 ‘탄생성’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는 존재’로서 인간은 시작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이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원초적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망을 통해 미래는 단지 예측 불가능한 어두움의 영역이
아니라 ‘약속’의 자리가 됩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깊이
체험한다고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기적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새로운
시작, 곧 인간이 탄생함으로써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이 능력의 완전한
경험만이 인간사에 희망과 믿음을 부여할 수 있다. (중략)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표현을 우리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나셨도다.’
라고 하는 성탄의 기쁜 소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가정이 ‘아기 예수님’을 그 중심에 두고 믿음과 희망의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자리가 될 수 있기를 간구해 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성가정 교회 하늘에 '수호천사 별'이 된 이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28일 주일(뉴튼수도원 48일째)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 없음-
집회3,2-6.12-14 콜로3,12-21 루카2,22-40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2-6.12-14<또는 창세 15,1-6; 21,1-3>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21<또는 히브 11,8.11-12.17-19>
복음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9-40>
성가정 교회 하늘에 '수호천사 별'이 된 이들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이 사막교부의 두 일화입니다.
-압바 시소에스(Sisoes)는 말했다.
"하느님을 찾아라.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찾지 말고!"-
-압바 아르세니우스(Arsenius)는 말했다.
"하느님을 찾으면 그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그분을 지키면 그분 역시 우리 가까이에 머물 것이다."-
모두 하느님을 늘 중심에 두고 기억해야 함을 일깨우는 말씀들입니다.
저에겐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머무는 곳 어디나 고향이요
수도원입니다. 제 방은 사막이자 동시에 오아시스입니다.
주님 안에 살 때 누구나 지니는 마음의 사막이자 오아시스에 내적 풍요의
삶입니다. 주님을 떠나면 온통 사막일뿐 내면의 깊은 오아시스 샘물도
사라집니다. 뉴튼수도원에 머무니 편하기가 그대로 제 고향이요 제
수도원입니다.
새삼 수도공동체는 성가정 교회공동체의 원형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성당 안의 성탄츄리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나무에 반짝이는
장식물 사이에 달린 여럿의 노란 리본들에 감전된 듯 감동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노란 리본들마다 세월호 희생자들중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아홉 명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리본들이요 리본들 마다 이름이 씌어진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신심 깊고 의식있는, 평소 수도원을 헌신적으로 돕는 어느
자매가 리본을 만들어 달았다 합니다.
순간 떠오른 생각이 하늘에 별들이었습니다.
'아, 이들은 성가정 교회 하늘에 영원한 별들이 되었구나!
이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인류가정의 원형이자 상징이
되었구나. 사실 모두가 하느님 안에 한 가정이지.'하는 깨달음이 온몸에
전율처럼 흘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자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과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이 어쩌면
이리도 절묘하게 들어맞는지요.
오래 전 애송했던 '별'이란 자작 애송시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월)
성가정 교회 하늘 안에 영원히 빛나는 '사랑의 별'이, 죄많은 세상에
'수호천사 별'이 된 아이들입니다. 탄생하신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위로와
안식을 누릴 세월호의 무죄한 희생자들입니다.
어제는 수도원 묘지를, 엊그제는 정에텔 자매가 묻힌 교회 묘지를
방문했습니다. 푸른 잔디 배경의 수도원 묘지에 돌아가신 분들의 나란한
무덤들 역시 성가정 교회 하늘에 떠오른 별들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갈 때 마다 성가정 교회 하늘에 영원한 수호천사 별들이 된 수사님들께
뉴튼수도원을 위해 전구를 청하곤 합니다.
엊그제 한평생 주님을 위해 살다가 세상을 떠난 정에스텔 자매님이 묻힌
교회 묘지를 자매님의 딸, 쥬리아와 함께 방문할 때도 똑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이제 주님의 집에서 매일 미사도 참석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겠구나.'
교회 곁 넓은 잔디밭 묘지에 무수한 무덤들 역시
성가정 교회 하늘에 영원한 별들이 된 이들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사람 눈에 산이들의 공동체, 죽은 이들의 공동체이지,
하느님 안에서는 모두가 살아있는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하느님은 이토록 넓고도 깊은 분입니다.
무수한 별들이 빛나는 드넓은 푸른 밤하늘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이요,
모든 인류를 품에 안은 성가정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먼저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성가정 공동체임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성가정 교회공동체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노인 공경도 부부간의 순종도, 예물을 봉헌함도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고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이는 보물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주는 적절한 집회서 말씀입니다.
이 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노인과 어린이, 부녀자들과 가난하고 약한
이들, 장애인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무사(無私)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키워드도 사랑입니다.
마리아 요셉 부부는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봉헌했고,
한평생 하느님을 사랑했던 시메온과 한나는 성전에서 탄생하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했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복음의 마지막 묘사도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 속에 자라 난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워야 함을 배웁니다.
사랑은 모두입니다. 사랑 밖엔 길이 없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우리는 사랑의 한 몸 안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참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 선물도 주님의 평화였습니다.
공동체의 건설에 우선적인 것이 평화입니다.
진정 대죄는 공동체의 평화를 깨는 분열과 불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릴 때 무한한 인내도 가능합니다.
정의와 평화의 일치도 이루어 집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다스리는 공동체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교회나 수도원을 찾는 이들의 궁극의 바람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또 무장(武裝)으로
유지되는 불안한 평화가 아닌 참 평화가 주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탄생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요 거룩한 미사를 통한 평화의 은총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말씀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우리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인 말씀입니다.
그러니말씀을 바탕으로 마음을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줄줄이 말씀의 은총에서 샘솟는 찬미와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성경만 렉시오 디비나가 아니라 찬미와 감사로 바치는 시편 기도 역시
살아있는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숨쉬며 살아갈 때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영육의 위로와 치유입니다. 찬미와 감사는 성가정 하늘을 날며 영적 고공
비행을 가능케 하는 영혼의 양날개입니다. 영육의 건강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탕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하여 제가 늘 고백성사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의 처방전이요,
온갖 정성을 다바쳐 행하는 것이 말씀을 소리내어 또 노래로 바치는
미사요 성무일도입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공동체의 원형이자 이상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교회공동체입니다.
이런 성가정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라고 부름 받은 우리들입니다.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성가정 교회공동체입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 말씀의 공동체를 사는 것입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하늘에 사랑으로 빛나는, '사랑의 별'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사랑과 평화, 말씀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시편128,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혼이 숨쉬는 가정/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28일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카 2,22-40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하느님의 혼이 숨쉬는 가정
오늘 교회는 나자렛의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가정은
하느님의 섭리와 뜻이 구체화되고 예수님의 강생이 실현되는 장(場)이다.
가정은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장소요 사회의
세포로서 우리 모두가 인간다워질 수 있는 터이다.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사랑의 학교’이며, 법과 정의, 양심과 진리를 배우는
‘진리의 학교’이다. 그런데 대화가 없고 늘 불평불만과 미움이 가득하고,
나아가 서로가 원수처럼 지내는 ‘지옥 같은 가정’들도 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 가정에 하느님의 혼을 불어넣어 보자.
나자렛 성가정을 보면 말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 본의 아니게 양부가 되어버린 요셉 등 구성부터가 남다르다.
더구나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다가 배척을 받아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시메온의 예언처럼 이 아기는 일생을 통하여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루카 2,35) 가정을 파탄으로 내몬 장본인이다. 이
사형수의 집안을 교회는 그리스도인 가정이 본받을 모범으로 삼는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얼굴을 들지도 못할 처지였으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겸손의
여인이다. 성모님은 어려움 중에도 구원으로 오신 이 생명이 모든 이에게
전해지도록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품어 안기 위해
존재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침묵 중에 기도하셨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존경받는 마리아에 비하면 요셉의 일생은 마리아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였고, 기껏해야 예수의 양부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약혼녀가 동정으로 잉태하여 낳은 아들을 입양하여 그 모자를 부양하기
위해 땀흘려 목수 일을 해야 했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늘 함께 하면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돌보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1,19). 그는 성령의 힘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
남자로서의 힘을 굴복시킨 새로운 인간이었다. 이 성령의 부모에게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 하느님이신 분이 전존재를 부모인 인간의 손에 맡기셨다.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가 정한 법대로 첫아들을 봉헌하면서 정결례의
제물을 바치는 날이 되자 성전으로 올라갔다. 새 가정은 하느님께 그들의
모든 것을 봉헌한다. 그들은 가난하여 어린양 대신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바쳤다. 이는 예수께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을 뿐 아니라, 가난한 이를 위하여 가난한 이로 오셨음을
암시한다(루카 4,18-22 참조).
집회서의 저자는 참된 지혜의 원천이 하느님을 알고 공경하는 것임을
역설한 다음, 인륜의 기초인 부모의 공경을 강조하고 있다. 곧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므로 축복과 은혜가 되며,
반대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므로 불행과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3,2-6). 부모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건네주신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의 통로이며, 하느님의 분신이다. 따라서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사람 된 기본 도리이다.
부모님의 시신 앞에서 뒤늦게 불효를 뉘우치며 슬퍼해봐야 소용없다.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태도는 어떤가? 자녀들은 부모들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기 위한 실험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소중한
인격체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들볶아 기를 꺾지 말고’(콜로 3,21)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가정에서 존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회에
나아가 다른 이들을 존중할 줄 안다. 부모는 자녀들의 귀가 되어주고,
그들에게 생명과 기쁨, 사는 보람을 느끼도록 ‘뜨거운 밥’을 먹이며, 그
어떤 잘못이나 실수 앞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으로 품어주어야 한다. 한편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자기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말고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콜로 3,18-19).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존중하면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경청하면서 헌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 가정은 어떤가? 나는 하숙생인가, 사랑을 지닌 가족의 일원인가?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나는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사랑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서로가 영의 존재가 되어 하느님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어주는가? 나자렛 성가정의 사랑의 침묵과 품어줌, 기다림,
함께함이 우리 가정의 혼이 되고 있는가? 우리 가정 밖의 가정들 특히
결손가정들과 어려움 중에 살아가는 가정들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우리의 가정도 이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2014년 나해 12월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2-6.12-14<또는 창세 15,1-6; 21,1-3>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21<또는 히브 11,8.11-12.17-19>
복음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9-40>
요즘에 자녀가 명문대에 들어가려면 세 가지 필수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빠의 무관심, 둘째는 엄마의 정보력, 마지막 세 번째는
할아버지의 재력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몇 년 전 교육특집 방송에서 전교 1등인 초중고생 100명의 가정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포함한 식구들이 다 함께 모여
식사 하는 횟수가 다른 일반 가정보다 무려 2.6배나 높더군요. 위의 세
가지 필수 조건이 근거 없다는 증거이지요.
솔직히 자녀가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래서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고 다
사용하려고 하지요. 과외도 시키고, 학원도 보내고, 심지어 신앙인인데도
불구하고 무속인을 찾아가 부적을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방법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가정 안에서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누는 사랑이 가득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강의를 할 때, 이런 질문을 꼭 던집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만 잘 하는 아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공부만 못하는 아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대답을 하지 못하십니다. 이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공부만 못하는 아이가 되기를 원해야 하는데, 공부도 잘했으면 하는 것이
공통적인 심정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공부가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도 행하지 못한다면 공부만 잘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 기본적인 것은 바로 가정에 있습니다. 특별히 위기와 시련을 겪는
가정이 많기 때문에 어른에 대한 공경도 사라지고, 사회적으로 흉악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어떤
가정이 되어야 할까요?
그 모범을 성가정을 이룬 예수님, 마리아, 요셉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성가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정은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습니다. 또한 서로를 비판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 되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받아들인 성모님, 세상의 기준에 벗어나는
일이었지만 사랑으로 부양했던 요셉 성인,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나약한 인간의 가정 안에서 함께 했던 예수님.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이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이 가정 공동체가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이며, 이 기본에 충실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가정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진실은 때로 우리를 다치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머지않아
치료받을 수 있는 가벼운 상처이다(앙드레 지드).
말보다는 침묵이...
어느 날, 성 빈체시오 성인에게 한 여성이 묻습니다.
“수사님! 밤낮 남편과 싸우는데 어떻게 해야 잘 살까요?”
그때 빈첸시오 성인은 성수를 주면서 말씀하십니다.
“자매님! 남편이 싸우려고 달려들면 그 성수를 한 모금 마신 후 삼키지
말고 있다가 남편의 말이 다 끝나면 삼키세요. 그러면 한 달 쯤 후에는
가정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 후 그녀는 남편이 싸우려고 달려들 때마다 성인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한 달 후에 가정이 정말 화목해진 것입니다. 너무
신기해서 빈첸시오 성인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수사님! 그 물이 정말 신비하네요.”
그때 빈첸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신비한 것이 아니라 침묵이 신비한 것입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문제를 풀 때도 많습니다.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는 비결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침묵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 안에 성가정이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28일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2-6.12-14<또는 창세 15,1-6; 21,1-3>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21<또는 히브 11,8.11-12.17-19>
복음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9-40>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간직하시고,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이렇게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 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 내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 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이혼율이 늘어갑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의미와 공허와 비인간화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게끔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 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포드는
대기업을 일으킨 후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그 집은
대기업의 총수가 살기에는 아주 작고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호화롭지 않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걱정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드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이지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글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의 성공 뒤에는 꿈꾸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함께 이룬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새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새3,15.16)
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실천하는 가운데 믿음의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랍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아들은 평생 내 아들이래요. 초등학생 때가지는
일촌이지만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되면 벌서 사촌이 되고 대학가면 오촌
아저씨가 됩니다. 장가를 들면 8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사돈의
팔촌이 된답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남이 되어가는 것은 사랑의 끈이
그만큼 느슨해지는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집인가 가정인가.
집 벽은 나무로 세워진 것
그 기초는 벽돌이나 돌로 세워진 것.
그러나 가정은 오직 심장의 고동들로 세워진 절묘한 것.
집 값은 즉시 매겨지고
한 덩어리 금덩이로 치를 수 있으나
가정의 값을 계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 가격을 말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네.
집의 방들은 품위 있고 호화로우며
그 장식이 예술적 업적인지 모르나
가정의 아름다움은 사심이 없는 마음의 노고에서 나오는
마지막 결과들이라네.
집은 불탈 수 있고 팔리거나 바뀔 수 있는 것
집안의 조화를 잃어버리기까지 간섭할 것은 아니지만
가정을 잃게 되면 마음이 얼마나 짓밟혀질 것인가!
우리의 가정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지켜야 할 것.
많은 행운으로 여러 집을 가진 사람은
그의 재산이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이 속한 가정에 사는 사람은
참된 백만장자로 여겨질 것이 틀림없다네(J.H 사이크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가정은 믿음에 바탕을 둔 가정
2014년 나해 12월28일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대축일
<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
복음: 루카 2,22-40
< 성가정은 믿음에 바탕을 둔 가정 >
컬투쇼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제목은 ‘마루타가 된 이야기’입니다.
사연을 보낸 사람은 연년생 세 아이를 둔 한 아버지입니다. 아내가 몸을 쉴
새도 없이 아기가 계속 생겨서 정관수술을 하기로 결심하고 동네 작은
병원을 찾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님은 없고 마흔 가까이 먹은
간호사만이 접수대에서 혼자 졸고 있더랍니다. 정관 수술을 하러 왔다고
하니 간호사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병원장 실로 들어가는데 문틈
사이로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간호사는
이 손님을 의식한 듯 문을 꼭 닫았지만 그 안에서 하는 소리가 밖으로 다
들렸습니다.
“원장님, 환자가 정관수술을 받으러 오셨는데요?”
“뭐? 정관수술? .... 어떻게 하더라? ... 너무 오래 돼서 생각이 안 나네?”
“네? 어떻게 하죠? 그냥 돌려보낼까요?”
“아냐, 잠깐 있어봐. 저 위에 초록색 책 좀 가져와봐.... 여기에 안 나오네?
저기 까만 책... 어! 여기 나온다!”
밖에서도 책을 읽으며 연습하고 있는 원장님의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이윽고, “옳지, 생각나네! 수술 준비해. 여기 책에 있는 수술 도구들
보이지? 이거 다 가지고 와!”라고 했습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도망을
나오려고 하는데 간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머뭇거리다가
얼떨결에 따라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면서 슬쩍 쳐다보니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책을 보면서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안 한다고 해야 하나?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도망칠까?’ 하는
등의 생각들이 스쳐갔지만, 의사선생님이 수술실로 들어오셨고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번에 걸쳐 수술을 멈추고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책을 보러 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30분이면
된다는 수술이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잘 되어 붓기 통증도 없고 바로 걷는데도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미용실이나 치과 병원 등에서 초보들에게 잘못 걸려서 실험용
교보재가 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가위와 칼, 뾰족한 기계들이 오가는
가운데 매우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조금씩 아프게 할 때면
귀가 잘리지나 않을까, 치아의 신경을 찌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긴장을 하면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떠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불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믿을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간호사와 의사가 나누는 이야기들을 듣지 않았다면
편안히 수술을 잘 받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일단 의심이 생기다보니 그
사람과 있는 것이 마치 지옥에 있는 것처럼 힘들어졌던 것입니다.
오늘은 성가정 대축일입니다. 성가정은 우리 가정이 닮아야 할 유일한
모델입니다. 이 성가정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이겠지만 믿음이 받쳐 주지
않으면 사랑은 무너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믿을 수 없더라도 가족만은
믿을 수 있어야 참 가족인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일임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가정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도 위태롭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갑자기 이집트로
피신가라는 꿈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는 무자비한
헤로데의 칼에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또 어땠습니까?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당신은 복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인사합니다.
성모님은 믿음으로 세상에 메시아가 오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믿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자만해하며 당장
짐을 꾸려 이집트로 도망쳐야 한다는 요셉의 말을 웃어넘겼다면 비극이
초래됐을 것입니다.
남편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함께 살면 가장 행복할 것 같아서 지금의 아내와
맺어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내는 하느님께서는 질서를
존중하시는 분이시기에 집안의 가장인 남편을 통하여 가정을
이끌어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남편의 말을 무시하게
된다면 남편도 아내를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남편을 임금처럼 대해
주어야 자신도 왕비가 되는 것입니다.
올해 개봉했던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서로 간에 믿음이 없는 부부가 어떤
결말을 맺게 되는지 잘 보여줍니다.
한 보통 남성은 매우 유명하고 돈 많은 여자를 아내로 맞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 멋진 남자가 자신을 보고 결혼한 것이 아닌 자신의 유명세와
집안을 보고 결혼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자꾸 자신을 더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귀찮은 이벤트를 꾸밉니다. 남편에게 자신이
숨겨놓은 물건을 찾게 만들며 스릴과 함께 부부관계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너무 똑똑하고 유명하고 돈 많아 그 장인 장모까지도
부담스러운 자신의 아내에게 실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남자는 그래도
집의 가장이 되기를 원하고 자신의 뜻대로 가정을 이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여자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 하나와 바람을 피게 됩니다.
아내는 불륜의 현장을 목격하고는 남편에게 지독한 복수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도록
고생하는데 그것을 알아주기는커녕 남편이 어린 학생과 놀아났던
것입니다. 엄청난 배신감에 그 좋은 머리로 모든 정황을 남편이 자신을
죽여서 어디로 숨겨놓은 것처럼 꾸며놓고 자신은 사라져 버립니다.
남자는 아내의 완벽한 계략대로 아내의 살인자로 몰리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TV 쇼를 통하여 아내를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합니다. 아내가 자신의 말을 믿고 돌아와야 자신의
누명이 벗겨지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돈이 없어 누군가에게
묶여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또 그 사람을 살해하고 남편에게
돌아갑니다. 그녀가 꾸며놓은 대로 경찰들은 살해 된 사람에게 납치되었던
아내가 정당방위로 그를 죽인 것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합니다.
어쩔 수 없이 둘은 다시 같이 살게 됩니다. 아내는 시험관 수정을 성공시켜
남편의 아기를 갖고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은
남편을 위해 살인까지 해가며 가정을 지키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언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아내가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여자와 아기 둘 다 버리고 도망을 치기에는 세상의 시선이 너무도
무섭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슬아슬한 결혼생활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는 비극적 결말로 끝납니다.
믿음이 없는 가정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려 하다가 상대를 지치게 만듭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상대에게 합당한
사람이라고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를
얼마나 지치기 하는지 모릅니다. 남편은 일부러 센 척을 하고 아내 또한
자신이 남편보다 더 잘났으니 함께 살아주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더 독차지하기 위해 다른 형제에게 질투를
느끼거나 공부와 같은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족의 현실입니까? 그런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아도 이미
하느님께서 맺어주셨으면 그만큼 합당하기에 맺어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자신이 더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맞기에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해체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껍데기만 부부요
가족으로 살고 있습니까? 성가정은 진실로 우리 가정과 항상 비교가
되어야 하는 모든 가정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면,
우리 가정은 성가정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부간의 믿음
하나만 생각해 보았지만 실제로는, 그분들의 순종, 겸손함, 정결함, 배려
등도 묵상하고 우리 가정에 적용시켜 가야만 합니다. 완벽한 질서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였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였으며, 서로 동정을 지키는
정결함을 부부간에도 유지하였고, 상대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정도로 배려하는 가족이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항상 이 성가정의 모델을
본받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지금의 가정을 엮어 주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손을 비우면서 두 손을 모은다
2014년 나해 12월 28일 주일 성 가정 축일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2-6.12-14<또는 창세 15,1-6; 21,1-3>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21<또는 히브 11,8.11-12.17-19>
복음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9-40>
성 가정 축일(2014년 12월 28일) 손을 비우면서 두 손을 모은다
이 세상이 다 우리 뜻대로 되면 참 좋겠지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 자식을 키울 때 더 그렇습니다. 수도원은 하나의
가정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지요. 저 자신도 수도원에서 젊은 형제들을
‘키우는’(수도원에서는 ‘양성’이라고 하지요) 일을 하기에 고민이 많이
됩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처럼, 좋은 수도자로 양성하는 것도 녹녹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포기’의 영성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온전히 하느님 손에 맡기는 것, 빈손이 되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하지요.
많은 부모들, 특히 엄마들은 자식 교육에 열정적입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너무 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자식의 미래까지
준비시키려는 욕심이 앞서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집착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사실 예수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손에 아기 예수의 현재와 미래를
내어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 아기 예수를
봉헌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신뢰하는 부모이기에
온전한 봉헌이 가능했습니다.
봉헌은 다른 말로 포기가 아닐까 합니다. 빈손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재산이나 학식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두
손을 비우면서 하느님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하느님의 소유인데 하느님이
얼마나 잘 이끌어주시지 않겠습니까?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수도회]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는 집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2-6.12-14<또는 창세 15,1-6; 21,1-3>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21<또는 히브 11,8.11-12.17-19>
복음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9-40>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가상 설문조사를 제가 해봤습니다.
“<나의 집>하면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듭니까?”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다른 어떤 집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나의 집이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나를 반기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너무 쓸쓸하고 삭막하여 들어가고 싶지 않다.
돌아가긴 해야 하지만 빨리 나오고 싶은 곳입니다.
이것이 제가 예상한 답들인데 그렇다면 여러분의 집은 어떤 집입니까?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곳일 뿐입니까?
건물일 뿐 아니라 가족들이 이루는 가정입니까?
가정이긴 하지만 냉랭한 기운이 도는 가정입니까?
가족 간에 사랑이 훈훈한 따듯한 가정입니까?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열린 가정입니까?
나의 집은 가족 간에 사랑이 넘치는 따듯한 가정이기를 바라고,
그럴 수만 있어도 나의 집은 꽤 괜찮은 집이라고 생각들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성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집이 주님을 배제하고
가족끼리만 알콩달콩 산다면 성가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로 성가정은 나의 집이 아니고 하느님의 집입니다.
가정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얘기이고, 나 뿐 아니라 하느님 아닌
그 누구도 중심이 아니라는 얘기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집이라는 얘기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 유대인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는 “쉐마 이스라엘”이 선포되는 식탁 자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식탁에 특별한 의자가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금요일마다 집의 어른이 신명기의 “이스라엘은 들으라.”를
읽는 자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유대인에 대한 저의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유대 가정을 보면서는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유대 가정과 비교하여 우리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성체를 가정에 모실 수 없으니 성체 방은 없어도
가능하다면 말씀의 방이 있어 거기서 기도할 수 있으면 제일 좋을 것이고,
기도의 방을 따로 마련할 수 없다면 적어도
티브이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집의 중심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족이 매일 같이 읽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기 위해서지요.
그럴 수 없다면 요즘 세상에 카톡으로 하느님 말씀을 들려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성가정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가정이겠지요.
가족 모두가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족들이 사랑 차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차게 됨으로써 가족 서로 간에서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가정입니다.
이것은 부부가 손자 보는 재미로 하느님 사랑도 팽개치고,
자기 가족만 무탈하면 세월호 유가족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그런 가정이라면 성가정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성 가정 축일 지내는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갑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가정이 본기도의 내용처럼
“사랑과 성덕의 성 가정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빕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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