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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선물 (The Present) | |
얼마전 두 딸들과 함께 장 뒤뷔페의 '우를루프 정원'展을 다녀왔습니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하는 초등학생 둘째가 방학 중 화실 수업으로 바빠서 벼르고 별러 토요일 오전에 모처럼 짬을 낸 저희 세 모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덕수궁 미술관을 찾았지요.
비록 우리나라에서 그 이름이 아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는, '2차 대전 이전의 파리에 피카소가 있었다면 2차 대전 이후 파리의 대표적 작가는 단연 장 뒤뷔페다.'라고 할 만큼, 프랑스 국민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국민 화가이며 프랑스 교과서에 등장하는 화가 순위 1위를 기록하는 대표적 화가라고 합니다. 또한 '미국에 잭슨 폴록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장 뒤뷔페가 있다.'라는 말이 그의 위상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라 하니, 프랑스 현대 미술, 나아가 유럽 현대 미술에 있어서 그의 역할과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저 역시 그동안 장 뒤뷔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더욱 호기심과 기대감을 안고 그의 전시회를 찾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그의 전시회에 대해 전시 주최측의 작가 설명과 전시 의의을 이곳에 옮기며 대신 소개해 봅니다.
장 뒤뷔페는 10대에 아카데미 줄리앙을 단 6개월을 다니고는 "배울것이 없다."고 그만둔 후, 가업을 이어포도주 상인이 된 채 반평생을 살았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41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돌연 본격적인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에게는 더 이상 반드시 따라야 할 미술사적 전통도, 문화계의 관습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서구 문명이 너무나 맹목적으로 좇던 가치에 의문을 표하고, 반대로 너무나 오랫동안 무시되어왔던 것들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즉, 그는 '이성과 논리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본능, 열정, 변덕, 격렬함, 광기'의 가치를 존중하는 예술을 지향했다. '사상이란 이성과 논리의 과정과 접촉했을 때는 물로 변화하고 마는 증기와도 같다.'고 믿었던 장 뒤뷔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함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회적으로 정신병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끌어내었으며 '단지 즐거음을 위해 스펙터클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는' 광대와도 같이 작업했다. 그는 '문화적 예술보다 더 좋은 원초적 예술(Art Brut)'을 주창했고, 한국 화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앵포르멜(Informal, '비정형'을 의미함.)의 선구자로 칭송되었으며, 2차 대전 이후 예술의 기능과 진로에 결정적인 이정표를 제시한 세계적 작가로 인정 받았다.
길들여지고 제도화된 '문화'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고,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서구 문명의 진로에 '멈춤'을 선언하며, 대신 순수함과 광기와 원시성을 다시금 예술의 영역으로 불러들인 장 뒤뷔페는, 오늘날 한국의 문화 현실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난무하는 '문화'라는 미명 아래 추구되는, 세련되고 다듬어진, 그래서 특별하고 사치스러운 취미인 우리의 '문화'는, 이미 반 세기 전 뒤뷔페가 그토록 애써 무너뜨리고자 했던 그 견고하고 재미없는 문명화된 '문화'인 것이다. 제도화된 문화의 영역보다 훨씬 앞서 이미 존재하는 원초적인 것, 문명의 기치 아래 너무 오래 가려지고 숨겨져 있는 그것, 그러나 실은 우리가 주변으로 눈을 돌리기만해도 언제든 문득 발견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예술은 온건히 드러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이야말로 인류가 '즐거이' 감상할 만한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총 178점의 장 뒤뷔페의 전 시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회고전으로서, 4개의 전시실을 각 시대 순으로 구성하여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따라가며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회 나들이를 나온 김에 근처의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展까지 함께 관람하였는데, 장 뒤뷔페 전시회는 르네 마그리트展에 비해 많이 붐비지 않아 비교적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제 1 전시실(보통 사람 1919 - 1950)에는 '보통 사람'이라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1942년 그가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택하기 이전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그의 아내 릴리를 그린 연작 시리즈 등 주변의 보통 사람들과 평범한 일상들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모자를 써보는 여인/1943년 11월/캔버스에 유채/60 X 73cm
제 2 전시실(바닥예찬 1951 - 1960)은 독특하고도 신선한 소재의 작품들로 시선을 끌며, 저희들을 오래도록 그 방에 머물게 했습니다. 전시실에 쓰여있는 설명을 보니, 이 시기 뒤뷔페는 파리를 떠나 방스(Vence) 등의 프랑스 지방에 머물면서 주변의 기이한 자연물, 광물-심지어 오물까지도- 등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고, 종이들을 붙인 아상블라주, 석판화 등 여러가지 다양한 작업 기법을 실험하며 곧 지형학, 재질학, 재료학에도 단계적으로 몰두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돌이나 흙, 풀 등 표면의 질감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들을 바라보며 많이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땅의 풍경/1957년/캔버스에 유채(아상블라주)/101 X 123cm
풀/1954년/캔버스에 유채/71 X 89cm
자유롭고 거친 표현이 마치 실제로 땅과 풀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처럼 실감나지요? '풀'은 제 둘째 아이가 특히 마음에 들어하였던 작품입니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엄마, 풀 속에 클로버도 있어요."라고 말해서 함께 웃었답니다. ^^ (위 두 사진은 덕수궁 미술관 싸이트에서 가져왔습니다.)
제 3 전시실(우를루프 1961 - 1974)에는 뒤뷔페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제작한 '파리 서커스' 연작에서 시작하여 그를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준, 이 전시회의 이름이기도 한 '우를루프' 연작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우를루프(L' Hourloupe)'는, 프랑스어로 '소리지르다' '새가 지저귀다' '늑대' '곱슬머리 리케' 혹은 정신적 방황을 그린 모파상의 소설 '오를라' 등을 연상시키지만, 어떠한 규정된 의미도 가지지 않은 웅얼거림과도 같은 단어라고 합니다. '우를루프' 시리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침대나 의자, 가위, 망치 등 일상의 모든 사물들을 빨강과 파랑, 검정 등 세가지 기본 색으로만 아이들이 낙서해놓은 듯 자연스럽게 표현해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규범에서 벗어나 원초적이며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그림을 그리기 원했던 그는, 그렇게 사람들이 낙서할 때 주로 쓰는 기본 색만으로 작품을 완성하여 '우를루프'라는 자기만의 예술 어법을 창조해냈다고 합니다.
우를루프 정원/1966년/캔버스에 비닐물감/97 X130cm
제 4 전시실(마지막 날들 1975 - 1984)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그의 말대로 '제 2의 실재' 속에서 살고 있는 뒤뷔페의 작품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또다른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전시실 벽면의 설명에서처럼, 구상과 추상, 대상과 공간, 사물과 사람, 물질과 정신의 구분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자유로운 사유와 무한히 가능한 창안의 세계가 펼쳐짐을 느끼며, 원색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작품들이 아주 인상적이었지요.
미르 G3(주룽)/1983년 12월22일/종이에 아크릴, 캔버스에 부착/268 X800cm (이 사진도 덕수궁 미술관 싸이트에서 가져왔습니다.)
전시회 관람 후 돌아오는 길에 두 아이들 모두 쟝 뒤뷔페展이 특히 좋았다고 말하며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저 또한 기분이 좋았습니다. 비록 둘째 화실 수업에 조금 지각을 하긴 했지만, 새롭게 알게된 화가와 그의 작품 세계를 음미하며 함께 풍성한 마음이 되어 부자가 된 듯 가슴 뿌듯한 나들이였지요. 물론 화실에서 받는 수업도 중요하지만, 틈날때마다 이런 전시회 나들이를 통해 제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더욱 풍부한 지식과 감성으로 자신만의 개성과 창의력을 멋지게 펼쳐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첫댓글 오늘도 또 잘 배우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