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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전문능(全文能)
나이: 80세
조사일: 2019년 1월 4일
전문능 아저씨는 수몰전 상종마을에서 12살까지 살다가 시내로 나가 살았는데 큰댁이 상종에 있어 자주 들르곤 했다고 한다. 어릴적 기억을 되살려 여러 얘기를 들려주셨다. 이발소를 운영하셨고 시내 교현동에 오래 사셨다. 그 전부터 안면이 있고 종민동분이라는 걸 알았지만 내 고향마을 어른과 막역한 친구분이 되다보니 나름 가리고 살았다.
연세가 드셔서 내가 질문하고 간단히 대답하는 식으로 이발소에서 면담하였다. 기억은 중간중간 끊기곤 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기도 했고 영업후 늦은 시각에 내가 방문한 탓도 컸다. 면담시간은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저씨는 공교롭게도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님과 교현국민학교 한반 동창이 된다. 아래에 졸업사진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반기문총장님과 가끔 모임이 있었는지, 간직하고 있던 반총장님과 함께 찍은 오래전 사진 한 장을 주었다고 하며 내게도 오래전 사진 한 장을 소개하셨다. 문지강변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도 아래에 첨부하였다.
충주는 생각보다 좁은 곳이고 운신의 폭이 좁아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런 점이 충주 사람들의 소극적인 성격에 한 몫 했다고 봐야 한다. 흔히 바닥이 좁다고 하는데 번거로운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변해주신 아저씨께 감사드린다.
요새 나이드신 분들이 영업하는 이발소가 줄어들고 사라지고 있다. 어느 도시는 아예 찾기가 힘들고 미용실로 대체되고 있다. 아저씨도 이런 세대를 대표하는 측에 속해 노년을 지내고 있는 셈이다
아래에 더러 자세히 설명을 달았지만 말을 글로 옮기는 작업은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다. 너무 내용이 간단해서 나름 꾸몄고 해설을 붙였지만 없는걸 보태지는 않았다.
1)마지막재: 옛날 경상도 문경지방에서 이곳을 거쳐 걸어 다녔는데 예전 충주역전 부근에 사형장이 있어 이 고개만 넘으면 마지막이 된다고 유래했다 한다.
예전 조선시대 사형제도가 어떤지는 모른다. 다만 큰 사건에 연루된 죄인은 한양으로 압송될테고 경상도에 있는 죄수들은 경상도에서 사형했다고 봐야 한다. 경상도 죄인을 충주에 와서 사형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마지막재와 관련해서 이 전설을 입에 올리는 이들이 많고 근래 <충주시립장묘시설>이 마지막재 너머 목벌동에 생기는 바람에 마지막재가 말그대로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가 되었다.
내가 어릴적 듣기로는 마스막재였다. 마시막고개, 마즈막재, 마지막재라고 부르는데 한자로 마음 심자, 목 항자를 써서 심항티(心項峙)라고 고지도에 나오기도 한다. 예전 충주목은 지금 충주시보다 휠씬 넓은 곳이었는데 사형장은 숲거리 지금 삼원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경상도 사람들이 한양으로 압송되다가 충주 사형장에 와서 형(刑)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을까? 조선시대 천주교박해때 문경쪽 사람들이 압송되어서 충주옥(忠州獄)에 갇힌 경우는 어느 책에서 본 것 같다. 전설은 아득한 과거 사실보다 근래 사건에 더 영향을 받고 내용이 변한다. 전설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자신과 가까운 현대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생각할때 천주교신자들 박해사건이 이 전설에 끼워든 것 같다.
2)요각골: 그 유래는 자세히 모른다. 예전에 중석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요각골은 한자로 쓰면 요각골(要角谷)이며 흔히 욧각꼴이라 부른다. 욧골, 각골로 분해하면 뒤의 각골(角谷)은 요각골 뒷산의 뿔처럼 뾰족한 모습을 보고 유래한 이름으로 볼 수 있고, 앞의 욧골은 예전에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하고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럼 한자로 요골(窯谷)로 쓸 수 있다. 이 마을은 진의실, 재오개와 함께 지금 남산에 있는 충주산성과 밀접한 마을로 봐야한다. 요각골 주민들은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이름을 순전히 한글로 풀이하는 연구가들이 있다. 그들은 예전 조선시대가 한문을 기본으로 쓰던걸 잊고 있는 것이다.
3)재오개: 재오개와 진의실 부근에 광산이 있었다. 이 돌을 불에 넣으면 하얀가루가 파랗게 변한다고 한다.
예전에 재오개마을 뒷산에서 형석광산을 본 기억이 난다. 형석광산인 것 같다.
재오개는 <재+고개>로 ㄱ이 생략되어<재오개>가 된 말이다. 성재(城峙)라는 지명이 근처에 전한다.
성재란 지명은 오래전부터 남산에 충주산성이 있었고 이 성 부근의 고개(재)가 되므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재와 고개가 합친 말 <잿고개>에서 온 말이 재오개가 되고 고개이름이 마을이름이 되었다
4)곱돌실: 예전 일신산업이 있어 활석을 채석하였다. 지금 활옥동굴체험장이 들어섰다. 곱돌은 한자로 활석(滑石)이다. 옛날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활석(活石)으로 쓰기도 했다.
5)목벌: 남벌이라고 했다.이 외에 주변에 원터, 밍개가 있었다.
목벌(木伐)은 나무벌의 준말 <남벌>을 한자로 옮긴 말로 뒷글자 벌(伐)은 벌판의 뜻이다. 원터는 옛날 원님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전국의 수많은 <원터>는 조선시대 있었던 역원(驛院)에서 유래한 지명이 된다. 그러므로 조선지대 원(院)이 있었던 곳인데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밍개는 한자로 무음(武音)로 쓴다. 그 유래는 홍수가 지고나면 명개(뽀얀 뻘흙)가 쌓여 유래했다고 한다.
6)봉오똑: 봉화뚝, 봉오똑산이라고 했다. 지금 심항산을 말하며 옛날 봉화를 올리던 곳이다.
봉오똑, 봉우뚝산은 전국에 흔하다. 예전 봉수대의 모습을 보고 이름지은 것 같다. 지금 이 산은 종댕이길로 유명해졌다.
7)왐재: 왕재, 우암재. 지금 계명산휴양림 아래 고개를 말한다. 지금도 이 부근은 급커브길이며 예전에는 휠씬 가파르고 험했다고 한다.
8)병문거리: 왕골입구를 말한다. 상종마을에서 조금 올라가면 있다.
9)둥그럭바위: 병문거리 지나 조금 올라가면 있었다.
병문거리를 지나면 둥그럭바위가 나오고 조금 올라가면 왕골이 나오고 그 위가 절터가 되고 절터 위가 골안이 된다. 골안에서 한참 올라가면 쪽두리봉이 나온다.
*병문거리 ---> 둥그럭바위 ---> 왕골 ---> 절터 ---> 골안 --->쪽두리봉.
10)승지골: 성지(城址)골, 상종마을 뒷산에 있다. 성터가 있어 유래하였다.
11)상상마루: 산상(山上)마루, 웃종댕이 마을 앞 산능선을 말한다. 계명산휴양림 아래 산줄기를 말한다.
12)집너메: 상종마을 앞 삼산골을 달리 부르는 말이며 마을너머가 된다.
13)집너메도랑: 상종마을 앞 삼산골도랑을 달리 말한다.
집너메 있는 도랑이란 뜻이며 텃골마을에도 집앞에 도랑을 집너머 있다고 집너메도랑이라 한다.
14)삼산골: 예전에 쇠똥이 많았다고 한다. 강건네 동량면 개천안과 꽃바우 사람들이 시내를 갈때 이곳을 많이 지나다녔다. 예전에 우리집에서 부치던 논이 있었는데 발을 구르면 울리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수몰되었다. 아주 오래전 전씨, 임씨, 유씨 세 성을 가진 분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웃종댕이에 속하지만 아랫종댕이 사람들 땅이 많았다.
쇳돌(철광석)을 불에 달구어 쇳물을 뺀 찌거기를 흔히 쇠똥(슬래그, 슬러지)이라고 부른다. 충주 여러 야철지(冶鐵址)에 가면 지금도 볼 수 있다. 이 야철지는 심항산봉수와 관련된건지 작은 규모의 쇠부리터나 점(店)터인지 지금 확인하기는 어렵다. 삼산골에 대해서는 하종마을의 땅이름을 소개하면서 써놓았다. 물론 다른 전설도 전한다.
오래전 세 성을 가진 분들이 어느 성씨인지는 논란이 있다. 지금 종민동을 처음 배판(排判)한 분들인지 아니면 도중 잠시 살다 떠난 분들인지도 불명확하다. 종민동에서 오래 산 집안은 하종 정선전씨 집안을 꼽을 수 있고, 텃골 평택임씨, 민마루 청주한씨 집안을 들 수 있다. 봉골 기계유씨 집안은 12대째 살고 있는데 용탄동에도 선대 조상묘가 있었다.
15)까치여울: 원터로 넘어가는 곳에 있었다. 까치여울의 유래는 잘 모른다.
16)누루꾸지여울: 달리 그 부근을 여울미끼라 하였고 뗏목이 내려오다 많이 걸려서 파손되었다. 하종에서 흩어진 떼를 모아 떼배를 다시 멨다고 한다.
17)독바우여울: 하종에서 텃골로 조금 내려가서 있는 여울을 말한다.
18)자라바우: 여울미끼 위에 있었고 쏘가리가 많이 잡혔었다.
19)짜개바우: 이 바위도 여울미끼 위 자라바위 위에 있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모습이 일부러 쪼갠듯한 모양이라서 유래했다.
20)사구랑산: 사고랑산, 사우앙산. 예전에 사구랑산 앞에 모래가 많이 쌓였었는데 사금을 많이 캤다고 한다.
이 산은 충주댐 전망대에서 보면 단정하게 보이는 산이다. 그 모양이 삼각형 모양으로 생겨 삼각산, 뾰족산이라고도 하였다.
21)장수바위: 웃종댕이에서 아랫종댕이로 가는 길아래 강가에 있었다. 논골에서 조금 내려가야 한다. 바위에 딱 갈라진 칼자국이 나 있었는데 예전에 장수가 나오려다 못 나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22)골안: 왕골에서 올라가면 절터가 있고 조금 위가 골안이 된다. 골짜기 안이란 뜻이다. 하종에도 골안이 있고 절터가 있다.
23)복개울: 복(洑)개울이 유명했다. 예전 웃종댕이마을에 있는 도랑을 말하며 왕골 위에서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내려오다가 동네쯤에서 솟았다고 한다. 물이 매우 찼다.
우리가 흔히 쓰는 봇도랑, 보를 막는다라고 할 때 보(洑)자는 복(洑, 스며흐를 복)으로 발음하기도 하는데 서로 혼동되어 쓰기도 했다. 상종마을 복도랑은 쉽게 마을에 복(福)이 되는 물이 된다고 복(福)개울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말 문신 이유원(李裕元)의 문집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보면 복천(福泉)이란 말이 나오는데 우리말로 복샘이다.
<보은군 지명지>를 보면 속리산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달천강 자문장대 서류위복천(達川江 自文藏臺 西流爲福泉) --- 달천강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 복천 즉 복샘이 된다.>
24)희매기: 희매기잔등이라 한다. 심항산에 있다. 희매기 풀이를 후미지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데 희다(白)는 뜻에서 온 말일 수 있다. 종민동, 동량면 일대와 심항산은 석회석이 많이 발견되고 한 때 백운석광산, 활석광산이 있었다. 쉽게 차돌이 눈에 많이 띈다. 차돌이 많은 곳은 멀리서 봐도 하얗게 보이므로 희매기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본다.
25)논골: 웃종댕이에서 아랫종댕이로 내려오는 중간에 있었다. 논과 밭이 많았다. 전국의 논골은 논이 있어 유래하였다.
26)벨내: 웃종댕이에서 밍개로 올라가다 보면 강가에 있었다. 여울메끼에서 조금 올라가면 짜개바우가 나오고 그 위가 벨내가 된다. 움벙이 있고 모래사장이 있었으며 말풀이 많았다. 말풀은 달리 말이라 했으며 깨끗이 씻어 볶아서 별미로 먹던 민물수생식물이다. 벨내는 별내(別川)의 뜻같은데 모래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벌판이란 뜻의 벌의 방언일 수 있다. 앙성면 비내는 한자로 벌천(伐川)로 옮긴다.
그리고 인근에 비내, 비내섬이 있다. 여기서 벌(伐)은 벌판의 뜻이다. 목벌(木伐)의 벌(伐) 역시 벌판의 뜻이다. 하여튼 중요한 지명이 된다.
27)갈메기: 웃종댕이에서 아랫종댕이로 내려가다 보면 계명산쪽에 있었고 지금 별장을 짓고 있는 곳이다.
갈메기에서 쭉 올라가다 보면 쪽두리봉이 나온다.
28)상종서낭당: 웃종댕이 강가에 있었다. 마을 입구가 된다. 서낭나무가 있었고 그네를 뛰고 놀기도 했다.
29)장길: 아랫종댕이에서 웃종댕이를 거쳐 우암재를 넘는 길을 장(場)에 간다고 장길이라 했다. 지금 나있는 도로와 유사하다.
30)암베이, 지대이, 거무뜽이, 개차구렁: 모두 물건너 동량면에 있었다.
31)용수꾸미: 범동에 있었다.
32)문지갱변: 문지강변, 목벌서 강쪽으로 올라가면 있었고 강에 용소꾸미가 있었다. 예전에 용마(龍馬)가 나오다 들고 뛰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33)못둔지: 하종에서 텃골로 가는 정선전씨 종중산 줄기 아래 강가에 있었다.
34)메골: 하종 충북교원복지회관 뒷편 골짜기를 말한다.
35)큰구렁, 작은구렁: 마스막재로 가다보면 있는 계명산 골짜기를 말한다.
<1953년 문지강변에서 찍은 사진, 한복을 많이 입었다.
날짜가 4월 24일인거로 봐서 봄소풍날 찍은 사진같다>
<교현국민학교 졸업사진, 반기문총장님 바로 옆이 전씨아저씨다. 윗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1957년도 교현국민학교 48회 졸업사진.>
<2018년 12월 29일 찍은 사우앙산 모습>
<상종마을 앞 과수원과 상상마루, 그리고 멀리 둥그런 산이 심항산, 2018년 사진>
<상종마을 앞 상상마루 아래와 멀리 심항산 줄기 모습,
2018년 사진>
<상종마을에도 근래 외지인들이 들어와 별장과 카페가 들어섰다, 2018년 사진>
<상종마을 마을회관 아래 있는 감사비,
2018년 사진>
<우암재에서 찍은 상종마을, 2016년 사진>
<우암재에서 찍은 상종마을 뒷산, 2016년 사진>
<상종마을 앞 상상마루와 심항산 모습, 2016년 사진>
<상종마을 앞강에서 낚시하는 모습, 수몰전 사진으로 사진이 흐릿하나 귀한 사진에 속한다. 충주댐이 완공된 것은 1985년이 되고 담수는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대초 사진으로 생각된다.>
<심항산에서 바라본 요각골 모습, 인터넷자료>
<충주시 장묘시설(하늘나라)에서 본 계명산과 심항산사이의 모습(중앙), 2017년 2월 사진. 생각보다 넓다.>
첫댓글 아주 오래전 얘기라 착오가 있을 수 있고 지금 시점에서 보면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예전 농사를 생업으로 살던 시대가 지금에 비해 만족스럽고 살기가 좋았던 것이 아니고, 사는 모습이 꼭 아름다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도 말못할 사연은 많았고 바깥세계가 변함에 따라 힘겨운 점도 많았습니다. 좋은 일도 궂은 일도 세월따라 지워졌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시대가 더 나아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현실의 짐이 무겁다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다들 각박하게 살아갑니다. 시골인심도 예전과 같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전국 어디나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 살다보니 정으로 뭉친 공동체라는 것이 의미가 적어졌습니다. 한 가문의식, 일가친척이란 의식보다 저마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 세태란 것이 이혼이 많고 홀몸가정도 많다보니 다들 자기 편한대로 삽니다. 대처에 나가 사는 사람들도 나름 현실이 있기에 그저 마음속의 고향입니다.
지나간 시절 지금은 태반이 사라진 세세한 일을 굳이 글로 옮기는 것은 무슨 거창한 뜻이 있는게 아니라 다만 기록으로 남겨보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