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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양옥환. 당대포주 영락인(719~756)(지금의 섬서 화음현) 출신.
음률의 조예가 깊고 가무에 능하였다. 당현종의 총비.
원래는 현종의 비가 아니라 당현종의 왕자 제 18 대 수왕(壽王)의 왕비였다.
즉, 현종의 며느리. 양옥환은 당현종이 그녀의 자태에 반하여 여도사로서 입궁시킴.
도호는 태진(太眞). 천보사년(745,天寶四年) 그 후에 현종의 총애가 지극하였다.
그녀가 현종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그 춤이 바로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라는 것이다.
절세의 미모와 재주로 현종의 총애를 받고 일족이 부귀영화를 누렸다.
안사(安史 : 안록산-사사명)의 난 때 피난길에서 피살되었다.
※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중국 봉건 사회의 황금 시대라 일컬어졌던 당왕조의 개원 연간을 정점으로 그 후 이어지는 천보 연간(742∼756)에는 그렇게 번영했던 당왕조의 발전상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결코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잠재해 있던 경제적·사회적인 근원적 병폐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당시 간신들의 횡포와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무분별한 총애가 그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림보가 조정의 실권을 한 손에 쥐게 된 736년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를 잃었다.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명이나 있었으나 누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없었다. 이럴 즈음 현종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한 가지 소문이 현종의 관심을 끌었다. 수왕비(壽王妃)가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이었다. 현종은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수왕비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 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수왕비야말로 다름 아닌 후의 양귀비(楊貴妃)로서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 막이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玉環)으로 원래는 현종의 열 여덟 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였다. 수왕 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귀비는 바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현종은 수와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남궁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못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 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현종과 태진 이 두 사람은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 하여 일찍이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 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 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 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양귀비의 6촌 오빠이다. 천보 10년(751) 칠월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진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 수가 없아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될 지이다."
이 뜻을 풀이하면,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하지만 간신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즉, 안록산이라는 절도사가 지나치게 권력을 쥐게 되어 조정에서 견제를 하려하자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안록산의 난) 그 후 사사명의 난, 황소의 난 등으로 당나라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