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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년을 수일 같이
창세기 29:1~20
오늘 저녁 우리가 읽은 창세기 29장은 그동안 앞서 여러 장에 걸쳐 나타났던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이르는 매 단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생각한 베델에서 경험한 신령한 체험과 같은 그런 것이 베델 이후에는 없었습니다. 그때에 뵈었던 그 하나님의 모습도, 그때에 들었던 그 하나님의 음성을 뵙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야곱을 떠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맛보며 그 귀한 은총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매일 매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야곱이 베델에서 하나님과의 행복한 교제를 가진 뒤 얼마나 행복하게 여행을 계속하였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형의 보복이 무서워 거의 도망치다시피 부모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던 때 그의 마음은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델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이제 야곱은 근심의 무거운 짐에 눌리지도 않았고, 두려움에 시달리지도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의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환상을 보고 났을 때는 엄숙한 규례로 서약을 해야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가 명한 길을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데 대한 감사와 감격도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아야 할 책임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가한 시골의 오솔길을 산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기는 영광과 지는 수치를 안은 채 많은 경주자들과 함께 경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달려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달리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면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죄가 아닐지 모르나 달리는데 방해가 되면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벗어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취미는 그것이 꼭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거추장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습관은 신앙 생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집어던지고, 벗어버리고, 끊어 버려야 합니다. 긴 옷을 입고 달려갈 수 있습니까? 몸이 너무 비대해도 달릴 수가 없습니다. 양의 털이 너무 길면 걸려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긴 옷은 벗어버리고 비대해진 몸은 절식을 해서 살을 빼고 길게 자란 털은 깎아 버려야 합니다.
롯의 아내는 멸망당할 소돔 고모라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손에 이끌리어 떠났습니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소돔성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특별한 분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돔성에 유황불 심판이 임하는 소리가 들릴 때, 그가 남겨 두고 온 아까운 것들이 생각나서, 그것이 불에 타 버릴 생각을 하니 너무 아쉬워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주께서 부르신 상을 얻기 위하여 좇아가야 합니다. 좇아가는 사람은 우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좇아가는 사람은 옆에 있는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없습니다. 몸은 앞을 향해 기울이고 눈은 목표에 이미 가 있고 팔과 다리는 사력을 다하여 휘두르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하셨으면 뒤를 돌아보지 마셔야 합니다. 잘못하고 실수한 것 있어도 거기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셨으면 과거의 죄는 다 용서 받으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다 옮기셨고 기억도 안하신다고 했는데 왜 내편에서 자꾸만 잊지 못하고 그러십니까?
제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은 가끔 교회에 오셔서 예배가 끝나면 저를 찾아 오셔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래서 만나뵈면 제 손을 붙들고 자기가 박 목사에게 죽을 죄를 지었으니 모든 것 다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할머니가 제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서도 소용이 없어서 “할머니, 저는 할머니가 제게 무슨 잘못을 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 잘못하신 것으로 생각하시면 제가 아예 상관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용서하니까 마음 평안히 가지세요.”
“아, 그래요? 그러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그럼요. 기도합시다.” 그래서 그 할머니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 드리면서 저에 대한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쁜 사람이라 그런 일 다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몇 달 후에 또 찾아오셔서 “목사님, 저 좀 만나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글쎄, 제가 목사님께 죽을 죄를 지었어요.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러세요. 지난번 제가 다 용서하고 다 잊어버렸는데 왜 그러세요?” “아니지요. 목사님이 용서하셨다고 해도 제 마음이 불안해요. 한번 기도 좀 해 주세요.” 그래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제편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할머니가 내 말과 인격을 믿지 못하시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는 정신이 좀 이상해 지셨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잘못한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면 열등감이 생기고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합니다. 과거의 잘못에 잡혀 있으면 전진하지를 못합니다.
과거의 것은 잘못도 잊어야 하지만 잘한 것도 잊어야 합니다. 과거에 한 일, 잘한 것에 사로잡혀 있으면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자랑하는 사람은 벌써 늙은 징조입니다. 늙으면 왜 말이 많아지는지 아십니까? 지난 일들을 자꾸만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왕년에 내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어떻게 했고‧‧‧‧‧‧” 이런 것으로 계속되는데 특수한 경우에 참고 사항이 될지는 몰라도 과거 생활의 나열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령, 미국이나 구라파 공원 벤치에 앉으면 한가한 노인들이 소일하러 나왔다가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옛날 일하던 이야기, 여행하던 이야기, 자녀 키우던 이야기‧‧‧‧‧‧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을 계속합니다. 옆에서 듣는 것이 고역이고 어떻게 하면 일어나 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은 우리의 과거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에 붙잡혀 있으면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현재 하는 일이 없어서 그럽니다. 현재에 바쁜 사람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심에 붙잡혀 있습니다. 젊은 것과 늙은 것을 무엇으로 구분하는지 아십니까? 과거에 사로잡혀 있느냐 아니면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위해 달리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몸은 늙었어도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사람은 젊은 사람이고, 나이는 젊었서도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은 늙은 사람이요, 전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행복하게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그의 외삼촌의 양떼들이 물을 먹는 바로 그 들판으로 데려다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또 다른 면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미 야곱은 그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가 누릴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야곱은 신령한 축복만 받을 뿐 아니라 육신적인 축복을 다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는 일이 잘된다면 우리는 그간의 모든 사소한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인도해 줄 사람을 마침 만났으면, 혹은 우리가 역경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체험했으면 이것이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길에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의 가는 길은 즐거운 길이 될 것입니다.
야곱은 그와 평생을 같이 할 라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성경에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라헬은 겸손하고 근면하게 일하는 여자였습니다.
9절에 보니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물론 라반의 집에는 양을 치는 목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라헬은 스스로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보통인 경우 가정의 형편이 여유가 있으면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라헬은 오히려 그러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일을 했습니다. 라헬이란 이름은 양을 뜻합니다.
기독교는 일하는 종교입니다. 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일하고 먹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우리 나라는 유교적인 영향을 받아서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뒤떨어졌습니다. 서구 사회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무엇이나 맡은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서구 사람들은 일하는 것이 몸에 배었고 일하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가신 분들을 보면 누구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해서 잠잘 시간도 모자라고 몸에 골병이 들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체면을 생각해서 일을 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 안하면 안했지.” 하면서 일을 안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면 대학을 졸업하고 말고 상관하지 아니하고 무슨 일이나 잘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그런 자세로 열심히 일했으면 얼마나 빨리 발전했겠습니까?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만나는 순간 자기 외삼촌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사람이 바로 자기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았습니다. 이미 야곱은 라헬의 솔직하고 귀여운 인상에 이끌리고 있었기 때문에 라헬은 친절하게 도와주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사랑의 입을 맞추면서 자기를 소개했습니다.(10-11절) 첫 대면에서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는 전조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이삭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노종을 고향에 보내서 이삭의 아내될 사람을 찾을 때도 이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격려해 주심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눈여겨 인도하십니다.
시편 32편 8절에 보면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났을 때 눈물을 흘린 것은 라헬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이렇게 행복한 만남이 너무나 갑자기 이루어져서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달에 라반과 야곱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15절에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이겠느냐 내게 고하라”
이것을 보면 야곱은 퍽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생 처음 외삼촌 집에 손님으로 왔어도 손님으로 그냥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집 식구나 다름없이 나가서 부지런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유용한 일을 찾아서 거기에 전념하게 되면 우리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제가 지난번 하와이에 들렀다가 제가 목회를 처음으로 하던 때 교회의 집사님의 아드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국민학교 다니던 어린애였는데 이제는 청년이 되고 그동안 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하고, 서울에서 아버지께서 다니던 회사에서 일을 보다가 몇 해 전에 미국에 이민 갈 길이 있어서 하와이에 갔는데 돈이라고는 비행장에 내리니까 20불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의 소개로 큰 슈퍼마켓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근면하게 사는지 사람이야 보든지 말든지 자기 맡은 일에 충성스럽게 잘하니까 지배인이 눈여겨보다가 재작년에 한번 그 청년을 부르더니 “자네, 내가 뒤에서 가만히 보니 정말 충실하게 일을 잘 보는데 앞으로 김치를 만들어 납품할 생각이 없는가?” 해서 그러겠다고 하여 김치를 만들어 슈퍼마켓에 납품하는 일을 하는데, 물건 팔 걱정도 돈 받을 걱정도 없이 요구하는 양만큼 만들어 납품만 하면 되는데 매달 인건비, 재료비 다 제하고도 1만5천불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고 하면서 벌써 집도 하와이에서 제일 좋은 지역에 마련했다면서 그 어머니 권사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한 가정은 한국에서 서울 공대를 졸업한 청년 집사님인데 미국에 가서 내외가 샌드위치 가게를 조그맣게 경영하면서 부지런히 성실하게,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옆에 새로운 큰 빌딩을 지은 사장님이 오시더니 “내가 우리 빌딩에 한 코너를 내서 빌딩 안의 직원들이 점심할 수 있는 가게를 다 꾸미고 시설 일체를 다해 놓을 터이니 당신이나 아니면 부인이 와서 책임지고 운영해 줄 수 없겠느냐? 그리고 우리는 종이컵 하나도 그냥 쓰지 않을 것이니 나를 도와 달라.” 해서 부인은 이미 있던 데서 그대로 가게를 하고, 남편이 새 빌딩의 주인이 전부 시설을 해 놓은 데 가서 일을 보는데 직원이 3천명 가량 되는데 장사가 얼마나 잘되는지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집 주인이 얼마 전에 오더니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내가 이제 빌딩을 하나 더 짓는데 거기도 이런 가게가 필요해요. 그 가게도 하기 원하시면 우선권을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하더랍니다. 부지런하게, 성실하게 일하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기가 그의 딸 라헬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면 라헬에게 줄 수 있는 아무런 재산이 그에게 없기 때문에 18절엘 보니까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그 아내를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양을 치는 수고를 했습니다. 더구나 라헬이 함께 양을 치는 일을 계속했다면 야곱은 라헬과 함께 양을 몰면서 서로 나눈 순수하고 경건한 대화들이 서로가 더 이해하고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혹시 라헬이 야곱이 온 이후로 양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하더라도 야곱은 라헬을 매우 정중히 돌보아 주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지루하고 고생스러운 일을 짧고 손쉽게 해 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로다.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사랑이 이렇게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식사하신 후 베드로를 불러서 다른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사랑을 다짐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다른 면은 부족한 점이 많이 있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는 것을 확신하고 “네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양을 먹이면 그 수고가 어렵지 아니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그것도 거꾸로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합니까? 핏덩이를 낳은 후 그것을 키워서 20살이 넘게 만들어 사회에 내보내는데 그 동안의 고생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그것을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아!”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이놈을 어떻게 20여년 동안 키워서 사람을 만드나?”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어느 결혼한 신부가 “아이구 어떻게 이제부터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고 40년 아니고 50년 저 남자의 옷을 빨아 주고, 다려 주고, 밥해 주고, 시중 들며 살아가나?” 하면서 땅이 꺼질듯이 한탄하는 신부를 보셨습니까? 서로 사랑하면 그저 더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20절을 다같이 찾아서 읽으시면 합니다. 창세기 29장 20절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이 얼마나 인상적인 말씀입니까?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7년을 수일 같이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이렇게 사랑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수고롭지만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기면서 봉사할 수 있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