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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시 34:1-22)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라는 팝송 가수가 부른 'Song Sung Blue'라는 노래가 있는데, '슬플 때 부르는 노래' 혹은 '우울하게 부르는 노래'라는 뜻의 제목입니다.
"Song sung blue everybody knows one / Song sung blue every garden grows one"(슬픈 노래, 누구나 하나쯤은 알고 있어요 / 슬픈 노래, 누구의 마음속 정원에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어요)라고, 첫 줄부터 모든 사람의 가슴에 딱 와 닿는 가사로 시작되는 명곡입니다.
그러면서 "Funny thing, but you can sing it with a cry in your voice / And before you know it, start to feeling good"(웃기는 일이지만 그 노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부를 수도 있어요 /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지요)라는 가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람이 아주 깊은 슬픔이나 극심한 괴로움에 빠져 있을 때에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좀 우울할 때에 '닐 다이아몬드 같은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기분을 전환시키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정말 비참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노래를 부른다면'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서 그는 "1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2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라고 뜨겁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1절 바로 앞에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위협에 견디다 못해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의 수하에 투항해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비멜렉의 측근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면서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그는 아비멜렉 앞에서 일부러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를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호구를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골리앗을 죽였던 이스라엘의 장군이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적국의 왕에게 머리 숙이면서 빌붙어 살다가, 그것도 더 이상 못하게 되자 스스로 미친 사람의 흉내를 내면서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으니 정말 이보다 더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처럼 자신의 전 인생을 통틀어 그야말로 최악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던 바로 그때에 '여호와를 송축하고, 여호와를 자랑하며, 여호와의 성호를 높이는' 이 시편을 지어 노래를 불렀던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며,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기분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첫 소절부터 '기쁨에 넘치는' 가운데 찬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노래는 다른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게" 될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서 그런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기쁜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성도가 인생의 절망적인 순간을 통과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오히려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그 이름을 높이며'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곤고할 때일수록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체험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4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4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 최악의 환난기를 통과하면서 가장 먼저 체험했던 사실은 바로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두려움"이라고 다윗이 표현하고 있듯이, 그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밑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두려움 아니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아비멜렉의 그날 기분'에 자신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6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이 곤고한 자"라고 했듯이 그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스스로는 속수무책에 빠져 있던 다윗은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만 '구하고 앙망하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은 눈을 뜨고 있는 동안 '주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도 없이 올렸을 것이며, 평생을 두고 이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해 본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곧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모든 공포와 위험으로부터 그를 "건져" 주신 것이었습니다.
특히 다윗이 블레셋에 사는 동안 본인 스스로는 알지도 못했던 위험의 순간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5절에서 "저희가"(they)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은 다윗뿐 아니라 다윗의 부하들도 함께 그처럼 "주를 앙망하는" 기도를 올렸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어쨌든 다윗 일행 모두는 그토록 수치스러웠던 상황에서도 오히려 "그 얼굴이 부끄럽지 아니하게" 되는 극적인 기사회생과 그토록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을 "둘러 진치고" 보호해 주시는 기적적인 구원을 얻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기도 응답'을 체험한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사실을 이미 그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맛을 보듯이' 제대로 '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분일초를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지내고 있던 중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온 천군천사를 동원하시어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응답을 받게 되었으니, 그 '행복한 맛'이란 실로 다윗의 오감 전체를 통해 짜릿짜릿하게 느껴질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에 입의 혀를 통해 그 맛을 느끼게 되는데, 그 '맛'이란 각 개인의 기호나 지방의 음식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똑같이 '맛있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배고플 때 먹는 밥맛'입니다.
아무리 입이 까다로운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생소하고 보기에도 역겨운 토종음식이라 해도 지금 뱃가죽이 등에 가 달라붙어 있을 정도로 허기진 상태에서 먹기만 하면 '꿀맛'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교회의 찬양대원들을 따라서 가야산으로 등산을 갔을 때였습니다.
그때가 10월의 어느 휴일이었으니까 정말 날씨 좋은 계절이었는데, 웬걸 올라갈수록 점점 더 추워지더니 해발 1,430미터라는 정상에는 아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옷도 얇게 입고 있었던 저는 그야말로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 수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 점심이라고 먹게 된 것이 '얼어붙은 김밥' 몇 개였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이가 절로 딱딱 부딪히는 추위 속에서 그 꽁꽁 언 김밥을 씹어서, 아니 부수어서 먹는데도 그 맛은 그야말로 '꿀맛' 그 자체였습니다.
'기도 응답의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평소에 교리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리 실감하지는 못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주 '곤고한 일'을 당했을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그 얼마나 선하게 대해 주시는 분이신지를 제대로 '맛볼 수' 있게 됩니다.
평소에는 그저 일상적으로만 기도하다가도 스스로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낭패에 빠지게 되면 정말 하나님만 앙망하며 간절히 부르짖게 되고, 평소에는 자기가 기도했던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넘겨 버리다가도 그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절실히 기다리던 응답을 받게 되면 그 행복한 맛은 순식간에 온 몸과 영혼 전체에 쫙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생일대의 위기, 사면초가의 환난을 당하게 된 때일수록 오히려 '여호와께 피하며 기도로 부르짖음'으로써 그 선하신 구원의 은총을 더욱 뜨겁고도 강력하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어려운 중에도 '꼭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시는 은혜를 절감하게 됩니다.
9절부터 16절의 말씀에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14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 밑에서 그처럼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가슴 졸이면서 살던 동안 오히려 더욱 간절하게 된 것이 기도 외에도 또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경외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다윗은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아비멜렉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하나님만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진짜 절대주권자만을 두려워했던 다윗의 참된 신앙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 경외의 신앙'은 어떤 '신행일치'로 나타나야만 하는지를 간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선행이란 곧 "혀를 악에서 금하며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하는" 것이었는데,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악'을 버리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먼저 자기 입에서 나오는 '궤사한 말'부터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상황을 비추어 생각해 보면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흔히 겪을 수 있듯이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오기 쉽습니다.
또한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몰리게 되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심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토록 비참하고 다급한 상황 중에서도 그런 '궤사한 말'을 자기 입에서 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 가장 높은 곳에서 각 사람을 살피시는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어" 버리고야 만다는 것을 다윗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처럼 "의인을 향하시는" "여호와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을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보답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두고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사자는 보통 12년에서 15년 정도까지 살 수 있지만 야생의 사자 중에 그 최대 수명을 다 누리는 경우는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합니다.
먹이사슬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어서 천적도 없으며 명실 공히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도 먹이를 제때에 잡아먹지 못해 '궁핍할' 때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젊은 사자' 즉 사자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힘센 사자조차 사냥 도중에 큰 부상을 입게 되면 그냥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주려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물원에서 온갖 보살핌을 받고 있는 사자는 적어도 생존율에 있어서는 야생의 사자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식과 능력만 믿고 뽐내는 사람은 결국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될 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신 따위는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라고 교만에 가득 찬 사람은 자기 스스로 극복할 길이 없는 큰 위기와 환난을 당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자기 인생에 대한 최고절대주권자로 모시면서 그 분만을 두려워하며 사는 성도는 바로 그 생명주께서 보살펴 주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아무리 눈앞의 환난과 위기는 당장 그 성도를 쓰러뜨리고 집어삼킬 것처럼 보여도 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은 반드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연예프로에서 출연자들이 '죽지 않아!'라는 구호를 함께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현재 상황은 필패지세처럼 보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는 아주 멋진 구호였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야말로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죽지 않아!'가 아니겠습니까?
'여호와를 찾는 자'는 아무리 자기 손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궁핍'한 상황이라 해도 그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까마귀를 동원해서라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원은 결코 중단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각박한 인간사회에서 자신의 힘만 가지고 살겠다고 한다면 뜻밖의 환난을 당할 때에 '궁핍하고 주릴' 수밖에 없지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도는 그 어떤 역경 중에도 일용할 것에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평생 '장수하면서 가장 좋은 복'까지 풍성히 누릴 수 있음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도는 환난을 통과함으로써 '의인에 대한 궁극적 구원'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17절 이하 22절에 "17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22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남들은 그저 괴로워하면서 자기 입으로부터 저주를 내뱉거나 혹은 그 자리에 완전히 쓰러질 수밖에 없는 "환난" 중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로써 "외치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중심에 통회하는" 겸손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지시고" "구원해" 주시는 은혜들을 하나하나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모든 일들은 다윗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연단의 과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두고 "의인은 고난이 많으니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다시금 뜨겁게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없다.'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의인일수록 고난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의롭게 살고자 하는 신자는 사단의 온갖 시험과 핍박을 당하기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의인을 더욱 굳건하게 연단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런 고난을 일부러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제가 군복무할 당시만 해도 아주 끔찍한 '기합'들이 많았습니다.
그것들은 받는 순간에도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또한 제대한 후에도 평생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는 실로 위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육군본부에서 허용하고 있는 정식 '얼차려'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팔굽혀펴기나 오리걸음 따위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고통이 큰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모두가 다 근육운동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즉 그런 합법적인 얼차려는 부당한 기합과는 달리 병사의 잘못을 바로잡는 동시에 신체단련도 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내리시는 시련 역시 부당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기합'이 아니라 바로 '영적 얼차려'와 같습니다.
이어지는 20절에서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다윗이 회상하고 있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즉 의인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난을 통과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와중에도 그가 결정적인 '중상'은 당하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의인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연단'일 뿐이지 절대로 그를 완전히 실족하게 만드는 '시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 연단만 잠시 견디어 내면 그 뒤에는 놀라운 '궁극적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각 사람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의인을 미워했던" 악인은 "악이 악인을 죽이는" 영벌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의인"은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는" 구원을 얻고 "죄를 받지 아니하는"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체험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자기 생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당했을 때에도 자신의 '뼈는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보호를 체험했으며, 바로 그런 연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속'에 대한 확신은 오히려 더욱 확고부동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라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견인'이란 '牽引'(끌 견, 끌 인) 즉 '끌어당겨 줌'이 아니라 '堅忍'(굳을 견, 참을 인) 즉 '굳게 참고 견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에 이를 때까지 끌어당겨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구원에 이를 때까지 모든 환난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끝내 이기게 하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택자로 하여금 끝까지 '견인'하게 하심으로써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해 주십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도는 연단을 통과함으로써 마지막 구원까지 꼭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는 것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찬 503장)라고 우리가 찬송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체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택자를 더욱 강한 신앙인으로 '견인'시키기 위한 과정일 뿐임을 기억하면서 그로 인하여 오히려 '칠 배나 연단된 정금' 같은 믿음을 키움으로써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제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복주의 종교인들이 생각하듯이 '등 따뜻하고 배부를 때'에만 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다윗처럼 가장 비참한 지경을 통과하면서도 '여호와를 송축하고 자랑하며 그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의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때야말로 '기도'를 통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일푼의 빈털터리'로 전락된 처지야말로 당신을 끝까지 경외하는 자에게 '일용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자상하심을 뜨겁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절망'의 순간이야말로 한번 택하신 성도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그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가운데 끝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독수리의 날개 침' 같이 올라가고 또 올라갈 길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부 시절에 불렀던 복음성가 중에 "나의 영혼 기쁜 노래 부르네 중한 죄짐 벗고 보니 / 슬픔 있어 눈물 앞길 막아도 나의 영혼 살아 있어 노래해 / 곤고해도 내 안에 노래 있네 모든 시험 후 갈 길 다 간 후 / 평안할 때 노래는 심상해도 고난 중에 노래를 주신 주"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 부르는 찬송은 심상'하게 되기 쉽습니다.
입술은 찬송을 부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무미건조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 중에도 찬송을 부르게 될 때' '슬픔이 있어 눈물이 앞길을 막아도 나의 영혼이 살아 있어서 노래를 부를 때' '곤고할 때에도 내 심령 안에서 솟아나는 노래를 부를 때' 그 찬송은 훨씬 더 뜨겁고 힘이 있으며 또한 다른 '곤고한 자'에게도 놀라운 위로가 되며 크나큰 격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자기 인생 최악의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안심하라. 왜냐하면 이제 그보다 더 나쁜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니까.'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보다 한 수 더 높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고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인생 최악의 환난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그럴수록 '간절한 기도'와 '경외의 신앙'과 '구원의 확신'을 통해 '여호와의 선하심'을 더욱 맛있게 체험함으로써 그 '광대하신 절대주권자의 이름'을 더욱 자랑하고 높이면서 송축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체험의 비밀
(시 34:1-22)
찬송 441장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 가드 아기스 왕에게로 갔다가 크게 의심 당하고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되자 미친 체하면서 위기에서 탈출에 성공한 후 생생한 감격이 흐르고 있는 찬양시입니다.
얼마나 긴박했으면 침을 흘리며 미친 체 했을까요?
적의 소굴에 들어가 영락없이 죽게 되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1절에서 여호와를 항상 찬송하고 또 여호와를 자랑하고 그 이름을 높이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8절 이하에 그 감격과 깨달음이얼마나 컸든지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그의 교훈 역시 더욱 적극적이고 확신에 찬 모습입니다.
체험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원수에게 구원 받은 체험도 이토록 감격스러운데 성령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체험하며 산다면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우리 믿음이 달라지고 우리의 전도가 달라지고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 잘 섬김으로 이런 감격적인 삶이 계속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여호와의 선하심을 경험하라
성경본문 : 시 34: 1-22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시69:32
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벧전2:3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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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 여호와의 선하심을 경험하라(34:1-22)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4절)
시편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을 체험한 고백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특별히 시편34편은 다윗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34편의 역사적 배경은 사무엘상 21:10~15 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서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하였습니다. 그때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이 장수 골리앗을 죽인 일을 기억하고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진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은 갑자기 위급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침을 흘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다윗이 미친 것으로 생각하고 쫓아내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 때 다윗과 같은 문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문제를 놓고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주를 앙망하는 자입니다,
즉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빛나게 하시고 그의 얼굴을 부끄럽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특징은 기도입니다. 안타깝게 부르짖는 한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라합의 소망을 외면하지 아니하셨고, 소경 바디매오의 간절한 절규를 들으셨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많은 죄 중에서 입과 관련된 부분을 본문에 지적하고 있습니다(13-14절).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먼저 입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말, 미워하는 말, 부정적인 말, 거짓말 등을 버리고 정직하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도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7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마치 한 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선 그에 합당한 행동이 입술에서부터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믿음의 표현은 기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내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다윗이 경험한 것처럼 여호와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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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합심기도
6.25사변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미군 소대장이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괜찮다면 지금 정찰하러 나가지 않겠나?"
그 병사는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소대장은 그 병사가 겁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6시쯤 되어서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소대장님, 지금 정찰하러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아해진 소대장은 아끼는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지금은 나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가 대답하기를 "소대장님, 바로 이 시간이 어머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도로써 지원하는 형제, 자매들로 인해 위기 속에서도 담대히 나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그 위대한 사역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그런 비밀은 없습니다. 있다면 일만 오천 명의 성도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성도들의 승리는 자기의 능력이나 지혜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뒤에서 기도해준 사람들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목회자의 승리는 교회 교인들의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된 기도의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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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다윗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간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34:1-7)?
2. ‘여호와의 사자’란 의미는 무엇입니까(34:7)?
3. 인간사에 생생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내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34:15-18)?
4.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일에 대해 자신있게 간증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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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살게 하옵소서.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름다운 봄을 주셔서 강한 생동감을 느끼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선하심과 아름다움 안에서 만물이 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한한 우주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가득해
만물이 그 은혜를 누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범죄하였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끊겨 버려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지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주님을 믿으며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며
그 은혜로 우리는 영생을 얻으며
그 은혜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갑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는 주님앞에 죄인이요 무익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덮어주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우리에게 내버려 두지 마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며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키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만들며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인도하며
주님의 은혜가 항상 우리안에 충만하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이룬 결과와 열매들이
주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과 경배가 되게 하시고
주님에 대한 헌신과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옮겨 쓴 기도문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