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다섯 번째 방문기를 쓴다.
세월은 빠르다.
작년 9월, 록시를 처음 방문하고 벅찬 감흥에 어쩔 줄 몰랐었는데, 이제는 제법 관록이 붙었다.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르면서, 차분하게 님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히 어느 누구도 님의 공연 앞에서는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그분은 자신의 고객을 철저하게 ‘압도’하고 만다는 사실은 이전에도 여러 번 느낀 바 있다.
그 분의 음악을 듣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利己(에고)’의 나는 없고, 광대무변한 그 분의 음악의 바다에 부유하는 가랑잎 한 잎처럼 ‘왜소해진 내가’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의 상태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분의 일거수일투족에 의해 결정되고, 높이 들려졌다가 내려졌다가를 반복한다.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이 눈을 크게 뜨는가 실눈웃음을 웃는가, 담배가게 아가씨를 부를 때 ‘우루루루르...까꿍!’이라고 애드립을 넣는가 넣지 않는가, 기타를 연주할 때 왼발을 얼마나 심하게 떠는가, 박자를 원곡보다 늘여빼어 천천히 부르는가 정확히 지켜부르는가, 심지어 내 쪽을 바라보며 웃어주는가 눈길이 그냥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가 등등...
사소한 몸놀림 하나하나가 모두 관중들의 ‘상태’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그래서 관중들은 그 하나하나에 따라서 감상에 젖다가, 흥겨워하다가, 빗소리를 듣다가, 열기에 빠지다가 마침내는 전율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제도 하릴 없이, 환상 속에서 그렇게 한참을 떠다니다가 공연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퍼뜩 정신이 들어, 적어도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지, 하고 귀가길 자동차 악셀에 힘을 가했던 것이다.
요즘 정말 불경기다.
사방에서 아엠에프 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말들을 한다. 이 쪽 저 쪽에서 크고 작은 기업들이 쓰러지고, ‘힘들어 죽겠다’는 업체들의 말이 엄살로 들리지 않는다. 직장인들도 회사에 더욱 충실해야하고 마음의 여유를 잃는 것 같다. 창식사랑 분들도 록시에 가는 여유를 느끼고 싶겠지만, 많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십원님은 영업차 간 춘천에서 부지런히 일을 마치려 했으나 늦엊고, 서비님은 직장상사의 송별식장에 있어야했고, 맑은공기님은 고객과 함께 간 인천현장에서 전화를 주셨다.
‘와우님, 저 못갈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천만에, 죄송하긴요. 아무렴, 생업이 우선인데...
봄비, 마이꼴, 호걸님도 얼마나 오고 싶으셨을까.
코엑스 우체국 앞에서 장혜경님과 인자님을 만났다.
다들 바쁜 일일업무를 마치고, 허위허위 달려오셨다.
함께 분식으로 배를 채우고, 미사리로 향했다.
[연주 시작 직전]
다른 사람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님의 앞 순서는 어느 여성가수의 차례다.
미안하지만 노래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굳이 차별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데...
노래시작하기 전에 안면이 있는 종업원과 얘기를 나누었다.
‘여기 사장님이 누구에요?’
‘아까 그 분요. 안경 쓰고 자그마한 여자분, 그분이 사장님이세요.’
‘남자 사장님은요?’
‘잘 안나오세요. 거의 안와요.’
우리가 왔을 때 입구에서 다정하게 웃어주던 앳되어보이던 여성이 40이 넘은 사장님이라고 한다. 참, 임정수군이 손을 다쳐서 당분간 기타를 칠 수 없다고 한다. 저런... 우리는 이미 임정수군과 흠뻑 정이 들었는데, 보지 못한다니... 너무 안타깝다.
그는 항상 허름한 쉐타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인가 조금은 야시꾸리(?)한 셔츠에 마이(?)를 빼입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이렇게 정이 들고, 순진하고 착한 그가 없다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창식님의 반주는 어쩐단 말인가...
그 화려한 기타연주가 빠진 님의 노래는 이미 상상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드디어 시간이 10시에 이르러, 애써서 흥을 유도하려 고생하던 길은정씨 순서가 끝나고
가수대기실로 창식님이 들어가신다.
여전한 개량한복의 풍채는 넉넉하고, 역시 여유 있는 웃음...
인자님이 얘기했다.
‘의상 죽인다.’
장혜경님이 받는다.
‘원래 저렇게 쪘어요? 살 좀 빼라고 해주세요.’
우리가 유쾌하게 웃는 사이 걷혀져있던 유리천정의 검고 투박한 커튼이 스르르 닫힌다.
추측컨대, 창식님의 우렁우렁한 성량의 반향과 반사음을 막기 위해서, 흡음판 역할을 하도록 그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는 창식님을 오늘 처음 뵙는다는 장혜경님이 안절부절이다.
‘급해서 그냥 왔는데, 꽃다발을 사가지고 왔어야하는데...’
마음씀씀이가 곱다.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송...창...식... 얼마나 그리워하고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던 우리들의 우상이 아니던가?
[1. 한번쯤]
10시 6분... 시작이 조금 늦었다.
이 곡은 무조건적으로 레퍼토리의 첫 곡이라고 보면 된다.
첫곡임에도 불구하고 목이 상당히 풀려있다.
아마 다른 일로라도 목을 좀 쓰셨나보다.
이 때 휴대전화기가 울린다.
‘저, 연광현인데요.’
‘아, 예. 반갑습니다. 지금 어디세요?’
‘록시 입구에 있습니다.’
록시로 직접 오시겠다던 연광현님이 약속대로 나타나셨다.
공연시작 조금 전에 개량한복을 입은 남자 일행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참, 인상이 좋구나... 생각했었는데, 바로 연광현씨 일행이었던 것이다.
무대위의 창식님과 제일 잘 어울릴 것 같다.
부인과 친구분들까지 동원해서 나들이를 하셨단다. 합석하지는 않았지만 참 반가웠다.
[2. 한걸음만]
임정수군이 없으니 허전하다. 그럴싸해서 그러한지 창식님 혼자만의 기타 연주는 외로워 보인다. 윤기가 없다. 화려함이 없이 좀 드라이하게 들린다.
‘이상해’와 ‘사랑하는 마음’을 중간 중간에 섞어 메들리로 부르신다. 천의무봉... 이음매가 없다. 계획된 곡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박자와 리듬이 연결되는 곡을 부르신 것 같은데도.
아마 30분 제한된 시간 내에 소화할 수 있는 곡이 통상 9곡 내지 11곡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에게 한 곡이라도 더 들려드리려는 배려 같다.
[3. 우리는]
‘무슨 노래를 할까요?’
‘음... 신청곡이 많군요. 우리는 하겠습니다.’
............
“이러케... 이러케.....”
목이 완전히 풀리신 듯 목청껏 소리를 내 지르신다.
눈을 지긋이 감고 여운을 음미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윗쪽 앞이 사이가 상당히 넓은데, 좀 메꿔드린다면 괜찮으실까?
지금보다 표정이 좀 단정(단단)해 보일텐데. 인간미가 좀 없어보이려나?
발성에는 변화가 없을까?
[4. 왜불러]
‘우리는’에서 윤기가 흐르던 목소리가 이제 본격적으로 흐드러지게 울려퍼진다.
온 실내가 님의 목소리로 가득 차 긴장감마저 드는 분위기다.
님의 목소리는 아직 풀어지지 않고 공중을 떠다닌다.
천정을 천으로 덮은 이유가 명백해진다.
장혜경님이 어쩔 줄 몰라한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거의 환호성을 지르기 일보직전이다.
보는 내가 불안해진다. 이런 말도 한다.
‘우리 전부 기립박수 해야 하는 것 아녜요?’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참고로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지막 곡이 끝나자 혼자서 기립박수를 쳤었다.
[5. 그대 있음에]
옆 테이블에는 30 후반가량의 세련된 부인들 10여명이 연주를 경청하고 있다.
보기에 예쁘다.
동창생 사이인 듯, 이런 자리에서 모임을 갖는 것은 좋아보인다.
요란하지도 않고...
[6. 새는]
참 오랜만에 듣는 곡이다.
76년,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교정에서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친구의 십팔번이었던 곡.
날아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날아가는 새.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를 하는 새.
당시 나도 그랬었던 것은 아닐까.
깊은 성찰도 없이, 남들이 장에 가니 꼴망태 메고 따라나선다고, 어쭙잖은 돌팔매질을 핑계로 소중한 많은 것들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을까...
[7. 축결혼]
‘축 김은미 황훈 결혼 20주년’
무대 스크린에 축하문구가 떴다.
남편의 깜짝 이벤트일까?
힘껏 박수를 쳐 축하해주었다.
나도 3년 후에 이 곳으로 와야 할까를 잠깐 생각했다.
‘무슨 노래 해드릴까요? 결혼 축하곡은 다 했는데. 저는 결혼 축하곡으로는 ‘우리는’, ‘사랑이야’와 ‘축 결혼’을 부릅니다. 참 많이 불렀지요.’
옆자리의 장혜경님이 외친다.
부끄러움 같은 것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축 결혼이요...’
[8. 꽃 보다 귀한 여인]
누가 신청했다.
‘저 한동안 이 노래 안 불렀습니다. 오늘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왜 안 부르셨을까?
슬퍼서?
사연이 있어서?
도중에 아까처럼 ‘딩동댕 지난 여름’을 순간적으로 끼워넣어 부른다.
얼핏들으면 다른 곡이 들어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매끄럽게 넘어간다.
그래, 애상조... 두곡 모두 슬픈 노래이니 잘 섞일 수밖에...
사실 창식님의 노래는 80퍼센트는 슬프다고 생각된다.
언제 날을 잡아 분류를 해봐야지.
흥겨운 노래, 슬픈 노래, 덜 흥겨운 노래, 덜 슬픈 노래, 많이 흥겨운 노래, 많이 슬픈 노래...
[9. 고래사냥]
‘마지막으로 고래사냥을 부르겠습니다.
제 다음에도 실력있는 훌륭한 후배가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가지 말고, 좋은 음악들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님의 노래가 끝나면 자리를 일어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처럼 들린다.
‘예, 압니다. 도롯도도 락도, 자기 곡도 외국곡도, 남자가수도 여자가수도 다 나름대로의 장점들이 있지요. 얼마든지 그 분들도 훌륭한 것을 인정합니다만, 우리의 너무 부족한 시간을 투자해가면서까지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솔직한 심정이다.
‘밤새도록 해요.’
장혜경님은 아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러나 어쩌랴, 다음 스테이지가 또 이어져야 할 것이고, 님도 몸을 쉬셔야 하는 것을
빠른 비트의 업앤다운이 계속되며 커다란 목소리에 기타소리까지 가세하여 온 홀을 가득 메운다.
저 기타는 이상하다. 옛날의 통기타는 아니고, 그렇다고 소위 말하던 일렉기타와도 다르고...
어쿠스틱? 일렉트릭? 아니면 퓨젼?
임정수군이 없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창식님이 너무 정수군의 기타에 의존도가 커지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1) 창식님의 기타연주 솜씨가 줄어든다.
(2) 임정수군을 반주자로 영원히 데리고 살 수는 없다.
(3) 자유자재의 애드립이 제한받을 수 있다.
(4) 연주(반주)의 비중이 과도하게 커진다. 등등...
어쨌거나 오늘의 록시방문은 이렇게 끝났다.
다수의 창식사랑 회원들이 참여하지 못하여 아쉽기는 했지만, 대수랴...
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참가자의 수에 의해 좌우될 것은 아닐진대.
첫댓글 회의중 휴식시간에 잠시 들렀습니다. 고생하셨고 좋은 후기를 써 주셔서 비록 가지는 못했으나 마치 다녀온듯한 느낌을 주어서 감사드립니다.다음번 정모에는 꼭 만납시다.개인적으로 산본에서 한번 뭉칩시다.제가 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