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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6세기부터 15세기까지를 중세라 하며, 성가(찬트)의 발전과 다성 음악의 시작, 세속음악의 출현 등이 이 시대 음악의 특징이다.
중세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던 크리스트교 음악은 '그레고리오 성가'가 대표적이며, 이러한 성가는 10세기까지 발전했고, 11세기에는 다성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양식은 후에, 노트르담 악파나 아르스 노바 음악으로 이어졌다.
또한, 십자군의 원정 등으로 나라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성가 이외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인 일반 세속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귀도 다레초는 악보와 계명 창법을 고안하여 음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배경
서유럽의 음악 역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음악이 대부분 첫 부분을 차지한다. 종교음악은 예배의 전례에 꼭 필요했고 교의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뜻을 지녔으므로 교회의 본질에 관련되는 문제였다. 음악은 매일 예배의 일부였고 철학자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교육체계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곧 모든 계층의 성직자들에게 있어 기초적인 지식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전례의 기본적 구조는 유태교 예배 진행 방식, 그것도 주로 시나고그(유태교회당)의 관습에 기원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기본적으로 그 가르침과 목적의 새로운 부분에 맞게 옛 유태교 전례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고그의 집회에서 시편을 노래하고 성전을 읽는 것이었다. 시편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예배의 중요 부분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전의 관습과 관계없이 추가된 것이 성찬식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교의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며 매일의 전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배인 미사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의 주교가 교황의 지위에 오르자 예배들은 로마식 전례를 따르는 전체 교회에서 정규적인 것이 되었다.
하루의 예배를 구성하면
조과 (날 새기 전 무렵)
찬과 (해돋이, 오전 3시경)
제1시과 (오전 6시경)
제3시과 (오전 9시경)
미사 (오전 10시경, 때로 제6시과, 제9시과 뒤)
제6시과 (정오경)
제9시과 (오후3시경)
만과 (오후6시경)
종과 (해넘이, 만과의 바로 뒤)
이러한 하루의 예배를 충실히 지킨 것은 수도원 뿐이고 일반 신자를 위한 교구 교회는 보통 미사와 만과만, 때에 따라 미사만 거행했다. 미사는 전례의 중심으로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어느 예배에 있어서도 시편창이 기본이며 중심이었다. 의식의 뜻뿐만 아니라 쓰이는 음악에 있어서도 미사가 가장 공들여지고 화려하다. 중세 교육제도에 있어 음악은 산수, 기하, 천문학과 함께 '제4학과'로 알려져 있는 학과의 하나이며 수리과학의 일부였다. 음악은 철학적인 넓이를 포함한 뜻을 갖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성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하나님에게 말씀을 올리기 위한 가장 적합한 '말'로써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음악의 전통성은 신앙의 전통성과 같은 정도로 교회 안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 음악
그 기반은 그레고리오 성가로도 불리는 단선율의 성가다. 미사는 7세기 무렵에 정식의 형식이 정해졌다. '쉬나크시스'(초학자들의 미사)라는 전반과 '유카리스트'(성찬)이라는 후반으로 이루어진다.
쉬나크시스
인트로이투스 (인제창) **
키리에(연민의 찬가) *
글로리아(영광의 찬가) *
콜렉타(집도문)
에피스톨라(서간)
그라두알레(승계창) **
알렐루야(알렐루야창) ** -부활절 전의 40일간인 4순절, 4계대재일 및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때는 알렐루야 대신 트라크투스(영창)를 부름
에반겔리움(복음서 낭독)
크레도(신앙고백) *
오페르토리움(봉헌창) **
세크레타(밀송)
유카리스트
프레파티오(서송)
상크투스(감사의 찬가) *
카논 *
아누스 데이(평화의 찬가) *
코무니오(성체 배령창) **
포스트 코무니오(성체 배령 후의 기도)
이테 미사 에스트(종제창) * -글로리아가 제외되는 계절, 즉 대강림적과 7순절에서부터 부활절까지 사이에는 베네디카무스 도미노(주님을 찬송하리로다)가 불림
* 통상문: 가사가 언제나 같고 바뀜이 없다. 이것들의 부분은 가사를 알 수 없어 별 중요시되지 않았으나 14세기 이후 중요하게 되었다. 통상문의 부분은 회중과 성직자(식을 거행하는)에 의해 불려졌으므로 단순했다. 성가 가사는 성경에서 따온 것이 아니므로 특정 축제일과는 관계 없다.
**고유문: 성경(주로 시편)에서 가사를 따오고 특정 축제일 예배와 결합되어 있다. 주로 전문적인 가수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어떤 축제일의 중요성이 클수록 그 제일의 고유문은 독자성이 커진다.
미사에 있어 성가대는 종속적이었고 중심인 사제의 동작을 반주하는 것이었다. 즉, 예술이 아닌 일부분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예배 구조의 발전과 정형화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고 그 전례와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레오1세와 그레고리우스1세, 두 교황이 했다.
단선율 성가가 그레고리오 성가로도 불리우는 것은 그레고리우스의 업적으로 교회 전체 속에서 예배와 음악의 통일화라는 방향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단선율 성가의 특질은 즉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얼마만큼 음악적 수완이 발휘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강조함이다.
단선성가의 특징
플레인송, 플레인찬트, 그레고리안 찬트 등의 명칭으로 불리워지며 근 100년간에 걸쳐 서구문화의 중심이 되고 기초가 된 음악이었다. 그리스도교 음악으로서의 이 단선성가는 가장 대규모의 것이었으며 가장 오래된 단독 음악 형태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종교음악의 다성음악 스타일의 중심적 근간이었다는 사실에서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다.
① 모노포니이다.
② 교회선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③ 보통 아 카펠라로 노래한다.
④ 박자표나 마디줄을 사용하지 않는 형태를 쓴다.
⑤ 자유로우며 유연성 있는 산문의 리듬을 쓴다. 도약진행은 아주 드물고 거의가 순차진행 형태이다.
⑥ 음역이 제한되어 있다.
⑦ 라틴어로 부른다.
⑧ 독특한 네우마 기보법으로 되어 있다.
전례의 개략이 정해진 후 낡은 것에 새로운 것을 덧붙이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가장 빠른 것이 임누스(찬가)이다. 본래 유행가의 선율에 가사를 신앙적인 것으로 바꾸어 생긴 성가인데 여기에 시인이 새로운 가사를 붙이고 음악가가 새로운 선율을 만들었다. 그 후 미사에서 쓰이지 않았지만 성무일과의 많은 부분에 채택되었다. 그러면서 유행가로서의 소박, 단순함을 잃고 다른 일반 성가선율과 별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기존 선율에 새로운 말이나 선율을 덧붙이는 수법을 트로푸스라 한다. 이 현상은 다른 성가에도 비슷한 현상을 일으켰는데 중요한 예가 '할렐루야' 이다. 할렐루야에 새로운 가사, 선율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성가는 세퀜티아(시퀀스:속창)로 불렸고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현재도 위령미사곡(레퀴엠)속에 포함된 디에스 이레(분노의 날)인데 이 선율은 베를리오즈, 리스트, 라흐마니노프에 머물지 않고 그 밖에 수많은 나중 시대 작곡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 전례에 덧붙여진 것이 전례극이다. 특정 축제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경 속의 한 장면을 연극으로 상연하는 것인데 한 동안 번창하다 14세기 사회의 세속화에 따라 시들어졌다.
세속의 단성음악
세속음악이 기보된 형태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은 세속적 일반 기술이 종교계의 기보 기술 수준에 따라간 다음이다. 중세 시초무렵 성직자가 쓴 세속적 라틴어 시가 있는데 대부분 고대 로마의 황금시대에 저술한 시를 본보기로 한다. 그 가운데 노래하기를 목적으로 한 대중적인 시도 있는데 '운'이 점차 중요한 요소로 소개되고 있으며 고전 라틴어의 특징인 옛날의 장단에 의한 악센트에서 버젓이 쓰이게 된 유럽 각자의 본국말이 갖는 강약에 의한 악센트로의 이행은 그러한 변화의 표시이다. 세속 노래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골리아르두스(유력 서생, 유랑시인)이란 불리는 시인 겸 작곡가들의 작품인데 그들은 12세기에 생겨난 대학이라는 세계의 일익을 담당하던 사람들이다. 대학의 학생들은 어떤 종류든 성직을 차지하고 있어야 했으며 당시의 전형적 학생의 생활은 도시에서 도시로 방랑하며 어디건 가는 곳곳의 대학을 다닌다고 하는 말하자면 보히미안적 존재들이다. 이들 작품의 다수는 카르미나 부라나라는 사본에 수록되어 있다. 연예의 서정가나 술 마실 때의 음란한 노래 따위도 포함되어 있다. 그 가사의 다수는 종교적인 것을 익살스럽게 풍자하고 세속적인 뜻을 억지로 갖다 붙여서 그 본이 되었던 성가와 별 관련이 없다. 종교상의 체제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시, 음악을 만드는 일에 최초로 관심을 돌린 지역은 프로방스어 또는 랑그 도크(오크어)로 불리던 말을 쓰던 남프랑스 사람들이였다. 특히 11세기 중엽 아키덴 지방의 주요도시인 프와티에 거리에는 가사나 음악이 모두 세속사회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세속가곡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싸움터에서의 용맹의 명성 따위로 귀부인의 마음을 잡을 수 없게 된 남프랑스의 궁정기사들은 대신 시인이며 음악가인 트루바두르로 명성을 올렸다. 그를 작품의 주요 소재는 여러가지 형태의 연예, 특히 자기가 연모를 맹세한 귀부인에 대한 것이다. 북프랑스는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와 접촉을 통해 일찌기 이들의 예술을 모방하여 시초에는 프로방스어 가사를 북프랑스 방언인 랑그 도일로 번역했지만 그후 독자적 작품을 쓰게 되었다. 이들은 트루베르(트루바두르의 북프랑스 방언역)로 불렸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의 작품 연주는 그들이 하인으로 고용하던 종글뢰르 또는 메네스트리에라는 직업적인 음악가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종글뢰르의 공연 순서 중 중요한 것이 과거의 위대한 영웅들의 무용을 노래한 서사시인 '샹송 드 제스트'였고 그 중 롤랑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이 프랑스의 새로운 세속음악은 급속히 인근 나라들로 퍼져 나갔다. 그 중 독일에 가장 많은 작품이 남아 있으며 14세기까지 미네젱거들에 의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전통은 중산계급 사이에 퍼져 마이스터징거라는 사람들의 단체가 많이 결성되었다.
단선율 성가와 마찬가지로 이 가곡들의 실제 연주방식은 잘 모르며 기보법도 성가의 것과 비슷하다. 이후 폴리포니에 대한 음악가들의 관심으로 세속 단성음악의 번창은 짧았다. 이 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위대한 아마추어 음악가는 14세기에 활약한 기욤 드 마쇼이며 그 재능은 폴리포니에도 미쳤다.
세속가곡의 특징
① 단선성가와 마찬가지로 모노포니의 형식을 취한다.
② 단선성가와는 달리 명료한 박자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3박자로 되어 있다.
③ 단선성가보다 더욱 명료하고 보다 정형의 리듬으로 되어 있으며 짧은 리듬 패턴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④ 보통 교회선법을 바탕으로 한다.
⑤ 단선성가가 라틴어로 불린 반면 세속가곡은 거의 모든 경우에 각 나라의 국어로 불려졌다.
⑥ 보다 넓은 범위의 제재를 택해 불렀다.
폴리포니의 시작
7세기 또는 8세기까지는 어떤 선율에 포함된 음의 하나하나에 다른 음을 즉흥적으로 붙여서 폴리포니를 만들어 내는 습관이 멀리 퍼져 있었다. 폴리포니의 도입은 각 축제일의 중요도를 분명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였다. 즉흥적이지만 멋대로 붙일 수 없었던 것은 근본이 되는 성가의 선율은 그대로 두고 음정 차이가 초기에 완전4도나 완전5도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 자체의 미보다 관념적인 이론이 지배적이었다.
'무지카 엔키리아데스(음악요강)'에는 가장 오래된 다성 악곡의 실지 예가 나온다. 여기에는 기존 성가 선율 밑에 완전 4, 5도 간격으로 새로운 선율을 덧붙이는 일이 허용되며 이들 두 선율은 1옥타브 위에서 중복하여 노래할 수 있었다. 짝 선율의 성부를 오르가눔 성부, 본래 성가의 성부를 주성부라 하는데 이렇게 음정간격이 일정한 오르가눔(초기의 폴리포니)을 평행(엄격)오르가눔이라 한다. 자유 오르가눔도 설명되어 있는데 두 성부의 최초와 최후의 음을 유니즌으로 부르지만 도중에 몇몇 음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정 선택의 폭이 적어 엄격 오르가눔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 뒤 이러한 규칙이 점점 완화되어 1세기 후에는 평진행이 아닌 주성부와 오르가눔 성부가 가능한 반진행으로 움직여야 하며 두 선율의 대비감의 필요성이 주장되었다. 그리고 두 성부가 교차되고 주성부가 아래 성부로 되는 것도 허용하였다.
오르가눔
평행 오르가눔
자유 오르가눔
멜리스마적 오르가눔
노트르담 악파
대학에서의 음악은 학생교육의 일부로서 지금까지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론 뿐 아니라 실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성당 부속의 성가대 학교의 충실을 도모하고 대학과의 합병을 진행시켰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은 노트르담 성당에 한정되지 않고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다른 교회에도 파급되었다. 이른바 노트르담 악파로 총괄되는 많은 음악상의 새로운 움직임은 실제로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전체의 많은 교회에도 관련이 있었다. 이 악파가 서양음악사 상의 의의를 갖는다면 리듬을 기보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 이전 자료에는 기보법에 운율이 실제 어떤 모양으로 사용되었는지 찾을 수 없다. 이 기보체계는 시의 운율에 준한 장음과 단음 6종류의 짝짓기로 이루어지며 단음의 길이를 1, 그 2 내지 3의 길이를 하나의 단위로 삼고 있는데 이 3이라는 수는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완전성을 나타낸다는 신학상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모테트는 상당히 이른 단계에서 세속화되어 갔는데 13세기가 끝나기 전 교회와의 결합이 더욱 약해지고 궁정 등 세속장소에서의 연주가 빈번해졌다. 새로운 청중의 즐거움을 위해 세속적 가사나 선율이 모테트 작곡에 이용되었다. 마침내 테노르를 성가에서 따오는 일을 그만둠으로써 교회와의 유대는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세속악곡의 형식 (론도, 비를레)까지 사용하였다. 교회의 세속화를 폭로하는 반체제적 가사도 나타난다.
폴리포니의 근본은 교회내부에서 새로이 일어난 움직임이며 세속사회의 신도에게 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다. 13세기 초기는 서양음악사의 하나의 정점이 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음악가들은 성직자나 신학자와 공통된 사상 체계 위에서 양쪽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자기 일을 해나갔다. 그러나 후기에는 이러한 연대감은 상실되고 음악가는 자신의 예술의 기교적 가능성 추구에 열중하게 된다. 음악의 독주에 대한 불만과 교회의 작곡가가 전례 속의 역할 범위를 넘는 일에 대한 심한 비난이 있었다. 음악상의 새로운 착상에 철학적 권위를 뒷받침할 필요가 없어져 7개 자유학과에 포함되는 4학과의 하나로서의 중요한 지위가 점차 낮아졌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위였던 기구의 음악, 즉 실제의 음악이 가장 중요시되면서 인간계, 우주의 음악도 철학자의 손에 남게 되었다. 새로운 발전은 실기면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음악가 자신들의 자유재량에 맡겨졌다. 이러한 과정이 나타났던 시기를 아르스 안티콰라고도 한다.
프랑스의 14세기 음악
13세기 말은 혼미 시대의 시작이다. 아비뇽 유수, 교회의 분열, 교황권 쇠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 페스트, 많은 농민 반란과 같은 사회혼란 속에서 교회에서 일하는 음악가들은 성직자로서의 본분과 전례의 직무에 등을 돌리고 세속 사회로 눈을 돌린다. 14세기 실제 음악상의 변화는 필립 드 비트리의 아르스 노바라는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아르스 노바라는 명칭은 13세기에는 없었던 새로운 예술의 개화이며 14세기 전 시대의 호칭으로 쓰인다. 이 논문은 기구의 음악에 중점을 둔 실용적 논문이며 중요한 점은 현대 표현 방식으로 말할 때 2박자와 3박자를 동등하게 다루기로 정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아이소리듬(같은 리듬)이라는 새로운 구성원리가 도입되어 있는데 이 수법은 음열, 강약, 리듬, 음색이라고 하는 요소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쓰는 현대의 음열에 의한 작곡법과 매우 비슷하다.
아이소리듬 모테트가 당시 음악에 있어 예술적 표현 수단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한편 미사 통상문을 이용한 다성악곡이라는 순전한 종교적 분야가 새로이 탐구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트로푸스가 붙은 몇몇 통상문이 작곡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주요 관심은 고유문이었다. 그런데 14세기 전반에는 트로푸스가 붙지 않은 보통 통상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글로리아나 크레도도 다성악곡으로 작곡되었다.
기욤 드 마쇼는 프랑스에 있어서 아르스 노바의 주도적인 작곡가로서 그가 작곡한 모테트는 23곡, 그 중 종교적인 것은 2곡인데 이것은 그의 세속 작품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 레, 롱도, 비를레, 발라드와 같은 당시 유행의 세속음악의 모든 형식을 써서 작곡했는데 그 중 레, 비를레의 대부분은 모노포니이며 오랜 트루베르의 전통이 깔려 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노트르담 미사곡인데 한 작곡가가 미사 통상문 전체를 통괄해 작곡한 예는 이것 외에 없고 서양 음악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작품 : 포벨 이야기-Roman de Fauvel, 투르네의 미사-Messe de Tournai
그런데 14세기 말이 가까워지면서 처음에는 발전이었던 새로운 움직임이 보다 복잡한 리듬을 악보 위에서 추구하는 일에 열중해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너무 외면적이고 말초적인 부분만이 음악에 계승되어 거의 전부가 세속작품이 되고, 가사도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성가대원의 명부를 가사로 한 아이소리듬 모테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표들, 별의별 색깔을 가진 음표들, 별로 뜻이 없는 기교를 위한 기교는 14세기 말의 프랑스 음악의 한 특징이며 결과는 15세기 초두에서의 완전한 쇠퇴였다. 프랑스는 서양 음악의 선도자로서의 자리를 놓치고 16세기 시초까지 그 힘을 되찾지 못한채 부르고뉴 공국과 그 지배하의 나라들에 주도권을 내주었다.
중요 형식
① 아이소리듬 모테트 : 13세기의 모테트에서 발전해온 14세기의 가장 중요한 선율 형식이다. 이 형식에 있어서는 테너 성부에 단선성가가 탈레아라고 하는 보다 길고 변화가 풍부한 음형 패턴으로 사용되었다.
② 발라드 : 여러개의 연(stanza)으로 구성되며 각 연은 AAB로 된 부분 공식에 따른 동일한 음악을 붙인 형으로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가장 높은 성부에 선율적 및 리듬적 중요성이 나타난 3성부로 된 작품이었다.
③ 론도 : 원래 론도는 트루베르라고 하는 모노포니 가곡 형식에서 나왔고 ABaAabAB의 공식에 따른 것이었다. 이 경우 몇번이라도 되풀이되는 반복부인 A는 동일한 가사와 음악을 갖는 부분이었다. 론도는 2성부, 3성부, 4성부로 된 형식으로 작곡될 때도 있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독창 성부와 보다 느린 움직임의 리듬에 다른 악기를 위한 두 개의 낮은 성부를 갖는 악곡이었다.
④ 비를레 : 14세기에 있어서는 샹송 발라데라고도 했다. 이 형식은 론도와 같이 트루베르에 따른 모노포니 형식에서 나왔고 시의 각 연에 근거를 둔 AbbaA라는 부분 구성에 따르고 있었다. 대부분 모노포니였지만 폴리포니로 작곡된 작품도 많이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14세기 음악
14세기에 쓰인 논문에 의하면 당시 음악 교육에서 폴리포니의 중요성이 강조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즉흥성을 존중하는 이탈리아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의 일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 다성악곡에 압도적으로 세속작품이 많고 전례용 종교음악은 별로 없다. 실제 이탈리아 폴리포니 발전은 볼로냐를 중심으로 시작하였는데 이 도시에서는 정량 기보법을 써서 이탈리아 시에 작곡하는 일이 퍼져 있었다.
중요 형식
① 마드리갈 : 보통 2성부로 이루어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폴리포닉한 가곡 형식. 이 형식에서는 2박자의 각 연이, 다음에 3박자의 리토르넬로를 붙여 끝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② 카치아 : 2성부나 그 이상의 성부 사이에서 행해지는 계속적이 모방에 바탕을 둔 카논의 원리를 처음으로 개발한 가곡 형식이었다. 보통 카논적인 리토르넬로 부분이 붙여져서 끝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③ 발라타 : 춤을 위한 노래로 나온 것이고 마드리갈이나 카치아보다는 조금 나중에 발전했다.
어느 시대건 이탈리아 음악은 선율선의 아름다움과 표현의 풍부함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어떤 때에도 가사와 음악의 관계는 밀접하고 두 요소를 짜맞추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직관적인 예민한 감수성을 나타냈다. 즉 프랑스인들의 복잡한 리듬은 이탈리아인에게는 맞지 않다. 14세기는 이탈리아 음악에 있어 영광에 가득찬 시대였지만 세기말에는 음악가들의 취향이 프랑스식으로 기울어져 결국 이탈리아식 기보법은 쇠퇴해 버렸다.
그 밖의 유럽제국의 14세기 음악
잉글랜드의 존 던스타블은 미사 통상문이 각 부분 사이의 음악적 통일을 도모하였으며 프랑스의 아르스 노바 이래의 날카로운 불협화음을 완화시켰다. 따라서 이전 작곡가의 작품과 다르게 온화하게 들려온다. 던스타블 음악 이후 음의 울림의 쾌감과 만족감이 당연히 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음악의 표면에 나타나 선율의 대위법적인 서로의 얽힘과 동등한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중세음악은 던스타블의 등장과 함께 종국을 맞게 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 구체화된 새로운 개념들이 다른 여러나라의 작곡가들을 자극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도 모습을 감추고 그 후의 서양음악의 발전은 프랑코 플랑드르 (부르고뉴 악파와 플랑드르 악파를 포함)악파의 작곡가들 손에 맡겨진다. 즉 기욤 뒤파이의 등장과 함께 르네상스의 막이 열린다.
이탈리아의 15세기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유능한 음악가를 구하려는 많은 후원자들의 경쟁이 있었다. 교황청은 높은 음악교육을 받은 이탈리아 음악가보다도 북방의 음악가들을 끌여들였고 초청받는 쪽도 순순했다. 그래서 프랑스, 플랑드르의 음악가들이 가진 고도의 표준은 이탈리아 음악가들에게 힘과 활기를 주었다.
영국의 15세기 음악
영국의 15세기는 혼란과 분열의 시대였다. 거의 모든 작품이 작자 미상이며 따라서 영국악파의 음악적 자료는 동시대의 다른 나라의 자료에 비해 훨씬 양도 적고 단편적인데 16세기 종교개혁 때 라틴어로 된 전례음악을 포함한 필사악보를 고의적으로 파기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15세기에 널리 사람들에게 보급되었던 형식으로 2성부로 된 캐럴이 있는데 대부분 작곡자를 모르며 가사는 라틴어, 영어 혹은 섞어 부르기도 한다. 전례와도 관계가 있지만 대부분 상류계층이나 궁정에서 노래를 불러 즐기기 위한 예술 음악으로서 최초의 정리된 레퍼토리이며 주제가 다양하다. 대부분 크리스마스 캐럴이지만 역사적 사건을 가사에 넣기도 한다.
던스타블의 작품을 독특한 것으로 만든 것은 감미로운 하모니와 복잡한 대위법과의 결합이다. 올드홀 필사악보 외에 15세기 영국에 기원을 둔 대규모이자 거의 완전한 형태의 필사악보라면 에저턴 필사본이 있는데 내용은 대부분 성주간과 부활제를 위한 교회음악이며 3성부 미사곡과 두개의 수난곡-마태수난곡과 누가수난곡으로 역사상 최초의 폴리포니에 의한 수난곡-을 포함한다. 이러한 작품의 높은 수준은 잃어버린 음악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말해 준다.
부르고뉴 악파
15세기 최대의 작곡가인 기욤 뒤파이에 대해서 다른 이들과 다르게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다. 뒤파이의 명성은 전 유럽에 걸쳐서 깊은 존경을 모았다. 부르고뉴 악파의 성립에는 영국음악의 영향이 중요했는데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부르고뉴 악파의 양식은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발전되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뒤파이 시대의 관례로서 이후 약 180년 후 르네상스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습관으로서 어느 성부를 확실하게 어떤 악기로 연주하라고 명확하게 기록하는 일은 하지 않고 그 때마다 주어진 조건과 효과를 고려하여 지휘자, 지도자가 그 경우에 맞는 악기를 선택한다. 뒤파이의 기지는 풍부하게 매력 넘치는 프랑스의 샹송과 이탈리아 가곡, 장대하고 위엄이 가득한 미사곡, 변화에 뛰어나고 화려한 음의 향연으로서의 모테트와 축전곡 등 그의 음악은 생생하고 힘찬 박력으로 오늘의 청중마저도 매료시킨다.
같은 세대의 대표자로 질 뱅슈와가 있는데 종교곡과 세속곡에 많은 작품을 남기고 특히 프랑스의 가곡, 샹송에 훌륭한 작품이 많다.
스페인의 15세기 음악
음악 활동 사정이 이탈리아와 그리 다르지 않아 교회가 작곡가의 중요한 고용처이며 국왕의 궁정이 중요한 예술적 창조의 정점이었다. 스페인에는 15세기의 원숙기를 맞아 자랑할 만한 작곡가들이 있었는데 페르난도 페레스 데 메디나, 판 데 트리아나, 프란시스코 데 라 토레, 후안 데 안키에타 등이 있었다. 스페인은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본국 외에 나폴리 왕국이라는 중요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의 알폰소1세의 궁정에서 예술과 문화가 번영하여 자라고 있었다. 거기에 일익한 사람이 요하네스 코르나고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15세기 음악
독일-15세기를 통해 외국의 영향이 너무 커서 순수 독일 작품이라 부를 만한 것은 극히 소수이다. 독일 기원의 몇 안되는 세속곡과 잡다한 곡은 1445년 로하머 가곡집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의 작품에는 음악의 취미와 양식에 관하여 유럽을 남김없이 석권한 프랑코-플랑드르의 음악가들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보이나 국민적인 스타일의 새싹마저 보인다. 독일의 기악곡은 파우만과 같은 오르간 연주자의 작품이 주된 것이고 거기다 글라가우가집에 볼 수 있는 합주곡도 있다. 얼마 안되는 오르간 미사곡의 단편들은 매우 간결한 건반악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보통 움직임이 많은 오른손은 성부에 대하여 왼손의 성부가 성가의 선율을 연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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