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시와세계》작품상 수상작 및 심사평
눈사람 (외 4편)
이강하
님께서 아흔아홉 번째 눈을 뿌렸다
잠시 쉬었다 가라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라고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축하하며 손뼉 친 범고래들
어제도 고마웠다
마당과 화단 사이
하얀 새끼 부엉이 닮은 눈사람들, 눈이 부시다
밤새 잠꼬대가 심했을까
눈사람 하나가 목이 삐딱하다
범고래는 떠났는데 눈사람은 살이 붙었다
밤새 얼마나 탐닉했을까
눈의 골짜기를
바람 구름 고요의 섞임이 팽팽하다
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 속 사방도
오늘만큼은 샤갈의 그림이고 싶은 날
갈라진 흰빛 뒷면은 누구에나 거룩한 여백이 될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언제 사라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 몸에 스며들고 있는 서늘한 흰빛 무더기
이것이 화두다.
칸나의 해안
나는 꿈꾸는 사계
어린 아이들이 맨발로 저벅저벅 나를 밟으면
긴장이 풀리면서 붕 뜬 마음
네가 최초 걸음마를 배울 때
파도 사이로 지나가는 새끼 거북이가 된 것처럼
중심을 잃지 않게 아치를 바로잡아준 그때 그 스침이 번진다
큰 꿈이 작은 꿈을 통과하면
지우고 싶은 구멍과 상실감이 박살날까
호미 들고 뛰어온 사내아이가 갯벌 깊숙이 힘을 가하면
더 멀리 달아나는 것들
아직 상대도 스침이 두려운 것일까
그래, 아이야
그렇게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면 된다
다시 스치면 된다
매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라는 말
먼저 삶을 경험한 어른들의 소망일 테다
그러고 보니
끝없이 움직이는 수평선도
구름과 물소리를 빚어 신비한 빛이 된 저물녘도
나의 최초 조력자를 닮았다.
붉은 화첩
해 지는 저녁이 가면을 쓰고 꿈틀거린다
어둠 속 가면이 백기를 든 골목으로 사라지면
진실을 고백할 때다
해넘이 찰나가 해돋이 찰나를 이해하듯
바오바브나무는 성장기를 펼치며 혹한 시절의 나이를 꺼내서 매만진다
저녁이면 어떻고 새벽이면 어떤가
수백 년 뒤 작은 섬이 되면 어떻고 수백 년 뒤 모래알이면 어떤가
가슴 텅 빈 여기 깊숙한 숲에서 못생기고 뚱뚱한 동화를 쓰면 또 어떤가
서로가 통했다면 해지는 저녁이지
해 없는 동안만은 농한 기도로 고통을 덜어낼 것
해가 떠 있는 동안만은 일터에서
착한 공기로 틈과 뜸을 배우며 사랑하기
해 지는 광경은 고통이면서 기쁨이다
시공을 초월한 불사의 사다리가 길어지는 강가
바오바브나무 표정이 축축하다
바오바브나무야, 더는 자책하지 마
너는 너일 뿐, 해지는 저녁은 내 마음이야.
줄무늬 돌
줄무늬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팔색조 햇살 내리는 계곡
지팡이 짚고 걷는 그림자들, 청색 층이다
줄무늬 검정돌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이
세계적 교량 일곱이 널뛰기를 했다
전쟁으로 죽은 아이가 아른거린다면서
그래, 이젠 한마음이면 좋겠어
전쟁 없는 세계라면 좋겠어
줄무늬 돌이 나무에게 말을 거는 사이
줄무늬 셔츠를 입은 소녀가 내 앞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줄무늬 셔츠는 한때 내가 사랑한 친구가 즐겨 입은 옷이었지 함께 줄무늬 셔츠를 입고 봉사하러 가는 날에는 발걸음도 초록이었지 그런데 가끔 친구의 친구들과 축구를 했던 장소가 떠올라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통증이 올 때가 있어 어쩌다가 친구의 친구와 심하게 몸싸움을 했고, 서로의 사과는 사과를 해도 피투성이 사과나무로 남았지 이제야 고백하는데 그때 그 주변 화살나무는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지금 나라 밖 전쟁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줄무늬 돌들이 계속 운다
돌과 돌 사이
물소리는 누구의 기도일까
오래된 나무 이야기
구름을 피워낸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무 영혼이 빠져나가는 소리로 자라난 밑동의 가지
어린 가지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할까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는
또 어떤 마음으로
허공을 꿰매서 저녁의 이불을 만들까
저 나무는 전생에 누구였을까
구름이었을까
그래서 죽음이 가까워지면 운지버섯을 피워낸 것일까
진정 영혼의 소리를 남겨줄 나이라서
저리도 겹겹 아름다울까
가만히 벚나무 밑동을 매만지니
내 영혼의 소리도 구름 되어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다
신발은 무겁고 몸은 더 가볍게.
─ 제15회 <시와세계작품상> 수상작
[수상소감]기차 소리가 詩의 원천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차멀미가 더 심해졌다. 버스는 두렵고 기차가 그나마 괜찮다. 무엇보다도 기차는 언제든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안심이고 칸과 칸 사이 통로에서도 자유로운 창밖이 될 수 있으므로 편하다.
1993년 울산 남구 도심을 벗어나 작은 강을 끼고 있는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었다.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육아가 힘들고 경제적으로는 더 힘들었다. 그래서 직장 생활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나는 세 번의 수술을 경험했고 극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휴직 후 매일 기차 소리를 들으며 시를 썼다. 어느 날에는 멀어진 기차 소리가 기쁜 듯 슬픈 듯 축축하고 길게 딸려올 때도 있었다. 저기 상행선 기차가 아버지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기 하행선 기차를 타고 그리스나 먼 우주로 날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그 당시 매일매일 들리는 기차 소리가 긴 여운으로 남곤 했다. 그 여운이 내 시의 원천이었다.
작품상 소식을 전해 듣고 예전에 살던 동네가 생각났다. 그래서 기차가 오가던 땅(가로숲길)을 밟으며 오래 걸었다. 동천강 유채꽃밭 너머로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수상소식은 기뻤지만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과연 내가 이 상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매일매일 내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기후환경을 생각하고 앞으로 독자에게는 더 자주 좋은 시를 보여드려야 할 텐데, 내심 걱정이 앞섰다.
부족해서 부끄러움이 많아진 저에게 더 폭넓게 세상을 읽고 사랑하라고 주는 상이라 여기겠습니다. 더 겸허해지겠습니다. 저의 작품을 심사해 주신 심사위원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께도 깊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항상 어디에서나 내 편이 되어준 남편과 소중한 우리 가족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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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하
2010년《시와세계》하반기 신인상 詩부문에〈숯가마〉외 3편의 詩가 당선. 시집『화몽花夢』『붉은 첼로』『파랑의 파란』등. 백교문학상(2013). 울산문학 올해의 작품상(2020).
[심사평]
불확정된 희망의 근거를 견지하는 시쓰기
이강하 시인의 『눈사람』 외 4편을 제15회『시와세계』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이강하 시인은 2010년 등단 이래 자신만의 색채를 가지고 활발한 문단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시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시편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담는 독특한 발화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고통을 직시하고 통감하면서도 언어는 한 발 뒤로 물러선 호흡법을 그린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관조적 태도이며 동시에 삶에 대한 응전의 방식이다. 「눈사람」 외 4편의 시들은 인간의 존재론적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일상이라는 주어진 시공간에서 견디는 불안의 안과 바깥 그리고 그 끝의 지난한 삶의 방황이 내뱉는 절실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바람 구름 고요의 섞임이 팽팽하다
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 속 사방도
오늘만큼은 샤갈의 그림이고 싶은 날
갈라진 흰빛 뒷면은 누구에나 거룩한 여백이 될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언제 사라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 몸에 스며들고 있는 서늘한 흰빛 무더기
이것이 화두다.
「눈사람」 부분
시인은 발견적이고 직관적인 이미지를 작시하여 새롭고 낯설음을 선사하고 있다. “바람 구름 고요의 섞임”의 세계와 “고드름”이라는 절대현재 투명의 순간에서 “사방”을 감지한다. 또한 “내 몸에 스며들고 있는 서늘한 흰빛 무더기”를 발견한다. 캄캄하고 막막한 삶 속에서 빛의 순간을 감지한다. 삶의 응시이다. 시적 화자의 ‘존재의 직시’이다. 현실을 통해 세계를 투시하는 방법으로 비로소 “거룩한 여백”이 되는 세계를 드러낸다. 여기서 “뒷면”은 삶의 이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삶은 모호하다. 대상을 호명하는 순간 휘발되고 사라진다. 순간이 전부이고 “지금”이 모두다. “이것이 화두”라는 시인의 선적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중심을 잃지 않게 아치를 바로잡아준 그때 그 스침이 번진다”(「칸나의 해안」 )라는 부분에서는 지각과 정서적 반향을 언어로 중첩시키는 섬세함과 유연함을 느낄 수 있다. 「붉은 화첩 」, 「오래된 나무 이야기」, 「줄무늬 돌」에서도 내적 발화가 포착된 이미지를 변주하며 새로운 인식에 가닿으려고 하는 힘을 찾을 수 있다.
이강하 시인의 시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삶의 현장성과 죽어가는 현재를 되살리려는 내면 의식이다. 또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세밀하게 포착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내는 쪽으로 용기를 내게 해준다. 시인은 삶의 틈을 벌리고 경계 마지막 끝까지 삶의 흔적을 밀어 넣는다. 불확실성과 불온한 세계 속에서 인간적 가치에 선을 부여함으로써 근원적인 삶에 대한 존엄의 가치를 놓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시세계가 앞으로 더 확장되고 깊어질 것이라 기대하며 2024년 『시와세계』작품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송준영 (시인 ․ 본지 발행인)
김미정 (시인 ․ 문학평론가 (글)
─ 계간 ≪시와세계≫ 202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