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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시민단체들이 싫어하는 판결내용
윤미향, 위안부단체,소녀상, 정신대 단체, 더불어성추행도덕당,정의당,진보당 제일 싫어하는 판결내용...
핵심은 일본과 대한민국 계속 이간질해서 후원금 및 대한민국 국가예산 처먹기 위한 저 위선적인 시민단체, 정치단체들 전원 단두대 보내야 한다.
문제해결보다.. 갈등유발하는 쓰레기들 그냥 북한으로 꺼져라. 대한미국 반역자들아.
https://casenote.kr/%EA%B4%91%EC%A3%BC%EA%B3%A0%EB%93%B1%EB%B2%95%EC%9B%90/2013%EB%82%985441
광주고등법원 2015. 6. 24. 선고 2013나5441 판결 [손해배상(기)] 상고
사 건 | 2013나5441 손해배상(기) |
원고, 피항소인 | 1. A 2. B 3. C 4. D |
원고, 항소인 겸 피항소인 | |
5. E | |
피고, 피항소인 겸 항소인 | |
미쓰비시(三菱)중공업 주식회사 | |
제1심판결 | 광주지방법원 2013. 11. 1. 선고 2012가합10852 판결 |
변론종결 | 2015. 5. 13. |
판결선고 | 2015. 6. 24. |
주 문
1. 제1심 판결을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가. 피고는 원고 A에게 120,000,000원, 원고 B에게 100,000,000원, 원고 C, D에게 각 120,000,000원, 원고 E에게 102,083,333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2015. 5. 13.부터 2015. 6. 24.까지는 연 5%의,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나. 원고들의 나머지 청구를 각 기각한다.
2. 원고 A, B, C, D와 피고 사이에 생긴 소송총비용 중 1/3은 원고들이, 나머지는 피고가 각 부담하고, 원고 E과 피고 사이에 생긴 소송총비용의 3/4은 원고 E이, 나머지는 피고가 각 부담한다.
3. 제1의 가.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및항소취지
1.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 A, B, C, D에게 각 200,000,000원, 원고 E에게 450,000,000원 및 위 각 돈에 대한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2. 항소취지
가. 원고 E
제1심 판결 중 원고 E 패소부분을 취소한다. 피고는 원고 E에게 370,000,000원 및 이에 대한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나. 피고
1) 주위적으로, 제1심 판결을 취소하고,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각하한다.
2) 예비적으로, 제1심 판결 중 피고 패소부분을 취소하고, 위 취소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이 유
1. 인정사실
가. 일본의 한반도 침탈과 침략전쟁에의 강제동원
1) 일본은 1910. 8. 22. 대한제국과 사이에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1937년 중일전쟁을 각각일으킴으로써 점차 전시체제에 들어가게 되었고, 1941. 12. 8.에는 태평양전쟁까지 일으켰다.
2) 일본은 이러한 전쟁들을 치르면서 군수물자 생산에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1938. 4. 1. '국가총동원법(1938. 4. 1. 법률 제55호)'을, 1939. 7. 8. 위 법에 따른 '국민징용령(칙령 제451호)'을 각각 제정 · 공포하고, 모집 형식의 노무동원계획을 실시하여 비행기 부품 및 제철 용광로 제조자, 선박 수리공 등 특수기능을 가진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일본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태평양전쟁이 개시되자 일본은 1942년경 '국민동원계획'을 세워 전쟁을 위한 군수산업에 필요한 노동력 동원을 확대해 나갔으며, 1942. 2. 13. 각의(閣議)에서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과 '조선인 내지이주 알선요강'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관 알선 형식의 노무동원계획을 실시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최고조에 달할 즈음인 1944. 8. 8.에는 각의에서 '반도인 노무자 이입에 관한 건'을 결의함으로써 특수기능의 보유 여부에 관계없이 일반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에도 적용하였다.
3) 남성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인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정부는 1943. 9. 13. 차관회의에서 '여자근로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결의하고, 1944. 3. 18. 각의에서 '여자정신대제도 강화방책요강'을 결의하여, 국민등록자인 여자를 여자정신대로 조직해서 필요한 업무에 협력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고, 같은 해 6. 21. 각의에서 '여자정신대원 인수측 조치요강'을 결의하고, 같은 해 8. 23.에는 '여자정신근로령(칙령 제519호)'을 공포하여 이를 한반도에서도 동시에 시행하였다. 다만 한반도에서 근로정신대동원은 위와 같은 '여자정신근로령' 시행 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는데, 1944년경 이후에는 특히 늘어나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통해서 국민학교 6학년이나 국민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모집이 행해졌다.
4) '여자정신대제도 강화방책요강' 및 '여자정신근로령'에서는 기본적으로 국민등록자인 여성들을 정신대 대원으로 할 것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당시 한반도에서 여성의 국민등록은 기능자, 즉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기능자로서 중학교 정도의 학교 졸업자 또는 실력과 경험에 의해 광산기술자, 전기기술자, 전기통신기술자 등으로 현직에 취업하고 있거나 예전에 일한 적이 있는 자만으로 한정되어 있어, 국민등록자의 범위는 매우 좁았다. 그러나 위 '여자정신대제도 강화방책요강' 및 '여자정신근로령'에는 "특히 지원하는 자는 정신대원으로 할 것을 막지 않음"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지원이라는 형식으로 근로정신대원 모집이 행해졌고, 이러한 모집은 관의 적극적인 개입이나 신문광고, 기사를 통한 모집, 학교나 단체를 통한 모집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국민학교의 담임교사나 학교장이 재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지원을 강요하거나 가정방문을 하여 설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집된 근로정신대원들은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이하 '구 미쓰비시중공업'이라 한다) 나고야(名古屋) 항공기제작소 도토구(道德) 공장, 도쿄(東京) 아사이토(麻糸) 방적 주식회사 누마즈(沼津) 공장 등의 군수 공장에 동원되었다. 한편 '여자정신근로령'은 정신근로대를 받으려고 하는 자는 지방장관에게 이를 청구 또는 신청하고 지방장관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 시정촌장 기타 단체의 장 또는 학교장에 대하여 대원의 선발을 명하여 그 결과를 보고받고, 지방장관이 대원을 결정하여 통지하면 이 통지를 받은 자는 정신근로를 하고 정신근로대를 받게 된 자가 원칙적으로 그 경비를 부담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나. 망 F, 망 G와 원고 A, B, C, D의 근로정신대 지원 경위와 강제노역
1) 망 F, 망 G와 원고 A, B, C, D는 모두 1929년경부터 1931년경 사이에 한반도에서 출생한 한국인들이고(이하 '원고 등'이라 한다), 원고 E은 망 F의 남편이자 망 G의 오빠이다.
2) 원고 등은 1930년대 후반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동들은 매일 아침의 조례에서 일본 천황에게 절을 하고(皇居遙拜), 황국신민의 서사(창시)를 합창하도록 강요당했고, 한국역사가 아니라 일본신화로 역사수업이 이루어졌으며, '천황은 신이다, 일본은 훌륭한 나라다'라는 가르침과 R, S, T 등 일본의 위인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일본의 교육칙어教育勅語)의 암기를 강요당하여 암기를 못하면 벌을 받았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에서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나 군가 등을 가르치고 학교 내에서는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이를 사용하는 학생은 벌을 받았다. 1940년경 창씨개명이 행하여진 후에는 학교 내에서 일본 이름으로만 서로를 호칭하도록 강요당했다.
3) 원고 A은 국민학교 재학 중에, 원고 A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 등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경위로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여 구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도토구 공장(이하 '이 사건 공장'이라 한다)에서 노동에 종사하였다.
가) 원고 A은 U 나주시에서 출생하였고, 1944. 5.경 V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하던 중 W 교장과 X 헌병으로부터 '체격과 머리가 좋은 아이가 정신대로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에도 다닐 수 있으며, 돌아올 때는 집 한 채를 살수 있는 돈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근로정신대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던 중 W 교장과 담임교사로부터 근로정신대의 지원자로 지명되었다. 위 원고의 부모는 위 원고가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천황폐하는 절대적'이라는 교육을 받았던 위 원고는 부모님의 말보다 학교 선생님의 말을 더 믿었고, 교장으로부터 '이렇게 지명을 받고 가지 않으면 경찰이 너의 아버지를 붙잡아 가둔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자고 있는 사이에 몰래 아버지의 도장을 가져다가 담임교사에게 건네주며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였다. 위 원고는 1944. 5. 말경 다른 근로정신대 지원자들과 함께 여수에 모인 후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下關)로 간 후,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나고야까지 이동하여 이 사건 공장으로 갔으며, 이 사건 공장에서 시너나 알코올로 비행기 부품의 녹을 닦아 내고,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줄질을 해서 부품을 절단하는 작업에 종사하였다.
나) 원고 B은 Y 나주시에서 출생하였고, 1937년 봄 V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천황은 하느님이시고, 일본은 훌륭한 나라다'라는 등의 교육을 받고 1943. 3. 위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위 원고는 1944. 5.경 W 교장과 6학년 담임교사, X 헌병 등으로부터 '일본에 가면 여학교에 다닐 수 있고, 일하며 돈을 벌어 집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면 평소 부러워하던 여학교의 학생이 될 수 있고 돈도 벌어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위 원고는 부모님의 반대에 불구하고 아버지의 도장을 몰래 학교로 가져가서 교장에게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고 일본에 가겠다'고 한 후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였고, 1944. 5. 말경 다른 근로정신대 지원자들과 함께 여수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간 후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나고야로 이동하여 이 사건 공장으로 갔다. 위 원고는 이 사건 공장에서 비행기의 작은 부품들에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에 종사하였다.
다) 원고 C은 Z 광주시에서 출생하였고, 1938. 4. AA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할 것',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은 정의롭고 양심적인 나라'라는 등의 교육을 받고 1944. 3. 위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위 원고는 1944. 5.경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교사에 의해 위 국민학교 교장실로 불려가 교장과 헌병으로부터 '일본에 가면 학교에도 다닐 수 있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 국민학교 교사의 급여 정도를 벌 수 있다, 6개월에 한 번은 한국에 올 수 있다'는 등의 말을 듣고 어머니 몰래 어머니의 도장을 가져와 교장에게 건네주면서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였다. 위 원고는 1944. 5. 28.경 교장에게 위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의 반대로 일본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으나, 교장은 '너의 부모는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된다'고 위협하였고, 이 때문에 위 원고는 어머니에게는 일본에 가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한 채 근로정신대에 참가하였다. 위 원고는 1944. 5. 31. X 헌병과 V국민학교의 AB 교사의 인솔 아래 순천역에서 기차로 여수로 이동한 후 여수항에서 배로 시모노세끼에 갔고, 그 곳에서 기차를 타고 나고야로 이동하여 이 사건 공장에 도착하였다. 위 원고는 이 사건 공장에서 두랄루민(Duralumin, 알루미늄 합금의 일종) 판에 비행기 부품의 형태를 그려 넣고, 그것을 일본인 종업원들이 일하는 곳까지 운반하는 작업에 종사하였다.
라) 원고 D는 AC 순천시에서 출생하였고, 9살부터 AA국민학교에 다니면서 일본 역사, 황국신민의 서사 등과 기미가요 등 일본노래를 배웠으며, '일본은 전 세계에서 제일인 나라이며 전쟁에서도 일본이 계속 이기고 있다'는 등의 교육을 받은 후 졸업했다. 위 원고는 1944. 5. 중순경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교사에 의해 위 국민학교 교무실로 불려가 그 담임교사와 키가 큰 일본인으로부터 '일본에 가면 여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근로정신대를 지원하는 것이 일본에 가서 공부도 계속하고 천황폐하에게 도움을 주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가족들 몰래 도장을 가져다가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였다. 위 원고는 1944. 5. 말경 다른 근로정신대 지원자들과 함께 여수에 모인 후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갔으며, 그곳에서 기차로 나고야까지 이동하여 이 사건 공장으로 갔고, 이 사건 공장에서 처음에는 비행기 날개의 형태를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일본인 남자들과 함께 절단기로 두랄루민판을 자르는 작업에 종사하였다.
마) 망 G는 AD 전북 순창군에서 출생하였고, 망 F는 AE 논산시 AF에서 출생하였다. 망 G와 망 F는 1944년 광주시에 있는 AG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집안일을 돕고 있던 중 1944. 5.경 이웃에 사는 애국반1) 반장으로부터 '일본에 가서 군수공장에서 하루 일하고 2, 3일은 공부하면서 2년간 일하고 그 후 4년간 공부해서 졸업증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평소 여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고 또한 국민학교에서 '내선일체, 팔굉일우(八紘一宇)' 등의 일본의 침략논리를 뒷받침하는 교육을 받았기에 일본국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하겠다는 마음도 들어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였다. 망 G와 망F는 1944. 6. 광주시청사 앞에서 다른 근로정신대 지원자 50여명과 함께 시내 거리를 행진한 후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갔고, 여수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끼로 간 후 다시 기차로 나고야로 가서 이 사건 공장에 도착하였다. 이 사건 공장에서 망 G는 비행기 기체에 페인트칠을 하는 작업에 종사하였고, 망 F는 바로 옆 바느질 공장이라 불리는 작업장에서 긴 파이프에 천을 꿰매는 작업에 종사하였다.
4) 이 사건 공장은 부품공장과 조립공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약 2,000명이 주야로 2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원고 등은 이 사건 공장의 제4 히시와(菱和) 기숙사(療)의 4평가량 되는 방에서 전라남도 혹은 충청남도에서 온 다른 정신근로대원들 6명 내지 8명과 함께 생활하였다. 원고 등을 비롯한 근로정신대원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 후 기숙사에서 공장까지 걸어서 20분 내지 30분 거리를, '가미가제(神風)'라고 쓰인 머리띠를 감은 채 4열종대로 열을 맞춰서 '우리는 처녀정신대'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행진하였다. 공장에서는 출신지별로 작업장에 배치되어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내지 6시경까지 일하였다. 공장에서의 작업은 엄격한 감시 하에 행하여져 작업 중에는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고, 화장실도 허가를 받고 가야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욕설을 듣거나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원고 등은 급여를 전혀 지급받지 못하였고, 기숙사와 공장에서 원고 등에게 제공되는 음식의 양도 매우 적어 항상 배가 고팠다.
5) 원고 등을 비롯한 근로정신대원들은 이 사건 공장에서 근무한 기간 동안에 단체로 나고야성(名古屋城), 아쓰다신궁(熱田神宮), 호국신사(護国神社), 히가시야마(東山) 동물원 및 마쓰사카야(松坂屋) 백화점 등을 찾아간 적이 있었을 뿐 개인의 자유로운외출이 금지되고 있었고, 집단으로 외출을 할 때에는 감시원이 동행하였다. 원고 D는 이 사건 공장에서 일한 지 약 1년 정도 지났을 무렵에 삼촌으로부터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가려 하였으나 돌아갈 수 없었다. 또한 원고 등은 한반도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도 검열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생활상의 불만을 편지에 쓸 수 없었다. 원고 등은 지원 당시의 약속과는 달리 이 사건 공장의 기숙사에서 일본노래나 일본의 예의범절, 바느질 등을 배운 것 외에는 학교 교육을 받지도 못하였다.
6) 원고 C은 이 사건 공장에서 두랄루민 판을 옮기던 도중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발 위에 떨어뜨려 피가 나고 다리가 부을 정도로 다친 적이 있었으나 의사의 진찰은 물론 치료약이나 소독약도 받지 못하였다. 또한 원고 D는 절단기 작업을 맡은 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두랄루민 판을 절단하다가 왼손 집게손가락 끝이 절단기에 잘려나가는 상해를 당하였다. 당시 위 원고는 반장과 함께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출혈이 지속되고 상처가 오랫동안 낫질 않아 결국 두 달 동안 작업을 하지 못하였는데, 그 기간 중에는 반장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
다. 원고 등의 강제노역 중 동남해지진에 의한 피해와 귀국까지의 경위
1) 1944. 12. 7. 13:30경 동남해지진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이 사건 공장 건물 중 상당부분이 무너지면서 망 G를 포함한 전라남도 출신의 정신근로대원 6명이 사망하였고, 원고 A은 천정이 무너지면서 쇠막대기가 왼쪽 옆구리를 관통하는 상해를 입었으며, 원고 D는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밀려 넘어지고 짓밟히면서 귀와 손, 왼쪽 발목 등을 다쳤다.
2) 동남해지진이 발생할 무렵 공습이 심해져 원고 등은 거의 매일 저녁에 공습경보가 있을 때마다 춥고 물이 고인 방공호에 대피해 있어야 하였고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1945. 1.경 이 사건 공장 중 본부 사무소, 조립, 부품 제작 부문이 도마야현(밟uJⅨ)에 있는 다이몽(}보5) 공장으로 이전하자 사망한 망 G를 제외한 나머지 원고 등도 1945. 봄경 다이몽 공장으로 이동하였다. 원고 등은 다이몽 공장에서도 이 사건 공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급여를 받지 못한 채 충분치 않은 음식만을 먹으며 힘든 노동에 종사하였다. 원고 C은 다이몽 공장의 기숙사 사감에게 '약속대로 한국으로 돌려보 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사감으로부터 '누가 맨 처음에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하였느냐? 이 속에는 간첩이 있다'는 호통만 듣고 오히려 사감에게 사과를 한 바도 있었다.
3) 일본이 1945. 8. 15.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종전되었고, 일본에 남아있던 원고 등은 1945. 10.경 당시 다이몽 공장의 기숙사 사감으로부터 '급여와 짐은 집으로 보내준다'는 말을 들은 후 작업복 차림으로 한반도로 귀국하게 되었다.
라. 원고 등의 귀국 후 상황
1) 일본은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이 전면화되는 1938년경부터 1945년경까지 한 반도의 여성들 중 다수를 군위안부로 끌고 갔는데, 이때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모집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종군간호원, 여자정신대, 위문단, 가극단, 봉사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모집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군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의 구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근로정신대도 군위안부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2) 원고 등은 귀국 이후 주변 사람들이 근로정신대원을 군위안부로 오인하자 근로 정신대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숨겼는데, 원고 A은 위 사실이 알려져 파혼을 당한 후 위 사실을 숨기고 결혼하였으나 10년 정도 지난 후 위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가출을 하였고, 원고 B은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위 사실을 숨겼으며, 원고 C은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후 위 사실을 알렸다가 남편이 군위안부가 아니라는 위 원고의 말을 믿지 않고 가출하여 1994. 10.경 이혼하였고, 원고 D는 1947. 12.경 위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하였으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으로부터 1960년경까지 지속적인 폭행을 당하였다.
마.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해산과 피고의 설립
1) 구 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의 회사경리응급조치법(1946. 8. 15. 법률 제7호)상의 특별경리회사, 기업재건정비법(1946. 10. 19. 법률 제40호)상의 특별경리주식회사로 지정된 후, 1949. 7. 4. 기업재건정비법에 의한 재건정비계획 인가신청을 하여 1949. 11. 3. 신청한 내용대로 주무대신의 인가를 받았다.
2) 구 미쓰비시중공업은 1950. 1. 11. 그 재건정비계획에 따라 해산하기로 하고, 같은 날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현물출자 등에 의하여 기업재건정비법상의 새로운 회사인 중일본(中日本)중공업 주식회사(상호가 1952. 5. 29. '신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로, 1964. 6. 1.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로 순차 변경되었다), 동일본(東日本)중공업 주식회사(상호가 1952. 5. 27. '미쓰비시일본중공업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 서일본(西日本)중공업 주식회사(상호가 1952. 5. 27. '미쓰비시조선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의 3개회사(이하 새로이 설립된 3개 회사를 통칭하여 '제2회사'라고 한다)가 설립되었다. 그 뒤 중일본중공업 주식회사가 1964. 6. 30. 동일본중공업 주식회사, 서일본중공업 주식회사의 2개 회사를 흡수합병함으로써 제2회사가 현재의 피고로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종업원들은 직위, 급료를 그대로 하고 구 미쓰비시중공업에서의 재직기간을 통산하여 퇴직금을 산정하기로 하여 제2회사로 승계되었고, 제2회사의 초대사장들은 모두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상무이사들이 취임하였다. 또한 피고 자신도 구미쓰비시중공업을 피고의 기업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3)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은 '특별경리회사에 해당될 경우 그 회사는 지정시(1946. 8. 11. 00:00을 말한다. 제1조 제1호)에 신계정과 구계정을 설정하고(제7조 제1항), 재산목록상의 동산, 부동산, 채권 기타 재산에 대하여는 「회사의 목적인 현재 행하고 있는 사업의 계속 및 전후산업의 회복진흥에 필요한 것」 에 한하여 지정시에 신계정에 속하며, 그 외에는 원칙적으로 지정시에 구계정에 속하고(제7조 제2항), 지정시 이후의 원인에 근거하여 발생한 수입 및 지출을 신계정의 수입 및 지출로, 지정시 이전의 원인에 근거하여 발생한 수입 및 지출은 구계정의 수입 및 지출로 경리처리하며(제11조 제1, 2항), 구채권에 대해서는 변제 등 소멸행위를 금지하되, 예외적으로 변제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구계정으로 변제하여야 하고, 신계정으로 변제하는 경우는 특별관리인의 승인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일정한 금액의 한도에서만 가능(제14조)'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4) 구 미쓰비시중공업은 회사경리응급조치법, 기업재건정비법에 따라 1946. 8. 11. 오전 0시를 기준으로 하여 신계정과 구계정을 분리한 후, '회사의 목적인 현재 행하고 있는 사업의 계속 및 전후산업의 회복진흥에 필요한 동산, 부동산, 채권 기타 기존 재산 등'을 신계정에 속하도록 한 후 위 재산을 현물 출자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이 3개의 제2회사를 설립하였다. 한편 그때까지 발생한 채무를 위주로 한 구계정상의 채무를 부담하면서 청산회사가 된 구 미쓰비시중공업은 1957. 3. 25. 설립된 료주(菱重) 주식회사에 흡수합병되었다가 1957. 10. 31. 해산하였다.
바. 태평양전쟁 종전에 따른 대일평화조약과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부속협정
1) 대일평화조약의 체결
태평양전쟁이 종전된 후 1951. 9. 8. 미국 샌프란시스코시에서 미국, 영국 등을 포함한 연합국과 일본국은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위 조약 제4조 (a)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위 조약 제2조에 규정된 지역에 존재하는 일본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그리고 위 지역의 통치 당국 및 그 국민을 상대로 한 청구권과 일본국에 존재하는 위 지역의 통치 당국 및 그 국민 소유의 재산, 그리고 위지역의 통치 당국 및 그 국민의 일본국 및 일본국 국민들에 대한 청구권의 처리는 일본국과 위 지역의 통치 당국간의 특별 협정이 규정하는 바에 따른다"고 정하였다.
2)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약과 부속협정의 체결
대일평화조약 제4조 (a)의 규정취지에 따라 1951년 말경부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 사이에 국교정상화 및 전후 보상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65. 6. 22. '국교정상화를 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 협정의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이라 한다)이 체결되었는데, 청구권협정은 제1조에서 "일본국이 대한민국에 10년간에 걸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정함과 아울러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I)은 위 제2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그리고 위 합의의사록에 적시된 대일청구 8개 요강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3) 청구권협정에 따른 후속조치
가) 청구권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은 1965. 12. 17.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제2조의 실시에 따른 대한민국 등의 재산권에 대한 조치에 관한 법률'(법률 제144호, 이하 '재산권조치법'이라 한다)을 제정 · 시행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한민국 또는 그 국민의 일본국 또는 그 국민에 대한 채권 또는 담보권으로 협정 제2조의 재산, 이익에 해당하는 것을 1965. 6. 22. 소멸한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나) 한편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지급되는 자금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사항을 정하기 위하여 1966. 2. 19.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2)'을 제정하고, 1971. 1. 19.에는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3)'을 제정하여 10개월간 국민의 대일청구권 신고를 받은 결과 총 109,540건의 신고가 접수되었는바, 위 신고분에 대한 실제 보상을 집행하기 위하여 1974. 12. 21.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법률 제2685호로 제정되어 제3615호로 폐지된 법률을 말한다, 이하 '대일 민간청구권보상법'이라 한다)을 제정하여 1975. 7. 1.부터 1977. 6. 30.까지 사이에 총 83,519건에 대하여 총 9,187,693,000원의 보상금을 지급하였고, 위 각 법률은 1982. 12. 31. 모두 폐지되었다. 그런데 앞서 본 법률들은 강제징용 피해자들 중 1945. 8. 15. 이전에 사망한자에 대한 보상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 민관공동위원회의 개최
원고 등과 같은 강제징용자인 H, I, J, K 등은 외교통상부장관을 상대로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문서들의 공개를 거부한 처분을 다투는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소송(서울행정법원 2002구합33943)을 제기하였는데, 2004. 2. 13. 위 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선고받았으며, 위 판결은 외교통상부장관의 항소취하로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일부 문서를 공개한 후 2005. 8. 26. '한일회담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이하 '민관공동위원회'라고 한다)를 개최하고,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 · 민사적 채권 ·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사할린동포 문제와 원폭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아. 일본에서의 소송경과와 망 F의 사망 등
1) 원고들과 망 F는 1999. 3.경 일본국 나고야지방재판소에 피고와 일본국을 상대로, 원고 등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자근로정신대원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와서 구미쓰비시중공업의 공장에서 노동에 종사한 것은 피고와 일본국에 의해 이루어진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이었으며, 나아가 피고와 일본국은 전쟁 중 사망한 망 G를 제외한 원고 등이 전쟁 후 새로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강제노동 등의 실태를 조사, 공표하고 사죄하는 등의 사후조치도 소홀히 했다는 등의 이유로, 신문에 사죄 광고를 게재하고 정신적 · 재산상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서 1인당 3,000만 엔을 지급할 것을 구하는 내용의 소를 제기하였으나 2005. 2. 24. 위 재판소는 청구기각 판결을 선고하였다4). 원고들은 위 판결에 불복, 나고야고등재판소에 항소하였으나 2007. 5. 31. 위 재판소 역시 항소기각 판결을 선고하였으며, 이에 원고 등은 다시 일본국 최고재판소에 상고하였으나 2008. 11. 11. 일본 최고재판소는 원고들의 상고를 기각하여 위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이하 이와 같은 일본에서의 소송을 '이 사건 일본소송'이라 하고, 그 판결들을 '이 사건 일본판결' 이라 한다).
2) 원고들은 이 사건 일본소송이 종료한 후 약 2년간 17차례에 걸쳐 피고 측과 배상을 위한 협상을 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2012. 10. 24. 제1심 법원에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일본소송의 청구원인과 같은 내용을 청구원인으로 하여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금의 지급을 구하는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다.
3) 망 G의 사망 당시(1944. 12. 7.) 망 G의 가족들로는 부모인 Q, AH과 오빠인 원고 E과 AI, 남동생인 AJ, AK 등이 있었고, 이후 Q은 1962. 4. 9.에, AH은 1968. 9. 20.에 각 사망하였다.
4) 망 F는 이 사건 일본소송이 제1심 법원에 계속 중이던 2001. 12. 3. 제주에서 사망하였고, 사망 당시 상속인들로는 배우자인 원고 E과 3명의 자녀(N, O, P)가 있었다.
[인정근거] 다툼 없는 사실, 갑 제1 내지 8호증(가지번호 있는 것은 각 가지번호 포함, 이하 같다), 제1심 법원의 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에 대한 각 사실조회 결과, 제1심 법원의 원고들에 대한 당사자본인 신문 결과, 변론 전체의 취지
2. 본안전 항변에 관한 판단
가. 피고의 주장
섭외적 사건에 관한 국내법원의 재판관할을 인정할지 여부는 소송당사자들의 공평, 재판의 적정, 신속을 기한다는 기본이념에 따라 조리에 의하여 결정하여야 하는데, 원고 등은 피고와 일본국을 상대로 일본에서 이 사건 소와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제기하여, 주장 · 입증의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었고, 상소의 기회 또한 보장받은 상태에서 패소 판결을 선고받아 확정되었다. 또한 이 사건 소의 청구원인 사실이 모두 일본에서 일어나 대한민국과는 실질적 관련성도 없고, 설령 일본국이 한반도에서 기망 또는 협박으로 원고 등을 강제연행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기망 또는 협박에 구 미쓰비시중 공업이나 피고가 관여한 바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 지점이나 영업소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일본 법인인 피고로 하여금 대한민국 법원에서 이 사건 일본소송과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반복하게 하는 것은 소송당사자들의 공평, 소송수행의 편의나 예측가능성 등에 비추어 심히 부당하다. 또한 이 사건 일본소송에서 원고 등에 대한 본인신문을 비롯한 적지 않은 증거조사가 실시되었고 피고가 일본 법인이며, 원고들이 주장하는 행위가 이루어진 장소 역시 일본인 점에 비추어 볼 때 재판의 적정, 신속,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도 일본 법원이 이 사건 소에 대한 국제재판관할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사건 소는 재판관할권이 없는 대한민국 법원에 제기된 것으로서 부적법하다.
나. 판단
국제재판관할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당사자 간의 공평, 재판의 적정, 신속 및 경제를 기한다는 기본이념에 따라야 할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소송당사자들의 공평, 편의 그리고 예측가능성과 같은 개인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재판의 적정, 신속, 효율 및 판결의 실효성 등과 같은 법원 내지 국가의 이익도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다양한 이익 중 어떠한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을지 여부는 개별 사건에서 법정지와 당사자와의 실질적 관련성 및 법정지와 분쟁이 된 사안과의 실질적 관련성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삼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하고(대법원 2005. 1. 27. 선고 2002다59788 판결,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등 참조), 국제재판관할에 관하여 조약이나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상의 원칙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고 이에 관한 우리나라의 성문법규도 없는 이상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의 토지관할에 관한 규정 또한 위와 같은 기본이념에 따라 제정된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위 규정에 의한 재판적이 국내에 있을 때에는 섭외적 사건에 관한 소송에 관하여도 우리나라에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인정함이 상당하다(대법원 1992. 7. 28. 선고 91다41897 판결 등 참조).
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피고가 일본법에 의하여 설립된 일본 법인으로서 그 주된 사무소를 일본에 두고 있기는 하나, ① 이 사건 청구는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군용기 등 전쟁물자를 생산하여 당시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국에게 공급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일본국의 협조 아래 일본국이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한반도에서 강제로 동원하여 충당한 행위, 즉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일본국과 함께 원고 등을 강제연행한 후 강제노동에 종사시킨 일련의 행위가 불법행위이고, 피고는 구미쓰비시중공업의 원고 등에 대한 법적 책임을 그대로 부담한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대한민국은 위와 같은 일련의 불법행위 중 일부가 이루어진 불법행위지인 점, ② 원고들은 대한민국의 민법에 근거하여 피고의 불법행위 책임을 묻고 있는 점, ky 원고들이 이 사건에서 주장하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본 내의 물적 증거는 거의 멸실된 반면, 피해자인 원고 등 중 생존자들이 모두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고, 사안의 내용이 대한 민국의 역사 및 정치적 변동 상황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점 등 제반 사정을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보면, 대한민국은 이 사건의 당사자들 및 분쟁이 된 사안과 실질적 관련성이 있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대한민국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하여 재판관할권을 가진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3. 본안에 관한 판단
가. 당사자들의 주장
1) 원고들의 주장
원고들은, 일제강점 아래에서 피고의 전신인 구 미쓰비시중공업은 원고 등에게 학교교사 등을 통해 상급학교로의 진학, 충분한 임금 제공 등을 보장한다면서 원고 등을 회유하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도록 하였으나, 실제로 원고 등은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 비행기 제작소나 다이몽 공장에서 원고 등의 의사에 반하여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강제노동에 혹사당하고 교육의 기회나 임금 등을 전혀 제공받지 못하였으므로,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사실상 동일한 법인으로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채무를 승계한 피고는 원고 A, B, C, D에게 각 2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고, 망 F, 망G의 상속인인 원고 E에게 망 F의 위자료 1억 5천만 원 전부와 망 G의 위자료 1억 5천만 원 중 상속지분(13/40)에 해당하는 합계 4,875만 원 및 원고 E 본인의 위자료3,000만 원 등 합계 2억 2,875만 원(= 1억 5천만 원 + 4,875만 원 + 3,000만 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5).
2) 피고의 주장
이에 대하여 피고는, ① 피고는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법인격이 다르고,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원고 등에 대한 손해배상채무를 승계하지도 않았으며, ② 원고 등은 이미 동일한 청구를 한 이 사건 일본소송에서 패소확정판결을 받았으므로 원고들의 청구는 선행판결인 이 사건 일본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되어 기각되어야 하며, ③ 원고들이 주장하는 손해배상채권은 청구권협정 및 그 후속조치로 인하여 소멸하였고, ④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위 손해배상채권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거나 제척기간이 도과하였으며, ⑤ 원고들이 대한민국으로부터 태평양전쟁 전후 강제동원 희생자로서 위로 금 등을 지급받으면서 권리 포기 약정을 함으로써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채권도 소멸하였으므로, 원고들의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없다고 주장한다.
나. 피고의 손해배상책임의 발생
1)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불법행위 책임의 성립에 관하여
가) 이 사건에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법은 법정지인 대한민국에 있어서 외국적 요소가 있는 법률관계에 적용될 준거법의 결정에 관한 규범(이하 '저촉규범'이라 한다)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데, 원고 등과 피고 사이에 그 법률관계가 발생한 시점은 구 섭외사법(1962. 1. 15. 법률 제996호로 제정된 것)이 시행된 1962. 1. 15.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걸쳐 있다.
그중 1962. 1. 15. 이전에 발생한 법률관계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은 1912. 3. 28.부터 일왕(曰王)의 칙령 제21호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의용(依用)되어 오다가 군정법령 제21호를 거쳐 대한민국 제헌헌법 부칙 제100조에 의하여 "현행법령"으로서 대한 민국 법질서에 편입된 일본의 '법례(法例)'(1898. 6. 21. 법률 제10호)이다. 원고 등의 청구권이 성립한 시점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에 해당하는 위 '법례'에 의하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성립과 효력은 불법행위 발생지의 법률에 의하는데(제11조), 이 사건 불법행위지는 대한민국과 일본에 걸쳐 있으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하여 판단할 준거법은 대한민국법 또는 일본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원고들은 이미 일본법이 적용된 이 사건 일본소송에서 패소한 점에 비추어 불법행위의 피해자들인 원고들은 자신들에게 보다 유리한 준거법으로 대한 민국법을 선택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추인되는 점이나 이와 같이 준거법이 될 수 있는 여러 국가의 법이 있을 경우 법정지의 법원은 당해 사안과의 관련성의 정도, 피해자의 권리보호의 필요성과 가해자의 준거법에 대한 예측가능성 및 방어권보장 등 당사자 사이의 공평, 형평과 정의, 재판의 적정성 등을 함께 고려하여 준거법을 선택 ·결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인데 위와 같은 요소를 모두 고려할 때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함이 옳다고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하는지 여부는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판단하기로 한다. 나아가 제정 민법이 시행된 1960. 1. 1.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의 판단에 적용될 대한민국법은 제정 민법 부칙 제2조 본문에 따라 '구 민법(의용 민법)'이 아닌 '현행 민법'이다.
나) 앞서 본 인정사실과 앞서 든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일본국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불법적인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기간 군수산업체인 군수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 핵심적인 기간 군수산업체의 지위에 있던 구 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국정부의 위와 같은 인력동원 정책에 적극 편승하여 인력을 확충하였는바, 당시 위의 침략전쟁들로 인하여 다수의 학생들까지 동원하고 있는 터라 근로정신대원으로 지원하더라도 여학교 또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도록 지원할 여유가 없는 상황임에도, 당시 일본국 정부는 한반도와 한국민들을 불법적이고 폭압적으로 지배하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등의 미명 아래 일본 천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시키고 일본국의 식민통치에 순응하도록 교육시킨 후 원고 등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나 담임교사 등을 동원하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여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 진학시켜 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취지의 거짓말로 근로정신대에 지원할 것을 회유하거나 부모의 의사에 반하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도록 하고, 부모의 반대로 지원을 철회하려 하면 협박을 통해 지원의사를 유지케 하여 원고 등을 일본으로 연행하였고, 원고 등은 당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 내용이나 강도 환경 등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일본국 정부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과 협박에 의하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여 연행된 후 이 사건 공장에서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앞서 본 사실관계에 의하면, 원고 등은 만 13세, 14세의 나이 어린 여성들이었음에도 구미쓰비시중공업은 이러한 원고 등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내어 기숙사에 집단으로 수용하면서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내지 6시 무렵까지 엄격한 감시 아래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도 사전 검열에 의하여 제한하고, 열악한 숙소와 부실한 음식만을 제공하며 급여조차 전혀 지급하지 아니하는 등, 원고 등의 자유를 현저하게 억압한 채 생명이나 신체에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환경에서 위험하고 혹독한 노동에 강제로 종사하게 하고, 특히 원고 등에게 아무런 안전교육이나 대피요령 등을 주지시키지 아니한 채 방치하여 동남해지진에 이 사건 공장이 무너지면서 망 G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고, 원고 A, C, D, 망 G 등이 이 사건 공장에서 작업 중 부상을 당하거나 동남해지진에 이 사건 공장이 무너지면서 부상을 당하였음에도 적정한 치료와 휴식 및 보상 등을 제공하지 아니한 채 열악한 환경 하에 계속 노동에 종사하게 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침략전쟁을 위한 전쟁물자의 생산에 원고 등을 강제로 동원하고 노무제공을 강요한 행위는 당시 일본국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에 적극 동참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나이 어린 여성들을 강제로 격리 · 수용한 후 급여도 지급하지 아니한 채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부상당한 원고 A, C, D 등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동남해지진이 발생했을 때 원고 등에 대해 아무런 안전조치나 구호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여 망 G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부상당한 원고 A, D 등을 방치한 행위는 여성이나 아동을 강제노동은 물론 위험한 업무에 종사시키지 말아야 할 의무 및 안전배려 내지 보호의무까지도 방기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며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 등이 심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
따라서 구 미쓰비시중공업은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 등이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2) 피고가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채무를 부담하는지에 관하여
가) 피고와 구 미쓰비시중공업을 법적으로 동일한 법인으로 볼 수 있어 피고가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채무를 그대로 부담하는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해산 및 분할에 따른 법인격의 소멸 여부, 제2회사 및 피고가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채무를 승계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법 역시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데, 그 법률관계가 발생한 시점은 구 섭외사법이 시행된 1962. 1. 15.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걸쳐 있다. 그중 1962. 1. 15. 이전에 발생한 법률관계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은 앞서 본 '법례'이다. 위 '법례'는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제2회사 및 피고의 법적 동일성 여부를 판단할 법인의 속인법에 대하여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법인의 설립준거지법이나 본거지법에 의하여 이를 판단한다고 해석되고 있었고,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제2회사 및 피고의 설립준거지와 본거지는 모두 일본이므로,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해산 및 분할에 따른 법인격의 소멸 여부, 채무 승계 여부를 판단할 준거법은 일단 일본법이 될 것인데, 여기에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 위 '법례' 제30조는 "외국법에 의한 경우에 그 규정이 공공의 질서 또는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때에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에 따라 준거법으로 지정된 일본법을 적용한 결과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위반되면 일본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법정지인 대한민국의 법률을 적용하여야 한다. 또한, 1962. 1. 15. 이후에 발생한 법률관계에 적용되는 구 섭외사법에 있어서도 이러한 법리는 마찬가지이다.
나) 이 사건에서 외국법인 일본법을 문언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원고들은 구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채권을 피고에 대하여 주장하지 못하게 되므로, 과연 그와 같은 결과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위반되는 것은 아닌지에 관하여 본다.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피고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피고가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실질적으로 승계하여 회사의 인적, 물적 구성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없었던 사실,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은 특별경리회사 내지 특별경리주식회사로 지정된 구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해 지정시 이전에 생긴 채무는 원칙적으로 구계정에 속하도록 하면서 원칙적으로 변제를 금지하고, 변제하더라도 구계정에서 변제하며, 특별관리인의 승인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일정 금액 한도 내에서만 신계정에서의 변제가 가능하게 제한을 가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다. 한편, 앞서 본 증거들과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면,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피고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비록 이의제기가 없더라도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알고 있는 채권자에 대한 절차관여권 보장을 위한 통지나 이들을 위한 일부 재산의 유보 등의 권리보호를 위한 절차적 또는 실체적인 장치는 거의 두지 아니하였고, 구 미쓰비시중공업 역시 구 계정에 대한 청산절차를 진행하면서 알고 있는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위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이, 패전이라는 비상상황에서 일본경제의 회생이라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채무자인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그 채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고 더구나 그 채무의 발생원인이 반인도적이고 고의적으로 자행된 불법행위에 기한 것에 이르기까지 채권자에 대한 거의 아무런 보호절차를 두지 아니하여 당시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가능성이 사실상 없는 대한민국 기타 피침략국의 국민 등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과 관련한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권리행사를 봉쇄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피고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피고가 구 미쓰비시중 공업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실질적으로 승계하여 회사의 인적, 물적 구성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없었음에도 전후처리 및 배상채무 해결을 위한 일본 국내의 특별한 목적 아래 제정된 기술적 입법에 불과한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 등 일본 국내법을 이유로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채무가 면탈되는 결과로 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비추어 용인할 수 없다.
일본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당시의 대한민국 법률을 적용하여 보면,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앞서 본 바와 같이 책임재산이 되는 자산과 영업, 인력을 제2회사에 이전하여 동일한 사업을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고 스스로 구 미쓰비시중공업을 피고의 기업역상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정 등을 종합하여 보면,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피고는 그 실질에 있어서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상당하여 법적으로는 동일한 회사로 평가하기에 충분하고(이와 같은 사정들에 의하면, 피고와 구미쓰비시중공업이 동일한 회사가 아니라거나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원고 등에 대한 채무승계를 부정하는 취지의 피고의 주장들은 신의칙에도 반한다고도 할 것이다), 일본국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구 미쓰비시중공업이 해산되고 제2회사가 설립된 뒤 흡수합병의 과정을 거쳐 피고로 변경되는 등의 절차를 거쳤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원고들은 구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도 행사할 수 있다.
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은 '전시보상'의 철폐로 인한 일본기업들의 급격한 재무구조 악화에 따른 도산을 막기 위한 응급조치로 입법된 것인데, 여기서의 '전시보상'은 일본기업들이 보상하여야 하는 채무가 아니라, 일본정부가 일본기업들에 대하여 보상하여야 하는 채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시보상의 철폐란 일본정부가 전시에 징발하거나 대가를 나중에 지급하기로 하고 기업들로부터 제공받은 전쟁물자에 대하여 일본국이 구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내 기업에 부담하여야 하는 보상을 중단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구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들이 강제동원,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하여 부담하는 배상채무를 면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므로 위 법률들을 전후처리 및 배상채무 해결을 위한 법률로 보는 것은 부당하고, 신설회사가 구 회사의 책임재산이 되는 자산과 영업, 인력 등을 승계받아 동일한 사업을 계속하는 사정은 부실회사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회사분할 또는 자산양도에 의해 신회사를 설립하는 경우에도 존재하므로 피고가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실질적으로 승계하였다는 사정만으로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피고의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고 스스로 지적하는 바와 같이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일본정부에 대한 채권은 전쟁물자의 제공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고, 그 채무자가 침략전쟁의 주체인 당시 일본정부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부실회사의 구조조정의 경우와는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즉, 위 각 법률은 당시 일본정부에게 전쟁에 사용할 전쟁물자를 공급하여 주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일본정부에 대해 채권을 보유하게 된 기업들이, 침략전쟁에 사용한 전쟁물자를 공급받기 위해 부담하게 된 일본정부의 채무가 탕감(철폐)됨으로 인하여 도산의 위험에 처하자 그 기업들의 재건을 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것이므로, 그 기업들이 위 법률이 정한 갱생절차를 거쳐 새로운 법인격을 부여받았다는 이유로 침략전쟁에 사용될 전쟁물자의 생산에 강제로 동원된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의무를 면제시키는 것을 문명국가에서 시행되는 도산법제 아래에서의 채무의 정리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 각 법률의 위와 같은 제정취지에 따라 침략전쟁의 주체인 당시 일본 정부의 채무를 탕감해주고도 도산하지 아니한 채 책임재산이 되는 자산과 영업, 인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일한 사업을 계속하고, 스스로도 구 기업을 기업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면서 재건되었다면, 적어도 침략전쟁에 사용될 전쟁물자의 생산에 강제로 동원된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의무를 부담하여야 할 주체로서의 실질적 동일성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봄이 상당하다. 따라서 피고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다. 피고의 그 밖의 주장들에 대한 판단
1) 이 사건 일본판결의 기판력에 반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가) 피고의 주장
원고들은 일본에서 이 사건 소와 동일한 청구원인으로 소송을 제기하여 이 사건 일본판결인 패소판결을 선고받고 그 판결이 확정되었는바, 이 사건 일본판결은 대한민국 민사소송법 제217조에서 정한 외국판결의 승인요건을 모두 갖추어 대한민국에서도 효력이 있으므로, 원고들이 다시 이 법원에 제기한 이 사건 소는 이 사건 일본판결의 기판력에 저촉된다.
나) 판단
우리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1항 제3호는 외국법원의 확정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점을 외국판결 승인요건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외국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 즉 외국판결을 승인한 결과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지 여부는 그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시점에서 외국판결의 승인이 대한민국의 국내법 질서가 보호하려는 기본적인 도덕적 신념과 사회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외국판결이 다룬 사안과 대한민국과의 관련성의 정도에 비추어 판단하여야 하고, 이때 그 외국판결의 주문뿐 아니라 이유 및 외국판결을 승인할 경우 발생할 결과까지 종합하여 검토하여야 한다(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참조).
살피건대, 원고들이 이 사건 소와 동일한 청구원인으로 피고와 일본국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패소판결을 선고받고 그 판결이 확정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으며, 갑 제1, 2호증의 각 1, 2의 각 기재에 의하면, 앞서 본 이 사건 일본 판결 중 제1심 판결에서는 원고 등에 대한 피고의 불법행위 책임 등의 인정에 대하여는 명시적인 언급 없이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판단하였으나, 그 항소심 판결에서는 근로정신대원으로 지원하였던 원고 등의 청구에 관하여, '원고 등에 대해 기망 혹은 협박에 의해 정신대원으로 지원시킨 것은 강제연행에 해당하고, 원고 등의 이 사건 공장에서의 노동 · 생활은 강제노동에 해당하며, 망 G의 사망과 원고 D의 부상은 모두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의하여 생긴 손해로 인정되며, 강제연행이 일본국의 감독 아래 행해지고, 강제노동 역시 구 미쓰비시중공업에 의해 일본국의 감독 아래 행해졌으며,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피고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동일성이 있고, 피고가 구 미쓰비시중공업의 위법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는 것은 신의칙상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피고가 원고 등에게 강제연행 · 강제노동에 관하여 불법행위책임을 부담할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 다음, 다만 제1심 법원과 마찬가지로, 청구권협정에 의해 원고들의 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판단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상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고, 부칙 제100조에서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며, 부칙 제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행헌법도 그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 · 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 · 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각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뾰놉)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앞서 든 증거들에 의하면, 이 사건 일본판결은 원고 등이 거주하던 한 반도를 일본 영토의 구성부분으로 보고 위 사건에 적용될 준거법을 외국적 요소를 고려한 국제사법적 관점에서 결정하지 않고 처음부터 일본법을 적용한 사실이 인정되고, 피고의 불법행위책임이 인정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항소심 법원의 판결에 의하더라도, 위 법원은 일본의 한반도 및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하에 일제강점기의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여자정신근로령이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전제로 당시 시행되던 매이지헌법 및 관련 법령에 근거하여 피고의 불법행위책임 등을 판단하고 있는 사실이 인정되는바, 결국 이 사건 일본판결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당시 일본국 정부가 '국가총동원법'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수행하였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국제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국제사회가 인식을 함께 하고 있고, 이런 침략전쟁 및 이를 수행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은 세계 문명국가들의 공통적인 가치인바, 이러한 사정을 더하여 보더라도 이러한 판결이유가 담긴 이 사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 일본판결을 승인하여 그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 사건 일본판결이 대한민국에서 승인될 수 있음을 전제로 원고들의 청구가 이 사건 일본판결의 기판력에 반하여 인정될 수 없다는 피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이 사건 일본판결, 특히 항소심 법원의 판결은 원고 등에 대한 강제연행 및 강제노동은 물론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피고 사이의 실질적인 동일성이 인정될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 후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의하여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것으로서,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의해 피고와 일본국의 배상책임을 부인하였을 뿐이고 근로정신대 지원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기망이나 협박이 개재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피고와 일본국의 불법행위책임의 성립 여지를 인정한 이상 국가총동원법이나 국민징용령, 여자정신대제도강화방책요강, 여자정신근로령 등이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이유로 외국판결의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문제되는 피고의 불법행위는 원고 등이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보내주고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등의 기망과 부모님이나 언니 등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의 협박을 하여 강제연행을 하였다는 것과 원고 등의 연령과 노동의 강도, 부실한 식사 제공과 외출 등의 제한, 급여 미지급 등의 제반 사정을 볼 때 원고 등을 강제노동에 종사시켰다는 점 등에 한정되지 아니하고, 주변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통치 아래에서는, 설령 개별적인 기망과 협박이나 열악한 조건 하에서의 노동의 강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고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해 원고 등을 전시동원 체제나 군수공장 가동에 편입시킨 행위 자체 또한 그 불법행위의 내용으로서 문제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전시동원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이나 국민징용령, 여자정신대제도강화방책요강, 여자정신근로령 등이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되는지여부에 관한 판단이 피고와 일본국의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결론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피고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2)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원고 등의 청구권이 소멸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가) 피고의 주장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은 1965. 6. 22.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에 체결된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바, 국가 사이의 일괄처리협정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체결로 원고 등의 피고에 대한 청구권은 이미 소멸하였다.
나) 판단
살피건대, 갑 제1호증의 1, 2, 을 제1, 2, 5, 16 내지 22, 35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국교정상화 등을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사이에 이루어진 이른바 '한일회담' 중 제5차 한일회담 이후부터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보상의 문제가 양국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국 정부 측에 사죄의 의미가 포함된 청구권이라는 형태의 보상을 요구하면서, 그 항목 중 하나로 생존한 피징용자가 입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와 고통에 대한 보상 역시 보상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일본국 정부는 피해자들의 명단 등 정확한 사실의 확인 없이는 보상을 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자에 대하여는 그 당시의 법적 지위가 일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인에게도 지불된 바 없는 보상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던 사실,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요구하는 개개의 청구권 항목들에 대해서는 양국 간의 현격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이 대한민국에 10년간에 걸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그 액수의 명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백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일본국 정부는 '대한민국에 대한 일본 측의 제공은 어디까지나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이러한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위와 앞서 인정사실에서 본 청구권협정의 내용 및 후속 조치상황 등을 종합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 즉 ①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대일평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 · 민사적 채권 · 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청구권협정 제1조에 의해 일본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 점, ②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국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 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원고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아니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참조).
나아가 국가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함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되는 점, 국가가 조약을 통하여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국제법상 허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임을 고려하면 조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조약 체결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 이외에 국민의 개인청구권까지 소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인데, 청구권협정에는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한 근거가 없는 점, 일본이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 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을 제정 · 시행한 조치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원고 등의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국 내에서 소멸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이다(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 참조).
따라서 원고 등의 피고에 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아니하였다 할 것이므로, 원고들은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피고에 대하여 위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할 것이다. 피고의 위 주장도 이유 없다.
피고는 위와 같이 청구권협정을 해석하는 것이 대법원 2012. 5. 10.자 2012다 12863 심리불속행 판결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위 판결의 사안은 청구권협정 체결과 관련한 대한민국 공무원의 행위가 불법행위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관한 것으로 이 사건과 사안을 달리하는 것이고, 심리불속행 판결은 상고이유의 주장이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 제4조 제1항이 정한 사유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이거나 또는 그러한 주장이 있더라도 원심판결과 관계가 없거나 원심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때에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위 판결이 청구권협정에 관하여 피고의 주장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는 판결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없으므로 피고의 위 주장 또한 이유 없다.
3) 소멸시효 또는 제척기간 주장에 대하여
가) 피고의 주장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원고들이 주장하는 불법행위일로부터 20년 이상의 기간이 경과하여 이미 소멸시효 내지 제척기간이 만료되어 소멸하였고, 원고들에게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 설령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원고들이 권리행사의 객관적 장애사유가 해소된 날로부터 신의칙상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원고들의 청구는 배척되어야 한다.
나) 판단
(1) 원고들의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채권의 소멸 여부에 관한 준거법 역시 앞서 본 바와 같은 이유로 대한민국법이 되는바, 현행 민법에 의하면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채권에 관하여는 소멸시효만이 규정되어 있으므로, 일본법이 준거법이라는 전제 아래서 제척기간이 도과되었다는 피고의 주장은 더 나아가 살필 필요 없이 이유 없다.
(2) 다음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피고의 주장에 관하여 본다.
eh 소멸시효는 객관적으로 권리가 발생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동안은 진행하지 않지만, 여기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라 함은 그 권리행사에 법률상의 장애사유, 예컨대 기간의 미도래나 조건 불성취 등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사실상 권리의 존재나 권리행사 가능성을 알지 못하였고 알지 못함에 과실이 없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유는 법률상 장애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대법원 2006. 4. 27. 선고 2006다1381 판결 등 참조). 다만, 채무자의 소멸시효에 기한 항변권의 행사도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또는 일단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하였거나, 채권자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의 변제를 수령하는 등의 사정이 있어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1. 6. 30. 선고 2009다72599 판결 등 참조).
Kh 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앞서 든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① 피고의 불법행위가 있은 후 1965. 6. 22. 한일 간의 국교가 수립될 때까지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고, 따라서 원고 등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판결을 받더라도 이를 집행할 수 없었던 사실, ② 1965년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나,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모두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청구권협정 제2조 및 그 합의의사록의 규정과 관련하여 청구권협정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포괄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견해가 대한 민국 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사실, ③ 일본에서는 청구권협정의 후속조치로 재산권조치법을 제정하여 원고 등의 청구권을 일본 국내적으로 소멸시키는 조치를 취한 사실(다만, 이 사건 일본소송에서는 원고 등이 피고에 의한 강제연행, 강제노동에 의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것은 청구권협정 당시 사실관계의 입증이 용이하며 그 사실관계에 기초하는 법률관계가 명확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채권이었다는 이유로 재산권조치법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피고의 주장을 배척하였다), ④ 그런데 원고 등과 같이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함에 따라 그 개인청구권,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서서히 부각되었고, 2005. 1.경 한국에서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된 뒤, 2005. 8. 26.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민관공동위원회의 견해가 표명된 사실, ⑤ 앞서 본 바와 같이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국은 일본과 교전상대국인 연합국과의 전후(뺨&) 관계를 정한 대일평화조약 제4조 (a)에서 연합국 측이한반도를 일본의 영토에서 배제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제반 문제의 정리를 전후 한반도에 들어서는 정부(시정을 행하고 있는 당국)와 일본과의 협의에 유보하여 둠에 따라 대일평화조약에 의한 전후 처리 문제를 완결 짓기 위한 취지에 한정하여 협상에 임하였을 뿐(일본국은 1952. 4. 28. 발효한 대일평화조약 제2조에 의해 비로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일본국의 교전상대국에 대한 국제법위반 책임을 정하고 있는 대일평화조약의 체결 당사자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과거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의 동원으로 인한 제반 문제를 청산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적은 전혀 없었던 사실, ⑥ 대법원은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2009다68620 판결을 통해 원고 등과 같은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 일본 판결은 대한민국의 공서에 반하여 승인될 수 없으며,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 어려워 청구권협정으로 원고 등과 같은 강제노동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고, 설령 그와 같은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이라고 판시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위 인정사실에 앞서 본 바와 같이 구 미쓰비시중공업과 피고의 동일성 여부에 대하여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본국 내에서의 법적 조치가 있었던 점, 위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원고 등과 같은 강제노동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되는지에 관하여 여전히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고, 청구권협정의 당사자인 일본국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과거 일본국 정부 등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현재까지도 청구권협정 관련 정보 공개조차 거부하고 있는 사정을 더하여 보면, 원고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원고들에게는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다만, 법령의 해석 · 적용에 관한 최종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위와 같은 청구권협정에 관한 해석을 천명한 이상,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 원고 등과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청구권협정의 해석 등과 관련하여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사유는 소멸하였다고 볼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고들이 위 대법원 판결의 당사자도 아니었고, 이 사건과 위 대법원 판결의 구체적인 사안이 동일하다고 보기 어려운 점에 비추어 볼 때, 원고들이 위 대법원 판결 선고일로부터 민법 제766조 제1항이 규정한 단기소멸시효인 3년 내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이상, 원고들로서는 그 장애사유가 해소된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원고들이 이미 1999년 일본에서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권리를 행사하였으므로 원고들에게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므로 보건대, 원고들이 2003. 4.경 이 사건 소의 청구원인과 동일한 내용을 청구원인으로 삼아 일본국 법원에 일본국과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던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으나, 이 사건 일본소송에서 일본국 법원이 청구권협정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포괄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하였던 종전의 견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상, 원고들이 이 사건 일본소송을 제기한 사정만으로는 원고들에게 그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소멸하였다고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이 사건 일본소송은 그러한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고 볼 것이다. 피고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토h 또한 피고의 이 사건 불법행위는 피고가 원고 등의 개인의 존엄성을 부정한 채, 일본국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 과정에 적극적으로 편승한 반인도적인 행위로서, 피고로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성하고 자신의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 등의 피해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와 적절한 배상을 해야 함이 마땅함에도 무려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고 회피하고 있는바, 이러한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여 원고들에 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일정기간 계속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커져가는 법률관계의 불명확성에 대처하려는 목적에서 인정되는 소멸시효 제도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원고들의 권리행사의 장애사유의 발생 · 존속에 피고가 기여한 바가 전혀 없음에도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항변권 남용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본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일본국은 한반도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의 동원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배상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절차 등을 제시한 적이 없고, 과거 일본국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동조하였던 피고 등의 기업들 역시 여전히 일본국의 위와 같은 태도에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사실(피고 스스로 '현재까지 원고들의 면담요구에 대해서도 수동적인 입장에서 면담에 응하였을 뿐이고, 피고의 법적 책임을 부정한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이미 결론이 났다는 판단이 피고의 입장'이라고 밝히고 있다)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위와 같은 장애사유의 존속에 피고의 기여가 전혀 없었다고도 할 수 없는데다가, 피고가 들고 있는 사정들을 고려하더라도 그동안 원고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원고들에게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는 앞서의 판단을 뒤집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피고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h 따라서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며 원고 등에 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위 주장은 결국 이유 없다.
4) 권리포기 주장에 대하여
가) 피고의 주장
태평양전쟁 전후 강제동원희생자로서 원고 E은 망 G에 대한 사망위로금을, 원고 A, B, C, D는 위로금 또는 의료지원금 등을 대한민국으로부터 수령하면서 '같은 사건에 관하여 같은 내용으로 법원에 제소하지 않는 등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 청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의 권리포기 약정을 하였으므로, 망 F의 손해배상청구권과 관련한 청구 이외의 피고에 대한 나머지 손해배상청구권은 위 권리포기 약정으로 인하여 모두 소멸하였다.
나) 판단
을 제42호증의 1 내지 5의 각 기재에 의하면, 원고들은 2008. 12.부터 2009. 6.까지 사이에 구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2010. 3. 22. 법률 제10143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부칙 제6조로 폐지된 법률이다. 이하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이라 한다)에 따라 설치된 태평양전쟁전후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위원회에 위 법률에 따른 위로 금 등(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 제4조에 따른 위로금, 같은 법 제5조에 따른 미수금 지원금, 같은 법 제6조에 따른 의료지원금 등을 말한다)의 지급을 신청하면서, 같은 법 시행령(2010. 4. 20. 대통령령 제22125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부칙 제3조로 폐지) 제16조에서 정한 별지 제13호 서식의 위로금 등 지급결정 동의 및 지급청구서를 위 위원회에 제출한 사실, 위 지급청구서 제3항에는 '신청인은 위로금 등을 받았을 때에는 그 사건에 관하여 같은 내용으로 법원에 제소하지 않는 등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 청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나 한편, 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 제1조는 '이 법은 청구권협정과 관련하여 국가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제4조는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의 유족에게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천만 원의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하면서, 다만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법 제4조 제2항에 따라 금전을 지급받은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34만 원을 뺀 금액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처럼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은 인도적 차원에서 강제동원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고, 청구권협정에 따른 후속조치로 제정된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법에 따라 보상받은 유족들까지도 위로금의 지급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여 보면,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이 정한 지원금은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대한민국이 일본국으로부터 수령한 무상자금의 분배 내지 집행을 위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고, 다만 청구권협정과 관련하여 국가가 인도적 차원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로 지급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따라서 위 지급청구서 제3항의 규정이 위로금 등을 지급받았을 때에는 일제강점기의 국외 강제동원과 관련한 권리를 포기하는 내용의 규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들어 원고들이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까지 포기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피고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라. 손해배상책임의 범위 등
1) 위자료의 액수
피고는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위하여 침략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과거 일본국 정부에 적극 협력하여 면밀한 계획 하에 기망과 협박 등을 통해 동원된 원고 등을 강제노동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원고 등은 나이 어린 여성들임에도 가족과 헤어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일본국이 패전할 때까지 오로지 피고가 강제하는 일정과 규범에 따라 노동에 종사하여야 했으며,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혹독한 노동에 강제로 종사하다가 망 G는 목숨을 잃었고, 원고 A은 우측 복부 부위를, 원고 C은 좌측 무릎 부위를, 원고 D 등은 좌측 2수지와 왼쪽 무릎 및 발목 관절을 각각 다치는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원고 A, B, C, D는 군위안부로 오해받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거나, 남편에게 자신의 과거를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채 60년을 살아와야 했다(이에 대하여 피고는, 근로정신대와 군위안부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대한민국 언론 등의 부적절한 용어의 사용으로 인하여 초래된 근로정신대와 군위안부와의 혼동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피고가 책임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든 증거들에 의하면, 일본국 정부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동원하였고, 그와 같이 동원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강제노동 등에 종사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의 여성들이 군위안부에 동원됨에 따라 동원된 여성들이라면 군위안부에 동원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게 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이러한 사정에 앞서 살펴 본 피고의 불법행위의 내용 등을 보태어 보면, 비록 위 원고들이 군위안부로 오인을 받게 된 자체에 대하여 피고가 어떠한 구체적인 잘못을 하였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피고의 불법행위책임에 따른 배상액을 정함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사정 또한 고려함이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가해행위의 불법성의 정도와 피고의 가담 정도, 원고 등의 연령 및 강제노동에 종사한 기간, 노동의 강도, 근로환경과 자유억압의 정도, 임금 등이 제대로 지급되지 아니한 점,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 등이 실제로 입은 피해의 결과와 그 피해의 정도, 불법행위일부터 당심 변론종결일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물가와 국민소득수준 등이 크게 상승하였고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법행위일부터 장기간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기간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가산하지 아니하는 사정, 기타 이 사건 변론을 통하여 나타난 제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면(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9다103950 판결, 대법원 2011. 7. 21. 선고 2011재다199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피고가 원고 등에게 지급하여야 할 위자료는 당심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강제노동 중 사망한 망 G에 대하여는 1억 5,000만 원, 망 G의 가족인 원고 E 본인에 대하여는 2,000만 원, 강제노동 중 부상을 입은 원고 A, C, D에 대하여는 각 1억 2,000만 원, 원고 B, 망 F에 대하여는 각 1억 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2) 상속관계
가) 망 G의 사망에 따른 상속관계
망 G의 사망 당시 그녀의 가족으로는 부모인 Q, AH과 오빠인 원고 E과 AI, 남동생인 AJ, AK 등이 있었고, 이후 Q은 1962. 4. 9.에, AH은 1968. 9. 20.에 각 사망한 사실은 앞서 본 바와 같다.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망 G가 1944. 12. 7. 미혼인 상태로 사망하여 당시의 우리나라의 관습에 따라 아버지 Q이 위 망인의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하였고, Q이 1962. 4. 9. 사망하여 그의 처인 AH과 장남으로서 호주상속인인 원고 E과 아들들인 AI, AJ, AK이 Q의 재산을 당시 시행되던 구 민법(1977. 12. 31. 법률 제3051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009조에 따라 1/10, 3/10, 2/10, 2/10, 2/10의 비율로 공동상속하였으며, AH이 1968. 9. 20. 사망하여 아들들인 원고 E과 AI, AJ, AK이 AH의 재산을 각 1/4의 비율로 공동상속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고 E이 망 G로부터 순차로 상속한 위자료채권의 액수는 48,750,000원[= 1억 5,000만 원 × {3/10 +(1/10 × 1/4)}]이다.
나) 망 F의 사망에 따른 상속관계
망 F가 2001. 12. 3. 사망하였고, 사망 당시 그녀의 상속인들로는 배우자인 원고 E과 3명의 자녀(N, O, P)가 있었음은 앞서 본 바와 같으므로, 원고 E이 망 F로부터 상속한 위자료채권의 액수는 33,333,333원(= 1억 원 × 3/9, 계산의 편의상 원 미만 버림)이다(원고 E은 3명의 자녀들과 상속재산 분할합의를 통해 망 F의 피고에 대한 위자료채권 전부를 원고 E에게 양도하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나, 갑 제9호증의 1 내지 4의 각 기재만으로는 그와 같은 상속재산 협의분할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위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3) 지연손해금의 기산일
원고들은 피고의 위자료 지급채무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부터의 지연손해금을 청구하고 있다.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서는 사실심 변론종결 당시까지 발생한 일체의 사정이 그 참작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위자료 산정의 기준되는 국민소득수준이나 통화가치 등도 변론종결시의 것을 반영해야만 하는바, 불법행위가 행하여진 시기와 가까운 무렵에 통화가치 등의 별다른 변동이 없는 상태에서 위자료 액수가 결정된 경우에는 그 채무가 성립한 불법행위시로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더라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으나, 불법행위시와 변론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행위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도 불법행위시로부터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현저한 과잉배상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법행위시와 변론종결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되어,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시의 통화가치 등에 불법행위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라도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 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변론 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9다103950 판결 참조).
이러한 법리에 비추어 보건대, 이 사건의 경우 불법행위 종료일인 1945년경 무렵부터 당심 변론종결일인 2015. 5. 13.까지 사이에 70년 이상의 장기간이 경과하고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으며, 그와 같이 변동된 사정까지 참작하여 당심 변론종결시를 기준으로 위자료의 수액을 결정하였으므로, 당심 변론종결일 이후의 기간에 대해서만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이것이 이 사건에서 피고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의 범위, 즉 위자료의 액수를 정함에 있어 피고의 불법행위 종료 이후의 원고 등의 사정을 함께 고려한 취지에도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원고들이 위 위자료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당심 변론종결일 전일인 2015. 5. 13.까지의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부분은 이유 없다.
마. 소결론
따라서 피고는 원고 A에게 1억 2천만 원, 원고 B에게 1억 원, 원고 C, D에게 각 1억 2천만 원, 원고 E에게 102,083,333원(= 망 G의 위자료 중 원고 E이 상속한 위자료 48,750,000원 + 원고 E 본인의 위자료 20,000,000원 + 망 F의 위자료 중 원고 E이 상속한 33,333,333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이 당심 변론종결일인 2015. 5. 13.부터 이 판결 선고일인 2015. 6. 2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의,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4.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이를 각 인용하고, 나머지 청구는 이유 없어 이를 각 기각할 것인바, 제1심 판결은 이와 일부 결론을 달리하여 부당하므로, 원고 E과 피고의 각 항소의 일부씩을 받아들여 제1심 판결을 위와 같이 변경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판사
홍동기
판사
안태윤
판사
김성준
1) 1938. 7. 7.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되면서 위 연맹의 산하조직으로서 말단 행정단위를 기본으로 하여10호 단위로 결성된 주민조직이다. 일제강점기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의 생활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고,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국민총력연맹으로 개칭되고 조직이 확대되면서1940. 12.에는 1개 보K10호) 당 30명 단위를 표준으로 전국적으로 38만여 개의 애국반이 결성되었다.
2) 제5조(민간인의 대일청구권 보상)① 대한민국 국민이 가지고 있는 1945년 8월 15일 이전까지의 일본국에 대한 민간청구권은 이 법에서 정하는청구권자금 중에서 보상하여야 한다.② 전항의 민간청구권의 보상에 관한 기준, 종류, 한도 등의 결정에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
3) 제2조 (신고대상의 범위)① 이 법의 규정에 의한 신고대상의 범위는 1947년 8월 15일부터 1965년 6월 22일까지 일본국에 거주한 일이있는 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일본국 및 일본국민에 대하여 가졌던 청구권 등으로서 다음 각 호에 게기하는 것으로 한다.9. 일본국에 의하여 군인, 군속 또는 노무자로 소집 또는 징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자
4)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망 F는 제1심 계속 중 사망하여 원고 E이 소송을 수계하였다.
5) 원고 E은 당심에 이르러 그 청구원인을 위와 같이 정리하였으나 이러한 주장에 부합하도록 그 청구취지를 감축하지는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