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란 실체가 아닌 허구다
라캉의 이론이 알려지기 이전까지 프로이트 심리학은 흔히 ‘자아심리학(ego psychology)’으로 불리는 입장에서 해석되었다. 자아심리학은 프로이트 제자로 후에 미국에서 활동한 하인츠 하르트만(Heinz Hartmann, 1894~1970)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자아심리학은 후기 프로이트의 정신기구 모델인 이드, 자아, 초자아의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자아심리학은 말 그대로 ‘자아ego’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강조한다. 이들이 자아에 주목하는 것은 원초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이드의 충동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역할이 자아에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아심리학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이론이 매우 명쾌하고 단순하며 실증적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정신을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세 개의 위상(토포스, topo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면, 인간의 정신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세 개의 위상이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이드와 자아가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있지 못할 때 정신적 질환이 나타난다. 가령 이드의 욕망이 지나칠 경우 그것은 히스테리로 나타나며 이드의 욕망이 지나치게 억압될 경우 강박증(obsession)이 발생한다.
자아심리학의 모델에 따르면 정신질환이란 곧 자아의 능력이 훼손된 상태이다. 따라서 자아심리학의 목적은 정신질환의 원인인 훼손된 자아를 치료하여 원래의 건강한 자아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체 기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치료나 수술을 통하여 그 기관을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자아 회복을 통한 정신질환의 극복이라는 자아심리학의 교의(敎義)는 매우 단순하고도 상식인 것으로 들린다. 그런데 라캉은 이 자아심리학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암적 존재라는 말에 빗댈 정도로 극단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이드의 욕망을 단순히 자아가 통제한다고 한다면, 자아는 매우 규범적인 것이 된다.
가령 이드에서 분출되는 욕망을 통제하는 방식은 성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단장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이드의 욕망을 통제한다면, 남성은 운동이나 명예욕의 추구로 이드를 통제한다. 이때 쇼핑이나 인형 모으기로 욕망을 통제하는 남성은 성 정체성을 의심받게 된다. 자아의 통제 방식은 항상 사회적으로 코드화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미 그 속에 규범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자아심리학이 강조하는 자아의 회복이라는 것은 기존의 규범에 복속시키는 과정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아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이데올로기적인 순응화의 도구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라캉이 자아심리학으로부터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구출해내고자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는 자아가 단순히 이드의 충동을 통제하는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아심리학에서와 달리 그는 자아를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라캉이 보기에 자아는 한 개인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자아란 일종의 가상적인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서 표현할 수 있는 자아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하나의 주체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란 스스로가 자신이라고 믿는 허구적인 가상에 불과하다. 라캉에게 주체란 사회적 담론이나 규범적 체계에 앞서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선험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담론 체계나 규범적 체계에 의해서 형성된, 혹은 그러한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자 결과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드의 충동을 억제할 때 언제나 어떤 특정한 주체가 된다. 가령 중년의 대학교수는 대학교수라는 지위에 맞추어 충동을 억제한다. 배기바지를 입고 싶은 충동이 있어도 그것이 대학교수로서의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충동을 억압한다. 그 순간 자신을 중년 남성 혹은 대학교수로 주체화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남성, 교수, 학생 혹은 인간 등의 어떤 것으로도 간주하지 않는다면 충동을 억압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 이드의 충동을 억압하는 자아를 갖는다는 것은 곧 어떤 특정한 주체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의 지위는 사회적 규범이나 담론에 앞서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학생으로 동일시하고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특정한 지위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남성과 오늘날의 남성은 다른 지위를 갖는다. 조선시대의 국가원수인 왕과 오늘날의 대통령도 서로 다른 지위를 지니는 다른 주체이다. 주체란 그것이 개입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임의의 지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가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아란 실체가 아닌 허구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