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복숭아꽃 / 이서빈
어느 생에선가 나는
너를 짝사랑 한 것이 분명하다
심장에서 꺼낸 휘파람으로 너의 집 울타리를 넘어가
불러보다가 혼자 타오르다가
눈썹 하나 까딱않는
너의 집앞을
왔다가 갔다가 서성이다가
문 한 번 두드리지 못하고 돌아와
애먼 개살구꽃잎만 똑똑 따던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지금도 내 심장은 개복숭아빛이다
잘 쪼개지지 않는 너의 가슴을 못 열어
벌레먹은 심장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매일 심쿵심쿵 주먹질한다
육시랄,
그놈의 짝사랑 언제나 끝날지
아직도 봄마다 눈알을 알알붉붉 찔러대며
심장을 날뛰게 만드는
너는 분명 어느 생에선가
내 젊은 봄날을
붉게 물들였던 짝사랑이였던 게 분명하다
- <애지> 2021년 가을호
* 이서빈 시인
경북 영주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달의 이동 경로』 『함께,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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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어 중에서 ‘개’라는 말은 그것이 명사이거나 접두사이거나 간에 나쁜 뜻으로 쓰인다고 할 수가 있다. 명사인 ‘개’는 포유류 갯과의 동물이지만, 성질이 사납고 행실이 못된 사람을 뜻하고, 다른 한편, 최고의 권력자나 나쁜 사람의 앞잡이를 뜻하며, 개백정, 개망나니, 개차반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개’라는 말이 일부 식물의 앞에 붙을 때는 개살구, 개복숭아, 개당귀, 개두릅 등에서처럼 ‘야생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개고생’이라는 말처럼 추상적인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개’라는 말은 참된 것과는 정반대로 쓰이며, 그것은 사물의 본질이나 도덕과 정의를 나타내기 보다는 그것을 훼손하고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뜻으로 사용된다.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는 인간이 개백정, 개망나니, 개차반이 될 수는 없고, 사물의 참된 본질을 간직하고 널리 이롭게 쓰이는 식물이 개살구, 개복숭아, 개당귀, 개두릅이 될 수는 없으며, 고생 끝의 행복이 찾아오거나 그 어떠한 성공보다도 더욱더 아름다운 실패를 ‘개고생’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복숭아는 장미과에 속하는 과수이며, 산간지역에 자생하는 야생의 복숭아를 말하고, 개복숭아의 열매가 익는 시기는 8~9월의 상순으로 황도와 백도와는 달리 크기도 작고 신맛이 강하다고 할 수가 있다. 이 과육이 작고 떫고 신맛이 강한 개복숭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지를 않았지만, 그러나 이 개복숭아에 유기산, 알코올류, 팩틴 등의 섬유질이 풍부하고, 다른 한편, 기침과 천식은 물론, 몸속 노폐물과 니코틴 배출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농가의 소득증대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참’은 올바르고 도덕적인 선에 맞닿아 있고, ‘개’는 더럽고 도덕적인 ‘악’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러나 이 ‘선악의 가치기준표’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며, 그것은 특정한 환경과 풍습의 미덕 아래 일면적인 진실만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개복숭아와 개당귀의 효능처럼 ‘개’라는 말이 ‘참’이라는 말을 발밑으로 깔아뭉개버리고, 도덕적인 선의 고지를 점령할 수도 있고, 최하천민의 주경야독의 개고생이 그 어떤 참된 고생보다도 더 나은 성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서빈 시인의 [개복숭아꽃]은 과연 무엇을 지시하며, 그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는 장미과의 야생의 개복숭아를 뜻하고, 두 번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즉, 개복숭아를 뜻하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지금도 내 심장은 개복숭아빛이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어떤 참복숭아보다도 더욱더 순수하고 깨끗한 참사랑을 뜻한다. “어느 생에선가 나는” 개복숭아를 짝사랑한 것이고, “심장에서 꺼낸 휘파람으로 너의 집 울타리를 넘어가/ 불러보다가 혼자 타오르다가/ 눈썹 하나 까딱않는/ 너의 집앞을/ 왔다가 갔다가 서성이다가/ 문 한 번 두드리지 못하고 돌아와/ 애먼 개살구꽃잎만 똑똑 따던” 날들이 있었던 것이다. 짝사랑은 상대가 외면하는 사랑이고 혼자만이 불타는 사랑이며,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심장에서 꺼낸 휘파람으로 너의 집 울타리를 넘어가 불러봐도 눈썹 하나 까딱않는 사랑, 너의 집을 왔다가 갔다가 서성이다가 문 한 번 두드리지 못하고 애먼 개살구꽃잎만 똑똑 따던 사랑----. 이처럼 짝사랑은 혼자만이 불타는 사랑이며, 미치광이의 사랑이고, 그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는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나 이서빈 시인은 “육시랄/ 그놈의 짝사랑 언제나 끝날지/ 아직도 봄마다 눈알을 알알붉붉 찔러대며/ 심장을 날뛰게 만드는”이라는 시구에서처럼, 왜, 그렇게 짝사랑을 잊지 못하며,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지금도 내 심장은 개복숭아빛이다”라고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짝사랑에 대한 그의 집념의 강도 탓이겠지만, 그의 언어는 너무나도 도발적이고 가치전복적이며, 대폭발 직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개복숭아는 참복숭아와는 다른 나쁜 것이며, ‘육시랄’은 몸을 여섯 토막으로 자른다는 뜻으로 더욱더 고약하고 몹쓸 사건을 지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짝사랑은 개복숭아에 대한 사랑이며, 그 언제 끝날지도 모를 “내 젊은 봄날을/ 붉게 물들였던” “육시랄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개복숭아꽃]은 그의 짝사랑의 객관적 상관물이며, 그는 개복숭아를 위해 살고 개복숭아를 위해 죽겠다는 이상적인 신념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짝사랑을 [개복숭아꽃]으로 표현함으로써 오늘날의 개복숭아의 효능처럼 더욱더 그의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의 [개복숭아꽃]은 참사랑의 다른 표현이며, 그의 도발적이고 폭발 직전의 언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즉, 그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반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개복숭아의 ‘개’는 참복숭아의 그것이 되고, 그의 짝사랑은 더없이 순수하고 이상적인 사랑이 된다. 도화꽃 만발한 봄날, 나는 나의 참사랑을 찾아 나섰던 것이고, 아직도 나는 그 참사랑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 참사랑, 즉,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분노가 자기 자신의 사랑을 개복숭아꽃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러나 개복숭아빛 심장으로 뛰고 있는 내 참사랑은 아직도 봄마다 눈알을 알알붉붉 찔러대며, 온 산천을 더욱더 붉디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개복숭아꽃]은 짝사랑이 아닌 이상적인 사랑이며,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고귀하고 거룩한 참사랑이었던 것이다.
이서빈 시인의 시는 대단히 역사 철학적인 사유의 산물이며, 이 역사 철학적인 사유가 그의 열정과 만나 만인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꽃은 아름다움의 진수이며, 꽃은 인간의 이성 이전에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 정서적 충격을 천리, 만리 울려 퍼지게 만든다. 개복숭아꽃이 참복숭아꽃이 되고, 짝사랑이 이상적인 사랑으로 승화되는 이서빈 시인의 시는 그만큼 그의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 반경환(시인, 평론가) 명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