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향매(杜香梅)
원제: 퇴계의 여자
그림 : 石泉 白梅
퇴계 선생은 마흔여덟 살이 된 명종 3년(戊申, 1548) 음력 정월에 경직에서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 군수로 가게 되었다. 이때 단양에는 두향(杜香)이라는 열여덟 살 어린 관기가 있었는데 청초한 자색에 거문고며 시며 서화에도 능하고 특히 매화와 난초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녀는 매화처럼 고고한 퇴계의 인품과 도저한 학문을 흠모하여 수청 기생을 자청하였고, 퇴계는 두향의 재색을 미쁘게 보았다. 이때 퇴계는 독신이었다. 스물일곱 살 때 부인과 사별했고, 재취한 둘째 부인마저 단양 군수로 오기 이태 전에 세상을 떴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더니, 단양에 온 지 두 달째인 음력 이월에 스물두 살인 둘째 아들이 죽었다는 기별을 고향 집으로부터 받았다. 부인과도 사별하고 아들마저 잃어버린, 이 외로운 초로의 군수에 대해 당시로서는 여자라면 한 번쯤 연모의 정을 가져 볼만도 했겠다.
두향이 그러했다. 차차 은혜하는 마음이 깊어 갔다. 퇴계한테 몇 번이나 선물을 바쳐 애틋한 마음을 전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자 두향은 끼니를 거르고 잠을 설치다가 궁리 끝에 퇴계가 뭘 좋아하는지를 아전한테 물었다. 매화를 혹애한다(我生多癖酷好梅)는 사실을 알아내고서는 그 동안 푼푼이 모은 돈을 털어서 팔로(八路)에 사람을 풀어 좋은 매화를 구했다. 매화를 구한 그 돈이 어떤 돈이란 걸 퇴계가 왜 몰랐겠는가? 그러한 나무마저 차마 야박스레 물리칠 수 없었던 퇴계는, 그 매화를 동헌 앞에 심고 말았다. 늘 가까이서 손발이 되어 수청 드는 어린 여자가 가련하게도, 타오르는 정념에 몸을 사르는데도 그 불길에 휩싸이지 말아야 퇴계인가?
퇴계는 이때 공사간에 근심이 많았다. 그는 스무 살 때 침식을 잊고 『주역』공부에 몰두하다가 일종의 소화불량증인 ‘몸이 파리하고 곤한 병’(羸悴之疾)을 얻은 후로는 늘 병치레를 하느라 빤한 날이 없었는데, 이때 작금에 겹친 가족의 불행으로 해서 심기가 한층 우울해진 데다가 군수로 부임하자 단양 고을에 기근마저 들어 곤란하고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그 당시에 그가 스스로 토로하기를, “황정(荒政)을 펴는 일밖에는 늘 근심으로 마음이 답답하여 문을 닫고 세월을 보낸다.”(荒政之外恒悒悒然閉戶度日)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단양의 빼어난 산수에 매료되었다.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일로 때로 개울과 산 사이를 왕래하다가 기승(奇勝)한 곳을 보게 되었다.”(顧以振救饑民之時出入往來溪山間因得窺其勝)라고 했다. 구담(龜潭), 도담(島潭), 불암(佛巖), 이락루(二樂樓), 화탄(花灘) 등이 부임한 그 해 음력 유월에 그가 지은「단양산수 놀 만한 곳의 기록」(丹陽山水可遊者續記)이라는 글에 나온다. ‘단양팔경’은 이때에 정한 것이라 한다.
답답한 마음 둘 데 없던 퇴계가, 굶주린 백성을 연민하며 시름을 달래며 청계(淸溪)와 백석(白石) 사이를 병든 학처럼 넘나들 적에 그의 곁에는 청순가련한 어린 기녀 두향이 부축하고 따랐지만, 꽃피자 바람이 그르칠 걸 퇴계도 두향도 미처 근심이나 하였으랴!
퇴계가 단양군수로 온 그 해 음력 시월에 그의 넷째 형 대헌공(大憲公, 名:瀣)이 충청 감사로 부임했다. 단양이 그 관할구역 안에 있으므로 이른바 상피(相避)에 해당되는지라, 퇴계는 떠나길 자청해서 풍기 군수로 가게 되었다. 퇴계를 만난 지 겨우 아홉 달 만에 두향은 퇴계를 눈물로 보내야 했다. 이때 퇴계는 동헌 앞에 심어 놓았던 두향이 준 매화나무를 옮겨다가 고향땅 도산에 심었다. 퇴계로서는 그 매화나무를 나무로만 대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퇴계가 떠난 뒤 두향은 어렵게 주선하여 가까스로 기적(妓籍)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퇴계와 자주 거닐던 강선대 아래에 초옥을 짓고 수절의 세월이 흘러 22년, 선조 3년(庚午, 1570)에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퇴계만을 추모하며 퇴계를 만났던 단양 땅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생을 마쳤다. 퇴계와의 애틋한 추억이 서린 곳일까, 그녀의 유언에 따라 강가의 ‘거북바위’(龜岩) 곁에 묻어 주었다. 세월이 흘러 사백 년쯤 뒤 충주댐이 건설될 때 퇴계의 15세손인 이동준(李東俊)의 주선으로 1985년에 지금의 신단양 제미봉 산기슭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한편 두향이 선물한 매화는 도산서원에서 한시절 고결한 청분(淸芬)을 거느리다가 오래 전에 죽고 말았다. 세상에서는 이 매화를 ‘도산매’라 하지만 나는 ‘두향매’라 한다. 다행이 그 자목(子木)이 서원의 광명실(光名室) 서고 앞에서 음력 2월 중순이면 꽃을 피웠는데, 아주 작은 순백의 홑꽃이었고 향기가 무척 맑은 것이 이 매화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이 자목마저 1996년에 고사했다. 그 후 다시 두향매의 손자 격인 다른 자목을 도산서원 옆 뜰에 심었으나 이 또한 몇 해만에 죽고 말았다. 도산서원에, 옛날의 그 두향매는 애석하게도 혈통이 끊어진 셈이다. 공교하게도 언젠가 도산면의 이윤항이란 사람이 산에 있는 개살구나무의 대목(臺木)에 두향매의 자목을 접목하여 분재를 만들었는데 이걸 안동시에 사는 이영철이란 사람이 갖고 있다고 한다. 수세도 강건하고 해마다 양력 11월 말을 전후해서 순백의 꽃을 피운다고 한다. 뿌리는 탐탁하지 않지만 그것이나마 도산서원에 심었으면 좋겠다.
두향과 퇴계의 관계가 설령 사실이 아니라 한갓 고로상전(古老相傳)의 야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가 사백여 년이 지난 이 시대에 와서도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까닭이 뭘까? 지금도 단양문화원에서는 해마다 5월이면 두향제를 열고 퇴계의 후손이 묘사를 지낸다고 한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낙화가 있는 줄을 알게 한다.
(글쓴이 : 박주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