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심 기관총(Mzxim Gun)






발명가 하이람 맥심(Hiram Stevens Maxim) 경의 이름을 따온 기관총으로, 최초의 자동 발사 기관총이다.
현대적인 기관총의 개념을 정립한 혁명적인 무기이며 전장의 양상을 바꾼 역사적인 기관총으로 평가된다. 기관총뿐만 아니라 모든 자동 화기들의 원조이다. 뒤에 나온 자동소총, 자동권총, 기관단총 등도 결국은 맥심 기관총의 개념을 응용해서 만들어진 무기들이다. 다만 모터의 힘으로 격발/재장전/탄피배출이 되는 개틀링 방식의 M61 기관포, M134 미니건 등은 예외이다.
번역은 맥심 기관총이라고 하나 이 총이 나오던 당대에는 기관총(Machine gun)이란 분류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영어로는 그냥 맥심 건(Maxim Gun)으로 불린다.
사실 맥심 기관총 이전에도 기관총은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기관총이라 할 수 있는 개틀링 기관총은 1861년에 개발되었다. 다만 개틀링 기관총은 수동으로 직접 손잡이를 돌려줘야 연속으로 발사되는 방식이었다. 그밖에도 급탄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원래 미국인이었던 맥심이 친구들과 취미로 사격을 하던 도중 격발시 총의 반동 때문에 어깨가 아파오자, 이를 착안해서 격발 시의 반동으로 재장전을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다. 마침내 1884년에 맥심 기관총 프로토타입의 개발이 완료되었고, 이때 맥심은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총으로 아름드리 소나무를 쓰러트리는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맥심은 가스압 재장전에 관련된 특허도 취득했다.
처음에 맥심 기관총을 눈여겨 본 것은 유럽이었다. 1886년부터 유럽의 아프리카 원정군에, 1889년부터는 싱가포르 방면의 영국군에게 정식으로 납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9년에 맥심은 영국으로 귀화했고, 1901년에는 기사 작위도 받았다.
맥심은 기관총 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발명하였는데,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비행기를 만들어내기 이전에 증기 엔진으로 구동되는 독자적인 비행기를 설계하였지만 결국 비행에는 실패하였다고 한다.
현대화된 최초의 기관총이었으니 만큼 많은 국가들에서 도입하여 사용했다. 당시에는 핸들을 돌리는 개틀링 기관총이 기관총의 전부이던 시절에 이는 획기적인 방식이었고, 이후로 이에 자극받아 여러 다른 개발자들에 의해 경량 자동 기관총들이 속속 개발되고, 독일의 MG08, 영국의 빅커스 기관총, 러시아의 PM M1910 등의 파생 지원화기들도 나와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시절 마식 기관포로 들여오긴 했지만 국산화가 되진 못했다. 대신 호치키스 기관총을 국산화(보식 기관포)하는데 성공하였고, 보식은 3년식 기관총, 92식 중기관총 등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우리에겐 걱정이 없다네. 맥심 기관총이 있으니까. 하지만 저들한테는 없지. - 영국군 사이에 유행했다는 군가
특성상 기존의 총기들에 비해 간단하게 많은 화력을 순식간에 쏟아낼 수 있어서 잘 자리잡은 기관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물건이기도 하다. 그때까지의 서구 군대는 당연히 원주민들보다는 선진화된 무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총기의 발사속도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일당백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아프리카의 줄루족이나 남아메리카의 마푸체족은 그런 상황 속에서 용맹함을 발휘하여 19세기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틀링 기관총과 함께 맥심 기관총이 도입되면서 서방 군대가 압도적인 화력우세를 점해 식민지 원주민들을 확실히 제압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남아프리카의 마타벨레 족이 영국군과 벌였던 전쟁에서의 결과를 들 수 있다. 1893년 영국군 50명이 장비한 기관총 4정의 위력에 영국군 진지 1km 내로 단 한 명도 진입하지 못한 채 5천 명이 전사했고, 3년 뒤의 전쟁에서도 영국군은 전사자 400명을 낸 것에 비해 5만명이나 죽어나가는 교환비 1:125라는 참혹한 결과를 마주해야 했다. 당시 마타벨레족의 왕인 로벤굴라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전사 8만 명과 영국제 마티니 헨리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한 전사 2만 명을 거느릴 만큼 세력이 왕성했다. 하지만 마타벨레족은 총의 사격법을 제대로 몰라서 아무렇게나 쏘아대어서 명중률이 매우 낮았다.
앞의 마타벨레 족보다는 훨씬 근대화가 잘되었던 수단의 마흐디군도 기관총 앞에서는 갈려나갔어야 했다. 옴두르만 전투에서, 기관총이 버티고 있는 곳으로 돌격했던 마흐디군은 52,000 명 중 1만여 명 가량이 즉사했던 반면, 영국군은 고작 47명의 전사자를 내며 1:200을 넘는 무지막지한 교환비를 냈었다.
기관총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라는 것이 실전에서 증명이 되자 슬슬 이 무기가 유럽인들끼리 싸우는데 쓰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눈치 채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들은 맥심의 답변은 너무나도 이상적이었다.
“아뇨, 전쟁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No, it will make war impossible.)”
- 1893년 영국의 한 과학자의 질문 “이 총으로 전쟁이 더 끔찍하게 되지 않겠는가?”에 대한 하이람 맥심의 답변
앞서서 개틀링건을 만든 리처드 조던 개틀링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실제로는 맥심의 답변대로 전쟁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결국 이 기관총을 대량으로 운용하던 유럽의 군대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자신들이 비웃던 식민지 원주민들처럼 무모하게 적군의 기관총 앞으로 돌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이 양쪽이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참호전이었으며, 가장 끔찍한 사례가 바로 솜 전투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대항책으로 연구된 것들이 바로 전차, 항공기, 독가스 등이었다. 그리고 맥심의 생각이 현실이 되는 건 좀 더 강력하고 확실하게 모두가 죽을 수 있는 무기가 개발되고 나서였다. 다행히 핵무기는 기관총과 달리 제대로 된 전쟁에 쓰이지 않았으므로 맥심은 어느 정도 상호확증파괴 이론에 대한 예언을 한 셈이다.
현대의 일반적인 총기는 노리쇠가 전진하며 약실에 탄을 넣고 격발 후 후퇴하며 탄피를 빼는 식인데 노리쇠가 전진하려면 림이 탄띠에 걸리므로 맥심에서는 이 방식을 쓸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탄띠가 약실 바로 위에 들어가서 노리쇠가 탄을 탄띠에서 뒤로 빼낸 뒤 아래로 내려 다시 전진해서 다시 약실에 넣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동일한 노리쇠 하나가 더 그 아래에 붙어있어 탄피 역시 이와 동시에 역시 약실에서 뒤로 빠져 아래로 내려가 배출되는 식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총 옆에서 보면 장전손잡이가 축을 중심으로 90도 정도 오르락내리락하며 회전하는 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또한 발열관리에 유리한 오픈 볼트 방식이 보편적인 현대의 기관총과 달리, 이 기관총은 클로즈드 볼트 방식을 사용한다. 이는 수랭식 냉각의 특성상 물만 충분하다면 과열의 우려가 사실상 없어서 클로즈드 볼트 방식을 사용하여도 지속사격능력에 별다른 지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형은 수랭식으로, 앞의 긴 원통이 물을 담는 통. 그외에도 공랭식의 요철 냉각핀을 총신에 달거나 총신 자체를 교체하는 모델도 만들어졌다. 이는 이 기관총이 개발되었던 당시의 운용교리가 지금처럼 분대와 함께 이동하며 분대를 지원해주는 ‘이동 사격’이 아니라, 주요 사격지점에 자리를 잡고 지속사격으로 부대를 지원하는 개념으로 운용되었기 때문. 신뢰성과 성능은 시대를 감안해도 대단히 우수하다.
맥심의 영국군용 버전인 빅커스 기관총의 경우 1차대전 당시였던 1916년 12시간 연속 사격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 바가 있다. 냉각수 보충과 총열교체를 위해 중간중간 중단하기는 했지만 다른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10정의 기관총이 총열 100개를 교체해 가며 1백만 발을 지속 사격했다고 하니 한 정이 초당 2.3발을 쏜 셈이다.
여기에 더욱 괴물 같은 일화가 남아 있는데 1963년 퇴역하기 전 재고탄약이 잔뜩 남아있자 1정으로 5백만 발을 쏘는 실험을 한 적까지 있다. 한 시간 반마다 총열을 갈아 가며 7일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쏴갈겼는데 단 한 건의 기능고장도 발생하지 않았고 총에도 아무 이상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