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첫 우승 후, 당시 나우누리에서 활동하시던 팬 한분이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 하이라이트 영상을 직접 만드셨습니다. 모든 경기 1회 첫타자부터 9회 마지막 타자까지의 결과물을 모아놓은 영상입니다. [1번타자 2루땅볼 -> 2번타자 삼진 -> 3번타자 중견수플라이].... 이런 식으로 해당 타석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볼카운트 싸움은 보이지 않지만 경기 전체의 큰 흐름은 복기할 수 있는 영상입니다. 당시 그 팬분은 이 영상을 CD에 담아 일부 팬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 CD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느낌은 두가지 였습니다. 첫번째는 [대단하다, 이걸 어떻게 수작업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두번째는 [우승 한번만 하고 말 것도 아닌데 뭐 굳이 이렇게까지 만드셨을까?] 하는 마음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CD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 눈앞에서 재생됐고, 몇년 전에는 동영상 파일로 변환되어 지금도 제 노트북과 아이패드에서 가끔 재생됩니다. 지난해 개막전 부산MT를 갈때 KTX에서도 그 영상을 봤습니다. 그리고 어제, 그 영상과 비슷한 영상이 MBC스포츠플러스에서 방영됐죠.
우승 동영상을 보면 참 재밌습니다. 지금은 팀을 떠난 정민철 송진우 장종훈 강석천의 '잘 나가던' 모습도 재밌고, 조경택이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쳤다든지, 당시 롯데 유격수가 김민재였다든지 하는 놀라운(?)에피소드를 확인하는 것도 참 재밌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지고 스스로 한심하게(?)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화면이 벌써 16년 전 영상이기 때문입니다.
카페 회원들끼리 만나서 술을 마시면, 예전에는 야구 얘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야구 얘기를 잘 안 합니다.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만나서 친해진 사람들이니까 야구 얘기 말고도 공통의 화제거리가 많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이유는 좀 슬픕니다. 술 먹고 나오는 얘기가 맨날 [장종훈 홈런왕 하던 얘기] 아니면 [로마이어 3루타 친 얘기] 뿐입니다. 그래서, 그 옛날 야구 얘기가 지겨워서 이제는 안 합니다. 류현진이나 김태균 얘기, 심광호가 오승환한테 홈런 친 얘기도 종종 합니다만 아무래도 [로마이어 3루타] 얘기 만큼 재밌지는 않더라고요.
만약에 우리가 삼성 팬이었으면, 85년 통합우승이나 02년의 한국시리즈 우승 얘기를 지금까지 하지는 않을겁니다. 이만수가 홈런왕 하던 얘기를 지금까지 울궈 먹지도 않겠죠. 04년 연장혈투, 06년 배영수, SK왕조를 무너뜨린 11류중일, 극적인 뒤집기로 우승한 13년이나 14년 얘기를 많이 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옛날 얘기는 별로 안 하고) 지금 얘기, 아니면 내년 시즌 얘기를 많이 할 겁니다.
제가 아는 삼성팬 한 사람이 그러더군요. [요즘은 직관 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한국시리즈때만 야구장에 간다]라고요. 08베이징이나 09WBC 이후에 한화팬이 된 사람면 머리털 나고 한번도 구경 못했을 한국시리즈가 누구에게는 '바쁘니까 그냥 가을에만 보러 가면 되는' 연례행사인겁니다.
어제 엠스플을 보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민철의 90년대는 정말 뜨거웠습니다. 특히 99정민철을 향한 올드팬들의 '가슴 짠한 고마움'을 그 시절 야구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잘 모를겁니다. 올드팬들이 구대성을 잊지 못하는 이유, 해태에게 번번이 무릎 꿇던 빙그레의 아픔을 결국 제 손으로 직접 끊어낸 송진우-장종훈에 대한 소중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글스 역사의 뼈대고 중심 축이죠. 하지만 문제는, 그 뼈대와 축 위에 아무것도 쌓아 올리지 못하고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그것만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이어 3루타 / 구대성의 1승 3세이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해태 선동열과 롯데 염종석에게 번번이 깨졌던 한국시리즈에서 우리 에이스가 무려 2승을 거뒀다는 점, 2승 1패로 쫓기는 한국시리즈에서 무려 8회 2사까지 공을 던졌다는 것은 지금도 짜릿한 쾌감이고 행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1999년 가을의 뜨거움만 추억하고 있다는 것은 좀 심술이 납니다. 엄밀히 말하면, 가을야구의 주인공이라면 그 계절은 언제나 뜨겁습니다. 99년의 우리만 뜨거웠던 것이 아닙니다. 2013년과 2014년에도 뜨거웠던 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머나먼 추억 속에서만 그것을 꺼내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한화팬들이 모여 꽐라가 되었을 때는 로마이어 얘기가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얘기를 하게 되길, 그리고 가능하다면 99년의 가을을 만들어냈던 선배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그때는 다시 함께하게 되길 바랍니다. 뜨거웠던 가을의 그 벅찬 두근거림을, 언젠가 그 시절 선배들과 다시 한 번 느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아마도 올가을에 그때의 그감동과전설이재현되지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봄니다.꼭 그렇게될거라고 믿고싶슴니다.
저는 가득염 상대로 터진 최익성의 홈런이 기억에 남네요.
하긴 99시즌 우승전 아무도 한화의 우승을 예상한사람은 없었다고하니 뭐 당장 올시즌 못할거라는 법도 없다고봐요. 다만 한번 지켜보는 맘으로 차분히 기다려보죠.
팬분께서 만드셨다는 영상 정말 보고싶네요...
전 직관했던 두산과의 플옵 3차전 장종훈 만루홈런이 더 기억나네요..
코시에서는 로마이어의 3루타와 함성유도, 그리고 남희석씨의 환호가 기억나네요ㅎ
올해 힘 한번 내보자고요.
99년엔 군대 있을때라 야구본 기억이 전혀없네요 뉴스에서 대성형님 마지막 환호하는 모습만...나도 언젠간 그런 장면을 볼수있겠죠!!!???
아쉬웠지만 06년도 한국시리즈의 심광호는 쓰리런홈런도 기억에 남네요~~ 한국시리즈 가본지도 벌써 9년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