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공로가 크다면 인간들이 율법을 만날 때에 우리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주인이더라(롬7:17)는 사실을 알고 미리 공지한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한 후에 서로 부끄러워하여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었는데 그들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 하시니
비로소 하와가 속은 사실도 드러나고 뱀의 꾐도 생각이 났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나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든 것이 결국 선악과의 독성이며 죄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죄를 가진 채로 예수를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복을 받자고 하든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가 되어 주의 영광을 드러내자고 열심을 냅니다.
아뇨. 인간은 가능성의 열쇠꾸러미를 다 사용해 보겠지만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Q. 신령한 율법이 왜 나를 죽이는가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A. 율법에 대해 완전히 망해야 비로소 항복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나를 완전히 파멸시켜 버렸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바울은 그게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그렇게 했다고 발견했습니다(롬7:17)
그러므로 언제나 나와 죄를 분리시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귀란 놈은 죄를 심어 놓고 범죄를 하면 참소를 하여 우리를 녹아웃을 시킵니다.
옛날 참새를 잡으려고 줄을 매서 틀을 놓고 그 밑에 모이를 갖다 놓는 형국입니다.
참새는 모이를 먹으려다가 망했다고 생각할 뿐 길게 늘어진 끈을 보지 못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 결과를 재구성해 보세요. 그게 마귀의 궤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십자가 저쪽에 있을 때도
나와 죄 두 존재였고 그리스도 안에 십자가 이쪽에 있는 지금도 두 존재입니다.
저 쪽에 있을 때는 나와 죄가 양립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쪽으로 넘어오면 속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대립이 됩니다.
우리는 어차피 이중인격자라는 걸 인정하고 이 둘을 분리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대칭으로 설정해 놓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바울이 전문가입니다.
내가 죄를 가지고 있으면 죄가 나의 주인이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따라서 자세히 보면 죄의 종과 그리스도의 종의 차이가 분명히 납니다.
왜냐하면 죄도 능력이고 그리스도도 내주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주인의 권세가 있어 죄가 시키는 대로 하면 사망의 월급을 받습니다(롬6:23)
죄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나의 욕심과 의욕으로 열심을 내서 한 번 해 보겠다고 하는데
탐심을 이뤄 우상 숭배를 하게 해서 결국 나를 사망으로 떨어뜨리고 맙니다.
아마 현재의 교회의 신자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거짓으로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이 교회에서 돋보이게 됩니다.
그건 바로 외식에 세련된 언행의 신자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와 같이 원죄를 가진 인간의 육신이란 어차피 망할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유롭게 해서
다른 이 곧 그리스도에게 갖다 붙이는 길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롬11장은 접붙임을 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돌 감람나무들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전에는
하나님의 준엄함 아래에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롬11:22)
죄에서 구원은 이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오직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을 염두에 두고 1장부터 전개해 가는 것임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1장부터 서술한 말씀을 통해 어떻게 8장의 고지에 우리를 올려놓는가 하는 겁니다.
그걸 알고 나서 아하! 드디어 내가 롬8장 안에 있구나 하는 확증이 와야 합니다.
롬8장 안에서는 큰 자 작은 자만 있을 뿐이지 거기선 되었다 안 되었다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롬8장 안으로 안내해서 그 안으로 이끌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 이 안에 집어넣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로마서는 전개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이라는 구원의 텐트 속에 기어이 끌어들이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의 의도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전 세계의 역사를 알고,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도 승리하며 살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의도입니다.
Q, 우리가 율법에 문제제기를 할 수가 있는가요?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A. 이로보건데 하고 말하는 뜻은 실상은 율법이 잘못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긍정과 부정이 함께 있듯이 용도가 문제입니다.
율법과 계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알고 그리스도 안으로 도피하도록 하는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다시 설명합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7:13)
여기서 죄라는 개념은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기울고 있는가? 그 성향을 말하는 겁니다.
이 죄의 성향이 무섭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나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내 속에 잠복해 있다가 그럴만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면 밖으로 분노로 표출됩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신림동 칼부림사건의 가해자와 같이 인간 속에 있는 악성입니다.
그런 것이 좁은 의미에는 죄의 성향으로 개인적으로 밖으로 나타나고,
넓은 의미에선 모든 인간 안에 다 그런 죄와 악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걸 율법이 우리에게 알도록 말해 줍니다. 완전히 썩어 쓸모없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만약 나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며 하나님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 타락한 죄인임을 알게 하여 구원하는데
절대적인 도우미가 되는 율법이 전혀 잘못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적용이 되고, 공식화 되어 그걸 풀어 보므로, 실제로
생애에 적용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걸 내가 안다고 해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그렇다고 하더라는 말씀대로 그 그렇다 하더라는 말씀을 안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계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넌 그런 인간이다.
알기만 하면 뭐 하냐 안 되는 것 아니냐. 속에 있는 탐심이 달려들면 뜀박질하는
인간이 아니냐, 그렇게 하면 안 되는걸 알아라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완전히 불도저 앞에 삽질을 하고 있는 거죠.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말입니다.
‘율법이 나를 죽게 만들어 버렸다’ 이 말은 철저한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나오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얌전한 죄인은 평생 못 고쳐요. 왕창 망해야 비로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그리스도 안으로 귀순합니다.
고난으로 인해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 완전히 풀이 죽어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