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진은 의쟁투위원장으로 폐업사태를 주도하다 현재 구속된 상태죠.
민경찬은 현재 법의학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아파요닷컴의 대표요 최근 "히포크라테스의 배신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언론의 하이라이트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과연 이들은 지금 위치까지 어떠한 삶을 살았고 누가 참된 삶을 살아왔을까요? 너무나 대조적인 삶을 두 사람은 살아왔고 현재 둘의 위치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상태에 놓여 있읍니다.
현재까지 이 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옮기니 독자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둘의 공통점을 보면 의대생 시절에 유급을 당하였고 레지던트라는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것이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그 과정이 사뭇다릅니다.
먼저 신상진은 의대생 시절 운동권으로 노동운동하다가 집시법위반으로 투옥되어 그 충격으로 홀어머니가 쓰러져 임종하게 됩니다.
이후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되고 이들의 삶을 위해 수련과정을 밟기보다 현장에서 노동자를 위한 진료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는 한편 동남아 외국인을 위한 진료를 시행하는 한편 틈틈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시민단체에 그가 번돈을 기부해왔읍니다.
그러다 의쟁투위원장을 맡은 후 정부의 잘못된 의약분업에 대한 투쟁을 벌여오다 동료 의사를 대표해서 현재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민경찬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민경찬은 뚜렷한 이유없이 성적부진으로 유급을 당하며 본인이 외과수련의 과정을 원했음에도 성적부진으로 수련의 생활을 못하게 되고 대학병원 앞에서 성형외과 환자를 모으는 돈벌이에 앞장섭니다.
그의 부도덕한 돌벌이를 위한 환자를 유치하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두군데서 개업의의 생활을 접게됩니다.
물론 의사회의 내부에서도 성토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동료의사들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게 됩니다.
그러다 신동아에 의사들의 관행을 보도한 후 본격적으로 동료의사들 죽이기에 나서다 법의학연구소라는 단체를 설립 후 본격적으로 동료 의사들의 의료사고를 자신의 부의 축적으로 차곡차곡 연결해 갑니다.
그러다 아파요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버 진료를 차리게 되었고 그는 사이버상 처방전발행이라는 그의 숙원을 이뤄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히포크라테스의 배신자"라는 동료의사 죽이기의 결정판을 내어 놓으면서 언론의 화려한 각광을 받으면서 그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읍니다.
현재 둘의 위치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고 대조적인 삶을 살아 왔읍니다.
한명은 잘못된 의약분업에 대한 반정부의 투쟁의 선봉으로 나서다 동료들을 대신해 철창 행을 선택했고 또다른 한명은 비뚤어진 삶을 점철하다가 그의 치부 수단으로 동료들 죽이기에 나서면서 현재 그의 위치는 사이비 언론에 의해 더욱 더 빛나고 있읍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희 의사들은 신상진의 삶이 참되게 살았다고 굳이 주장은 않겠읍니다. 현재 폐업사태에 대해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민경찬(양의 탈을 쓴 늑대)이가 동료의사들을 죽이기에 나선 것을 영웅시 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그는 그의 치부 수단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읍 니다. 그의 현재까지의 삶을 보면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 방법으로 동료들 죽이기에 나선 것 뿐이기 때문 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언론을 잘 이용할 줄을 압니다.
하필 이 시기에 히포크라테스의 배신자라는 책을 출판했을까요?
정답은 바로 언론을 이용한 그의 돈벌이라는 사실을 국민 여러분 께서는 잘 아시기 바랍니다.
현재까지 이러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아파요닷컴에 들어가서 문진, 검사도 없이 마구 발행되는 처방전에 국민의 건강을 맡기겠읍니까?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2동 상대원시장 입구에 있는 성남의원의 신상진 원장(40)은 어느 의사보다도 바쁜 사람이다. 그는 의사로서의 일상이 끝나는 오후 9시가 지나면 더욱 바빠지는 것이다.
그는 94년 결성한 `성남시민모임'에서 총무일을 보다 요즘은 정책기획국장을 맡고 있다. 여기서 일하다 보면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다반사이다.
성남지역의 대표적 재야단체인 이 모임은 그동안 시장후보토론회 개최,분당에 세워질 예정인 서울남부저유소 설치에 대비한 공동대책위 구성,무료 법률·의료 상담 등 지역과 연결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11월부터는 `의정지기단'을 만들어 성남시의 의정활동을 주권자인 시민이 직접 감시하는 일도 벌이고 있다.
그의 대외활동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성남외국인 노동자의 집'이사로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하고, 성남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분당의 목련마을을 찾아 장애인 무료진료를 한다.
누대에 걸친 서울토박이인 신 원장은 92년 2월 이 곳에 개원을 하기 오래전부터 성남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개원뒤에는 `지척의 고향'인 서울에 들를 짬도 없이 성남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의 성남생활은 82년 서울의대재학중 시국사건에 연루돼 집에서 연행되는 그를 보고 놀라 쓰러진 어머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노점상을 했던 어머니가 장남인 저에게 건 기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죠. 그러다가 자식이 눈앞에서 끌려가는 꼴을 보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가 얼마안돼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가신 것을 생각해서라도 제대로 살아야겠다, 어머니의 삶에 누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
그는 결국 의대 재학 시절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처음엔 인천지역에 뛰어들었지만 그곳은 운동가들이 많다고 판단하고 84년 당시만도 활동가가 뜸한 성남지역으로 옮겼다. 노동운동가로 한계를 느낀 그는 89년 복학을 하게 된다. 의사가 된 그는 서울에서의 편한 삶을 포기하고 성남으로 다
시 돌아온다. 의사로서, 시민운동가로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5천만원짜리 27평형 아파트에 전세를 든 무주택자이기도 한 그는 아내에게 결혼생활 7년이 넘도록 10만원이 넘는 옷을 사준 적이 없다고 한다.
최근 부인이 성남기독청년여성회 간사로 일하게 되면서 망설임끝에 큰 마음먹고 30만원짜리 옷 한벌을 마련해줬다고 그는 부끄러운듯이 털어놓는다.
이렇게 아낀 돈은 각종 시민단체의 회비, 이런 저런 모임에서 모자라는 밥값 등으로 술렁술렁 사라진다.
“50줄이 넘으면 집한칸이 생길 지도 모르죠. 하지만 먹는데 지장없고, 시민단체에 회비도 내고, 소주에 삼겹살 정도는 더러 살 수 있으니 굉장히 부자인 것같습니다”
의사로서 부와 명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벗하며 사는 생활을 그는 즐기고 있는 것이다.
박근애 기자
#참고자료-2(민경찬 편)
-펀글
내가 아는 의사 민 경찬.
최근 몇 년사이 그의 이름이 방송을 오르내릴 때마다 나는 처절한 그의 이면을 보는 듯하여 서글프다.
그는 나와 대학 입학동기다. 81학번이고, 그것도 재수인지 삼수인지를 고행 끝에 남들 줄서 들어오는 정도면 입학할 수 있던 시절. 물론 의대를 올 정도면 어느정도 머리는 있다고 봐야겠다.
학생시절 그는 별반 말없는 자였고, 바둑과 같은 잡기에 능했다. 반쯤 깍은 듯한 구레를 만지작거리며, 기말고사앞에는 늘 뭔가를 열심히 좇아다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낙제의 미끄럼을 타고서 우리 반을 내려갔다. 그런 뒤로 후배교실에서 수업시간 늦게 쫓아 강의실로 언뜻언뜻 들어가는 그를 본 것이 나의 기억에 남은 그의 학창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인턴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와서 뜻한 외과를 수련하고 있을 어느 가을. 아마도 내 년차가 3년차 chief resident때 그가 부산백병원 외과를 하겠다고 주임교수님을 알현했다. 원래 외과에 대한 자부심과 고지식이 전부였던 나의 주임교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단지, 그의 학교성적과 작은 병원의 인턴경력 때문에...
그는 부산의 모 중소수련병원에서 인턴을 수련했다.
대개 지원자는 의국을 들르게 마련인데도 그는 의국문보다는 교수님문을 먼저 두드리고는 맞지않는 열쇠를 지니고 홀연히 돌아갔다. 그는 결국 부산시내에서 일반의로서 그것도 성형과 야간진료를 주업으로 하는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부산백병원과 몇몇 종합병원의 야간당직의에게 숱한 선심을 던지고서 많은 열상환자를 유치하여 단지 비보험이라는 명목으로 고액의 진료비를 희사받았다.
"야간열상봉합, 100만원" 믿을 수 없는 그의 신기의 봉합술도 경제적 어려움에 그만큼 곪아터지고, 합병증에 시달린 환자에 의해 하나둘씩 터지고, 마침내 부산의 모 방송과 신문에 오르면서 그의 찬란한 언론플레이의 서곡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돈에 맛이 든 의사로서 다만 그가 성공한 것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략이 적중해서 인지 몰라도 다시금 그는 경남마산에서 멍든 상술의 의료행위를 재차 펼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발닿는 곳이면 의례히 그는 비참한 열등의식의 종말을 맛보듯 역시 마산에서도 성형외과적인 물의로 병원을 접게된다.
그동안 그는 일반의로서 지나온 과거의 잘못된 반추로 안으로 싹트는 패배의식과 복수심이 자라게 되었으리라.
과태료, 벌금도 내고, 경고도 받은 그가 어느 날 의사죽이기에 나서게 된다. "신동아"라는 희대의 언론잡지에 리베이트, 랜딩의 검은 고리를 의열찬 마음으로 복수의 펜을 들기 시작했다. 이름을 날리고 언론이 주목하는 그옆에는 언제나 우리가 아는 우리의 비리가 따라 다녔다.
물론 그의 지난 행적은 그럴때마다 하나둘씩 투사적인 자기기만으로 숨기면서.... 의료사고가 날때마다 자칭 의로운 의사로서 낱낱히 챠트를 파헤쳐서 털끝만큼의 오류를 부여잡고 월척인 양 환자에게 내밀며, 굳이 의사를 죽이는 방법을 열강하고, 그들의 때묻은 양심의 동전을 자기깡통에 떨어뜨려주기를 바라며, 고개숙인 척하던 그다.
사회적으로 "참의사"처럼, 때로는 배고프고 헐벗은 환자의 편인 양 거창한 문구로 마이크를 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의인처럼 TV 화면을 채웠다.
그러나 나는 그를 조금은 안다.
결코 그는 히포의 후예가 될 수는 없는 자다. 여지껏 한번도 이 나라의 구조적인 의료의 모순을 질타하고 개선의 칼날을 휘두른 적이 단 한번도 없던 그였기에 더더욱 그가 진정 참된 의료를 위해 열사적인 의로운 의인의 길을 가려는 게 아니라는 반증이 서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말끔한 하얀 색 가운을 걸치고 짧은 머리에 속에 그득한 검은 체액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스런 억양으로 얼굴을 내보인다.
어쩌면 불쌍한 우리 조국의 의사상의 종말을 먼저가는 것처럼 보여주는 그가 한없이 가여울 뿐이다.
아직도 민경찬은 책상위에 앉아서 우리가 휘날려 써놓은 기록들을 보면서 자기가 당한 옛날을 지울 수 있는 어떤 핑계를 찾고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 이땅에는 또다른 민경찬이가 의사라고 진료행위를 시험하며 미래의 언론을 장식하고저 도사리고 있는 자들이 너무도 많으리라는 두려움이 나 마저 의롭지 못한 내 양심을 짖누르고 있는 듯 내가 그의 동기라는 것이 너무도 서글프다
---- 내가 고2학년 당한 5.18 민주항쟁이래 대한민국 언론은 잘 믿지 않는다. 제약회사 광고비에 맞이 들었는지, 정부에 자갈이 물렸는지 조용한 언론, 과거나 속셈을 보지 않고 덮썩 경찬이에게 상 주는 정부, 의인으로 묘사하는 언론 , 5공화국과 국민의 정부와의 차이는 무얼까? 인테넷으로나 나마 나부작되는 것 정도 차이일까?
정치깡패와 사이버상의 욕두문자가 난무하는 깡패들의 테러의 차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