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다낭에서 남은 여정을 .......2,꽁 카페에서
다낭에서 넷째 날, 비가 내리고 있다. 비올 확률40%라더니 요즘은 어디를 가든 일기예보가 틀리지 않는다. 다행히 후에도 다녀오고 참파의 미선도 호이안도 다녀온 터라 마음이 놓인다. 아침을 한 우리는 한강다리를 건너 콩 카페란 곳으로 향했다. 한(Hàn) 강 바로 옆 박당(Bạch Đằng) 길! 주소 : 96, 98 Bạch Đằng. 숨 막히는 호치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다낭, 공기부터가 다르다. 꽁카페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코코넛 커피, 나는 대신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이른 아침부터 노천카페의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맛보는 커피 한잔의 정취가 탐이 났기 때문이다.

습하고 뜨거운 베트남의 낮 공기엔 '카페 쓰어 다Caphe Sua Da'가 정답이다. 커피 한잔을 제대로 즐기려면 나름의 내적갈등을 이겨내야 한다. 강하게 볶은 원두를 양철 필터를 통해 한 방울씩 추출한 베트남 커피는 기다림의 철학같이 에스프레소 샷보다 몇 배나 더 진하고 고소하다. 여기에 설탕과 우유 대신 연유를 넣어 차갑게 즐기는 베트남 식 아이스커피가 바로 '카페 쓰어다'. 극단적으로 쓰고 단 이중적인 맛의 향취는 단순하게 말할 권리를 차감하고 만다. 적어도 두 번은 생각해야 한다는 신중함이 작은 액체 속에 함유되어 있다. 무슨 이런 자극적이고 은밀한 맛이 있단 말인가. 극단적으로 단맛이 어우러진 이 커피는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야 제대로 마시는거다. 조급하지 않게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베트남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평소 커피에 무관심한 나지만 나는 꽁 카페에 반해 떠나는 날도 그곳에 들려 맛을 음미하며 귀국 후의 일을 냉정히 생각했다. 왜 그렇지 않은가. 희열의 정점에 닿아서는 이내 한 순간 우울을 만드는 공허 내지 허무함 말이다. 그 커피에는 다독여 가라앉히는 그런 고독한 성분이 따로 들어 있다.
3. 박당(Bạch Đằng) 길 그리고 참 박물관

강변을 걸었다. 여전히 가랑비가 내린다. 가느다란 비는 오히려 시원하고 운치 있어 차라리 낫다. 호텔 사이 마사지 집이 즐비하다. 그들은 맛싸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어제 호이안에서 돌아와 피로를 풀겠다면 K는 호텔친구들이 소개한 맛싸를 다녀왔었다. 신통치 않은데 가격만 비싸다고 했다. 발마사지 15만동 전신마사지 20만동으로 박힌 광고를 보더니 K가 흠칫 놀란다. 아무래도 비싸게 다녀온 모양이다. 호텔이나 패키지 투어 가이드를 끼면 종종 그런 경우가 생긴다. 나는 웬만하면 마사지를 안 한다. 비인간적이란 느낌이 들어서다. 하지만 나도 그 다음 날 비행기 타러 가기 두 시간 전 바로 이 박당거리 마사지 숍에 들러 20만동(우리 돈 만원)을 주고 발마사지를 했다. 남은 시간 떼우는 셈 삼았다.
드디어 목적지인 참 박물관. 참 박물관은 용 다리 바로 앞에 있다. 노란 색 건물은 참파의 기둥과 천장 모양을 본 따 건물을 지어 아주 이색적이다. 참파에 대해 앞서 쓴 글은 바로 이 박물관에서 본 것을 토대로 쓴 글이다. 박물관은 나에게 아주 유용했다. 아직도 반 이상은 잘 모르겠지만. 앞서 말 한대로 그들의 신들을 구분하기 어렵다. 거기에 신들의 아내들은 또 어찌나 변신을 잘하는지. 혹여 형상이 아니라 의미로서 신들을 파악하는 것은 아닐까 여전히 의문이 생긴다. 신성시 하는 신들이 데리고 있는 동물들도 참 괴이하다. 그들의 신들을 일부러 이 참에 싣는다. 여러분들은 어찌 구분하고 이해할 것인지 알아서 하기 바란다.
시바 신

브라흐마 신

비수누신

가루다

마카라

그런데 정작 이해 안가는 것은 참파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 대한 것이다. 애써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제 호이안 작은 박물관에서 다낭 일대 고대문명이 형성된 지역으로, 싸후인(Sa Huynh)에 대한 발굴 사진들과 몇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았다. 그런데 참파는 그곳에 없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리도 없다. 바로 이 지역은 누가 뭐라 해도 천년 이상 참파의 꽃피운 문화가 융성하던 곳이다.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삶속에는 참파가 스며있다.
문득 이 대목에 이르러 나는 스페인의 순혈령이 떠오른다. 스페인은 한 때 이슬람이 점령을 했었다. 1492년 이사벨 여왕이 다시 재건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딱 500년이되는 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했었다. 그 시기 그들은 이슬람 문화를 수용하여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잘 살았다. 이는 건축양식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슬람이 그리스도로 개종한 경우 모사라베라 하고 반면에 이슬람교도로 개종한 가톨릭교도들은 물라다라 불렀다. 그리고 가톨릭교도가 국토회복을 한 지역에 남아 있는 이슬람교도들을 무데하르라 하였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슬람교도들을 토르나디소라 하고 두 종교의 경계선상에 있던 사람들을 에나시아도라 하여 스파이 취급을 했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구분은 끝나지 않는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열 인은 메스티소, 백인과 흑인 간읜 혼혈인은 물라토, 원주민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은 삼보라 했다. 그런 그들은 다인종 다문화를 형성하며 남미에 정착하여 살다 수 세기가 지나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 하는데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층이 바로 크리오요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들이다. 이러하듯 종교와 인종에 따른 다양한 구분을 하게 되는 스페인은 그리스도로 통일한 후 이에 따른 종교적 갈등이나 순혈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순혈령으로 인해 콘베르소(개종한유대인들)과 모리스코(개종한무어인들)들이 상당부분 추방되는데 콘베르소나 모리스코나 둘다 서비스직이나 관리, 혹은 상업에 종사하는 전문직이었다. 콘베르소가 대체로 상인, 성직, 관리 등에 진출했다면 모리스코는 대체로 농업이나 3D업종, 기타 필수적인 서비스(ex.이발, 재단)등에 종사했다. 재정 관련된 직종에 콘베르소가 많이 종사했는데, 이들이 떠나 버리면서 노하우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모리스코의 추방으로 그들이 많이 거주했던 안달루시아의 경제가 사양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슬람 지배시절 안달루시아를 개간했었기 때문에 모리스코들은 농업 부문에 대한 노하우를 갖고 있었는데, 모리스코의 추방은 그렇잖아도 곡물수입국이던 스페인에게 더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노하우는 전수되지 않은 채 인력들이 죄다 빠져나가니 국가경제가 흔들리는 건 당연하다. 물론, 이들의 추방이 스페인 경제쇠퇴를 100%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원인 중 하나는 되고 결국 무적함대 스페인은 쇠락의 길을 걷고 만다.
참파는 중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을 상대로 무역을 한 사람들이다. 그때만 해도 참파는 경쟁국으로 캄보디아 앙코르 족을 경계하였지 홍하델타는 넘보지도 않았다. 베트남의 영토는 홍하(紅河) 델타를 중심으로 한 북부에 국한되어 사이좋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독립적으로 생을 영위했었다. 그 무렵 참파는 앙코르만을 왜 상대하였던 것인지 이는 종교에서 오는 경쟁구도가 그 시발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의문이 생긴다. 혹여 인도차이나가 좁은 영토가 아닌 이상 종교 색채가 다르다면 상호 존중하고 살았던 것이 아니었던가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아무튼 14세기까지는 평온한 베트남 다낭지역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스페인에서 보듯 베트남의 많은 종족은 어울려 씨를 뿌리고 동화도 되었을 것이고 그런 호이안이고 다낭인데 그들의 흔적은 실로 미미하다. 그들의 활동무대였던 호이안에는 전시물 하나 없다. 그 정도로 폐쇄적이었을까. 폐쇄란 말과 무역은 아주 상반된 말이다. 혹여 스페인의 순혈 령 같은 피의 부름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참파 역시 베트남의 조상이고 연연이 그들의 피는 여전히 베트남에 살아 숨 쉰다. 그들 특유의 무역방식을 존중하고 전통을 앞세웠더라면 세상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누구든 삶의 고유 특성은 소중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참파가 못내 아쉽기만하다.
4. 오행산(응우한썬)을 찾으며
참 박물관을 나설 쯤 비는 그쳤다. 표 파는 사람한테 오행산(응우한썬)가는 버스를 물었다. 바로 앞에서 타면 된다고 했다. 들으면 다 되고 쉬운 것 같은데 어려운 경우가 때로는 많다. 조금만 가면 된다던지 금방 온다던지 하는 말은 사실 애매할 때는 한 없이 애를 먹인다. 바로 앞에서 탄다는 말도 그랬다. 바로 앞길이 두 갈래인데 어느 길인지 다시 돌아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헷갈린다. 설마 좁은 도로에 버스가 설까 싶어 큰 길을 택했다. 그게 실수였다. 한참을 가다가 의심이 생겼다. 버스정류장 표시가 없다. 다시 돌아서 좁은 도로로 향했다. 바로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바로 앞이라는데 왜 굳이 큰길은 택해서...
이윽고 타려는 1번 버스가 도착했다. 조수에게 물었다. 응우한썬? 조수는 듣는 둥 마는 둥 빨리 타라한다. 한두 번 한 길 안내가 아닐 텐데 맞으니 타라고 했겠지. 뭐....

앞서 말했지만 참 박물관은 바로 앞이 용 다리다. 거기를 건너면 호이안 가는 방향으로 오행산 가는 길이 맞다. 그런데 웬 걸, 버스가 커브를 틀더니 다낭 성당쪽으로 향한다. 길잡이 K가 순간 당황하며 뒷좌석에게 묻는다. 말이 안 통하니 무조건 고개부터 젓고 보는 사람들이다. K가 급히 사진을 꺼내더니 운전기사에게 다가갔다.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에서 잘못 탔다는 것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고마운 기사였다. 우리를 위해 특별히 가던 길을 멈추고 반대편 방향 정류장을 가리켜주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우리는 반대편에 서서 제대로 버스를 탔다. 젊은 조수가 요금을 내라고 했다. K는 5만동 한 장을 꺼냈다. 그러자 조수가 한 장을 더 달라고 했다. 나와 K는 알아듣지도 못할 한국말로 어제 미썬에 갈 때 7만동인데... 어쩌구 하며 반항하듯 응수를 했다. 때로는 헛바람도 필요하다.조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잘 알아듣는 양 바로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부렸다. 5만동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구간 버스요금이 도대체 얼마인지 잘 모른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간다하여 우리가 이긴 것인지 아니면 1만동 밖에 안하는데 더 준 것인지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인데 아무튼 주먹구식이고 조수 마음대로다. 아니 외국인들에게는 뻥튀기를 마냥 하는 그들. 다낭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로 더 달라고 하다가 우리가 뭐라 되지도 않는 말을 하니 그냥 돌아서 가버렸다. 토큰 하나 던지다가 이제는 카드로 알아서 척척 계산하는 공평정대한 우리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 수준에 오르려면 또 얼마나 많은 진척이 진행되어야 할 것인지 새삼 새로웠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얼마나 가야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산을 향했다. 가는 길, 대리석 동네라더니 돌 깎는 소리 우렁찬 동네다. 작품이 정교하고 세련된 것이 젓가락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일맥상통한다싶다. 다행히 가까웠다. 관광버스가 제법 많은 게 산 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겠다 싶었다. 응우한썬은 산의 생김새에 따라 음양오행으로 분류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베트남인들의 민간 신앙을 대변하는 산이다. 물, 나무, 금, 땅, 불을 상징하는 5개의 봉우리. 산 전체가 대리석이기 때문에 마블 마운틴이라고 불린다. 응우한썬은 투이썬水山, 목썬木山, 호아썬火山, 낌썬金山, 터썬土山의 다섯 개의 산을 총칭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관광은 가장 큰 108m의 투이썬을 방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투이 선(Thuy Son)은 물을 상징한다. 대리석 산이라는 이름답게 산 입구에는 대리석 기념품점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었다. 오르는 길은 두 갈래다. 우리는 가파른 돌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택했다. 이곳에는 린운Linh Ung 등 모두 3개의 사찰과 2개의 전망대, 3개의 자연동굴이 있다. 탄정동굴Tang Chon Cave안에는 불상과 참족 문화유산인 석상이 자리하고 있고, 전망대에 서면 다른 산의 모습과 함께 다낭시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논 느억(Non Nuoc) 마을. 정상에 오른 보람이 있다. 사진을 펑펑 찍었다. 속 시원한 전경에 걸 맞는 행위다. 소담한 마을은 수백 년 내리 돌만 깎고 조용히 살지 않았을까 싶은데 동네 모퉁이 리조트들이 들어차고 있다. 빈 땅이 제법 흥미를 끈다. 투자처로 괜찮겠다는 괜한 생각이. 아마 또 몇 년 후면 이 고즈넉한 전경은 또 바뀌고 말리라.멋진 풍경을 간직한 곳들은 늘 그래왔다.

배가 무척 고팠다. K는 다낭에 곧 바로 가서 먹자고 했다. 나는 권한이 없다. 이럴 때는 돈과 권력이 부럽다. 배고픈 백성은 그래서 늘 돈과 권력을 그리워했다. 곧 바로 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허울 좋은 말로 매우 더딘 상황으로 둔갑을 할 때가 많다. K가 말을 덧붙였다. 아주 맛 나는 음식점으로 모시겠다. 다낭의 유명 맛 집, 닥싼 짠 dac san tran. 그 말은 참는 데 효능이 있었다. 그리고 음식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반. 라이스페이퍼에 돼지고기 수육을 싸먹는다는데 메뉴가 바뀌어 돼지 대신 소고기.

앞서 말했지만 ‘곧 바로 라든지, 조금만 가면, 아주 맛 나는’ 등등의 말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일종의 뻥튀기가 들어 있다. 맞을 성 싶지만 그 말에 현혹되어 기대를 한 나머지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경우가 개중에는 생긴다. 아니 이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의 주관과 무관치는 않다. 그런데 K도 생각한 맛과는 상이했던 모양이다. 그가 말했다. 이것은 아닌데...아무리 배가 고팠지만 나 또한 이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말이 제각각이고 소문은 소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래도 허풍은 있어야 하고 흥행하는 거다. 잠시의 기대를 위해서라도. 그 바람에 때로는 진실이 왜곡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기실 평소 헛다리나 허풍을 다 사랑하는 편이다. 아내는 내 허풍에 반했던 게 아닌가. 허풍이나 헛다리가 없다면 이 세상 그만큼 재미도 줄 것이다. 글에 호들갑을 떨었지만 솔직히 말해 오행산 또한 뻥튀기가 들어 있다 싶었다. 뭐 우리한테는 저 정도 산은 흔한 게 아닌가.

Take Me Home Country Road / John Den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