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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 和林城, 내만(乃蠻)의 故地, 서방(西方)에 있다!
2022년 09월 25일
○ 〈“몽고(蒙古)”는, 철목진(鐵木眞)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강성(强盛)해져, 철목진(鐵木眞)이 칭제(稱帝)를 한 뒤에 “화림(和林)”은 “회동지소(會同之所)”가 되어, 처음으로 도읍(都邑)한 곳이다.〉라고 사가(史家)들은 말한다.
“회동지소(會同之所)”란 말은, 당시(當時)의 몽고(蒙古)족들의 여러 부족(部族)들이 모여 회합(會合)을 했던 곳이란 이야기다. 이는 「옛 서방(西方)의 흉노(匈奴), 선비(鮮卑)들이 모여 회합(會合)을 하며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용성(龍城)”과 같은 의미(意味)의 장소(場所)다.
여기에 등장(登場)하는 “용성(龍城)”은, 말 그대로 서융(西戎)들이 있었던 서방(西方) 땅에 있어야 함은 당연지사(當然之事)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注目)하며 보아야 할 큰 조건(條件)은, 〈옛 몽고족(蒙古族)들은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색목인(色目人)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걸 자꾸 잊거나 무시(無視)해 버리면, 그 뒤의 결론(結論)은, 모두가 오류(誤謬) 투성이가 되어버린다.
“화림(和林)”에 대해 사가(史家)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목소리가 없다. ‘이곳에 있다, 저곳에 있다’고 말로만 떠들 뿐, 정확(正確)하게 어디에 있나? 라는 질문에는 묵묵부답(黙黙不答)이다. 대략적(大略的)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기록(記錄)한 옛 원전(原典)과 현대(現代)의 해설(解說)을 보면 :
➀ 동사강목(東史綱目) 11상 丙辰年 고종(高宗) 43년[송 이종 보우 4, 몽고 헌종 6, 1256)] : 〈화림성(和林城)은, 북막(北漠)에 있다〉고 하였으니,
북막(北漠)이란 : 북(北)쪽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일컫는 말이니, 당시(當時)의 화림(和林)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북막(北漠)에 있었다.”는 기록(記錄)하였다.
➁ 해동역사(海東繹史) 14권 / 세기(世紀) 14 : 고려(高麗) 3 :《[주-D025] 화림성(和林城) : “몽고의 고비 사막 서남쪽에 있다.” 돌궐(突厥) 이래로 추장(酋長)들이 있었던 곳이며, 원나라 태조 역시 이곳에 도읍하였다. 화령(和寧)이라고도 한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주석(註釋)’은, 20-21세기의 학자(學者)들에 의해 설명(說明)된 것인데, “화림(和林)”은, 몽고(蒙古) 고비사막(Gobi, 沙漠) 서남(西南)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감숙성(甘肅省) 하서회랑(河西回廊) 땅으로, 기련산맥(祁連山脈)이 있는 곳이다.
➂ 카라코룸[Karakorum] [네이버 지식백과] : 몽골제국 초기의 수도. 몽골어로는 ‘검은 숲길’ 의 뜻. 한음(漢音) 역어로는 합나화림(哈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이라 함. 유적은 몽골공화국의 서부 올혼 강 상류 우안(右岸)의 에르데니자오 부근에 있음. 제2대의 한(汗), 태종(오고타이) 7년(1235)에 도성을 정하여, 만안궁(萬安宮)을 조영하고 이후 정종, 헌종에 이르는 약 20년간의 제도(帝都)였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카라코룸 [Karakorum]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현대(現代)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는 : 현재(現在)의 ‘몽골공화국’ 서부(西部) “올혼 강” 상류(上流)의 우안(右岸) ‘에르네니자오’에 있다고 말한다. 이곳은 아마도,
화림성(和林城)의 유적(遺跡) 발굴(發掘) : 〈AD 1948~1949년 소련(蘇聯)의 ‘키세료프’를 단장으로 한 ‘몽골역사민족학 조사단’이 발굴. 도성(都城)은 남북(南北)으로 약 2500m, 동서(東西)로 약 1300m의 ‘토루’로 싸여 있으며, 만안궁터로 짐작되는 토대나 관아 지구 및 공방지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 그곳에 『이곳이 옛 화림성(和林城)”이었다는 직접적(直接的)인 증거(證據)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말로만 떠들고 있는 것이고, 이는 곧 오늘날의 “몽골공화국”의 정통성(正統性)을 만들어주기 위한 행위(行爲), 자체(自體)였을 뿐이다.
결과론(結果論)적인 이야기지만 『화림성(和林城)』은, 「오늘날의 외몽골 땅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➊ 화림(和林)은 총령(葱嶺) 서(西)쪽에 있다 ➋ 화림성(和林城)은 당(唐) 때의 회골(回鶻) 비가가한(毗伽可汗)의 고성(故城)이다.〉 이곳 두 곳 중의 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 림 성 (和 林 城)
○ 여기서 「화림성(和林城)」을 찾는데 중요(重要)한 것은 역사기록(歷史記錄)이다. 그런데 왜 사학자(史學者)들은 사서(史書)에서 뻔하게 설명(說明)하고 있음에도 전혀 관계(關係)없는, 엉뚱한 곳에서 발굴작업(發掘作業)을 하는 것일까?
그 이유(理由)가 중요(重要)한 것이다. 즉(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서방(西方)의 땅, 요충지(要衝地)를 차지하고 있던 몽고(蒙古) 땅은 ‘지들[서세(西勢)]’이 몽땅 빼앗아버리고,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하고 난 뒤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오늘날의 ‘외몽골’ 땅에 “몽골공화국”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당시에 겨우 20여 만(餘萬)의 국민(國民)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➊ 그렇지 않다면 “수백(數百)만 명(明)으로 추산(推算)되던 색목인(色目人) 몽고족(蒙古族)들은, 하루아침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후손(後孫)들 또한 몽땅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일까?”
➋ 〈사라져 없어져 버린 “몽고족(蒙古族)들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색목인(色目人)들은, 지금도 우랄산맥[Ural,山脈] 서(西)쪽에서 번영(繁榮)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게 무슨 조화(造化)인가?
세계사(世界史)는 다시 쓰여 져야 한다. 이건 필연(必然)이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명(明)대의 기록(記錄)으로 ‘몽고(蒙古) 즉(卽) 원(元)’에 대해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 수 있는 처지(處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조우(顧祖禹)’는 1631年—1692年 간에 걸쳐 생존(生存)했던 인물(人物)로 ‘명(明) 말(末)과 청(淸) 초(初)’의 인물(人物)로 수십(數十)년간에 걸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완성(完成)했다〉고 전해진다.
또 〈신원사(新元史)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복잡(複雜)하고 다난(多難)했던 격동(激動)의 시기(時期)에, “기존 원사(元史)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1,921년 당시 중화민국(中華民國) 때의 총통(總統) 서세창에 의해 정사(正史)로 추가되어 기존의 24사를 25사로 고쳤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략(大略) 신원사(新元史)의 편찬(編纂) 동기(動機)를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인식(歷史認識)을 바탕으로 “화림성(和林城)”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대략적(大略的)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화림(和林)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1) 신원사(新元史) : 新元史卷四十六地理志一 :「嶺北等處行中書省,領和寧路.和寧路.上.始名和林,亦名哈剌和林. 本乃蠻故地。太祖滅乃蠻,建四大斡兒朵於其地。: 처음 이름이 화림(和林)이며, 또한 합랄화림(哈剌和林)이다. 본래(本來) 내만(乃蠻)의 옛 땅이다. 中略.太宗始定都於此。七年,城和林,作萬安宮。태종(太宗)이 처음으로 이곳에 도읍(都邑)했고, 7년에 화림성(和林城)을 쌓고, 만안궁(萬安宮)을 지었다. 중략(中略). 有大街二:其一撒剌先人所住,中為市場;其一支那人居之,皆工匠。: 큰 길이 2개인데, 한 개는 살랄(撒剌)선인(先人)이 살고, 가운데는 시장(市長)이다. 그 한 길은 지나인(支那人)들이 사는데, 모두 공장(工匠)들이다. 二街之外,為朝貴之大邸第。又佛堂十二,回回教寺二,基都教寺一。: 2가외에는 조정(朝廷) 대신들의 저택이 있다. 또 불당이 12, 회회교 절이 2, 기독교 절이 1가 있다. 중략(中略)[新元史》卷四十六《地理志一]》하였다.
《嶺北等處行中書省,領和寧路。和寧路. 始名和林,亦名哈剌和林。本乃蠻故地 : 령북등처행중서성(嶺北等處行中書省) 화녕로(和寜路). 화녕로(和寧路)는, 초명(初名)이 화림(和林)인데, 또 다른 이름은 합랄화림(哈剌和林)이다. 본래 내만(乃蠻)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는 ‘령북(嶺北)’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령북(嶺北)은 어디냐? 하는 것이다. 즉(卽) 산(山)이나 산맥(山脈)이 동서(東西)로 놓여있는 상태에서 그 북(北)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령북(嶺北)”은 어디냐?
당(唐)으로부터 기록(記錄)된 “령북(嶺北)”아라는 말은, 알타이 산[Aitai, 山=금산(金山)=벨루하산]으로부터 이어지는 외몽고(外蒙古)와 러시아[Russia]를 가로지르는 당노산맥(唐努山脈)의 북(北)쪽을 “령북(嶺北)” 또는 “당록령(唐麓嶺)”등으로 기록(記錄)되었다.
‘령북등처행중서성(嶺北等處行中書省) 화녕로(和寜路)’ : 그렇다면 “화림(和林)”은 당노산(唐努山)의 북방지대(北方地帶)인 러시아[Russia] 땅에 있다는 말인가?
또 가장 중요(重要)한 구절(句節)은 : “화림(和林) 땅”은, 곧 “내만(乃蠻)의 옛 땅”이라는 대목이다. 『내만(乃蠻)』은 누군가?
● 乃蠻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古代突厥-蒙古混合部落,於11世紀開始居住在蒙古高原西部。牧地在阿爾泰山之陽,北接斡亦剌惕,西界回鶻,可能突厥語族蒙古語族語言在部落內混用,使用畏兀兒文字。: 고대(古代)의 몽고(蒙古)와 혼합된 부락으로, 11세기 초 처음 몽고(蒙古)고원 서부(西部)땅에서 거주하였는데, 목지(牧地)는 아이태산(阿爾泰山)의 남(南)쪽이었는데, 북(北)쪽으로는 ➊ 알역랄척(斡亦剌惕)과 접하고, 서(西)쪽 지경은 회골(回鶻)이 있었는데, 돌궐어족과 몽고어족들의 언어가 서로 혼용되었는데, 문자는 외올아(畏兀兒)문자를 썼다. 又譯乃馬、乃滿、廼蠻、奈曼、奈蠻、耐滿、粘拔恩、粘八噶等。: 또 내마(內馬), 내만(內滿), 내만(廼蠻), 나만(奈曼), 나만(奈蠻), 내만(內滿), 점발은(粘拔恩), 점팔갈(粘八噶)등으로 통역되었다. 他們有一突厥名sakiz oghuz,八姓烏古斯人(乃蠻即蒙古語之意)。: 다른 무리들은 돌궐의 이름으로 “sakiz oghuz”라 하였는데, ➋ 팔성(八姓) 오고사인(烏古斯人)이다. (내만(內滿) 즉(卽) 몽고어의 뜻이다.) 乃蠻故地(今阿爾泰山以南及以稍偏西的一些土地): 내만(乃蠻)의 고지(故地)는 (아이태산(阿爾泰山) 이남(以南)과 서(西)쪽의 땅이다. 중략(中略)》
➊ 〈내만(乃蠻) 북(北)쪽에는 ‘알역랄척(斡亦剌惕)’ 즉 명(明) 때의 와랄(瓦剌)이 있었고【瓦剌[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瓦剌(Oirat)是位於蒙古西部的部族,元朝稱斡亦剌惕、明朝稱瓦剌(Wǎlà/Wǎlā)】, 서(西)쪽으로 우랄산맥[Ural, 山脈)쪽에는, “회골(回鶻)”이 있었다는 뜻이다.〉
➋ ‘오고사인[烏古斯人]’ 이란 : 고대(古代)의 돌궐(突厥)어족 부락을 칭하는 말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광활한 대초원지구에서 살던 종족(種族)으로, 돌궐(突厥)제국 후기에 독립(獨立)국가가 되어 ‘구성(九姓) 오고사(烏古斯)’라고 불렸다. 【烏古斯人,古代突厥語民族部落中的一個群體,中略, 現代之土庫曼語、亞塞拜然語及土耳其語,烏古斯人亦為現今一部分土耳其人、亞塞拜然人和各地的土庫曼人的先祖。他們最早是生活於中亞廣大草原地區,中略, 後於突厥帝國後期,建立獨立國家,稱九姓烏古斯】
『파사(波斯) 무명씨(無名氏)의 지리지인 세계경역지(世界境域志)에 의하면 : 파이객즙호(巴爾喀什湖)와 함해(鹹海)이북에서 살던 자(者)들로, 석이하(錫爾河)와 은파하(恩巴河), 오랍이하(烏拉爾河) 하류(下流)에서 살았는데, 합살극(哈薩克) 초원이다.』라고 하였다. 【波斯無名氏地理著作《世界境域志》提出在巴爾喀什湖至鹹海以北,錫爾河[Syr Darya]及恩巴河[發源自穆戈賈雷山,最終注入裡海],烏拉爾河[Urál, 江 : 發源於烏拉山脈南部]下游,現在哈薩克草原.】
➤ 즉(卽) 『내만(乃蠻)』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哈薩克)의 ‘카스피 해[Capi, 海]’와 ‘우랄 해(Ural, 海)’ 유역(流域)과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살던 종족(種族)이다』는 뜻이다.
이곳의 서(西)쪽 지경(地境)에“회골(回鶻)과 접했다”는 말은, 『“회골(回鶻)”은 서방(西方) 종족(種族)이었다는 뜻이고, 카스피 해[Caspi, 海] 서(西)쪽, 우랄산맥[Ural, 山脈] 서(西)쪽에 있었다.』는 뜻이다.
➤➤➤ 이러한 땅,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었다고 하는 『내만(乃蠻)의 고지(故地)』가 『오늘날의 “몽골 땅에 있다”고 하는 말은, 역사조작(歷史造作)이다.』
즉(卽) 『조선(朝鮮) 땅을 빼앗고, 그곳에 ‘몽골공화국’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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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乃蠻國 : 《乃蠻國, 亦在蔥嶺西南。宋嘉定中,蒙古鐵木真擊滅乃蠻諸部,是也。其後復立其種類爲乃蠻王。: 내만국(乃蠻國)은, 또 총령(葱嶺) 서남(西南)에 있다. 송(宋) 가정(嘉定)중에, 몽고(蒙古) 철목진(鐵木眞)이 내만(乃蠻)의 여러 부(部)를 쳐 멸(滅)하였다. 그 뒤에 다시 일어나 그 종류를 내만(乃蠻)왕으로 세웠다. 宋史:「景定元年乃蠻王屈出律襲西遼王直魯古,遼祀始絕。: 송사(宋史)에서는, 경정(景定) 원년에 내만왕(乃蠻王) 굴출률(屈出律)이 서요왕(西遼王) 직노고(直魯古)를 습격, 요(遼)나라의 제사(祭祀)가 처음으로 끊어졌다.(멸망했다).》
➊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내만국(乃蠻國)”편에 따르면 : 『‘내만(乃蠻)’은 “총령(葱嶺) 서남(西南)”에 있다』고 하였는데, “총령(葱嶺) 서남(西南)은, 오늘날의 아랄 해(Aral, 海) 남(南)쪽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땅”이다.
서요(西遼)의 직로고(直魯古)를 멸망(滅亡)시킨 것이 철목진(鐵木眞)이라고 하였는데, 송사(宋史)에서는 내만(乃蠻) 왕(王) ‘굴출률(屈出律)’이라고 하였다는 점이다.
➤ 그렇다면 “내만(乃蠻)의 고지(故地)에 있었다.”고 한 『화림(和林)은, 총령(葱嶺)의 서남(西南)쪽에서 있어야 한다.』
더불어 ‘철목진(鐵木眞)’은 내만(乃蠻)과 흠찰(欽察)을 함께 공격(攻擊)하여 복속(服屬)시켰다고 하였다. 내만(乃蠻)과 흠찰(欽察)이 서로 인접(隣接)하고 있었을 때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➋ 讀史方輿紀要 / 欽察國 : 《欽察國在蔥嶺西.宋嘉定十六年,蒙古將速不台滅欽察,大掠西番邊部而還,置欽察都指揮使治其地. : 흠찰국(欽察國)은, 총령(葱嶺)의 서(西)쪽에 있다. 송(宋) 가정(嘉定)16년에, 몽고(蒙古)의 장군 속불태(速不台)가 흠찰(欽察)을 멸하였는데, 크게 서번(西番)의 변부(邊部)를 노략질하고 돌아왔는데, 이 땅에 흠찰(欽察)도지휘사(都指揮使)두었다. 諸裔考 : 欽察去中國三萬餘里,產良馬. : 제예고(諸裔考)에 : 흠찰(欽察)은 중국(中國)에서 3만여 리 떨어져 있으며, 좋은 말이 나온다고 하였다. 元史:蒙古窩闊台五年,命諸王拔都征西域欽察,阿速,斡羅思等國.明年,命蒙哥往焉,至寬田吉思海旁.欽察酋長八赤蠻逃避海島中,適大風吹海水干,遂生擒八赤蠻等.進征斡羅思,至乜列贊城,破之. : 원사(元史)에 의하면 : 몽고(蒙古) 와활태(窩闊台)5년에, 여러 왕과 발도(拔都)가 서역(西域)의 흠찰(欽察), 아속(阿速), 알라사(斡羅斯)등의 나라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명년(明年), 몽가(蒙哥)가 명을 받고 가, 관전길사해(寬田吉思海) 가까이에 다다랐다. 흠찰(欽察)추장(酋長) 팔적만(八赤蠻)이 바다 가운데 섬으로 도피하였는데, 때에 큰 바람이 불어 바닷물이 막아, 팔적만(八赤蠻)등이 생포되었다. 진격하여 알라사(斡羅斯)를 정복하고, 야열찬성(也列贊城)에 다다라, 깨뜨렸다.》고 하였다.
讀史方輿紀要 / 寬田吉思海 : 《寬田吉思海在蔥嶺西.宋嘉定中,蒙古伐欽察,至寬田吉思海,會大風,海水涸,遂進師屠其城.又進圍斡羅思,蔑怯思城,皆降之. : 관전길사해(寬田吉思海)는 총령(葱嶺)의 서(西)쪽에 있다. 송(宋) 가정(嘉定)중에, 몽고(蒙古)가 흠찰(欽察)을 토벌(討伐)하여 관전길사해(寬田吉思海)에 다다랐는데, 대풍(大風)을 만나, 바닷물이 말라, 진격(進擊)하여 그 성(城)의 우두머리를 죽였다. 또 진격(進擊)하여 알라사(斡羅斯), 멸겁사성(蔑怯思城)을 포위하니, 모두 항복(降服)하였다.》고 하였다.
欽察部彙考【欽定古今圖書集成/方輿彙編/邊裔典/第138卷】:《欽察國,元時聞于中國。: 흠찰국(欽察國)은 원(元)나라 때에 중국에서 들은 것이다. 按元史, 中略, 號其國曰欽察,其地去中國三萬餘里,夏夜極短,日暫沒即出。: 원사를 상고해보면 : 그 나라의 호는 흠찰(欽察)이다. 그 땅은 중국에서 3만 리를 가야하는데, 여름밤은 극히 짧고, 해는 잠깐 몰(沒)했다가 곧 떠오른다.》
※ “동유럽과 서부 시베리아 평원을 이슬람 문헌에서는, 11세기 이후 ‘킵차크 초원’이라고 표현(表現)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킵차크 종족(種族), 부족(部族)의 외형적(外形的) 특징(特徵)을 금발(金髮) 즉 노랑머리에 두고 있다는 것은 색목인(色目人) 중에서 금발(金髮)머리가 많은 종족(種族)이란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說明)도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중국(中國)에서 3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 흠찰(欽察) : ‘킵차크(Kipchak)’라고 한다. 신원사(新元史) : 《欽察,其先爲武平北折連川按答罕山部族.唐以前稱其種曰庫莫奚,後徙西北居玉里伯里山,本遊牧之國,與蒙古同. :흠찰(欽察), 그 선대(先代)는 무평(武平)의 북(北)쪽 절연천(折連川?) 안답한산(按答罕山?)의 부족(部族)이다. 당(唐) 이전에는 그 종족을 칭하기를 고막해(庫莫奚)라고 하였는데, 뒤에 서북(西北)쪽의 옥리백리산(玉里伯里山)으로 옮겨갔다. 본래 유목(遊牧)의 나라로, 몽고(蒙古)와 같은 무리다. 其酋有曲出者,號其部爲欽察,亦曰乞卜察克.曲出生唆末納,唆末納生亦納思.: 그 두목에 곡출이란 자가 있어, 그 부(部)를 흠찰(欽察)이라고 칭하였는데, 또 걸복찰극(乞卜察克)이라고 한다. 곡출(曲出)이 사말납(唆末納)을 낳고, 사말납(唆末納)이 역납사(亦納思)를 낳았다.》고 하였다.
► 〈諸 裔 考 : 欽 察 去 中 國 三 萬 餘 里, 產 良 馬. : 제예고(諸裔考)에 : 흠찰(欽察)은, 중국(中國)에서 3만 여리 떨어져 있으며, 좋은 말이 나온다고 하였다.〉 “흠찰(欽察)”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가 아닌 구라파(歐羅巴)의 “프랑스 또는 스페인”등지가 되어야 한다.
이들 “흠찰(欽察)”은, “유목(遊牧)지국(之國)으로, 몽고(蒙古)와 같다.”고 하였다. 즉(卽) 몽고족(蒙古族)의 일원(一員)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모두 전형적(典型的)인 ‘색목인(色目人) 집단(集團)’이다. 색목인(色目人)들을 나누어보면 :
㉮ 「코가 높고, 눈이 깊은 무리들은 전형적(典型的)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인」이다.
㉯ 「청안(靑眼)을 가진 무리들, 또는 백인(白人)이 많고, 흰 피부와 회색 눈동자(灰色目睛)를 가진 무리들, 또는 청안(靑眼 : 푸른 눈동자)과 콧수염(髭)과 귀밑털(鬢)이 붉은 색(青眼赤髭鬢)을 가진 무리들, 금발(金髮)무리들은, 몽땅 구라파(歐羅巴) 인종(人種)들이다.」
㉰ 「이들 모두는 총령(葱嶺)의 서(西)쪽, 즉(卽) 서방(西方)종족(種族)이다.」
➤ 종족사(種族史), 또는 구라파(歐羅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등지의 기원(起源)을 살펴보면,
이런 종류(種類)의 종족(種族)이, 극동(極東)에서 서(西)쪽으로 이주(移住)한 것이 아니라,
본래(本來) 옛날부터 “킵카스산맥(Kavkaz, 山脈)=코카서스(Caucasus)山脈”등지에서 살던 인종(人種)들이었다고 하며, “카스피 해【Caspian, Sea : 裏海】와 흑해(黑海)사이의 땅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며, “이곳은 현재(現在)에도 수십(數十)여개 이민족(異民族)들이 아웅다웅 살고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 몽고족(蒙古族)들은, 본시(本是) 황인종(黃人種)과는 거리가 먼 이민족(異民族)들이다.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 즉 ‘색목인(色目人) 집단(集團)’이다.
新元史 / 卷029 / 氏族表 下 :《色目人, 曰 : 畏吾氏·唐兀氏·康里氏·乃蠻氏·雍古氏·欽察氏,又爲伯牙吾氏·阿速氏·迦葉彌兒氏·賽夷氏·烏思藏掇族氏·族潁氏·突甘斯氏·感木魯氏·回回氏【其別曰:答失蠻·迭裏威失·木速蠻木忽四氏.于闐氏·阿里馬里氏·昔裏馬氏·八瓦耳氏·古速魯氏·也裏可溫氏·亦回回別族.】·哈剌魯氏·阿魯渾氏·尼波羅氏·忽魯木石氏.畏吾氏,本回鶻之裔,音轉爲畏吾【或云,畏兀又作偉兀,又作衛兀】. : 색목인(色目人), 이르기를 : 외오씨(畏吾氏)·당올씨(唐兀氏)·강리씨(康里氏)·내만씨(乃蠻氏)·옹고씨(雍古氏)·흠찰씨(欽察氏), 또 백아오씨(伯牙吾氏)·아속씨(阿速氏)·가엽미아씨(迦葉彌兒氏)·새이씨(賽夷氏)·오사장철족씨(烏思藏掇族氏)·족영씨(族潁氏)·돌감사씨(突甘斯氏)·감목노씨(感木魯氏)·회회씨(回回氏)【그 외(外) 답실만(答失蠻)·질리위실(迭裏威失)·목속만목홀사씨(木速蠻木忽四氏)가 별도로 있다. 우전씨(于闐氏)·아리마리씨(阿里馬里氏)·석리마씨(昔裏馬氏)·팔와이씨(八瓦耳氏)·고속노씨(古速魯氏)·야리가온씨(也裏可溫氏)는 또한 회회(回回)의 별도 족속이다.】·합랄노씨(哈剌魯氏)·아노혼씨(阿魯渾氏)·니파라시(尼波羅氏)·홀노목석씨(忽魯木石氏). 외오씨(畏吾氏)는, 본래 회골의 후예로, 음이 외오(畏吾)로 변하였다.【혹 전하기를, 외올(畏兀)은, 위올(偉兀)이고, 또 위올(衛兀)이다.】고 하였다.
옛 ‘몽고족(蒙古族)’들은, 오늘날의 “몽골공화국”를 이루고 있는 국민(國民)들과는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들이다. 즉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국민(國民)들과 옛 몽고족(蒙古族)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민족(異民族)이다.”라는 뜻이다.
➤ 위의 기록(記錄) 즉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내만(乃蠻)은, 총령(葱嶺) 서남(西南)’에 있었다. 몽고(蒙古)가 ‘흠찰(欽察)과 내만(乃蠻)을 공격했다’는 것에 따르면 : 그들은 서로 인접(隣接)한 곳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確實)하다.
● 이러한 ‘예(例)’에 따르면 “화림(和林)”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카스피해[Caspi, 海=寬田吉思海: 裏海]와 흑해(黑海) 연변(沿邊)에서 찾아야 마땅하다.」왜냐하면 “내만의 고성(故城)이 바로 화림성(和林城)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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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화림성(和林城)’편에 의하면 :
《和林城在漠北千餘里。唐回鶻毗伽可汗故城也。蒙古初都此,以西有哈喇和林河,因名。: 화림성(和林城)은 막북(漠北) 천여(千餘)리에 있다. 당(唐)나라 때의 회골(回鶻) 비가가한(毗伽可汗)의 옛 성(城)이었다. 몽고(蒙古)가 처음 이곳에 도읍(都邑)했는데, 서(西)쪽에 합랄화림하(哈喇和林河)가 있어, 이로 인하여 이름[和林]이 된 것이다. 志云:蒙古之先有孛端叉兒,其部族居烏桓北,與畏羅乃蠻九姓回鶻故城和林接壤,世奉貢於遼、金,而總領於韃靼,至也速該始盛,攻塔塔部,還次跌里溫盤陀山,而生鐵木真,後日以強大。: 지(志)에서 이르기를 : 몽고(蒙古)의 선대(先代)에 패단차아(孛端叉兒)가 있어, 그가 부족(部族)을 이끌고 오환(烏桓) 북(北)쪽에서 살았는데, 외라(畏羅) 내만(乃蠻) 구성(九姓) 회골(回鶻)의 옛 성(城)과 화림(和林)에 땅이 접(接)해 있어, 대대로 요(遼)와 금(金)나라에 공물(貢物)을 바쳤는데, 달단(韃靼)이 모든 것을 다 다스렸다. 야속해(也速海) 때에 처음으로 성(盛)하여, 탑탑부(塔塔部)를 공격하고, 질리온반타산(跌里溫盤陀山)으로 돌아갔는데, 여기에서 철목진(鐵木眞)이 태어나, 뒤에는 강대(强大)해졌다.》고 하였다.
❶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왈(曰) : 〈唐 回 鶻 毗 伽 可 汗 故 城 也。화림성(和林城)은, 당(唐)의 “회골(回鶻)” 비가가한(毗伽可汗)의 옛 성(城)이었다〉는 설명(說明)이다.
결국(結局) 핵심(核心) 포인트[Point]는, 『당(唐) 때 “회골(回鶻)”의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인데, 당(唐)이 망(亡)하고 난 뒤에 만들어진 당서(唐書)가 아닌, 당(唐) 왕조(王朝)가 생생(生生)하게 살았을 때 만들어진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이 더 신뢰(信賴)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다. [서력(西曆) 762년∼801년에 걸쳐 완성(完成)되었다.]
이러한 “두우(杜佑) 통전(通典)의 변방전(邊防傳)”에 따르면 : 《迴紇 : 迴紇在薛延陀北境,居延婆陵水,去長安萬六千九百里. : 회흘(迴紇=回鶻=回紇)은, 설연타(薛延陀)의 북(北)쪽 지경에 있는데, ‘파릉수(婆陵水)’에 퍼져 산다. 장안(長安)까지 16,900리를 가야 한다[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➋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옛 장안(長安)까지 16,900 리가 떨어져 있다」고 했을 때, “장안(長安)으로부터 16,900리가 되는 곳을 어딜까?” 이게 핵심(核心) 대목이다. 이걸 수치화(數値化)하면 : 〈4,000km+2,400Km+360Km= 6,760Km〉가 되는데,
옛 ‘장안(長安)은 경조(京兆)’다. 현재(現在)의 서안(西安)이다. 이곳으로부터 16,900리[ 6,760km]를 구글어스[Google Earth]에 대입(代入)해보면 :
➀ 지중해(地中海)의 키프로스(Cyprus)섬에 닿고,
➁ 이스탄블(Istanbul) 흑해(黑海)에 닿고,
➂ 서(西)쪽과 서북(西北)쪽으로는 우크라이나(Ukraine) 키이우[Kyiv: 키예프] 서(西)쪽에 이르며, ➃ 핀란드(Finland)와 발틱해(Baltic, 海)에 이른다.
즉(卽) 쉽게 말해 〈오늘날의 러시아[Russia] 서울[모스크바 : Moskva]의 서(西)쪽 땅에 “회흘(回紇) 부락(部落)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곳에 “당(唐) 때의 회골(回鶻) 비가가한(毗伽可汗)의 옛 성(城)”이 있다』라는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다.
정확(正確)하게 “동라(同羅), 설연타(薛延陀), ‘회흘(回紇)=회골(回鶻)”등의 여러 부락(部落)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통전(通典)의 서역(西域)편에서 말해주고 내용(內容)이다.
➤➤➤ 그렇다면 『당(唐) 때의 ‘회골=회흘(回紇)’의 땅은, 모스크바[Moskva] 서(西)쪽 땅에 있었으며, 회골(回鶻)의 비가가한(毗伽可汗)의 고성(故城) 또한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역사기록(歷史記錄)으로 보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 수밖에 없는 ‘팩트(Fac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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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신외사(庚申外史) 상(上)’편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즉(卽) 〈阿速者,綠睛回回也 : 아속(阿速)인들은, 푸른 눈동자(綠睛)의 회회(回回)이다.〉라고 하였다.
아속(阿速)은 즉(卽) 흠찰(欽察)이다. 이들은 『엄채(奄蔡)=아숙(阿宿)=아사(阿思)=阿速惕=阿速特이며, 이란[伊朗人種]인 종으로 원래 고가색산[코카서스]에서 살았는데, 뒤에 복이가하[Volga강]유역으로 이주(移住)하여 아란(阿蘭)왕국(王國)을 건립했으나 1239년 몽고(蒙古)에게 멸(滅)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회회(回回)족이 누군가?
‘회회(回回)’는, 당대(唐代)의 회골(回鶻)이며, 회흘(回紇)이다. 이들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인들이 아니라 바로 “구라파(歐羅巴) 인종(人種)”들이다. 즉(卽) “카스피해[Caspi, 海)] 서(西)쪽의 색목인(色目人)들로, 발칸반도(Balkan, 半島]로부터 폴란드{Poland}로 이어지는 흑해(黑海 : Black Sea)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살고 있는 많은 ‘색목인(色目人)’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상식(歷史常識)이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틀 속에서 맴도는, 사고(思考)하지 못하는 ‘사관(死觀)’을 뇌(腦) 세포(細胞)에 주입(注入)시켜 만든 ‘좀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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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필자(筆者)의 주관적(主觀的)인 주장(主張)이 아니다. 「고전(古典) 원전(原典)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 하나하나를 찾고, 또 찾아나서 객관적(客觀的)이며, 합리적(合理的)인 결론(結論)을 도출(導出)한 것이다.
○ 이러한 곳에서 찾아야 할 “화림성(和林城)”을 “고비사막(Gobi沙漠)” 북(北)쪽에서 찾는다? 또는 ‘몽골공화국’ 서부(西部) “올혼 강” 상류(上流)의 우안(右岸) ‘에르네니자오’에 있다고 말하며, 이곳에서 유적(遺跡)을 발굴(發掘)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당(唐)나라 때의 회골(回鶻)이 어디에 있었는가? 이게 핵심(核心)이다. 더불어 “당(唐)”이라는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대륙(大陸) 요충지(要衝地) 땅인 “장안(長安)”에 없었다. 이곳은 『고구려(高駒驪)의 장안성(長安城)』이었기 때문이다.
○ 장안(長安)에서 〈17,500리 또는 16,900리, 14,000여리〉등은, 엄청나게 먼 곳이며,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진짜 2만 리(萬里)” 가 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머나먼 곳이다.
따라서 고정관념(固定觀念)과 역사통설(歷史通說)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세뇌(洗腦)되고, 일상화(日常化)되어버린 많은 분들에게는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대목일 것이다.
[한국인으로 국내에서 유아시절을 보내고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받고, 전문지식까지 습득한 많은 정치인들이, "영상속의 한국인이 말하는 대화속"에서 '∼새끼'니, '쪽 팔려서 어떡하냐'등은 제대로 알아들으면서, 왜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에서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기괴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일까?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 조차 구별 못하는 주제들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맆서비스를 날리는 것일까? 이건 귀신들이 백주에 꽝과리를 치며 행진하는 꼴이다.]
발상(發想)의 전환(轉換)과 사고(思考)의 전환(轉換)을 할 수 있는 계기(契機)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사(朝鮮史)를 이해(理解)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2022년 09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나라안에 "미신과 무속"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을 수록 그 나라는 망조(亡兆)가 보인다.
"반도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도, 일제는 반도 땅에서 "미신과 무속'을 몰아내기 위해 힘썼다"고 했다.
또, "전 대통령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나서도 이 땅에서 미신과 무속을 타파하기 위해 무지한 노력을 기울렸다."고 했고, 실제 시골에서 미신과 무속의 존재들이 하나하나 제거되는 것들을 직접 목격한 시절을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만인가? 2022년 오늘의 대한민국 땅에서 "미신과 무속들"이 활개를 친다? '서낭당'이니 '무슨 무슨 법사'니 하는 대표적 미신과 무속집단들이 활개를 치며, 이 나라에 '망조'를 선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미신과 무속"의 올가미에 걸려 퍼득거려야 좋겠는가?
어떠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미신과 무속"은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피해야 할 건전하지 못한 관습이다.
나라가 "망조"가 들면 이런 건전하지 못한 "미신과 무속"들이 활개를 친다. 이런 현상을 누가 제어하고, 누가 감시해야 할까?
바로 우리들이다. 즉 국민들의 몫이다.
소위 "보수"집단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지들이 움켜쥐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하는 욕심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 상태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발버등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삶에서 변화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발전이 있었을까?
끊임없는 변화에 힘입어 오늘이 있는 것이다.
왜 보수집단은 "친일과 친미"에 목매는 것일까?
특히 "친일"에 목매는 자들을 보면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왜 하필 "친일"인가? "극일"이면 누가 뭐라나?
오늘의 우리를 보면 : '기시다와 윤석열 정권'이 보인다.
일본의 정치수준에서 '윤석열 정권'을 보면, 지금 일본의 정치판은 살얼음판이다. 몇 % 더 지지율이 떨어지면 '기시다'는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게 오늘의 일본 정치판이다. 윤석열 정권의 지지도는 어떤가? "도토리 키재기다."
이런 판국에 무슨 얼어죽을 "정상회담"일까? 그것도 구구절절 부탁하고 부탁하고, 요청에 요청하여 어거지로 몇 십분만난것이 회담이냐? 오죽하면 "윤석열이 기시다에게 빚을 졌다"는 이야기까지 나놀까?
왜 그렇게 목매는 걸까? 끼리끼리 목매고 있는 자들이 바로 보수집단이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