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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이전(吏典) 제1조 속리(束吏)
5.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며 끝내 허물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사기만을 일삼는 아주 간악한 자는 형벌로써 다스려야 한다.
《사기(史記)》 혹리열전(酷吏列傳)에 이렇게 말했다. “영성(甯成)이 윗사람이 되더니 마치 젖은 나무를 묶듯 아랫사람을 다루었다. - 위소(韋昭)는 ‘젖은 나무를 묶듯’이란 말을 “급하게 다룬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
유공작(柳公綽)이 산동 절도사(山東節度使)로 있을 때 등현(登縣)을 지나게 되었는데, 두 아전 중에 한 사람은 장물죄를 범하고 한 사람은 법조문을 농간한 일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유공작은 반드시 장물죄를 범한 자를 죽이리라.’ 하였더니, 유공작은, “법을 범하면 법은 그대로 있지만, 법을 어지럽히면 법이 없어진다.” 라고 판결하고, 결국은 법조문을 농간한 자를 죽였다.
당나라 때 진원현(眞源縣)에 화남금(華南金)이란 세력 있는 아전이 방자하게 구니 읍중 사람들이, “남금(南金)은 입이요, 명부(明府)는 손이다.” 하였는데, 장순(張巡)이 현령이 되어 그를 곧 잡아 죽였다.
송나라 때 역전(酈戩)이 개봉부(開封府)를 맡아 다스릴 적에 부(府)의 아전 풍사원(馮士元)이란 자가 높은 벼슬아치들과 결탁하여 멋대로 간사한 짓을 하고 장물을 탐하였으며, 대부분의 권력이 풍사원에게서 나오므로 경사(京師) 사람들이 그를 입지경조(立地京兆)라고 불렀다. 역전이 풍사원을 잡아 죄안(罪案)을 작성하여 해도(海島)로 유배시키니 도하(都下)가 숙연해졌다.
황종(况鍾)은 의덕(宜德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1426~1435) 연간에 소주지부(蘇州知府)가 되었는데, 그 고을은 매우 번거로워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결국 황종을 발탁하여 새서(璽書)를 주어 일을 전결(專決)하게 하고 역마(驛馬)를 타고 부임하도록 하였다. 황종이 부임하여 처음 정무를 볼 때 말도 어눌하게 하면서 아전이 문서를 가지고 오면 옳고 그름을 전연 묻지도 않고 그대로 결재해 주고 폐단이 되는 점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통판(通判) 조침(趙忱)이 방자하게 굴면서 황종을 업신여겼지만 황종은 역시 그대로 따르고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거의 한달 쯤 되는 어느 날 아침에 좌우 사람들에게 명하여 향ㆍ촛불ㆍ책상을 갖추어 놓게 하고, 예생(禮生)ㆍ요속(僚屬) 이하도 아울러 불러서 모이자, 황종은, “내가 가지고 온 조정의 칙서(勅書)를 아직 선포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 칙서를 선포할 것이다.” 하고 선포하니, 선포한 칙서 중에는 요속들의 불법한 행위는 곧장 잡아 문초하라는 말이 있었다. 그제서야 여러 아전들은 모두 놀랐다.
예가 끝나자, 황종은 당(堂) 위에 앉아서 동네 노인들을 불러 놓고, “내가 듣건대 이 고을 사람들 중에는 교활한 자가 많아 매양 착한 사람을 속인다 하니, 내게는 선한 사람을 나타내고 악한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 내 비록 염라노자(閻羅老子)만은 못하더라도 부류(部類)를 나눌 수는 있다. 이제 그대들에게 위촉하니 속히 선호(善戶)와 악호(惡戶)를 보고해 오라. 선한 자는 내가 우대하여 그중 특별한 자는 빈례(賓禮)로 향음(鄕飮)에 초대할 것이고, 악한 자는 백성을 위하여 죽일 것이다. 나는 선악을 기재할 두 장부를 차려 놓고 그대들을 기다릴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부중(府中)의 아전들을 모조리 앞에다 불러 놓고 큰소리로, “어느 날 어떤 일은 너 아무개가 이러이러했으니, 응당 약간을 도적질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어느 날에는 아무개가 이러이러했겠다.” 하니, 여러 아전들은 놀라서 자복하고 감히 변명하지 못했다. 황종이 죄인을 끌어 내도록 하면서, “나는 더 이상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고, 벌거벗게 한 다음 조례(皁隷 노예) 중에 어깨 힘이 있는 자 네 명을 골라, 아전 한 사람을 공중으로 던져서 거꾸로 떨어져 죽도록 하였다. 조례들이 처음에 살며시 던지므로 황종은 크게 노하여, “나는 지금 백성을 위하여 도적을 죽이는 것이다. 쥐새끼 같은 것들은 나더러 포악한 위세를 부리기 위한 것이라 하는가? 높이 던져서 그대로 떨어져 죽게 하라. 죽지 않으면 개같은 네놈들을 죽일 것이다.” 하니, 조예들은 무서워서 명령대로 하여 그 자리에서 여섯 명을 거꾸러뜨려 죽였다. 도살하는 사람에게 명하여 죽은 자의 머리를 갈고리에 걸어서 끌어내어 저자에 벌여 놓게 하고, 다시 관속 가운데서 탐욕하고 포악한 자와 용렬하고 나약한 자 10여 명을 내쫓으니, 이로 인하여 이민(吏民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 마음을 고치고 명령을 삼가 받들었다. 이에 소주(蘇州) 사람들이 황종을 ‘황청천(况淸天)’이라 칭하였다. - 《황명통기(皇明通紀)》에 보인다. -
생각하건대, 악한 자를 징계하고 교활한 자를 주살(誅殺)하는 데는 정한 형벌이 있는데, 하필 거꾸러뜨려 죽여야 통쾌하단 말인가? 혹리(酷吏)가 참혹한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민심을 복종시키지 못한다.
고려 시대 권단(權㫜)이 경주유수(慶州留守)로 있을 때 창고를 맡은 자 중에 백성이 낸 조세(租稅)를 도둑질한 사람이 있으므로 그의 머리를 관청 뜰에서 뻐개버리니, 보는 자들이 떨었다. 충렬왕(忠烈王) 초에 불리어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제배되었다.
고려 시대 전원균(田元均)이 합천군(陜川郡)을 맡아 다스릴 때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고, 영세민을 위무할 때에는 언제나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보았으며, 간활한 아전을 처벌할 때에는 마치 호미로 풀을 매듯 샅샅이 다스렸다. 그리고 간악한 자를 발견하고 숨은 일을 귀신같이 찾아내니, 온 고을이 경탄하였고, 옥사를 처결할 때에는 더욱 상세하게 심리하였기 때문에 곤장 맞는 자들까지도 모두, “전(田) 사또가 판결한 것이니, 억울함이 없다.” 하였다.
이정영(李正英)이 가산 현감(嘉山縣監)으로 있을 때 그 고을에 교활한 아전이 있었는데, 감영(監營)의 세력을 믿고서는 관리를 능멸하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으며 심지어는 매질까지 하여 가난하고 약한 백성을 사사로이 협박하였다. 공은 그의 죄를 다스리고 그가 빼앗은 물건을 임자에게 돌려 주었더니 그 아전은 또 원한을 풀 계략을 꾸몄다. 공은 그 사실을 순찰사(巡察使)에게 말하여 그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원하였더니 승낙했다가는 중간에 다시 번복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 아전을 곤장으로 쳐서 죽이니 백성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영휘(李永輝)가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있을 때 아전들이 마음씨가 사나워서 교활하게 백성을 침해하는 일이 많았다. 공은 그중에서 심한 자를 적발하여 법대로 엄하게 다스리고 서로 감시하게 하여 마을이나 사찰ㆍ시장 등지에 가지 못하도록 금하니,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부하를 엄하게 단속하니 아전들은 모두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들을 감화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공은 그 군의 아전 두 명이 약간 청렴하고 공손한 데다 효도하고 우애한다고 고을에서 소문이 났는지라, 그들을 불러 주식(酒食)을 주면서, “너희들은 이러한 행실을 가졌으니 충(忠)을 효(孝)에서 구함이 마땅하매 반드시 맡은 바 직책에 전심하고 관장을 속이지 말며 죄를 지어 부모를 위태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니, 두 사람은 감격하여 맡기는 일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고, 다른 아전들 또한 따라서 분발하였다. 백성 중에 상례(常例)로 아전에게 사물을 보내는 자가 있었는데, 아전이 그것을 받지 않자 몰래 그 집에 갖다 두었으나 그 아전은 그것을 알고 끝내 돌려 보냈다. 그래서 뇌물을 주고 받는 풍습이 거의 없어졌던 것이다.
민진량(閔晉亮)이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있을 때 그 고을에 간휼한 아전이 있었는데, 공의 강명(剛明)함을 꺼리고 일당과 모의하여 일시에 도망쳐 버렸으니, 그것은 공으로 하여금 떠나 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공은 의젓하여 조금도 동요치 않고 촌민들을 불러서, “도망간 놈들의 전토는 관에서 수확하여 고원(雇員)의 품삯으로 충당하려 한다.” 한즉, 열흘도 채 못되어서 뿔뿔이 돌아왔는데 공은 지난 일은 불문에 붙이고 그대로 안정시켰다.
판서 이노익(李魯益)은 언젠가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었다. 감영의 아전인 최치봉(崔致鳳)이란 자는 성품이 매우 교활하여 악인의 으뜸이었다. 도내에 53읍이 있는데, 매 읍마다 반드시 2~3명의 간악한 아전이 있어 모두 치봉(致鳳)과 결탁하고 치봉을 맹주로 삼았다. 치봉은 매년 수십 만 냥을 여러 간악한 아전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창고를 농간질하여 돈으로 바꾸어 식리(殖利)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니 모든 백성이 해독을 입었다. 매양 감사가 이속과 군교들을 보내 수령들의 잘잘못을 염탐하게 하면, 반드시 먼저 치봉의 지시를 받고, 돌아와서도 반드시 그 기록한 것을 치봉에게 먼저 보였다. 그래서 치봉은 수령 중에 청렴 근신하고 법을 잘 집행하는 자는 모두 몰래 중상하는 반면, 탐오하고 법을 잘 지키지 않는 자와 간사한 향임(鄕任)이나 간활한 아전으로서 기록에 들어 있는 자들은 모두 빼내었다. 그리고 그 기록된 것을 도려내서 본인들에게 보내 위세와 공덕을 세웠으니, 온 도민이 그를 미워한 지 오래였다.
이 판서(李判書)가 감사로 부임한 지 10여 일 만에 갑자기 치봉을 잡아들여다가, “네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고 곤장으로 쳤으나 죽지 않거늘, 3~4 고을에 옮겨 가두다가 고창(高敞)에 이르렀을 때는 속히 물고장(物故狀)을 들이도록 재촉하니, 치봉은 다음날 오시(午時)까지만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으나, 현감이 들어주지 않아, 드디어 고창에서 죽고 말았다. - 대개 치봉은 재상들과 결탁하였으므로 이때에 세 아들을 나누어 보내 살기를 도모하였으니, 다음날 오시에 이르면 거의 살길이 트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이때 나는 강진(康津)에 있었는데, 간악한 아전 몇 사람이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애를 태워서 뼈만 앙상하게 남더니 몇 달이 지난 뒤에야 조금 안심하는 것을 보았다. 우두머리 악인을 죽인 영향이 이와 같았다.
[주-D001] 사기(史記) 혹리열전(酷吏列傳) : 《사기》는 한(漢)나라 때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것이며, 혹리열전은 가혹한 관원들의 전기(傳記)를 모은 것이다.
[주-D002] 영성(甯成) : 한(漢)나라 때 남양(南陽) 사람이며 영성(寧成)이라고도 한다. 그는 하관으로 있으면서도 상관을 마구 능멸하였고, 제남도위(濟南都尉)ㆍ관도위(關都尉)ㆍ내사(內史) 등을 역임하는 동안 “차라리 유호(乳虎 새끼 난 범)를 볼지언정, 영성의 노여움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당시 사람의 평을 받을 정도로 포악한 정치를 하였다. 《史記 卷122》 《漢書 卷90》
[주-D003] 위소(韋昭) : 삼국 시대 오(吳)나라 운양(雲陽) 사람으로 자는 홍사(弘嗣)이고, 위요(韋曜)라고도 한다. 문장에 능하고 벼슬은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거쳐 시중(侍中)에 이르렀으며, 저서에는 《효경주(孝經注)》ㆍ《논어주(論語注)》ㆍ《국어주(國語注)》ㆍ《관직훈(官職訓)》ㆍ《변석명(辯釋名)》 등이 있다. 《三國志 卷65》
[주-D004] 유공작(柳公綽) : 당나라 때 화원(華原) 사람으로 자는 관(寬), 시호는 원(元)이다. 벼슬은 하동 절도사(河東節度使)ㆍ병부 상서(兵部尙書)ㆍ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唐書 卷162》
[주-D005] 남금(南金)은 …… 손이다 : 이 말은 화남금은 지시하는 입장이고, 사또는 심부름하는 입장이란 뜻이다. 명부(明府)는 태수(太守)와 현령(縣令)의 별칭으로 부군(府君) 또는 명부군(明府君)이라고도 한다.
[주-D006] 장순(張巡) : 당나라 때 남양(南陽) 사람이다. 군서(羣書)에 널리 통하고 전진법(戰陣法)에도 밝았으며, 벼슬은 청하령(淸河令)ㆍ진원령(眞源令) 등을 거쳐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고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 《唐書 卷192》 《舊唐書 卷187》
[주-D007] 역전(酈戩) : 미상이다.
[주-D008] 입지경조(立地京兆) : 즉석 경조윤(京兆尹)이란 말이다. 즉, 풍사원의 위세가 경조윤에 못지 않기 때문이다.
[주-D009] 황종(况鍾) : 명(明)나라 때 정안(靖安) 사람으로 자는 백률(伯律)이다. 인품이 강직 청렴하고, 벼슬은 예부 낭중(禮部郞中)을 거쳐 소주지부(蘇州知府)를 지냈다. 《明史 卷161》
[주-D010] 새서(璽書) : 임금의 도장이 찍힌 문서이다.
[주-D011] 예생(禮生) : 예절 의식을 거행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주-D012] 요속(僚屬) : 계급에 있어서 아래에 딸린 동료를 말한다.
[주-D013] 염라노자(閻羅老子) : 여기서는 송나라 포증(包拯)을 가리킨다. 포증은 송나라 때 합비(合肥) 사람으로 자는 희인(希仁),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성품이 곧으면서 돈후하고 관리들의 가혹함을 미워하였으므로 어린애나 부녀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았고, 당시 그를 포대제(包待制) 또는 포염라(包閻羅)라 부르기까지 했다. 벼슬은 예부 시랑(禮部侍郞)에까지 이르렀다. 《宋史 卷316》 인품이 강직하고 부정을 귀신처럼 밝혀내므로 귀척(貴戚)ㆍ환관(宦官)이 꼼짝을 못하고 간사한 관리들이 떨었다. 그래서 후세에 부정을 잘 밝혀내는 데 있어 대표적인 인물로 흔히 포증을 드는데, 염라포자(閻羅包子)라고도 한다.
[주-D014] 황청천(况靑天) : 푸른 하늘과 같이 밝아서 속일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15] 권단(權㫜) : 1228~1311. 자는 회지(晦之), 호는 몽암(夢巖),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전리총랑(典理摠郞)ㆍ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등을 지내고, 만년에 선흥사(禪興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주-D016] 전리총랑(典理摠郞) : 전리사(典理司)의 총랑(摠郞)이다. 전리사는 1275년(충렬왕1)에 원(元)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이부(吏部)와 예부(禮部)를 통합한 기관이다. 총랑(摠郞)은 정4품직이다.
[주-D017] 전원균(田元均) : 1144~1218. 자는 진정(眞精), 본관은 태산(泰山)이다. 호부 시랑(戶部侍郞)ㆍ서경 유수(西京留守)ㆍ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등을 지냈다.
[주-D018] 이정영(李正英) : 1616~1686.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이다. 이조 판서(吏曹判書)ㆍ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지냈고,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
[주-D019] 이영휘(李永輝) : 미상이다.
[주-D020] 민진량(閔晉亮) : 조선조 현종 때의 문신(文臣)으로 태안 군수(泰安郡守)ㆍ양주 목사(楊州牧使) 등을 지냈다.
[주-D021] 이노익(李魯益) : 1767~1821. 자는 겸수(謙叟), 호는 탄초(灘樵),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교리(副校理)ㆍ경기 관찰사ㆍ대사헌(大司憲)ㆍ예조 판서(禮曹判書) 등을 지냈다.
[주-D022] 향임(鄕任) : 향리(鄕吏)의 악폐(惡弊)를 막고 수령을 보좌하는 향소(鄕所)의 직원이다.
[주-D023] 물고장(物故狀) : 죄인을 죽였다고 보고하는 서장이다.
誘之不牖。敎之不悛。怙終欺詐。爲元惡大奸者。刑以臨之。
史記酷吏傳云。甯成爲人上。操下如束濕薪。韋昭云急也。
柳公綽節度山東。過鄧縣。有二吏。一犯贓。一舞文。衆謂公綽必殺犯贓者。公綽判曰。犯法法在。亂法法亡。竟誅舞文者。
唐眞源縣。有豪吏華南金。恣肆。邑中語曰。南金口。明府手。及張巡爲令。卽誅之。
宋酈戩知開封府。府吏馮士元者。通結權貴。恣爲奸贓。權柄多出於士元。京師號爲立地京兆。戩收士元案成。流於海島。都下肅然。
況鍾。宜德間。爲蘇州知府。郡號煩劇難治。遂擢鐘。授以璽書。假便宜從事。馳驛之任。鐘初視事。爲木訥。胥持文書。皆不問當否。便判可。弊蠹輒識之。通判趙忱肆慢侮。鐘亦唯唯不校。旣期月。一朝。命左右具香燭案。幷呼禮生僚屬以下亦集。鐘言某有朝廷勑。未嘗宣。今自宣勑。旣宣中有僚屬不法。徑自拿問之語。於是諸吏皆驚。禮畢。坐堂上。呼里老言。吾聞郡人多狡。每傾誣善人。吾有彰癉之術。雖不能如閻羅老子。自爲部別。今以屬若等。速以善戶惡戶報來。善者吾優視之。甚則賓致鄕飮。惡者吾且爲百姓殺之。吾列善惡二簿。俟若曹矣。又召府中胥悉前。大聲言。某日某事。你某作如此擬。應竊賄若于然乎。某日某如之。群胥駭服。不敢辨。鍾命引出曰。吾不能多耐煩。命裸之。俾皁隷有膂力者四人。輿一胥擲空中攧死之。皁始少投去。鍾大怒曰。吾爲百姓殺。賊狗鼠輩爲吾樹虐威耶。高投之立死。不死。死若狗曹。皁懼如命。立斃六人。命屠人鉤其髮。拖出肆諸市。復黜屬官貪暴者。庸懦者十餘人。由是吏民震悚革心。奉命惟謹。蘇人稱之曰況靑天。皇明通紀。
〇案懲惡誅猾。自有常刑。何必攧死之爲快。酷吏之慘覈。不足以服民心也。
高麗權㫜爲慶州留守。司戶有盜民租者。碎其腦于庭。觀者股慄。忠烈初徵。拜典理摠郞。
高麗田元均知陜川郡。淸廉。不受苞苴。其撫細民。未嘗不俯循哀惻。及繩猾吏。鋤理甚威。發姦摘伏如神。一州敬憚。決獄尤詳審。雖受棒楚者。皆曰田君決之。
李正英爲嘉山縣監。邑有黠胥。倚使府凌官。吏奪民產。至爲榜楚。私脅窮弱。公治其罪。而還其所奪。胥又計逞怨毒。公知狀。以言巡使。請究其罪。旣諾中改。公竟杖殺此胥。小民歌舞。
李永輝爲林川郡守。吏屬强悍。多姦猾侵暴。公摘治其尤者。嚴科條。使相伺察。諸村里寺店。禁不得到。以此民間晏然。束下旣嚴。吏皆知畏。於是思有以風動之。郡之二吏。稍持廉矜。而以孝友聞於鄕。召賜酒食曰。汝有此持行。當求忠於孝。必盡心職事。勿欺官長。毋取罪罰。以危父母。二人感激自誓。凡所委必用誠。諸吏亦自奮勵。民有以常儀饋吏者。吏不受。饋者潛置其家。吏覺竟還之。蓋苞苴之俗幾絶焉。
閔晉亮爲坡州牧使。邑有猾吏。憚公剛明。約其徒一時逃散。要使公去。公凝然不動。召村民使令而曰。逃者之田。將自官收穫。以充雇價。未浹旬。稍稍還集。公亦不問以安之。
李判書魯益爲全羅監司。府吏崔致鳳。巨猾首惡也。一路五十三邑。每邑必有二三奸吏。皆締交。致鳳恃爲盟主。致鳳歲以錢數十萬兩。分授諸奸吏。使幻弄倉庫。作錢立本。萬民受毒。每監司遣吏校廉問。守令臧否。必先受致鳳風旨。及其歸也。必以所錄。先示致鳳。守令廉謹執法者。皆陰中之。其貧鄙不法者。及奸鄕猾吏。入於所錄者。致鳳皆脫出之。割其所錄。送于本人。以樹其威德。一路側目久矣。李判書下車十餘日。忽拿入諭之曰。汝罪當死。棍之杖之。猶未死。移囚三四邑。至于高敝。促納物故狀。致鳳乞貸命。以待明日午時。縣監不聽。遂死于高敞。蓋致鳳締交宰相。至是分遣三子。以圖其生。若至明日午時。庶有生路故也。 時余在康津。見奸吏數人。恐禍及己。悚息焦心。爲之骨立。數月而後。乃能少安。首惡之誅。其風聲如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