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어느 날
사무실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뜯어보니, "중림 도시환경정비계획 의견 수렴
조사(세입자용 우편 조사
설문지)"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서울시 중구 중림동 398-1번지 일대 도시 환경 정비 구역 지정을 위한 의견 수렴 조사로 거주민 여러분의 의견을 청취하고자 실시하는 조사입니다."
개발에 맞서는 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수년, 중구청 잘 걸렸다는
생각을 했다. 은근히 삐져나오는
불안함을 누르며, 제대로 귀찮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거 쉽지가 않다.
사는 게 불편하면 개발?
조사지를 봤다. 사는데 뭐가 불편하냐고 묻는다.
주택이 낡고
주차 공간이 부족하고 등등, 둘 이상 선택 가능하단다. 다음 문항. "귀하/귀댁은 이
지역이 개발(
재개발 재건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띵 하다. '개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거주하는 지역이나 주택에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묻더니
바로 개발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묻는다.
정보 공개
청구까지 해가며 한참 걸려 받은 설문 결과, 역시나 짐작했던 대로 찬성 비율이 높다. 설문의
구성 속에 이미 개발은 낡은 주택과 부족한 주차 공간을 해결할
대안이 되어 있다. 중구청만이 아니다. 서울시 다른 구청들이
뉴타운이나
주택 재개발 사업 등을 위해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지와 설문 결과를
모아 보았다. 지역의 불편한 점과 '개발'을 연결시켜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중구청 설문이 나은 게 있다면, 세입자들에게도 설문을 받아 의견을 물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유자에 한정하지 않고 설문을 받는 지방자치단체들은 이외에도 있다.
주민 의견 수렴인지, 구청 의견 유포인지문제는 소유주에게 묻느냐, 세입자에게까지 묻느냐에만 있지 않다. 이런 설문은 사실상 의견 수렴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첫째
이유는 의견 수렴은 말 그대로 의견 수렴일 뿐, 개발
사업의 절차에서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청취'할 뿐이다. 개발 구역을 지정하는 절차는 오로지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구청이 계획을 수립한 후 구의회의 의견을 듣고, 주민
설명회를 열고, 30일 동안 주민 공람을 하면서 의견을 받는다.
여기에 설문 조사 하나가 더 들어가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구청이 잘 듣고 서울시에
신청을 하면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거쳐 통과된다. 자, 이제 개발 구역이 지정된다. 추진위원회에 이어 조합이
설립되고 사업
시행 계획을 인가받고 관리
처분 계획까지 내달리면 된다. 요즘은 이 단계들에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개발을 되돌리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최근 들어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 개발 구역 지정을
해제한 사례가 수도권에서 나오고 있고, 한나라당도 일몰제 등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에 걸쳐 파괴되어 온 동네
공동체까지 살아날 수 있을까. 결과는 의견과 무관하게 나타난다.
둘째 이유는, 중림동 설문지에서 보듯, 주민들에게 무엇을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설명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의견 수렴 조사에서 '개발'은 절대선이다. 마치 현재 거주 환경의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다. 물론 주민들이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각하고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개발이 대개의 경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기이한 현상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 많은 주민들이 개발에 기대를 건다.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나서 반대하는 주민들을 보며 시작할 때는 찬성하며 기대했던 것 아니냐며 질타하는 사람들도 있다.
손가락질은 지방자치단체를 향해야 한다. '개발'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음 자체가 개발에 대한 물신을 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민이세요?"
이렇게 개발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바람과 전혀 무관하게 추진된다. 물론 조합이 시행 주체가 되는 경우 소유주들은 의견을 낼 기회가 조금 더 생긴다. 조합의
총회를 거쳐야만 넘어갈 수 있는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위임장이다 뭐다 하면서 이조차 유명무실하기는 하지만, 소유주들이 마음만 먹으면, 되돌리기는 어려워도, 추진을 유예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세입자들은 끌려갈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뒤엎어지든지 뒤집어지든지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복잡한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개발은 재산권의
행사니 세입자들의 의견을 물을 수 없다는 얘기는 그만 듣고 싶다. 개발은
자기 집을 재건축하는 게 아니라 한 동네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다른 사람 집까지 부수자는 것이다. 개발은 재산권의 행사가 아니라 침해다.
지금 중림동에서는 개발 구역 지정을 반대하는 서명을 받고 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시는 분들은 오히려 소유주다. 이 분들도 처음에는 서명을 소유주에게만 받자고 했다. 사람을 만나면 "주민이세요?"라고 물으며 소유주인지 세입자인지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입자들도 '주민'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가리지 않고 서명을 받고 있다.
오히려 세입자들이 관심이 없다고 아쉬워한다. 문제는 중구청이다. 800세대 중 100세대가 응답한 작년의 설문 결과만 되뇌며 "찬성하는 주민이 많다"고 주장한다. 중구청이 개발을 추진하고 싶다는 말일 뿐이다. 주민들이 의견도 내고 면담도 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중구청은 의견 수렴 조사를 다시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흘렸다.
아니, 면담을 다녀온 주민 분은 분명히 조사를 다시 하겠다고 들었고, 작년 설문 문항이
공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문안도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왔다고 한다. 중구청에서 말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과의 약속대로 구역 지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이 조사가 진행된다면, 제대로 조사하고, 결과에 따라 추진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면, 이것은 누누이 지적되어 온 개발에서의 주민 배제 문제를 넘어,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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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을 버리는 개발. 그 최악의 결과가 용산 참사다. ⓒ뉴시스 |
선택한 자를 버리는 선택지도시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 동네의 일은 우리가 결정한다. 거주하기에 불편한 점을 찾고
추리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개발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최악의 선택지인 동시에, 도시의 주인인 주민의 선택을 벗어나버리는 선택지다. 그 결과가 용산4구역이었고, 지금의 명동 마리이고, 성남 단대동이고,
용강동, 아현동, 용마터널,
화곡동 판자촌이다.
아무도 동네가 좋아지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동네가 좋아지는 방법으로 개발만을 강요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권리를 그렇게 쉽게
회수하려는 현재의 '개발'을 반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