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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60
2월8일[연중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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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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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WmXeG37gMk
[서울대교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주교좌명동대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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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녀를 살리고자 하는 극진한 마음과 더없는 겸손, 주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
오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이방인 어머니에게 드러내신 행동이나 표현들은 우리가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보다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통상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데 있어, 이유나 목적이나 우선적인 순위를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특히 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더 중증이고 절박한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절박한 이교도 부인의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거절도 하시고, 잔뜩 뜸도 들이기도 하십니다. 더구나 아주 모진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고통당하는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예수님 입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로 여겨집니다. 이방인 부인 입장에서는 엄청 큰 모욕이고 수치였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의구심을 품을 상황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지만, 유다인 가운데 태어나셨고 유다 문화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또한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사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일련의 절차랄까 우선 순위가 있었습니다.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우선권이 부여되었고 이방인들은 그다음 차례였습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 말씀이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는 다른 때와는 달리 가련한 이방인 어머니의 간절한 청을 즉각적으로 들어주시지 않고 무척이나 뜸을 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일종의 밀당을 계속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고 더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을 지니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엄청난 수모를 당하면서도 단 할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여인의 태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의 지극한 겸손,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 그리고 죽어가는 딸을 살리고자 하는 그 극진한 마음이 마침에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아들딸들이, 이 시대 또 다른 악령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무너져가고 죽어가는 자녀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이방인 여인의 그 지극한 겸손, 주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 그리고 자녀를 살리고자 하는 극진한 마음이 합쳐져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자녀들도 말끔히 치유될 수 있는 기적과 희망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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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4Zof3V0X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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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청해야 하는 것 하나는 있어야 하는 이유>
영화 ‘백조의 노래’(2020)는 깊은 감정적,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생각을 자극하는 공상 과학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카메론 터너에 초점을 맞춥니다.
임박한 죽음과 씨름하는 동안 카메론은 스콧 박사로부터 혁신적인 과학적 해결책을 소개받습니다. 그 해결책은 자신의 클론, 즉 모든 면에서 같지만, 불치병이 없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은 스콧이 죽어도 그것을 모르고 제2의 스콧과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카메론은 자기 대신 자기의 복제인간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이 이미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더 주는 자기 이기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스콧 박사에게 청합니다.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도 왠지 다른 인간에게 자기 아내와 아들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 몰래 집안으로 숨어들기도 합니다. 아내나 아들이 두 카메론을 동시에 보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복제 카메론은 자기만큼 카메론을 아는 인간이 없기에 자기가 숨어줍니다.
카메론은 그런 자신의 복제 인간에게 가족을 맡겨도 된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스콧 박사도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카메론이 편하게 죽게 해주는 좋은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카메론이 스콧 박사에게 무언가 청할 때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 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는 것은 믿음의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로 페니키아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악령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청에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십니다.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무언가 이 여인처럼 목숨을 걸고 청할 수 있는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청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무언가 청할 때 우선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강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강아지도 자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무엇이든 청할 자격이 있습니다.
둘째는 ‘자비와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상대에게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과 자비가 없다고 여긴다면 나는 청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자비롭지 못하다고 여기면 결국 내가 이용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도 주님을 좋은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분을 모진 분으로 여겨 불만을 품는다면 스스로 주님께 청하는 일을 포기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아이가 칼과 총을 사달라고 청한다면 부모가 들어줄 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알아서 그런 것을 청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뜻에 어긋남을 알기 때문에 계속 청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자기 딸이 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에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끊임없이 청하라는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지치지 않고 청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면 내 청함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도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자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청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헛갈릴 때는 주님의 기도나 십계명, 혹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해당하는지만 살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는 것이라면 죽기까지 청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같은 식탁에서 빵을 먹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는 이의 청을 주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거나 뿌리치실 수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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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겸손이 최고의 덕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덕의 어머니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참 멋진 말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지혜로운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전해줍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재물과 권력 그리고 오래 사는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재물과 건강까지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가 아이 어머니라고 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정 그렇다면 아이를 둘로 갈라서 나누어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가짜 엄마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진짜 엄마는 차마 그럴 수 없어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아이를 포기한 엄마에게 아기를 주었습니다. 진짜 엄마는 죽은 아이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짜 엄마는 벌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왕자였을 때입니다. 다윗 왕은 대장장이에게 반지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지에 어려움에 처해서는 희망을 잃지 않고, 성공했을 때에는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새겨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대장장이는 무슨 말을 넣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대장자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대장장이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글을 반지에 새겨서 다윗 왕에게 주었습니다. 다윗 왕은 크게 만족하며 반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스바의 여왕이 찾아왔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하였습니다. 솔로몬을 축복하며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의 뜻과 멀어졌습니다. 교만함이 솔로몬의 지혜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꾀에 스스로 속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솔로몬도 교만 함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뽐내며 기도하는 바리사이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거만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많은 헌금을 했던 바리사이의 봉헌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작은 헌금을 했던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너희는 잔치에 초대 받으면 제일 낮은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집주인이 와서 너희를 높은 자리로 안내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겸손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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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다. 여기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끈질긴 간청으로 주님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인가? 마치 유다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원의를 갖고 기도할 때에 얼마나 조바심을 해왔고, 또 귀에 거슬리는 처사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모습보다는 화를 낸다든지, 즉시 그 사람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욕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딸을 치유해 주신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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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는 솔로몬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죄가 어떻게 시작되며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지에 대하여 묵상하게 합니다. 솔로몬의 타락은 인간적으로 매우 지혜로운 선택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하여 가장 좋은 결정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혼인으로 동맹하였고,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이웃 나라와 물자 교역을 늘렸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의 신들을 받아들인 것은 그 나름대로 문화적 다양성과 풍요로움에 이바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번영과 함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솔로몬이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었고, 조약을 공고히 하고자 정략혼인을 하였습니다. 또한 이민족에서 데려온 아내들을 위해서 그들이 섬기는 신을 위한 신당을 짓고서 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좋은 의도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다른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최악의 결과로 끝이 납니다. 솔로몬은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뿐이라 변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죄는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는 말로 우리의 경계심을 늦추며 조금씩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차지합니다.
몰라서 짓는 죄보다 그것이 죄인 줄 알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어 짓는 죄가 더 많아 보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죄악과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물신주의, 무관심, 이기심과 같은 세속적 정신과 손을 잡고, 자리를 내주며, 결국 그 세속적 신념에 동의하고 그것에 제물(삶)을 바치게 됩니다. 그렇게 합리화하고 자기 정당화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빠져듭니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요한 17,14-16 참조) 죄악을 근본적으로 끊어 버리는 단호함과 용기를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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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4-30)
이 이야기는, 이방인 구원에 관한 시메온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고, 어떤 백인대장의 이야기와 함께 이방인 복음화의 예고편이기도 합니다.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1-32) 하느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어떤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0ㄴ-11) <이 말씀도 이방인 구원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려고 그 지역으로 가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신 것은 아마도 제자들 교육과 휴식을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이 그 지역에 퍼졌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만 언급되어 있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에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 일이 일어난 것으로,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어서 하신 일로 보였던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복음서에 기록했는데,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로, 그래서 어쩔 수 없어서 하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해서 하신 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이든지 간에, 주님께 은총을 청해서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표현되어 있든지 간에,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일의 주도권은 언제나 항상 주님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능동적으로, 또 당신이 먼저 원하셔서 사람들의 청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강아지들’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 숭배자’ 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우상 숭배자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상 숭배자가 주님께 은총을 청해서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서 얻으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도, “자녀들의 빵을 먹고 싶다면 강아지에서 자녀로 변화되어라.”, 즉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여자의 말은, 계속 우상을 숭배하면서 강아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겸손한 태도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 말 앞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응답의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말은, “이제부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간절함’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떻든 여자가 우상 숭배자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고,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 것은, 그의 딸이 마귀에게서 해방된 것보다 더 큰 은총을 받은 일입니다. <여자는 딸 때문에 예수님께 왔지만, 그 자신이 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청한 은총도 받았고, 청하지 않은 은총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단호한 태도를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혹시라도 미신을 믿거나 미신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개로 전락시키는 일이 됩니다. 자녀가 되었다면, 끝까지 충실하게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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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매정한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어떤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마귀 들린 자기 딸을 치유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평소의 예수님 같아서는 여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실 법도 한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상하게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 청을 거절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자녀’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강아지’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오늘날같이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시대라면 강아지라는 표현에 큰 거부감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당대사람들은 ‘개’를 매우 부정적인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누군가를 개나 강아지에 비유하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꽤 무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숨은 의도는 여인이 지닌 믿음이 드러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거칠었던 표현은 사실 그를 자극하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시험대에 오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자녀와 강아지의 비유’를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굳건한 믿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청들이 있습니다. 또 이를 들어주시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한 경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믿음의 시험대에서 매일 그분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속에서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절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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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재학 예로니모 신부님]
<기적의 주인공>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연보다 조연들이 빛날 때가 많다. 사실 조연이 없다면 영화나 드라마의 재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는 잘생긴 주연보다 연기력이 뛰어난 조연이 돋보일 때가 있다.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복음 자체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님이고, 그분이 전해 주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복음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가끔 주인공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다.
사랑이 넘치시는 예수님이 평소와 다르게 매정하다. 딸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을 모욕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듣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모두를 감수하는 믿음의 말을 한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 딸에게 일어난 기적은 어머니의 겸손한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믿음의 여인이요, 어머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음의 주인공,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 어머니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말이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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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시로페니키아 여인>
사랑하는 예수님, 딸을 살리려는 애틋한 모정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당신은 시험이라도 하듯이 모욕적인 언사로 이방인인 그녀를 강아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딸을 악령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강아지가 아니라 돼지라도 될 각오였습니다.
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어떤 모욕도 감수하게 합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1요한 5,18)라고 노래합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시로페니키아 여인 위에 당신의 모습이 겹쳐(오버랩 overlap)집니다.
당신은 부족하고 죄 많은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늘을 버리고 땅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정든 고향과 집과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떠돌이 랍비가 되게 했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벗이 되게 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산으로 오르게 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다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렇게 조롱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그러나 당신은 그 모든 조롱과 모욕을 고스란히 받아 안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이 사랑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그 한량없는 큰 사랑으로 저희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닮아서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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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어떠한 여자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이 여자를 만나야 합니까?, 저 여자를 만나야 합니까?”
그는 하느님이 어떠한 여자를 만나야 할 지 선택해 주시면 그 여자에게 가서, “내가 기도를 했는데 하느님께서 내가 만나야 할 여자가 너라고 말씀해 주셨어. 그래서 너는 나를 만나야 해. 이건 하느님의 뜻이거든”이라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누구를 원하니?”
그 사람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뜻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의 뜻대로 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뜻을 찾아 헤맬 뿐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음성이 또 다시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누구를 원하는지가 궁금하단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궁금하다.”
남자가 말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복잡한 것은 묻지 마시고 차라리 명령을 하십시오.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니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왜 내 뜻을 구하는지 이야기 해주겠다. 첫째, 너는 스스로 자신이 없으니 한 여자에게 가서 신의 뜻이라고 이야기하며 그와 만나려 하는 거다. 즉, 내 이름으로 장사를 하려고 하는 거지. 두 번째, 네가 만약에 그 여자와 잘 안됐을 경우 너는 내게 와서 당신이 하라고 해서 그것을 따랐을 뿐인데 안됐으니 당신이 책임지라고 핑계를 대고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는 거다. 네 마음이 어떤지 다시 한 번 들여다보거라. 믿음이 좋다고 포장하지 말고.”
이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스스로 결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러나 다분히 계산적인 그릇된 신앙인의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듯 하지만 사실은 <간절함>과 <의지>가 빠져 있는 부족한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이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땅 “티로”라는 지역으로 가시어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이방인 여인을 만나 딸을 치유해 달라는 간청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소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여자를 ‘개’에 비유했고, 유다인들 역시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용어로 ‘개’라는 말을 써 오곤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해 여인을 개에 비유하십니다. 이러한 발언은 여인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임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끈을 절대 놓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주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신앙 고백의 중심에는 도움을 청하는 <간절함>과 자신의 <의지>가 모두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예수님이 이방인들까지 보듬어주시는 분, 힘든 이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굳건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시험에 기꺼이 자신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참다운 믿음과 신뢰를 내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지치지 않는 참된 신앙인의 모범적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인간의 삶이란 결코 평탄하지 않으며 여러 장애물들로 잡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의를 갖고 주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다소 조바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당장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같지 않은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오늘 복음의 여인의 태도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간절히 믿고 의지하는 여인의 신앙 고백에 감탄하셨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주님은 당신을 간절히 따르는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실 준비가 되어있는 분이십니다. 당장 우리의 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할지라도 도움의 과정에 우리를 놓아두시는 분,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간절함과 의지를 깊이 살피시고 배려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다시금 돌이켜 보며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청이 말했던 그대로 어느새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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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7,28)
서울 강남성모병원 검사받으러 가는 길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잠시 책방에 들렀습니다. 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를 잠시 시간 내서 읽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공감한 부분을 인용할까, 합니다. 『정보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다. 정보는 넘쳐난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세상이다. 편집의 시대에는 지식인이나 천재의 개념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정보를 외우고 있으면 천재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지식인은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검색하면 다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다.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생략) 일단 김용옥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무한하다는 거다. 죽을 때까지 한 이야기 또 할 수 있다. 개신교의 목사, 천주교의 신부, 불교의 스님들이 평생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가 항상 변한다. 같은 이야기도 콘텍스트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맥락에 따라 다르게 편집된다는 말이다. 해석학의 본질은 ‘에디톨로지’이다.』
결국 이 책의 주제는 '창조는 편집이다.'라고 할 수 있으며, 편집능력이 곧 권력이다, 고 주장입니다. 동일한 텍스트를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토를 달 수 없는 완결적 이론보다 다양한 생각이나 주장들이 다양한 가지들을 쳐나갈 수 있는 조금은 느슨한 스토리 프레임으로 편집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동일한 사료를 바탕으로 기록한 복음서이지만 각 복음서가 다른 배경은 복음사가들이 자신들 만의 프레임으로 편집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힘이 있다는 뜻으로 저는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 사이에 극명한 시각 차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루카 복음에는 아예 없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어떤 편집 원칙에서 복음을 섰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드러난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하심과 측은지심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무언(=표정과 몸짓)과 유언의 표현, 특히 성차별이나 인종이나 종교에 아무런 차별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복음은 이런 본래의 예수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극히 ‘차가운 도시남’처럼 냉정하고 몰인정하게 이방인 여성을 대하는 모습이 여간 낯설고 생소하기만 합니다. 왜 그렇게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냉정하고 쌀쌀맞게 대하시는지 저로서는 예수님의 숨은 의도, 깊은 뜻을 알지 못하기에 더욱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더욱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노골적으로 치켜세우면서, 이방인을 강아지라고 대놓고 모욕하는 듯싶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알려진 마태오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 당신 입으로 자신의 파견 소명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15,24)라고 단정 지어 말씀하심으로 이방인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왜 저토록 더러운 영이 들린 딸로 인해 힘겨워하고 맘고생을 겪고 있는 불쌍한 여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토록 몰인정하게 대하고, 무슨 심정으로 그렇게 모질게 대하는지 당황스럽고 속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아니 예수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지!, 하는 볼멘소리가 제 목에 꽉 차오릅니다.
어찌 뱁새가 봉황의 높고 깊은 뜻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이 예수님의 진심이 아니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는 말처럼 예수님은 그녀의 속마음을 이미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녀가 원하는 딸의 치료와 치유가 아니라,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로12,2)를 좀 더 알고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 위해 그녀에게 믿음의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여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을 때부터 그녀의 남다른 모습과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더더욱 자기 딸에게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간청하는 그녀에 대한 예수님의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라고 굴욕적인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녀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주워) 먹습니다.”(7,28)라고 다시금 예수님의 대자대비하심에 의탁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숱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감사하기보다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언감생심으로 자녀들의 밥상에서 함께 먹으려 하는 게 아니라,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만으로도 족하고 족합니다, 는 너무도 겸손한 고백을 듣기 원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는 단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매일 하느님의 식탁에서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하면서도 하느님의 한없이 크신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마땅히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우리의 무감각, 무감동을 반성하게 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새로운 감동으로 감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소홀하기 쉬운 주변의 사물,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무라 가즈키오’는 「당연한 일」이란 시에서 이렇게 사람들의 무심함을 묘사합니다. 『세끼를 먹는다. 밤이 되면 편히 잠들 수 있고 그래서 아침이 오고 공기를 실컷 들이마실 수 있고 웃다가 울다가 고함치다가 뛰어다니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두가 당연한 일 그렇게 멋진 걸 아무도 기뻐할 줄 모른다. 고마움을 아는 이는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뿐 왜 그러지 당연한 일을 가지고.』
그녀는 딸을 위해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말과 몸짓에 더 자신을 낮추고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기에, 주님께서는 단지 딸의 치유보다도 그녀를 더 높은 영적 생명으로 초대하시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식탁으로 초대하셨다고 봅니다. 이방인인 이 여인처럼 우리 또한 주님의 믿음 시험을 잘 치를 수 있기 위해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낮출 줄 아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주님, 당신께서 베풀어 주시는 모든 은혜를 당연시하지 않게 하시고 늘 새롭게 감사하게 하여 주시고, 매일 당신의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당신 사랑에 더욱 감사하며 그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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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세기 초, 덴마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을마다 순회공연을 하는 유랑 극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마단에 불이 난 것입니다. 곡마단의 광대는 분장을 지우지 못한 채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불이 났다고 소리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광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광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공연을 보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제는 별 희한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광대는 진짜 불이 났다면서 계속해서 호소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광대가 정말로 연기를 그럴싸하게 잘하는데?”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곡마단은 모두 불타버렸고, 그 불이 번져서 마을까지도 모두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세상입니다. 워낙 거짓이 많아서인지 먼저 의심부터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에서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믿음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며 불신했습니다.
이런 불신은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정확한 답을 위한다는 이유를 말하지만, 우리 인간이 정확한 진리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삶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것도 습관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욱더 주님 뜻에 집중하면서 그분 안에서 진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만든 힘든 삶에서 벗어나 기쁨과 행복의 만족스러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대단한 믿음의 여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한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딸을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에 심한 모욕과 수치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매정한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사랑의 딸에게서 마귀가 쫓겨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도 믿지 못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방인이라면서 비판을 받던 이방인 여성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굳은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때문이라면 모욕적인 수치심도 기쁘게 견디게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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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닮음 곧 믿음>
마르코 7,24-30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닮음 곧 믿음>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스스로를
한없이 낮춘
사람이
당신을
한없이 낮추신
하느님을
참으로
너무나도
닮았으니
당신을
한없이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어
강아지처럼 된 사람에게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믿음을 보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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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배가 부른 사람>
어떤 생선 장수가 마을에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신선한’은 빼시오. 다 신선한 생선 아니오?”
“그렇군요.”
그래서 “신선한”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다 알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했습니다.
“‘팝니다.’라는 말도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생선’이라는 글자도 필요 없습니다.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니까요.”
그래서 간판 없는 생선가게가 되었고, 고객들은 그 사람이 생선 장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은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헛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권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을 가진 이교도에게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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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정주 영성과 믿음의>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삶-
잠깨어 일어나 집무실을 문을 여니 은은한 봄향기가 온몸에 젖어들었습니다. 어제 제 75회 생일을 맞이하여 선물 받은 안개꽃과 후리지아 꽃이 잘 어울리는 꽃꽂이에서 나는 봄향기, 꽃향기였습니다. 즉시 꽃말을 찾아봤습니다.
안개꽃은 죽음,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 간절한 기쁨, 기대, 밝은 마음, 약속, 슬픔등 꽃말을 지니고 있고, 후리지아는 순백, 결백, 천진난만, 기대, 우정, 감사등의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꽃같은 영혼으로 살라는 깨우침을 주는 참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말들입니다. 26년 전 동양난(東洋蘭)을 선물 받고 써드린 “난(蘭)같은 당신”이란 답시도 생각납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있음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蘭)같은 당신입니다”-1998.3.31
어제 제 생일은 뜻하지 않게 참 행복한 일이 많았습니다. 수도원 봉사왔던 꽃같이 향기로운 네분 자매들은 축하케이크 선물에 축하노래에 이어 제 자작시(自作詩)들을 돌아가며 읽으니 얼마나 꽃처럼 향기로웠던 시간이었던지요! 대표 자매님의 감사의 메시지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신부님!
저희 모두에게 너무도 행복하고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가끔씩 모여 신부님 시낭독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가하면 세상 한복판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고고한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치과의사 형제님으로부터 향기 그윽한 꽃꽂이 택배 선물을 받았고 즉시 19년전의 “어느 치과 예찬”이란 시도 보내드렸습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욕심없어
마음 또한 맑고 깨끗하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이다
식물성이라
그 곁에선 풀냄새가 난다
시를 좋아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다
부드러움 중에
강인한 의지가 빛처럼 배어나오는 이다
그의 일은 하나의 예술이다
때로 쉬는 날 그는 진료 봉사를 한다
쉴 틈이 별로 없는 이다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사는 이다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살기에
외로움도 그를 슬며시 비켜간다
그러니
그는 예술가이고 세속 안에 수도자이다
내 좋아하는
어느 치과의사이다”-2005.3.
놀랍습니다. 19년이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서 정주하면서, 위 시처럼 한결같이 변질됨이 없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치과 서비스업에 전념하면서, 향기로운 발효인생을 살아가는 제가 좋아하는 어느 치과의사입니다. 또 알게 된 지 1년 채 못 되지만 수도원과 저를 끔찍이 좋아하는 분으로부터 평생 간직하고픈 수필집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제, 등짐을 내려놓다.-전국 가톨릭 성지순례완주, 그 발걸음 에세이”
표지 제목에 이어 안에는 저에게 보낸 글이었습니다.
“고마우신 분, 하늘만큼 존경하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순례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한 웃음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사와 사랑을 드리며, 2024.1.20. 저자 박온화(朴溫花) 루시아-
뒷 표지의 이해인 수녀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단아한 추천글도 일부 나눕니다.
“실제의 삶에서도 너무나 성실하고 단단하게
인내로운 신앙인의 본을 보여주는
박온화 작가의 진솔하고 따뜻한 글을 통해
우리에게도 영적갈망이 은은하고 새롭게 피어오르는
참 기쁨을 맛볼 수 있으니 거듭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 위해 목숨 바친 순교성인들을
더 깊이 더 고맙게 기억하면서
기도의 하얀 꽃 한 송이 바치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 계시듯 성인들도 언제 어디서나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윗분들은 물론이고 제 주변에는 하늘의 별처럼, 땅의 꽃처럼,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정주영성과 믿음을 살아가는 참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성인 같은 분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서울교대부국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60대 초반에 병사한 약 55년 전 제 고향 충남 예산의 옆동네 홍성 출신의 교대시절 절친이었던 분의 교대부국 동산에 세워진 돌판 묘비명 “한결같이”란 친필 글자도 문득 생각납니다. “한결같이” 절친의 삶의 모토였던 듯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온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음이 내내 회한(悔恨)으로 남아있습니다.
강론 서두가 길었습니다. 얼마전 “1.책 더 많이 보고 싶어서, 2.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다 했는데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3.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서” 오래 살고 싶습니다. 어느 고승은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 유언을 남겼다는데, 저는 하루하루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고, 공부할 것 가득 안고 강론을 씁니다. 다산 어록의 오늘의 말씀입니다.
“재물을 탐내기보다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재물보다 풍성한 만족을 준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정주영성과 믿음을,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참사람의 성인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복음의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한결같은 믿음과 독서의 솔로몬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말씀이 그대로 다윗과 솔로몬에게 적용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솔로몬은 한결같지 못했고 날로 변질 부패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우리의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다음 솔로몬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 못하였다.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르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 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솔로몬은 700명 아내와 300명의 첩을 두었다 하니, 그 변질 부패인생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면 얼마나 부패 변질되고 망가지고 무너질 수 있는 지 보여줍니다. 이래서 광야인생 하느님 중심의 삶에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하느님을 떠나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잘못 미치면 괴물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종교도 국적도 남녀노소도 보지 않고 믿음만 보십니다. 주님은 한결같이 당신 중심의 정주영성과 믿음에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끝까지 챙기십니다. 바로 그 좋은 예가 복음의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의 겸손과 인내의 정주의 믿음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그녀의 믿음에 감동한 주님의 치유의 응답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참으로 주님의 불퇴전(不退轉)의 여전사(女戰士),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의 겸손한 믿음, 인내의 믿음, 탄력좋은 백절불굴의 믿음, 한결같고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믿음, 목숨을 건 믿음입니다. 솔로몬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영적전투에 임하는 탄력좋은 믿음으로, 한결같고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믿음으로 살 때 영적승리의 삶이요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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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의 깊은 눈>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 말씀이 설마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일까 의심도 하고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도 송구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송구스러워할 필요 없고, 의심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잘못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너무도 교만하시기에 우리처럼 깔보신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처럼 교만하시고 우리처럼 깔보시는 분이시라면 그런 분을 우리가 우리의 주님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그런 분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실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동족이라고 더 사랑하고 이방인이라고 덜 사랑하는 분이 절대로 아니고 모든 족속을 다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그래서 동족 의식이나 민족주의는 아예 없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주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신 것인지, 분명 숨겨진 좋은 의도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제 생각에 그 숨겨진 의도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중에서도 제자들에게 도전을 주시려는 것일 겁니다. 이방인도 이런데 너희는 더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도전 말입니다.
실로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스라엘 동족은 주님을 죽이는데 오히려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미리 아시고 도전하셨습니다. 당신이 동족 주의자인 거처럼 이방인인 자기를 무시하셔도 이 여인은 당신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사실 여인이 그것도 이방 여인이 유대 남자를 찾아온 것은 그 당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이 여인에게 주님은 유대 남자가 아닙니다. 겉모습은 유대 남자지만 그것을 초월하시는 분, 겉으로는 무시하는 척하시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신 분임을 믿음으로 이미 안 것이고 믿음의 깊은 눈으로 본 것입니다.
믿음의 깊은 눈. 저는 이것을 오늘 강조하고 싶습니다. 눈 속의 풀을 보고 얼음 밑의 고기를 보듯 겉모습과 겉 행동 속의 본질을 보는 깊은 눈 그것이 믿음의 눈이고, 그렇게 아는 것이 믿음의 앎입니다.
주님께서 이방 여인에게서처럼 우리를 거칠게 다루셔도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거라고 믿는다면 그것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고 가르치시려는 것을 보는, 그런 믿음의 깊은 눈을 우리도 이방 여인처럼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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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마음의 가난!>
오늘 복음(마르7,24-30)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에 가셨을 때,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와, 아무리 비유적인 말씀이지만, 예수님께서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한 여자를 개 취급 하셨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모욕적인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거나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다면 당장 발끈할텐데, 청하는 것도 포기하고, 성당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여자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던 마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큰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자는 '마음이 가난한 여자'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구원자이신 분께로 향한 마음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성당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려고 성당엘 다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이런 은총이 주어집니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5,22-23)라는 '성령의 열매'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마음의 가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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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H7Zs30Vb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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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 28)
부스러가
있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주님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입니다.
부스러기들의
역사가 모여
신앙의 역사가
됩니다.
부스러기들이
모여
우리의 기도를
건져 올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부스러기처럼
작아지지 못해
은총을 놓치는
우리들 삶입니다.
부스러기처럼
작아지면
고요해지고
부스러기처럼
작아지면
삐걱거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처방전은
언제나 우리가
부스러기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부스러기가
향하는 곳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부스러기가
가야 할 길은
겸손한 믿음의
길입니다.
부스러가가
쌓이고 쌓여서
큰 뜻을 이룹니다.
우리에겐
부스러기
은총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긁어모아야 할
충실한 생활입니다.
부스러기에게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은
부스러기들을
놓치며 살기
때문입니다.
사라지기 위해
부스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하기 위해
부스러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스러기
사랑에
감사하는
오늘 되십시오.
무디어가는
일상의 날을
바로 세우는 것은
부스러기의
힘입니다.
부스러기의
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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